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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총관 1권(2화)
第一章 빌어먹을 유언(2)
“영감, 영감―”
집으로 돌아온 진자강이 급하게 영감을 찾았다.
한시라도 빨리 혈각흑사의 내단을 건네주고, 나머지 십천무의 구결을 받아낼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집 주변이 조용했다.
여느 때 같으면, 왜 이렇게 늦었냐며 영감이 악다구니를 써 대며 방문을 확 열어젖혔을 텐데 이상하게도 방문은 굳게 걸어 잠긴 채 열릴 줄 몰랐다.
‘설마?’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열흘 전 혈각흑사의 내단을 구한다고 집을 나설 때, 영감의 낯빛이 영 좋질 못했다.
그땐 잠을 설쳤다고 하는 말에 무심결에 넘겼었는데,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진자강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황급히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문고리를 잡아채기 무섭게, 문짝을 뜯어내 버렸다.
그의 거친 손길에 문은 별다른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밖으로 나뒹굴었다. 문이 뜯겨 나가자, 저무는 태양의 마지막 불빛이 방 안으로 비쳐 들었다.
부들부들―
방 안을 바라보는 진자강의 두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의 눈 아래, 영감이 등을 보인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보이는 검붉은 핏자국.
“영감―”
진자강은 황급히 영감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영감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무리 큰소리로 외치고 몸을 거칠게 흔들어 봐도 영감의 몸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질 않았다.
“제, 젠장! 이, 이게 뭐야! 겨우 갖은 고생해서 마지막 혈각흑사의 내단을 구해 왔는데 이렇게 죽어 버리면 어떡해. 그 잘난 얼굴에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당당히 여길 떠나려고 했는데.”
진자강이 절규하듯 악을 내질렀다.
내일이면 떠나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이별을 기대한 건 결코 아니었다.
주마등처럼 과거의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영감, 대체 여기가 어디야?”
“클클, 그렇게 쳐 맞고도 날 대하는 태도는 변함이 없구나. 뭐, 그런 점이 맘에 들어서 데려오기는 했지만.”
“헛소리 그만하고, 여기가 어딘지나 알려 줘. 난 이렇게 한가하게 여기서 누워 있을 처지가 아니란 말이야.”
“여기는 천중산이다.”
“서, 설마, 나, 낙양 이남에 위, 위치한 그 천중산은 아니겠지?”
“어쩌나! 거기가 맞는데.”
“이런 니미럴! 영감,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 산간오지까지 날 끌고 온 거야?”
“네 몸이 맘에 들었다.”
“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후후, 말이 안 되다니… 네놈의 몸은 천생무골이다. 내 평생에 수많은 무인들을 봐 왔지만, 네놈처럼 무공을 익히기에 타고난 신체는 처음 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나한테 무공 배워볼 생각 없냐?”
“없어. 무공이라면 나도 배울 만큼 배웠어.”
“흥, 꼬맹이나 취객들 뒤통수나 후리는 것도 무공이냐? 내가 말하는 무공이란 일권에 바위를 부수고, 일검에 산을 가를 수 있는 그런 무공들을 일컫느니라.”
“저, 정말 그런 무공을 나한테 가르쳐 준다는 거야?”
“물론. 네놈의 몸은 뒷골목에서 썩기엔 너무도 아깝거든.”
‘이게 꿈이야, 생시야?’
진자강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상승 무공을 익히는 건 그의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다.
그래서 뒷골목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무공 서적들을 사들였다. 물론 결과는 다 꽝이었다. 하나같이 삼류나 이류에 겨우 걸칠 만한 무공이 태반이었던 것이다.
‘가만가만… 그런 대단한 무공을 아무런 조건 없이 내게 가르쳐 줄 리가 없잖아. 날 때려눕힐 때의 모습을 봐선 정파보다는 사파 쪽에 더 가까워 보였는데.’
상승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진자강은 영감의 의도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상승 절기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처음 본 사람한테 무작정 가르쳐 준다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아무런 대가 없이 가르쳐 주진 않을 것 같은데…….”
진자강은 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영감의 반응을 살폈다.
