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른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6화
1. 바스티안 (2)
이후 사일러스는 꾸준히 살롱에 발 도장을 찍었다. 비록 그에게 말 걸어 주는 이 하나 없었지만, 회장에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이 가시는 듯했다. 얄팍한 가면으로 맨얼굴을 감춘 채 나뒹구는 이들을 구경하고 있다 보면 이 세상에 사람 살내 아쉬운 사람이 저뿐만은 아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한편, 하루도 빼놓지 않고 늘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얌전히 샴페인 몇 잔만 홀짝이고 가는 사일러스를 향한 기묘한 호기심 또한 무럭무럭 자라났다. 살롱을 오가는 이들은 주눅 든 티 없이 꾸준히 파티마 홀을 오가는 저 ‘목석 오메가’가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곳에 와 앉아 있는지 궁금해했다. 저 홀로 지쳐 나가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던 이가 이리도 오래 버틸 줄이야.
바스티안 또한 사일러스에게 호기심을 느끼던 무리 중 하나였다. 근래 들어 사일러스의 존재는 가벼운 가십거리로 자주 언급되었는데, 마침 그와 시시덕거리는 무리 중 하나가 화두를 던졌던 것이다.
“……그래서 저 오메가는 정말 목석인 걸까?”
“먹어 보지 않은 음식의 맛을 어찌 알리오?”
“보기엔 뻣뻣하니 영 야살스레 굴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과일도 벗겨 봐야 맛을 안다고, 침대 위 사정을 어찌 함부로 예상하겠어?”
“아랫구멍 맛이 그렇게 좋으면 가윈, 그자가 아랫도리 쑤시고 빨아 주느라 바빴겠지, 그렇게 냉대를 했을까.”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들은 이런저런 예를 들어 가며 사일러스의 잠자리 버릇을 추측했다. 얼마나 아랫도리 돌리는 실력이 최악이기에 부부 관계가 파탄이 났을까 하는 의문부터, 저런 류가 의외로 더 밝힐 수도 있다, 까 보지 않으면 모른다 식의 반박까지…… 저질스러운 토론이 열렬히 오갔다. 이내 대화는 직접 확인해 보면 되지 않겠냐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이 중 대표로 나선 것이 바로 바스티안이었다.
바스티안은 스물여섯의 알파로, 수도 사교계에 이름 높은 자칭 한량에 난봉꾼이었다. 유서 깊은 고상한 집안 출신은 아니지만 이름 높은 무역상 집안의 막내아들이다. 제 형들이 이런저런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대며 아버지를 치열히 보좌하는 것에 비해, 5형제 중 막내인 바스티안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며 하루하루를 짜릿하게 즐겼다.
이런 바스티안의 모습이 밉상 맞게 보일 법하나, 그의 아버지와 형들 모두 바스티안의 방탕한 행보에 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둥이라, 그저 큰 사고 치지 않는다면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거니,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상 집안의 한량, 난봉꾼이라 자칭하는 바스티안이었지만 이 신랄하고 거친 표현은 그와 썩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무역상인 아버지를 따라 어릴 적부터 갑판 위를 뛰놀았던, 바다를 좋아하고 배 타는 것을 즐기는 싱그러운 청년이었다. 날이 조금이라도 따스한 날에는 항구 옆 백사장에서 상체를 탈의한 채 개인 보트를 몰거나 수영 중인 바스티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야외 생활을 즐기는 덕에 태양에 탄 가무잡잡하니 윤기 흐르는 피부가 아름답게 어울리는 쾌남형의 태양 같은 젊은이였다. 꽉 짜인 늘씬한 근육에, 햇빛에 탈색된 흐린 금발은 뭇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었다.
그는 제 외양과 부친의 어마어마한 재력이 주는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자연스레 바스티안의 주변에는 남녀노소, 알파, 오메가, 베타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리고 그는 자칭 ‘난봉꾼이자 한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밤놀이에 정통하고 도덕성 낮은 이들과 교류하길 즐겼다. 실제로 다정한 눈빛과 예의 바른 언행과는 다르게 아랫도리는 무척이나 방탕했다.
