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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총관 1권(3화)
第一章 빌어먹을 유언(3)
…(중략)…….
자강아, 염치없는 부탁인 줄은 알지만 강호로 나가거든 본가를 다시 일으켜 주거라.
네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만, 이 사부는 단목가가 너의 새로운 뿌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절대 네게 강요는 하지 않으마.
싫으면 그냥 안 해도 된다.
다만, 이것 하나만 알아둬라.
네가 익힌 십천무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본가의 진짜 무공은 파황무(破皇武)라 불리는 파천의 술이다.
‘이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진자강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근 십 년간 죽어라 익힌 십천무다.
단목승이 천하에 다시없을 무공이라 하여, 고생을 하면서도 나름 그것에 위안을 삼은 것인데 십천무가 단목세가의 진짜 비전이 아니라니.
허탈한 마음과 더불어 진한 분노의 감정이 끓어올랐다.
너무 열 내지 마라.
화낸다고 눈앞에 파황무가 떡 하니 나타나는 것도 아니니.
아무튼 잡설은 그만두고 본론을 얘기하마.
파황무를 얻고 싶거든 본가의 핏줄을 찾아라.
그 아이는 본가가 멸문했을 지금,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단목가의 핏줄이다.
너와도 인연이 있는 아이니, 찾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게다.
물론, 파황무를 얻기 위해선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겠지. 파황무를 얻으려면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라. 너한테도 아마 나쁘지 않은 제안일 게다.
“이, 이런 니미럴!”
마지막 글귀를 읽는 순간, 진자강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편지를 사납게 구겨 버렸다.
‘이 인간,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적이었어. 풍월로에 와서 갑자기 날 납치한 거나 십천무는 천하제일의 절학이라고 속여 익히게 한 것이나.’
진자강은 강한 배신감이 들었다.
그동안 단목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따랐는데, 그게 다 목적이 있어서 한 짓이었다니.
“하여튼, 어른이란 인간들은 믿을 게 못 돼. 날 버린 부모나 이 빌어먹을 영감이나 다를 게 하나 없잖아.”
진자강이 잡아먹을 듯 사나운 눈초리로 단목승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이미 단목승은 숨을 거두었고 그의 사나운 눈빛을 받아줄 두 눈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젠장―”
진자강이 애꿎은 청동화로를 발을 후려 찼다. 감정이 잔뜩 실린 일격에 청동화로는 요란한 비명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날아갔다.
그날 밤.
진자강은 단목승의 시신을 옆에 두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 술은 단목승과 처음 이 산에 올라왔을 때 백사를 잡아 담근 술이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떠나려면 이 백사주라도 한잔 마시고 떠나지. 그동안 이별주로 쓴다고 아끼고 아껴둔 건데.”
진자강의 눈가에 다시 이슬이 맺혔다.
백사주를 보니 지난 십 년 동안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 것이다.
그 수많은 기억들 중에는 좋은 기억도 있고 나쁜 기억도 있었지만, 단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기억 한가운데 언제나 단목승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감! 부디 좋은 곳으로 가. 이승에서 얻은 한 따윈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진자강이 백사주를 단목승의 몸 위로 뿌렸다.
백사주는 콸콸 대며 단목승의 얼굴과 가슴, 그리고 배와 다리를 흠뻑 적셨다.
틱―
술이 골고루 뿌려지자, 진자강은 화섭자를 꺼내 불을 붙였다.
본래는 봉분을 만들어 단목승을 묻으려 했는데, 이곳에는 들짐승이 자주 출몰해 봉분이 파헤쳐질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진자강은 단목승을 화장하기로 마음먹고, 불이 붙은 화섭자를 단목승의 몸 위로 던졌다.
화르륵―
독한 백사주의 기운을 머금고, 불이 세차게 타올랐다. 그 불길은 곧 단목승이 깔고 누운 낙엽과 마른 나뭇가지로 옮겨 붙었다.
어두운 밤하늘이 환하게 밝혀졌다.
“영감, 당신의 마지막 소원! 아직 들어줄지 말지 확실히 결정 못했어. 솔직히 파황무가 탐나기는 하지만, 지금 익힌 십천무만으로도 뒷골목에서는 차고 넘치는 것 같거든.”
진자강은 불길에 휩싸인 단목승을 보며 자신의 진실한 속내를 내비쳤다.
