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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5화
1. 바스티안 (1)
해가 짧아졌다. 입가에 찬 기운이 슬쩍 서렸다 사라졌다. 별채 밖을 거의 나서지 않기에 겨울이 이리도 가까워졌는지도 몰랐다. 멋모르고 입고 나온 옷이 얇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일러스는 조심스레 옷깃을 여미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도에서 지낸 지 햇수로는 10년을 헤아리는데, 촌에서 갓 올라온 뜨내기보다 길을 몰랐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만 어른거렸다. 안개처럼 어둠이 깔려 거리가 한층 낯설게 느껴졌다.
마침내 은밀한 골목을 빠져나와 고개를 돌리자, 창 사이로 비어져 나온 환한 불빛이 속눈썹을 간지럽혔다. 파티마 홀이다.
***
날이 밝을 때 저택을 조용히 빠져나오려 했으나, 쪽문 앞에서 하인에게 잡혀 문책을 당하고 말았다. 외출이라고는 별채에 딸린 좁은 정원을 뱅뱅 도는 것이 다였던 이가 옷까지 차려입고 슬그머니 집안을 나서는 꼴이 수상해 보였을 법했다.
사일러스는 가윈의 허락을 받고 외출을 하는 것이며, 영영 어디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한참을 해명했다. 그러나 하인은 그의 말이 영 미심쩍은지 직접 주인에게 확증을 받은 후에야 그를 내보내 주었다.
당시 사일러스의 외출을 보고받은 가윈은 ‘그분은 어떻게 할까요?’ 하는 하인의 물음에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맘대로 하라고 해. 페로몬도 못 내는 반편이 오메가에게 꼴릴 놈이라 봐야 변태 성욕자밖에 더 있나?”
신랄한 평가였다.
하인은 차마 주인의 말을 모두 전할 수 없었으므로 사일러스의 외출을 허락했노라는 요지만 간단히 알렸다. 사일러스는 당신의 호의에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저택 담장을 벗어났다. 참으로 오래간만의 외출이었다.
사일러스는 선뜻 저택을 나선 것에 비해 한참을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결국 그는 마차 한 대를 잡아탄 후 목적지를 묻는 마부에게 우물쭈물 물었다.
“저…… 알파나, 그, 상호 간에 적절한 만남을 가지는 곳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이 든 마부는 야릇한 시선을 던지더니 말없이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는 깨끗하게 포장된 거리를 달렸다. 얼추 차 한 잔이 느긋이 식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마차가 덜컥 멈추어 섰다.
“행색을 보니 지위도 돈도 꽤 있는 분 같아서 여기서 내려 드리오. 이곳은 체스넛 거리고, 여기서 저 골목으로 들어가 가로등을 따라 좀 걷다 보면 파티마 홀이 나올 것이외다. 높으신 분들은 그곳에서 은밀한 외도를 즐기시더군.”
사일러스는 마부에게 무척 고마워하며 사례를 했다. 팁이 마차 삯의 서너 배가 넘었다. 마부는 사양조차 않고 돈을 챙겨 쌩하니 자리를 떴다.
마부가 가르쳐 준 길을 따라 꽤 오래도록 걸었다. 골목은 마차가 진입하기에는 폭이 좁았지만, 으슥하거나 갑갑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드문드문 놓인 가로등 불빛이 꽤 위안을 주었다. 대로에나 있을 법한 가로등이 이렇게 평범한 골목 안을 밝히고 있다는 것부터가 무척 독특했다.
“아, 여기구나.”
마침내 마지막 모퉁이를 도는 순간, 밝은 불빛으로 가득 찬 건물 하나가 눈에 보였다. 아무런 표식도 붙어 있지 않았지만 사일러스는 알 수 있었다. 저곳이 파티마 홀이었다.
홀에 입장하기 위한 특별한 의식 따위는 없었다. 이름도, 신분도, 혼인 여부도, 그 무엇도 묻지 않았다. 그저 ‘살롱 참가비’라는 명목의 입장료만이 필요했는데, 일반 서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법한 거금을 요구했다. 마부의 말마따나 ‘있는 분들이’ 알음알음 모여 즐기는 은밀한 모임다웠다.
참가비는 옛 시절 사일러스였다면 상상할 수 없을 만치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심지어 단 한 번의 입장에 필요한 비용인 것을 감안하면, 굉장한 사치였다.
하지만 사일러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빼어 내밀었다. 링은 얇았으나, 알알이 박힌 보석들은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 결혼 예물로 받은 패물 더미 안에서 빼내 온 반지였다. 안내인은 외알 안경을 빛내며 반지 알을 이리저리 비추어 보고는 아주 극진한 태도로 그를 안내했다.