놀랍게도 이 젊은 알파 또한 요 며칠간 파티마 홀의 화제가 되고 있는 오메가에게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그럼 내가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지.”
마침내 사일러스와 하룻밤을 지내보겠다며 호기롭게 출사표를 던지게 된 것이다.
바스티안은 침대 위에서 꽤나 다정한 데다 테크닉 또한 좋아 인기가 많았다. 그렇기에 ‘바스티안이라면 나무토막도 흠뻑 젖어 물을 뿜어내게 할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돌 정도였는데, 실제로 그는 상대가 누구든 녹진녹진 녹여 버릴 자신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잘해 주면 매달릴 수 있으니 조심하고. 이렇게 바스티안의 포로가 하나 더 생기는 건가?”
“정확히 말하면 그 아랫도리의 포로가 되겠지요.”
왁자지껄, 저질스러운 농담과 함께 바스티안의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사가 요란히 울려 퍼졌다.
***
사일러스는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서서 다정한 미소를 짓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미스터, 무료해 보이시는데 제가 합석해도 될까요?”
며칠간 살롱을 드나든 그로서는 익히 보아 낯익은 인물이었다. 매번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모임의 중심이 되어 뭇 사람들의 추파를 받던 알파였다. 그는 상대의 나이나 성별을 딱히 가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매번 함께 자리를 뜨는 파트너가 다양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알파, 오메가, 남성, 여성, 그리고 간혹가다 베타.
“저, 미스터?”
멀뚱하니 눈만 깜빡이며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바스티안은 사일러스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 손등을 톡톡 쳤다. 그제야 사일러스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보다 이곳엔 최근에야 오신 것 같은데…….”
바스티안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리드했다. 그는 사일러스가 홀짝이던 음료에 대해 이야기하다 시중인을 호출해 음료에 어울리는 적당한 핑거 푸드를 주문했다. 그것은 사일러스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재료를 이용해 만든 음식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이국 문물을 자연스레 접해 왔던 바스티안은 잔잔한 목소리로 사일러스의 손에 들린 음식이 어디에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더불어 독특한 외국의 문물마저 소개하자니, 제대로 된 대화 상대 없이 몇 년을 홀로 지내 온 사일러스는 자연히 이야기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 얼마 전 남국에서 들여온 전통주가 있는데 드셔 보시겠습니까? 주류는 즐기시지 않는 편이신지?”
“아니요. 못 마시는 편은 아니에요.”
바스티안이 손짓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투명하고 작은 유리잔에 호박색 음료가 담겼다. 샴페인이나 와인류만 홀짝여 본 게 다였던 사일러스는 찰랑이는 술의 표면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살폈다.
“아!”
술을 입 안에 머금는 순간, 달콤 쌉싸름한 향이 가득 퍼졌다. 혀 위에서는 부드러웠으나, 목 넘김이 뜨거웠다. 독한 알코올 향이 코끝으로 훅 뿜어져 나왔다. 달콤한 향에 방심하던 사일러스는 급작스레 올라오는 알코올의 후폭풍에 가벼운 기침을 토했다. 얕게 사레에 들린 사일러스가 걱정스러운지, 바스티안이 몸을 가까이 붙였다. 탄탄한 몸을 감싼 알파 페로몬이 코끝을 자극했다.
“제가 너무 독한 술을 권했네요. 괜찮으십니까?”
바스티안은 사일러스의 어깨를 잡아 안고 진정시키려는 듯 등을 쓸었다. 등허리를 더듬는 단단하고 뜨끈한 손에 사일러스는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예……. 괘, 괜찮아요.”
굳은 몸에 긴장이 풀리자 손길이 한결 노골적으로 변했다. 손끝으로 척추골을 세어 나가듯 부드럽게 문지르고,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그럼 한 잔은 마저 비울까요, 우리?”
매력적인 알파의 유혹 어린 속삭임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스티안은 사일러스의 잔을 대신 받아 들고 입가에 술을 흘려 주었다. 어린애 입가에 음료를 대어 주듯, 다정한 손길이었다. 사일러스는 조심스레 입 안으로 흘러오는 액체를 꼴깍꼴깍 받아 마셨다. 술을 삼키자 목구멍과 배 속 깊은 곳까지 화하니 열이 올랐다.