단목승은 십천무가 파황무를 익히기 위한 기본 무공이라고 했지만, 십천무는 그 자체로도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뒷골목은 그야말로 하류 잡배들의 터전. 굳이 파황무가 아니더라도 십천무의 위력이면 뒷골목을 장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영감! 일단은 내 꿈이 먼저야. 파황무는 그 꿈을 이루고 난 다음에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볼게.”
활활 타오르는 불줄기를 바라보며 진자강이 독백하듯 입술을 들썩였다.
그에겐 본래 가지고 있던 꿈이 있었다.
십 년 전, 단목승에게 납치당하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그 꿈을 위해 미친 듯이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십 년 동안 잊고 지냈던 그 꿈을 향해 달려갈 때였다.
반 시진이 지나자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잦아들었다.
뜨거운 불길에 단목승의 몸은 이제 검게 그을린 뼈만 남았다. 진자강은 뼈들을 모아 곱게 가루로 빻았다.
뼈가 가루로 모두 화하자, 진자강은 화로에 숨겨져 있던 철함에 그것들을 모아 담았다. 본래 철함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은 이미 진자강이 따로 챙겨 둔 터였다.
‘언제고 단목세가의 핏줄을 찾게 되면, 영감의 유골을 전해 줄게. 그때까진 내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을 테니까 아무 걱정 말고 저승에서 재밌게 살아.’
진자강은 철함 속에 담긴 뼛가루를 보며 단목승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인사가 끝나자, 그는 철함을 봇짐 안에 조심스레 넣고 떠날 채비를 했다.
단목승도 세상을 떠나고 없는 지금,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챙길 물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단목승이 남긴 소검과 전낭은 이미 챙겼으니, 남은 건 그가 천중산에 와서 우연히 얻게 된 막대기 하나와 그동안 모은 약초로 만든 정체불명의 단환들만 챙기면 됐다.
준비를 모두 마치자, 어느새 해가 동편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진자강은 뜨거운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힘차게 산 아래로 발길을 내디뎠다.
***
하남성 낙양.
중원의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함께 겪은 풍운의 땅이다.
삼국시대에는 폭군 동탁에 의해 도시 전체가 불타기도 했지만, 낙양은 여전히 중원 상권의 중심으로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인구가 많으면 자연스럽게 오고 가는 돈의 규모도 커진다. 물론, 그 돈에 기생해 사는 부류 또한 늘어나게 마련이다.
“이 새끼들, 여긴 엄연히 우리 구역이야! 좋은 말로 할 때 꺼지지 않으면 내 손에 뒈진다!”
“크크크, 어린놈의 새끼가 간덩이가 부었구나. 우린 황우파다. 네놈도 황우파에 대해선 들은 풍월이 있겠지.”
“황우파고 나발이고 난 그딴 거 몰라. 어떤 놈이든 간에 우리 구역을 침범하는 놈들은 적이야.”
“이 새끼들 소문대로 꼴통 중의 꼴통이구만. 어쩔 수 없지. 말로 안 된다면 두들겨 패서 가르치는 수밖에. 얘들아, 저 새끼 밟아!”
황소처럼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사내가 뒤에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을 앞으로 내보냈다.
그의 이름은 맹달.
낙양 북문가를 장악하고 있는 황우파의 중간 두목이다.
특별히 내세울 만한 무공은 없지만, 눈치가 빠르고 처세술에 능해 여러 조직을 옮겨 다니며 지위를 높였다.
덕분에 힘깨나 쓰는 맹달이란 이름 대신 견복(개 같은 박쥐 새끼)이란 별명으로 많이 불렸다.
퍼퍼퍽 퍼퍽―
수십 개의 주먹이 난무하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질적으로는 본래 이곳의 주인인 자강파가 더 강했지만, 황우파의 쪽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구리에 장사 없다고, 자강파는 황우파의 공격에 속절없이 밀렸다.
자강파의 두목 마강혁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황우파 놈들을 주먹으로 때려눕히며 분전했지만, 중과부적. 상황은 점점 자강파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헉헉헉―
‘비, 빌어먹을! 하필이면 천호와 위연이 자리를 비울 때 쳐들어올 게 뭐람.’
격한 숨을 힘겹게 내쉬며 마강혁은 맹달을 사납게 노려봤다.