괜히 심하게 자극을 줘서 영감이 맘이라도 상해 버리면 손해 보는 쪽은 바로 자신이었다.
“하하하! 역시 눈치가 빠른 녀석이군. 맞다, 네가 무공을 가르쳐 주는 데는 딱 하나 조건이 있다.”
“그게 뭔데?”
차라리 조건이 있다고 대 놓고 말하니 진자강은 오히려 맘이 편해졌다.
“여기에 적혀 있는 약초와 내단을 구해 와라.”
영감이 진자강 앞으로 양피지 하나를 건넸다.
양피지 위에는 글과 그림이 빼곡했다. 그림은 대부분 약초의 생김새를 나타내는 것이고, 글은 내단을 지닌 영물에 관한 것이다.
혈각흑사의 내단
지심열화초
냉심화의 꽃잎
천년화리의 내단
…(중략)…….
천년삼왕
“지, 지금 여기에 적혀 있는 걸 나보고 다 구해오란 얘기야?”
“응. 그걸 모두 모아오면 내가 가진 최고의 비기를 전수해 줄 것이다.”
‘이 영감이 누굴 호구로 아나? 어떻게 이 많은 약초와 내단을 나 혼자 구하라는 거야? 약초야 어느 정도 발품을 팔면 구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겠지만, 이 내단들은 아니잖아.’
진자강은 영감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할 말을 잃었다.
약초 정도로 끝났다면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단은 솔직히 무리였다.
내단은 영물이 지니고 있다. 영물은 땅에 고정되어 있는 약초와 달리 움직이는 존재다.
더욱이 영물의 위치는 세상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워낙에 인적 드문 곳에서만 살다 보니, 사람의 눈이 그곳까지 닿질 않는 것이다.
“아, 난 못해. 여기 적힌 약초만 찾는 거면 몰라도, 이 내단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찾아.”
진자강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감의 요구 조건은 너무했다.
“이놈아, 사내놈이 해 보지도 않고 그런 약한 소리부터 해 대는 게냐!”
“그럼 진짜 사내인 영감이 직접 찾아.”
“뭐야!”
영감이 주먹을 움켜쥔다.
단지 주먹 하나 움켜쥐었을 뿐인데, 진자강은 온몸이 옥죄이는 압박감을 느꼈다.
‘이, 이게 무림고수라는 건가?’
진자강은 태어나서 한 번도 무림고수라는 걸 본 적이 없다.
낙양 뒷골목에서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어찌 그들을 볼 틈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런 그도 귀동냥으로 무림고수가 어떤 존재라는 것쯤은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크크크,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이군. 하기야 뒷골목 주먹패 따위가 내 발끝에나 미칠 수 있을까?”
‘저 영감탱이가…….’
진자강은 부아가 치밀었다.
나름대로 뒷골목 세계에선 뼈가 굵은 그다.
나이는 어렸지만 그 밑에 어린 동생들이 족히 스물이 넘었다.
“그렇게 사납게 째려보면 어쩔 테냐? 어차피 네놈은 내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해.”
“그거야 붙어 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지.”
“호오,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재주껏 덤벼 봐라. 만약, 네 손이 이 옷깃에만 스쳐도 네가 이긴 것으로 하고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마.”
“그 말 진심이지?”
“물론.”
‘그래, 때리는 건 힘들어도 저깟 옷깃 하나 잡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투지가 들끓었다.
진자강은 두 발에 강하게 힘을 주고, 힘차게 앞으로 달려 나왔다. 심법을 익히지 못해 단전에는 내력 한 줌 없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꽤나 가볍고 경쾌했다.
하지만 날파리가 아무리 날뛰어 봐야 사람한테는 한낱 벌레에 불과하다.
진자강의 움직임은 좋았지만, 그 대상이 너무도 나빴다.
퍼퍼퍽 퍼퍽―
진자강의 온몸으로 주먹과 발이 쏟아졌다.
당연히 영감이 자신의 공격을 피하기만 할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있던 진자강으로선 뜻하지 않은 공격이었다.
“크, 크억! 이 비, 빌어먹을 영감탱이…….”
배를 움켜쥐며 쓰러지는 진자강.