“하아…….”
술기운이 올라 나른하게 늘어진 몸을 단단한 가슴 위로 기대 눕자, 바스티안이 손을 틀었다. 뱀 같은 손가락이 은밀하니 허벅지 안쪽을 쓸고, 숨결을 불어 넣으며 귓불을 간지럽혔다.
사일러스는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외려 알파의 손이 닿기 좋도록 몸을 틀어 주었다. 바스티안은 이 얌전한 오메가와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대범함에 눈썹을 까딱이더니 몸을 한결 밀착시켜 부드러운 허벅지에 곧추선 아랫도리를 문질렀다.
이 모습에 회장 안의 사람들은 분주히 시선을 교환했다. 특히 사일러스가 알파 손이라도 스쳐 희롱당하면 깜짝 놀라 눈물을 달고 뛰쳐나갈 것이라 예상한 이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내 목걸이!”
“나는 루비 반지를 걸었는데. 이럴 수 없어!”
한편 바스티안이 사일러스를 꾀어낼 수 있을 것이란 데에 돈을 건 자들은 신나는 표정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바스티안은 소란한 회장 한구석을 힐끗 살피며 사일러스의 손을 겹쳐 잡았다. 마지막 관문이었다.
“당신, 얼굴이 빨개졌네요.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편히 쉬실 곳으로 안내해도 될까요?”
사일러스는 제 손등 위에 얹힌 바스티안의 단단한 손바닥을 말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바스티안은 오메가의 멀겋고 무심한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가는 긍정을 확인하고는 씨익 웃음 지었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실까요?”
“예, 좋아요.”
그대로 몸을 밀착한 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들을 주시하던 사람들이 눈길을 교환했다. 내기에 진 몇몇은 투덜거리며 가슴 위에 달린 브로치, 소매의 커프스단추 등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고, 참여하지 않은 이들 또한 이 상황이 흥미로운 듯 귓속말을 나누었다.
그리고 모두의 관심 속에서 마지막 내기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저 오메가가 정말 목석인 걸까?”
호기심 어린 속살거림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 바스티안 (2)
이후 사일러스는 꾸준히 살롱에 발 도장을 찍었다. 비록 그에게 말 걸어 주는 이 하나 없었지만, 회장에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이 가시는 듯했다. 얄팍한 가면으로 맨얼굴을 감춘 채 나뒹구는 이들을 구경하고 있다 보면 이 세상에 사람 살내 아쉬운 사람이 저뿐만은 아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한편, 하루도 빼놓지 않고 늘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얌전히 샴페인 몇 잔만 홀짝이고 가는 사일러스를 향한 기묘한 호기심 또한 무럭무럭 자라났다. 살롱을 오가는 이들은 주눅 든 티 없이 꾸준히 파티마 홀을 오가는 저 ‘목석 오메가’가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곳에 와 앉아 있는지 궁금해했다. 저 홀로 지쳐 나가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던 이가 이리도 오래 버틸 줄이야.
바스티안 또한 사일러스에게 호기심을 느끼던 무리 중 하나였다. 근래 들어 사일러스의 존재는 가벼운 가십거리로 자주 언급되었는데, 마침 그와 시시덕거리는 무리 중 하나가 화두를 던졌던 것이다.
“……그래서 저 오메가는 정말 목석인 걸까?”
“먹어 보지 않은 음식의 맛을 어찌 알리오?”
“보기엔 뻣뻣하니 영 야살스레 굴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과일도 벗겨 봐야 맛을 안다고, 침대 위 사정을 어찌 함부로 예상하겠어?”
“아랫구멍 맛이 그렇게 좋으면 가윈, 그자가 아랫도리 쑤시고 빨아 주느라 바빴겠지, 그렇게 냉대를 했을까.”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들은 이런저런 예를 들어 가며 사일러스의 잠자리 버릇을 추측했다. 얼마나 아랫도리 돌리는 실력이 최악이기에 부부 관계가 파탄이 났을까 하는 의문부터, 저런 류가 의외로 더 밝힐 수도 있다, 까 보지 않으면 모른다 식의 반박까지…… 저질스러운 토론이 열렬히 오갔다. 이내 대화는 직접 확인해 보면 되지 않겠냐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이 중 대표로 나선 것이 바로 바스티안이었다.