자강파는 심부름하는 애들까지 다 합쳐도 백을 넘지 않는 소수 정예로 이뤄진 조직이다. 하지만, 낙양 북문에서 자강파를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조직은 없었다.
마강혁을 비롯해 자강삼룡이라 불리는 강천호, 주위연 때문이다.
이 셋은 타고난 싸움꾼이다. 별다른 무공을 익힌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싸움 실력은 낙양 전체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꼭 들었다.
그 때문에 낙양 북문을 장악하고 있는 황우파조차도 자강파를 쉽사리 건드리지 못했다. 자칫 섣불리 공격했다가 자강파에 큰 타격이라도 입으면, 다른 세 곳의 조직이 한꺼번에 달려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마강혁, 그냥 항복해라. 여기서 더 끌어 봐야 네놈 부하들만 다칠 뿐이다. 우리 두목님께서 네놈을 중히 쓰신다 했으니 여기서 항복한다면 이만 싸움을 끝내겠다.”
싸움이 일어난 지 일각이 지났을 무렵 맹달이 항복을 권했다.
하지만, 마강혁은 그의 제안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맹달, 개소리 집어 치워라! 네놈 두목 밑으로 들어가느니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고 말겠다!”
“뭐, 뭣이!”
“황우파 두목은 날 거둘 재목이 못돼! 내 형님은 이 세상에 오로지 한 명뿐이야!”
“이 새끼, 아직도 그 소리냐! 진가 놈이 마두한테 끌려간 지 벌써 십 년이 지났다. 너 같으면, 그 성질 더러운 마두가 진가 놈을 아직까지 살려뒀을 것 같냐?”
맹달은 마강혁이 답답했다.
마강혁이 기다리는 형님이란 놈은 이미 십 년 전에 이 바닥을 떴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이 바닥을 뜬 것인지라,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데 답답하게도 마강혁을 비롯한 자강파의 간부들은 모두 그를 기다렸다. 일 년이 지나고, 오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났어도 그들의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독한 새끼… 이렇게 되면 주먹으로 끝장을 보는 수밖에.’
“조져!”
맹달이 다시 싸움을 재개시켰다.
자강파를 포위하고 있던 황우파의 조직원들은 그의 명이 떨어지자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오십 대 십.
싸움의 결과는 뻔했다.
자강파는 격렬하게 황우파에 맞서 싸웠지만, 사방에서 달려드는 주먹과 발을 막아 내기엔 상당히 버거웠다.
하지만, 마강혁만은 지친 몸을 하고서도 다섯을 쓰러뜨리는 믿기 힘든 성과를 냈다. 과연 이 바닥에서 투귀(鬪鬼)라 불릴 만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뛰어난 체력을 지닌 그라도 계속된 싸움엔 지칠 수밖에 없었고, 그의 몸놀림은 점점 둔해졌다.
‘끝났군.’
뒤쪽에서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맹달이 마침내 앞으로 나섰다.
맹달이 나오자, 마강혁을 둘러싸고 있던 황우파의 조직원들이 일제히 길을 열었다.
“마강혁, 마지막 기회다. 지금이라도 내 발 아래 무릎을 꿇어라.”
“개소리… 집어 치워!”
마강혁이 마지막 힘을 짜내 맹달에게 주먹을 뻗었다. 두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그의 주먹에선 상당한 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상대는 황우파의 맹달이다.
멀쩡한 몸으로 싸웠어도 쉽게 승부를 볼 수 없는 상대인데, 지금의 몸 상태론 전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새끼, 그렇게 내 손에 뒈지고 싶냐!”
날아오는 주먹을 가볍게 옆으로 피해 내며, 맹달이 허리 어림에 두고 있던 오른 주먹을 강하게 앞으로 뻗었다.
그 주먹은 정확히 마강혁의 복부 한복판에 꽂혔다.
“커억―”
마강혁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급소에 강한 일격을 맞았으니, 천하의 투귀라도 버티긴 힘들었다.
결국, 맹달이 주먹을 빼내자 지지대가 사라진 마강혁의 몸은 힘없이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맹달은 순순히 그가 쓰러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이, 이 정도에 쓰러지면 곤란하지. 내 화가 풀리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고.”
맹달이 쓰러지는 마강혁의 머리채를 뒤에서 사납게 휘어잡았다.
그리곤 마강혁의 얼굴을 허리 어림까지 올려, 그대로 오른쪽 무릎을 강하게 차올렸다.