그는 흐릿해지는 눈을 부릅떠 영감의 얼굴을 눈에 꼭꼭 담았다.
그날 이후 진자강은 영감의 제자(?)가 됐다.
“여, 영감. 이제 겨우 영감 옷깃을 잡아챌 수 있는 수준이 됐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 버리면 어떡해? 빚지고는 못 사는 내 성질 잘 알잖아. 떠나더라도 제대로 나하고 한 판 붙고 갔어야지.”
진자강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평소 못 잡아서 안달이었던 영감이지만, 십 년 세월은 그 둘 사이에 끈끈한 정을 만들었다.
진자강은 영감이 가족처럼 느껴질 때마다 그 정을 애써 부정했지만, 지금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진실했다.
‘저건 뭐지?’
한참 동안 슬픔에 잠겨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진자강의 눈에 영감이 손에 쥐고 있는 종이 뭉치가 보였다. 진자강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영감의 손에서 그 종이를 빼냈다.
이놈아, 아쉽게도 너와 함께할 날이 며칠 안 남은 모양이다. 네놈이 이곳을 떠날 때까진 어떻게든 버텨 보려 했는데, 세상일이 내 맘대로 되질 않는구나.
미안하다, 네놈과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는데…….
이 편지를 다 읽거든, 방 구석에 놓인 청동화로 밑을 살펴봐라.
그곳에 내 모든 것이 담겼다.
‘설마, 유산?’
진자강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청동화로로 향했다.
청동화로는 십 년 전부터 저 자리에 있었는데, 영감이 자주 숯불을 피워 밤이나 고구마 같은 걸 구워 먹었다.
진자강은 조심스럽게 영감의 시신을 바닥에 눕히고, 청동화로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청동화로를 들어 그 아랫부분을 살폈다.
화로의 바닥에는 미세하게 실금이 나 있었다.
진자강은 조심스럽게 그 실금 위를 눌렀고, 탈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철함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근두근―
철함을 보자 진자강은 가슴은 세차게 요동쳤다.
고수가 남긴 유산이다.
결코 평범한 물건이 들어 있을 리 만무했다. 한껏 부푼 기대를 안고 진자강이 조심스레 철함을 열었다.
“뭐야?”
철함 안에 든 것은 진자강이 기대했던 것과 거리가 멀었다.
눈에 띄는 것은 낡은 봉서 한 통과 묵직한 전낭, 그리고 석 자 길이의 소검이 전부였다.
혹시나 싶어 진자강은 철함 안쪽을 이리저리 뒤져봤지만, 기연이라고 할 만한 귀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기야 영감이 나한테 그런 귀중한 물건을 남길 리가 없지.’
진자강은 툴툴거리며 봉서를 열었다.
그 안에는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급하게 써 갈겼는지 글씨가 제멋대로였다.
자강이 놈 보거라.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아마도 날 보고 빌어먹을 영감탱이라고 욕을 해 대고 있겠지. 그 마음 이해한다. 나 같아도 이깟 편지 쪼가리보다는 무공 비서를 더 원했을 테니까.
‘하여튼 귀신같은 영감탱이야. 죽고 나서도 내 마음을 어찌 이리 훤하게 알고 있는 거야.’
진자강은 가슴이 뜨끔했다.
죽은 영감이 자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네게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얘기한 적이 없는데, 이제는 밝히마.
내 이름은 단목승이다.
내 가문은 한때 강호에서 천중제일가라 불렸던 단목세가지.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하남성의 패주로써 만천하에 그 명성을 떨친 곳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화무십일홍에 불과했다.
승승장구하던 가세는 신주사가와 신마도연맹이 탄생하면서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놈들은 강하고 야비했다.
본가는 스스로의 강함에 도취된 나머지, 그것을 알지 못했고 야금야금 놈들에게 세력을 빼앗겼다.
결국 내 대에 이르러, 본가는 외부에서 침투한 간자들에게 의해 갈기갈기 찢겨졌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내가 나섰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지.
그때 난 치명적인 독에 당했다.
어떤 명의가 와도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극독이었지. 나는 그 독을 이겨 내기 위해 이독제독이라는 악수를 뒀다.
덕분에 십 년의 시간을 벌 수 있었지.