바스티안은 스물여섯의 알파로, 수도 사교계에 이름 높은 자칭 한량에 난봉꾼이었다. 유서 깊은 고상한 집안 출신은 아니지만 이름 높은 무역상 집안의 막내아들이다. 제 형들이 이런저런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대며 아버지를 치열히 보좌하는 것에 비해, 5형제 중 막내인 바스티안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며 하루하루를 짜릿하게 즐겼다.
이런 바스티안의 모습이 밉상 맞게 보일 법하나, 그의 아버지와 형들 모두 바스티안의 방탕한 행보에 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둥이라, 그저 큰 사고 치지 않는다면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거니,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상 집안의 한량, 난봉꾼이라 자칭하는 바스티안이었지만 이 신랄하고 거친 표현은 그와 썩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무역상인 아버지를 따라 어릴 적부터 갑판 위를 뛰놀았던, 바다를 좋아하고 배 타는 것을 즐기는 싱그러운 청년이었다. 날이 조금이라도 따스한 날에는 항구 옆 백사장에서 상체를 탈의한 채 개인 보트를 몰거나 수영 중인 바스티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야외 생활을 즐기는 덕에 태양에 탄 가무잡잡하니 윤기 흐르는 피부가 아름답게 어울리는 쾌남형의 태양 같은 젊은이였다. 꽉 짜인 늘씬한 근육에, 햇빛에 탈색된 흐린 금발은 뭇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었다.
그는 제 외양과 부친의 어마어마한 재력이 주는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자연스레 바스티안의 주변에는 남녀노소, 알파, 오메가, 베타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리고 그는 자칭 ‘난봉꾼이자 한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밤놀이에 정통하고 도덕성 낮은 이들과 교류하길 즐겼다. 실제로 다정한 눈빛과 예의 바른 언행과는 다르게 아랫도리는 무척이나 방탕했다.
놀랍게도 이 젊은 알파 또한 요 며칠간 파티마 홀의 화제가 되고 있는 오메가에게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그럼 내가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지.”
마침내 사일러스와 하룻밤을 지내보겠다며 호기롭게 출사표를 던지게 된 것이다.
바스티안은 침대 위에서 꽤나 다정한 데다 테크닉 또한 좋아 인기가 많았다. 그렇기에 ‘바스티안이라면 나무토막도 흠뻑 젖어 물을 뿜어내게 할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돌 정도였는데, 실제로 그는 상대가 누구든 녹진녹진 녹여 버릴 자신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잘해 주면 매달릴 수 있으니 조심하고. 이렇게 바스티안의 포로가 하나 더 생기는 건가?”
“정확히 말하면 그 아랫도리의 포로가 되겠지요.”
왁자지껄, 저질스러운 농담과 함께 바스티안의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사가 요란히 울려 퍼졌다.
사일러스는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서서 다정한 미소를 짓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미스터, 무료해 보이시는데 제가 합석해도 될까요?”
며칠간 살롱을 드나든 그로서는 익히 보아 낯익은 인물이었다. 매번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모임의 중심이 되어 뭇 사람들의 추파를 받던 알파였다. 그는 상대의 나이나 성별을 딱히 가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매번 함께 자리를 뜨는 파트너가 다양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알파, 오메가, 남성, 여성, 그리고 간혹가다 베타.
“저, 미스터?”
멀뚱하니 눈만 깜빡이며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바스티안은 사일러스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 손등을 톡톡 쳤다. 그제야 사일러스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보다 이곳엔 최근에야 오신 것 같은데…….”
바스티안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리드했다. 그는 사일러스가 홀짝이던 음료에 대해 이야기하다 시중인을 호출해 음료에 어울리는 적당한 핑거 푸드를 주문했다. 그것은 사일러스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재료를 이용해 만든 음식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이국 문물을 자연스레 접해 왔던 바스티안은 잔잔한 목소리로 사일러스의 손에 들린 음식이 어디에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더불어 독특한 외국의 문물마저 소개하자니, 제대로 된 대화 상대 없이 몇 년을 홀로 지내 온 사일러스는 자연히 이야기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 얼마 전 남국에서 들여온 전통주가 있는데 드셔 보시겠습니까? 주류는 즐기시지 않는 편이신지?”