第一章 빌어먹을 유언(3)
…(중략)…….
자강아, 염치없는 부탁인 줄은 알지만 강호로 나가거든 본가를 다시 일으켜 주거라.
네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만, 이 사부는 단목가가 너의 새로운 뿌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절대 네게 강요는 하지 않으마.
싫으면 그냥 안 해도 된다.
다만, 이것 하나만 알아둬라.
네가 익힌 십천무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본가의 진짜 무공은 파황무(破皇武)라 불리는 파천의 술이다.
‘이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진자강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근 십 년간 죽어라 익힌 십천무다.
단목승이 천하에 다시없을 무공이라 하여, 고생을 하면서도 나름 그것에 위안을 삼은 것인데 십천무가 단목세가의 진짜 비전이 아니라니.
허탈한 마음과 더불어 진한 분노의 감정이 끓어올랐다.
너무 열 내지 마라.
화낸다고 눈앞에 파황무가 떡 하니 나타나는 것도 아니니.
아무튼 잡설은 그만두고 본론을 얘기하마.
파황무를 얻고 싶거든 본가의 핏줄을 찾아라.
그 아이는 본가가 멸문했을 지금,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단목가의 핏줄이다.
너와도 인연이 있는 아이니, 찾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게다.
물론, 파황무를 얻기 위해선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겠지. 파황무를 얻으려면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라. 너한테도 아마 나쁘지 않은 제안일 게다.
“이, 이런 니미럴!”
마지막 글귀를 읽는 순간, 진자강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편지를 사납게 구겨 버렸다.
‘이 인간,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적이었어. 풍월로에 와서 갑자기 날 납치한 거나 십천무는 천하제일의 절학이라고 속여 익히게 한 것이나.’
진자강은 강한 배신감이 들었다.
그동안 단목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따랐는데, 그게 다 목적이 있어서 한 짓이었다니.
“하여튼, 어른이란 인간들은 믿을 게 못 돼. 날 버린 부모나 이 빌어먹을 영감이나 다를 게 하나 없잖아.”
진자강이 잡아먹을 듯 사나운 눈초리로 단목승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이미 단목승은 숨을 거두었고 그의 사나운 눈빛을 받아줄 두 눈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젠장―”
진자강이 애꿎은 청동화로를 발을 후려 찼다. 감정이 잔뜩 실린 일격에 청동화로는 요란한 비명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날아갔다.
그날 밤.
진자강은 단목승의 시신을 옆에 두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 술은 단목승과 처음 이 산에 올라왔을 때 백사를 잡아 담근 술이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떠나려면 이 백사주라도 한잔 마시고 떠나지. 그동안 이별주로 쓴다고 아끼고 아껴둔 건데.”
진자강의 눈가에 다시 이슬이 맺혔다.
백사주를 보니 지난 십 년 동안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 것이다.
그 수많은 기억들 중에는 좋은 기억도 있고 나쁜 기억도 있었지만, 단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기억 한가운데 언제나 단목승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감! 부디 좋은 곳으로 가. 이승에서 얻은 한 따윈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진자강이 백사주를 단목승의 몸 위로 뿌렸다.
백사주는 콸콸 대며 단목승의 얼굴과 가슴, 그리고 배와 다리를 흠뻑 적셨다.
틱―
술이 골고루 뿌려지자, 진자강은 화섭자를 꺼내 불을 붙였다.
본래는 봉분을 만들어 단목승을 묻으려 했는데, 이곳에는 들짐승이 자주 출몰해 봉분이 파헤쳐질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진자강은 단목승을 화장하기로 마음먹고, 불이 붙은 화섭자를 단목승의 몸 위로 던졌다.
화르륵―
독한 백사주의 기운을 머금고, 불이 세차게 타올랐다. 그 불길은 곧 단목승이 깔고 누운 낙엽과 마른 나뭇가지로 옮겨 붙었다.
어두운 밤하늘이 환하게 밝혀졌다.
“영감, 당신의 마지막 소원! 아직 들어줄지 말지 확실히 결정 못했어. 솔직히 파황무가 탐나기는 하지만, 지금 익힌 십천무만으로도 뒷골목에서는 차고 넘치는 것 같거든.”
진자강은 불길에 휩싸인 단목승을 보며 자신의 진실한 속내를 내비쳤다.