第一章 빌어먹을 유언(2)
“영감, 영감―”
집으로 돌아온 진자강이 급하게 영감을 찾았다.
한시라도 빨리 혈각흑사의 내단을 건네주고, 나머지 십천무의 구결을 받아낼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집 주변이 조용했다.
여느 때 같으면, 왜 이렇게 늦었냐며 영감이 악다구니를 써 대며 방문을 확 열어젖혔을 텐데 이상하게도 방문은 굳게 걸어 잠긴 채 열릴 줄 몰랐다.
‘설마?’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열흘 전 혈각흑사의 내단을 구한다고 집을 나설 때, 영감의 낯빛이 영 좋질 못했다.
그땐 잠을 설쳤다고 하는 말에 무심결에 넘겼었는데,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진자강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황급히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문고리를 잡아채기 무섭게, 문짝을 뜯어내 버렸다.
그의 거친 손길에 문은 별다른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밖으로 나뒹굴었다. 문이 뜯겨 나가자, 저무는 태양의 마지막 불빛이 방 안으로 비쳐 들었다.
부들부들―
방 안을 바라보는 진자강의 두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의 눈 아래, 영감이 등을 보인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보이는 검붉은 핏자국.
“영감―”
진자강은 황급히 영감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영감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무리 큰소리로 외치고 몸을 거칠게 흔들어 봐도 영감의 몸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질 않았다.
“제, 젠장! 이, 이게 뭐야! 겨우 갖은 고생해서 마지막 혈각흑사의 내단을 구해 왔는데 이렇게 죽어 버리면 어떡해. 그 잘난 얼굴에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당당히 여길 떠나려고 했는데.”
진자강이 절규하듯 악을 내질렀다.
내일이면 떠나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이별을 기대한 건 결코 아니었다.
주마등처럼 과거의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영감, 대체 여기가 어디야?”
“클클, 그렇게 쳐 맞고도 날 대하는 태도는 변함이 없구나. 뭐, 그런 점이 맘에 들어서 데려오기는 했지만.”
“헛소리 그만하고, 여기가 어딘지나 알려 줘. 난 이렇게 한가하게 여기서 누워 있을 처지가 아니란 말이야.”
“여기는 천중산이다.”
“서, 설마, 나, 낙양 이남에 위, 위치한 그 천중산은 아니겠지?”
“어쩌나! 거기가 맞는데.”
“이런 니미럴! 영감,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 산간오지까지 날 끌고 온 거야?”
“네 몸이 맘에 들었다.”
“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후후, 말이 안 되다니… 네놈의 몸은 천생무골이다. 내 평생에 수많은 무인들을 봐 왔지만, 네놈처럼 무공을 익히기에 타고난 신체는 처음 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나한테 무공 배워볼 생각 없냐?”
“없어. 무공이라면 나도 배울 만큼 배웠어.”
“흥, 꼬맹이나 취객들 뒤통수나 후리는 것도 무공이냐? 내가 말하는 무공이란 일권에 바위를 부수고, 일검에 산을 가를 수 있는 그런 무공들을 일컫느니라.”
“저, 정말 그런 무공을 나한테 가르쳐 준다는 거야?”
“물론. 네놈의 몸은 뒷골목에서 썩기엔 너무도 아깝거든.”
‘이게 꿈이야, 생시야?’
진자강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상승 무공을 익히는 건 그의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다.
그래서 뒷골목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무공 서적들을 사들였다. 물론 결과는 다 꽝이었다. 하나같이 삼류나 이류에 겨우 걸칠 만한 무공이 태반이었던 것이다.
‘가만가만… 그런 대단한 무공을 아무런 조건 없이 내게 가르쳐 줄 리가 없잖아. 날 때려눕힐 때의 모습을 봐선 정파보다는 사파 쪽에 더 가까워 보였는데.’
상승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진자강은 영감의 의도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상승 절기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처음 본 사람한테 무작정 가르쳐 준다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아무런 대가 없이 가르쳐 주진 않을 것 같은데…….”
진자강은 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영감의 반응을 살폈다.
괜히 심하게 자극을 줘서 영감이 맘이라도 상해 버리면 손해 보는 쪽은 바로 자신이었다.