안내인은 사일러스가 고액의 입장료를 내주었다며 살롱 출입증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금박 딱지를 손에 쥐여 주었다. 얼굴을 가리는 얇은 가면 또한 주었다. 참가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유지해 준다는 명목이었으나, 실상 눈가만 겨우 가리는 가면으로 얼굴을 숨기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철저히 남을 가장하더라도 턱 선, 몸태, 작은 제스처만 보아도 정체는 금방 까발려졌다. 수도 안 상류층 인사들이라고 해 보아야 거기서 거기였다.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는 것이다. 가면은 실지로 얼굴을 감추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이곳, 파티마 홀 살롱에서 있을 어떠한 추문과 불륜도 공식적으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얄팍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사일러스는 눈매만 가려 주는 얄팍한 흰 가면을 쓰고 복도를 지나 홀에 입장했다.
너른 홀 안은 이미 사람들로 붐볐다. 홀은 비정기적으로 내부 장식을 바꿔 특별한 분위기를 주곤 했는데, 이날은 붉은 비단이 천장에서부터 걸려 하늘거리고, 이국의 기묘한 향초가 곳곳에 피어나고 있었다. 가면을 쓴 남녀가 비밀스러운 음료를 홀짝이며 삼삼오오 모여 소곤거리거나 끈적한 스킨십을 나누었다. 몇몇은 격정적으로 서로의 몸을 더듬다 휘장 뒤 공간으로 몸을 감추기도 했다.
사일러스는 낯선 분위기에 얼뜨기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살면서 이리도 많은 인파를 한꺼번에 접한 일이 있었던가? 어린 시절에는 가난한 촌구석에서 자란 데다, 수도에 올라온 후로도 정식 외출이라곤 해 본 적 없는 사일러스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화려한 광경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용기를 내 저택을 나서 운 좋게도 은밀한 모임에 입장할 수 있었으나, 이 이상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결국 사일러스는 이리저리 눈만 굴리다 회장 한구석에 놓인 의자에 몸을 기대앉았다. 가만히 앉아 구경이라도 하고 갈 생각이었다.
한편, 사일러스의 등장으로 회장 내부가 다소 술렁거렸다.
“저이는 누구지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 아는 사람 있나?”
회장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교양 있는 상류 예법을 익힌 자들이었으므로,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은 없었다. 다만 은밀히 눈을 굴려 상대를 관찰하고, 슬그머니 입가를 가려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참내기의 정체가 밝혀지기까지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저 사람, 그…… 집안의 오메가인 것 같다는데?”
공식 석상에는 나선 적 없는 사일러스였으나, 소문에 밝은 몇몇은 이미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사일러스의 정체와 출신이 알려지자, 그는 순식간에 노골적인 가십의 중심이 되었다.
“들은 바로는 혼인한 지 10년이 지났다는데.”
“가윈, 그치에게 아이가 있었던가? 계약 결혼이라 하더라도 아이는 낳고 각자 살림하는 게 정상일 텐데 어째서 아직 애가 없지?”
“아니, 들리는 말로는 애를 못 가져서 거의 내쳐졌다나?”
“이 정도면 알파 쪽이 밖에서 애를 데려오는 것이 백배 낫지.”
“그쪽 가주 되는 사람이 조카를 그리도 아끼는데 조카 손주를 못 보니 어찌나 원통할까.”
“아니, 제가 듣기로는 그렇게 목석이고 잠자리에서 못난 나머지 있던 것도 죄 시들 지경이라 알파가 그리 밖으로 나돈다고—”
“그 사람, 가윈이 나도는 걸 보면 그럴싸한 말이죠. 그가 어디 빠지는 알파는 아니니…….”
“그럼 저 오메가는 맞불 작전이라도 놓겠다는 건가?”
“글쎄…… 모를 일이지.”
“그렇다기엔 좀…….”
“좀, 보잘것없어 보이는데.”
사일러스는 바쁘게 오가는 눈길과 속삭임들을 눈치챘다. 사람들이 모두 저를 힐끗거리며 한 마디씩 던지고 있었다. 눈가에 비웃음이 스치는 것으로 보아 분명 좋은 내용은 아닐 터다. 뻔했다. 매력 없는 오메가, 불운을 불러온 뻔뻔한 오메가, 제 주제를 모르고 버티고 앉은 오메가, 아이조차 못 가지는 돌덩이.
뻔뻔하고 호탕한 성격이라도 타고났다면 사람들 사이에 끼어 말이라도 한번 붙여 보거나 귀에 뻔히 들릴 정도로 못된 말들을 수군거리는 이들에게 무어라 한마디라도 해 줄 텐데. 숫기 없는 사일러스로서는 이 낯선 공간, 낯선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력을 다 소모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라면, 어두운 밤 홀로 텅 빈 방 안에 앉아 지난 10년의 외로움과 슬픔을 반추하는 것보다야 부끄러움에 휩싸여 주위를 둘러보는 작금의 상황이 훨씬 덜 불행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사일러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북적이니 쓸쓸하지는 않구나.”
그를 향한 무수한 추측과 가십은 차치하더라도, 이쯤 되면 누구라도 사일러스에게 말 한마디 걸어 볼 법했다. 그런 장소였다. 저질스러운 호기심과 치기 어린 장난이 허락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사일러스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는데, 단순히 민망한 추문 때문은 아니었다. 이 회장 안에 있는 이들 중에 악질적인 소문 하나 없는 자는 단 하나도 없을 테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 근거가 없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모두 어지간한 가십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인사인 것이다.