단목승은 십천무가 파황무를 익히기 위한 기본 무공이라고 했지만, 십천무는 그 자체로도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뒷골목은 그야말로 하류 잡배들의 터전. 굳이 파황무가 아니더라도 십천무의 위력이면 뒷골목을 장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영감! 일단은 내 꿈이 먼저야. 파황무는 그 꿈을 이루고 난 다음에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볼게.”
활활 타오르는 불줄기를 바라보며 진자강이 독백하듯 입술을 들썩였다.
그에겐 본래 가지고 있던 꿈이 있었다.
십 년 전, 단목승에게 납치당하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그 꿈을 위해 미친 듯이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십 년 동안 잊고 지냈던 그 꿈을 향해 달려갈 때였다.
반 시진이 지나자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잦아들었다.
뜨거운 불길에 단목승의 몸은 이제 검게 그을린 뼈만 남았다. 진자강은 뼈들을 모아 곱게 가루로 빻았다.
뼈가 가루로 모두 화하자, 진자강은 화로에 숨겨져 있던 철함에 그것들을 모아 담았다. 본래 철함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은 이미 진자강이 따로 챙겨 둔 터였다.
‘언제고 단목세가의 핏줄을 찾게 되면, 영감의 유골을 전해 줄게. 그때까진 내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을 테니까 아무 걱정 말고 저승에서 재밌게 살아.’
진자강은 철함 속에 담긴 뼛가루를 보며 단목승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인사가 끝나자, 그는 철함을 봇짐 안에 조심스레 넣고 떠날 채비를 했다.
단목승도 세상을 떠나고 없는 지금,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챙길 물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단목승이 남긴 소검과 전낭은 이미 챙겼으니, 남은 건 그가 천중산에 와서 우연히 얻게 된 막대기 하나와 그동안 모은 약초로 만든 정체불명의 단환들만 챙기면 됐다.
준비를 모두 마치자, 어느새 해가 동편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진자강은 뜨거운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힘차게 산 아래로 발길을 내디뎠다.
하남성 낙양.
중원의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함께 겪은 풍운의 땅이다.
삼국시대에는 폭군 동탁에 의해 도시 전체가 불타기도 했지만, 낙양은 여전히 중원 상권의 중심으로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인구가 많으면 자연스럽게 오고 가는 돈의 규모도 커진다. 물론, 그 돈에 기생해 사는 부류 또한 늘어나게 마련이다.
“이 새끼들, 여긴 엄연히 우리 구역이야! 좋은 말로 할 때 꺼지지 않으면 내 손에 뒈진다!”
“크크크, 어린놈의 새끼가 간덩이가 부었구나. 우린 황우파다. 네놈도 황우파에 대해선 들은 풍월이 있겠지.”
“황우파고 나발이고 난 그딴 거 몰라. 어떤 놈이든 간에 우리 구역을 침범하는 놈들은 적이야.”
“이 새끼들 소문대로 꼴통 중의 꼴통이구만. 어쩔 수 없지. 말로 안 된다면 두들겨 패서 가르치는 수밖에. 얘들아, 저 새끼 밟아!”
황소처럼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사내가 뒤에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을 앞으로 내보냈다.
그의 이름은 맹달.
낙양 북문가를 장악하고 있는 황우파의 중간 두목이다.
특별히 내세울 만한 무공은 없지만, 눈치가 빠르고 처세술에 능해 여러 조직을 옮겨 다니며 지위를 높였다.
덕분에 힘깨나 쓰는 맹달이란 이름 대신 견복(개 같은 박쥐 새끼)이란 별명으로 많이 불렸다.
퍼퍼퍽 퍼퍽―
수십 개의 주먹이 난무하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질적으로는 본래 이곳의 주인인 자강파가 더 강했지만, 황우파의 쪽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구리에 장사 없다고, 자강파는 황우파의 공격에 속절없이 밀렸다.
자강파의 두목 마강혁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황우파 놈들을 주먹으로 때려눕히며 분전했지만, 중과부적. 상황은 점점 자강파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헉헉헉―
‘비, 빌어먹을! 하필이면 천호와 위연이 자리를 비울 때 쳐들어올 게 뭐람.’
격한 숨을 힘겹게 내쉬며 마강혁은 맹달을 사납게 노려봤다.