“하하하! 역시 눈치가 빠른 녀석이군. 맞다, 네가 무공을 가르쳐 주는 데는 딱 하나 조건이 있다.”
“그게 뭔데?”
차라리 조건이 있다고 대 놓고 말하니 진자강은 오히려 맘이 편해졌다.
“여기에 적혀 있는 약초와 내단을 구해 와라.”
영감이 진자강 앞으로 양피지 하나를 건넸다.
양피지 위에는 글과 그림이 빼곡했다. 그림은 대부분 약초의 생김새를 나타내는 것이고, 글은 내단을 지닌 영물에 관한 것이다.
혈각흑사의 내단
지심열화초
냉심화의 꽃잎
천년화리의 내단
…(중략)…….
천년삼왕
“지, 지금 여기에 적혀 있는 걸 나보고 다 구해오란 얘기야?”
“응. 그걸 모두 모아오면 내가 가진 최고의 비기를 전수해 줄 것이다.”
‘이 영감이 누굴 호구로 아나? 어떻게 이 많은 약초와 내단을 나 혼자 구하라는 거야? 약초야 어느 정도 발품을 팔면 구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겠지만, 이 내단들은 아니잖아.’
진자강은 영감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할 말을 잃었다.
약초 정도로 끝났다면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단은 솔직히 무리였다.
내단은 영물이 지니고 있다. 영물은 땅에 고정되어 있는 약초와 달리 움직이는 존재다.
더욱이 영물의 위치는 세상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워낙에 인적 드문 곳에서만 살다 보니, 사람의 눈이 그곳까지 닿질 않는 것이다.
“아, 난 못해. 여기 적힌 약초만 찾는 거면 몰라도, 이 내단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찾아.”
진자강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감의 요구 조건은 너무했다.
“이놈아, 사내놈이 해 보지도 않고 그런 약한 소리부터 해 대는 게냐!”
“그럼 진짜 사내인 영감이 직접 찾아.”
“뭐야!”
영감이 주먹을 움켜쥔다.
단지 주먹 하나 움켜쥐었을 뿐인데, 진자강은 온몸이 옥죄이는 압박감을 느꼈다.
‘이, 이게 무림고수라는 건가?’
진자강은 태어나서 한 번도 무림고수라는 걸 본 적이 없다.
낙양 뒷골목에서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어찌 그들을 볼 틈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런 그도 귀동냥으로 무림고수가 어떤 존재라는 것쯤은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크크크,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이군. 하기야 뒷골목 주먹패 따위가 내 발끝에나 미칠 수 있을까?”
‘저 영감탱이가…….’
진자강은 부아가 치밀었다.
나름대로 뒷골목 세계에선 뼈가 굵은 그다.
나이는 어렸지만 그 밑에 어린 동생들이 족히 스물이 넘었다.
“그렇게 사납게 째려보면 어쩔 테냐? 어차피 네놈은 내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해.”
“그거야 붙어 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지.”
“호오,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재주껏 덤벼 봐라. 만약, 네 손이 이 옷깃에만 스쳐도 네가 이긴 것으로 하고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마.”
“그 말 진심이지?”
“물론.”
‘그래, 때리는 건 힘들어도 저깟 옷깃 하나 잡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투지가 들끓었다.
진자강은 두 발에 강하게 힘을 주고, 힘차게 앞으로 달려 나왔다. 심법을 익히지 못해 단전에는 내력 한 줌 없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꽤나 가볍고 경쾌했다.
하지만 날파리가 아무리 날뛰어 봐야 사람한테는 한낱 벌레에 불과하다.
진자강의 움직임은 좋았지만, 그 대상이 너무도 나빴다.
퍼퍼퍽 퍼퍽―
진자강의 온몸으로 주먹과 발이 쏟아졌다.
당연히 영감이 자신의 공격을 피하기만 할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있던 진자강으로선 뜻하지 않은 공격이었다.
“크, 크억! 이 비, 빌어먹을 영감탱이…….”
배를 움켜쥐며 쓰러지는 진자강.