“아니요. 못 마시는 편은 아니에요.”
바스티안이 손짓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투명하고 작은 유리잔에 호박색 음료가 담겼다. 샴페인이나 와인류만 홀짝여 본 게 다였던 사일러스는 찰랑이는 술의 표면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살폈다.
“아!”
술을 입 안에 머금는 순간, 달콤 쌉싸름한 향이 가득 퍼졌다. 혀 위에서는 부드러웠으나, 목 넘김이 뜨거웠다. 독한 알코올 향이 코끝으로 훅 뿜어져 나왔다. 달콤한 향에 방심하던 사일러스는 급작스레 올라오는 알코올의 후폭풍에 가벼운 기침을 토했다. 얕게 사레에 들린 사일러스가 걱정스러운지, 바스티안이 몸을 가까이 붙였다. 탄탄한 몸을 감싼 알파 페로몬이 코끝을 자극했다.
“제가 너무 독한 술을 권했네요. 괜찮으십니까?”
바스티안은 사일러스의 어깨를 잡아 안고 진정시키려는 듯 등을 쓸었다. 등허리를 더듬는 단단하고 뜨끈한 손에 사일러스는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예……. 괘, 괜찮아요.”
굳은 몸에 긴장이 풀리자 손길이 한결 노골적으로 변했다. 손끝으로 척추골을 세어 나가듯 부드럽게 문지르고,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그럼 한 잔은 마저 비울까요, 우리?”
매력적인 알파의 유혹 어린 속삭임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스티안은 사일러스의 잔을 대신 받아 들고 입가에 술을 흘려 주었다. 어린애 입가에 음료를 대어 주듯, 다정한 손길이었다. 사일러스는 조심스레 입 안으로 흘러오는 액체를 꼴깍꼴깍 받아 마셨다. 술을 삼키자 목구멍과 배 속 깊은 곳까지 화하니 열이 올랐다.
“하아…….”
술기운이 올라 나른하게 늘어진 몸을 단단한 가슴 위로 기대 눕자, 바스티안이 손을 틀었다. 뱀 같은 손가락이 은밀하니 허벅지 안쪽을 쓸고, 숨결을 불어 넣으며 귓불을 간지럽혔다.
사일러스는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외려 알파의 손이 닿기 좋도록 몸을 틀어 주었다. 바스티안은 이 얌전한 오메가와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대범함에 눈썹을 까딱이더니 몸을 한결 밀착시켜 부드러운 허벅지에 곧추선 아랫도리를 문질렀다.
이 모습에 회장 안의 사람들은 분주히 시선을 교환했다. 특히 사일러스가 알파 손이라도 스쳐 희롱당하면 깜짝 놀라 눈물을 달고 뛰쳐나갈 것이라 예상한 이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내 목걸이!”
“나는 루비 반지를 걸었는데. 이럴 수 없어!”
한편 바스티안이 사일러스를 꾀어낼 수 있을 것이란 데에 돈을 건 자들은 신나는 표정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바스티안은 소란한 회장 한구석을 힐끗 살피며 사일러스의 손을 겹쳐 잡았다. 마지막 관문이었다.
“당신, 얼굴이 빨개졌네요.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편히 쉬실 곳으로 안내해도 될까요?”
사일러스는 제 손등 위에 얹힌 바스티안의 단단한 손바닥을 말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바스티안은 오메가의 멀겋고 무심한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가는 긍정을 확인하고는 씨익 웃음 지었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실까요?”
“예, 좋아요.”
그대로 몸을 밀착한 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들을 주시하던 사람들이 눈길을 교환했다. 내기에 진 몇몇은 투덜거리며 가슴 위에 달린 브로치, 소매의 커프스단추 등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고, 참여하지 않은 이들 또한 이 상황이 흥미로운 듯 귓속말을 나누었다.
그리고 모두의 관심 속에서 마지막 내기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저 오메가가 정말 목석인 걸까?”
호기심 어린 속살거림이 끊임없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