자강파는 심부름하는 애들까지 다 합쳐도 백을 넘지 않는 소수 정예로 이뤄진 조직이다. 하지만, 낙양 북문에서 자강파를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조직은 없었다.
마강혁을 비롯해 자강삼룡이라 불리는 강천호, 주위연 때문이다.
이 셋은 타고난 싸움꾼이다. 별다른 무공을 익힌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싸움 실력은 낙양 전체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꼭 들었다.
그 때문에 낙양 북문을 장악하고 있는 황우파조차도 자강파를 쉽사리 건드리지 못했다. 자칫 섣불리 공격했다가 자강파에 큰 타격이라도 입으면, 다른 세 곳의 조직이 한꺼번에 달려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마강혁, 그냥 항복해라. 여기서 더 끌어 봐야 네놈 부하들만 다칠 뿐이다. 우리 두목님께서 네놈을 중히 쓰신다 했으니 여기서 항복한다면 이만 싸움을 끝내겠다.”
싸움이 일어난 지 일각이 지났을 무렵 맹달이 항복을 권했다.
하지만, 마강혁은 그의 제안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맹달, 개소리 집어 치워라! 네놈 두목 밑으로 들어가느니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고 말겠다!”
“뭐, 뭣이!”
“황우파 두목은 날 거둘 재목이 못돼! 내 형님은 이 세상에 오로지 한 명뿐이야!”
“이 새끼, 아직도 그 소리냐! 진가 놈이 마두한테 끌려간 지 벌써 십 년이 지났다. 너 같으면, 그 성질 더러운 마두가 진가 놈을 아직까지 살려뒀을 것 같냐?”
맹달은 마강혁이 답답했다.
마강혁이 기다리는 형님이란 놈은 이미 십 년 전에 이 바닥을 떴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이 바닥을 뜬 것인지라,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데 답답하게도 마강혁을 비롯한 자강파의 간부들은 모두 그를 기다렸다. 일 년이 지나고, 오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났어도 그들의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독한 새끼… 이렇게 되면 주먹으로 끝장을 보는 수밖에.’
“조져!”
맹달이 다시 싸움을 재개시켰다.
자강파를 포위하고 있던 황우파의 조직원들은 그의 명이 떨어지자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오십 대 십.
싸움의 결과는 뻔했다.
자강파는 격렬하게 황우파에 맞서 싸웠지만, 사방에서 달려드는 주먹과 발을 막아 내기엔 상당히 버거웠다.
하지만, 마강혁만은 지친 몸을 하고서도 다섯을 쓰러뜨리는 믿기 힘든 성과를 냈다. 과연 이 바닥에서 투귀(鬪鬼)라 불릴 만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뛰어난 체력을 지닌 그라도 계속된 싸움엔 지칠 수밖에 없었고, 그의 몸놀림은 점점 둔해졌다.
‘끝났군.’
뒤쪽에서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맹달이 마침내 앞으로 나섰다.
맹달이 나오자, 마강혁을 둘러싸고 있던 황우파의 조직원들이 일제히 길을 열었다.
“마강혁, 마지막 기회다. 지금이라도 내 발 아래 무릎을 꿇어라.”
“개소리… 집어 치워!”
마강혁이 마지막 힘을 짜내 맹달에게 주먹을 뻗었다. 두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그의 주먹에선 상당한 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상대는 황우파의 맹달이다.
멀쩡한 몸으로 싸웠어도 쉽게 승부를 볼 수 없는 상대인데, 지금의 몸 상태론 전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새끼, 그렇게 내 손에 뒈지고 싶냐!”
날아오는 주먹을 가볍게 옆으로 피해 내며, 맹달이 허리 어림에 두고 있던 오른 주먹을 강하게 앞으로 뻗었다.
그 주먹은 정확히 마강혁의 복부 한복판에 꽂혔다.
“커억―”
마강혁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급소에 강한 일격을 맞았으니, 천하의 투귀라도 버티긴 힘들었다.
결국, 맹달이 주먹을 빼내자 지지대가 사라진 마강혁의 몸은 힘없이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맹달은 순순히 그가 쓰러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이, 이 정도에 쓰러지면 곤란하지. 내 화가 풀리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고.”
맹달이 쓰러지는 마강혁의 머리채를 뒤에서 사납게 휘어잡았다.
그리곤 마강혁의 얼굴을 허리 어림까지 올려, 그대로 오른쪽 무릎을 강하게 차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