그는 흐릿해지는 눈을 부릅떠 영감의 얼굴을 눈에 꼭꼭 담았다.
그날 이후 진자강은 영감의 제자(?)가 됐다.
“여, 영감. 이제 겨우 영감 옷깃을 잡아챌 수 있는 수준이 됐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 버리면 어떡해? 빚지고는 못 사는 내 성질 잘 알잖아. 떠나더라도 제대로 나하고 한 판 붙고 갔어야지.”
진자강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평소 못 잡아서 안달이었던 영감이지만, 십 년 세월은 그 둘 사이에 끈끈한 정을 만들었다.
진자강은 영감이 가족처럼 느껴질 때마다 그 정을 애써 부정했지만, 지금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진실했다.
‘저건 뭐지?’
한참 동안 슬픔에 잠겨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진자강의 눈에 영감이 손에 쥐고 있는 종이 뭉치가 보였다. 진자강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영감의 손에서 그 종이를 빼냈다.
이놈아, 아쉽게도 너와 함께할 날이 며칠 안 남은 모양이다. 네놈이 이곳을 떠날 때까진 어떻게든 버텨 보려 했는데, 세상일이 내 맘대로 되질 않는구나.
미안하다, 네놈과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는데…….
이 편지를 다 읽거든, 방 구석에 놓인 청동화로 밑을 살펴봐라.
그곳에 내 모든 것이 담겼다.
‘설마, 유산?’
진자강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청동화로로 향했다.
청동화로는 십 년 전부터 저 자리에 있었는데, 영감이 자주 숯불을 피워 밤이나 고구마 같은 걸 구워 먹었다.
진자강은 조심스럽게 영감의 시신을 바닥에 눕히고, 청동화로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청동화로를 들어 그 아랫부분을 살폈다.
화로의 바닥에는 미세하게 실금이 나 있었다.
진자강은 조심스럽게 그 실금 위를 눌렀고, 탈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철함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근두근―
철함을 보자 진자강은 가슴은 세차게 요동쳤다.
고수가 남긴 유산이다.
결코 평범한 물건이 들어 있을 리 만무했다. 한껏 부푼 기대를 안고 진자강이 조심스레 철함을 열었다.
“뭐야?”
철함 안에 든 것은 진자강이 기대했던 것과 거리가 멀었다.
눈에 띄는 것은 낡은 봉서 한 통과 묵직한 전낭, 그리고 석 자 길이의 소검이 전부였다.
혹시나 싶어 진자강은 철함 안쪽을 이리저리 뒤져봤지만, 기연이라고 할 만한 귀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기야 영감이 나한테 그런 귀중한 물건을 남길 리가 없지.’
진자강은 툴툴거리며 봉서를 열었다.
그 안에는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급하게 써 갈겼는지 글씨가 제멋대로였다.
자강이 놈 보거라.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아마도 날 보고 빌어먹을 영감탱이라고 욕을 해 대고 있겠지. 그 마음 이해한다. 나 같아도 이깟 편지 쪼가리보다는 무공 비서를 더 원했을 테니까.
‘하여튼 귀신같은 영감탱이야. 죽고 나서도 내 마음을 어찌 이리 훤하게 알고 있는 거야.’
진자강은 가슴이 뜨끔했다.
죽은 영감이 자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네게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얘기한 적이 없는데, 이제는 밝히마.
내 이름은 단목승이다.
내 가문은 한때 강호에서 천중제일가라 불렸던 단목세가지.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하남성의 패주로써 만천하에 그 명성을 떨친 곳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화무십일홍에 불과했다.
승승장구하던 가세는 신주사가와 신마도연맹이 탄생하면서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놈들은 강하고 야비했다.
본가는 스스로의 강함에 도취된 나머지, 그것을 알지 못했고 야금야금 놈들에게 세력을 빼앗겼다.
결국 내 대에 이르러, 본가는 외부에서 침투한 간자들에게 의해 갈기갈기 찢겨졌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내가 나섰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지.
그때 난 치명적인 독에 당했다.
어떤 명의가 와도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극독이었지. 나는 그 독을 이겨 내기 위해 이독제독이라는 악수를 뒀다.
덕분에 십 년의 시간을 벌 수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