그런데 사일러스에게 사람 하나 얼씬하지 않는 까닭은 어째서인가?
단순한 이유였다. 그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사일러스는 썩 매력적인 오메가가 아니었다. 제 딴에 홀로 차려입고 왔다 해도 제대로 관리받지 못해 수수하고 초라한 외양에, 사랑받아 보지 못한 사람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심지어 페로몬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호르몬에 성적 이끌림을 느끼는 알파, 오메가로서는 전혀 호감 갈 상대가 아닌 것이다. 이래서는 음침하고 미숙한 베타와 별다를 바 없지 않은가.
결국 외출 첫날, 사일러스는 누구와도 대화해 보지 못한 채 홀로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 상황이 수치스럽게 느껴질 법했으나,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회장 한구석에 앉아 달콤한 음료를 홀짝이며 얌전히 주위를 살필 뿐이었다.
1. 바스티안 (1)
해가 짧아졌다. 입가에 찬 기운이 슬쩍 서렸다 사라졌다. 별채 밖을 거의 나서지 않기에 겨울이 이리도 가까워졌는지도 몰랐다. 멋모르고 입고 나온 옷이 얇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일러스는 조심스레 옷깃을 여미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도에서 지낸 지 햇수로는 10년을 헤아리는데, 촌에서 갓 올라온 뜨내기보다 길을 몰랐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만 어른거렸다. 안개처럼 어둠이 깔려 거리가 한층 낯설게 느껴졌다.
마침내 은밀한 골목을 빠져나와 고개를 돌리자, 창 사이로 비어져 나온 환한 불빛이 속눈썹을 간지럽혔다. 파티마 홀이다.
날이 밝을 때 저택을 조용히 빠져나오려 했으나, 쪽문 앞에서 하인에게 잡혀 문책을 당하고 말았다. 외출이라고는 별채에 딸린 좁은 정원을 뱅뱅 도는 것이 다였던 이가 옷까지 차려입고 슬그머니 집안을 나서는 꼴이 수상해 보였을 법했다.
사일러스는 가윈의 허락을 받고 외출을 하는 것이며, 영영 어디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한참을 해명했다. 그러나 하인은 그의 말이 영 미심쩍은지 직접 주인에게 확증을 받은 후에야 그를 내보내 주었다.
당시 사일러스의 외출을 보고받은 가윈은 ‘그분은 어떻게 할까요?’ 하는 하인의 물음에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맘대로 하라고 해. 페로몬도 못 내는 반편이 오메가에게 꼴릴 놈이라 봐야 변태 성욕자밖에 더 있나?”
신랄한 평가였다.
하인은 차마 주인의 말을 모두 전할 수 없었으므로 사일러스의 외출을 허락했노라는 요지만 간단히 알렸다. 사일러스는 당신의 호의에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저택 담장을 벗어났다. 참으로 오래간만의 외출이었다.
사일러스는 선뜻 저택을 나선 것에 비해 한참을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결국 그는 마차 한 대를 잡아탄 후 목적지를 묻는 마부에게 우물쭈물 물었다.
“저…… 알파나, 그, 상호 간에 적절한 만남을 가지는 곳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이 든 마부는 야릇한 시선을 던지더니 말없이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는 깨끗하게 포장된 거리를 달렸다. 얼추 차 한 잔이 느긋이 식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마차가 덜컥 멈추어 섰다.
“행색을 보니 지위도 돈도 꽤 있는 분 같아서 여기서 내려 드리오. 이곳은 체스넛 거리고, 여기서 저 골목으로 들어가 가로등을 따라 좀 걷다 보면 파티마 홀이 나올 것이외다. 높으신 분들은 그곳에서 은밀한 외도를 즐기시더군.”
사일러스는 마부에게 무척 고마워하며 사례를 했다. 팁이 마차 삯의 서너 배가 넘었다. 마부는 사양조차 않고 돈을 챙겨 쌩하니 자리를 떴다.
마부가 가르쳐 준 길을 따라 꽤 오래도록 걸었다. 골목은 마차가 진입하기에는 폭이 좁았지만, 으슥하거나 갑갑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드문드문 놓인 가로등 불빛이 꽤 위안을 주었다. 대로에나 있을 법한 가로등이 이렇게 평범한 골목 안을 밝히고 있다는 것부터가 무척 독특했다.
“아, 여기구나.”
마침내 마지막 모퉁이를 도는 순간, 밝은 불빛으로 가득 찬 건물 하나가 눈에 보였다. 아무런 표식도 붙어 있지 않았지만 사일러스는 알 수 있었다. 저곳이 파티마 홀이었다.
홀에 입장하기 위한 특별한 의식 따위는 없었다. 이름도, 신분도, 혼인 여부도, 그 무엇도 묻지 않았다. 그저 ‘살롱 참가비’라는 명목의 입장료만이 필요했는데, 일반 서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법한 거금을 요구했다. 마부의 말마따나 ‘있는 분들이’ 알음알음 모여 즐기는 은밀한 모임다웠다.
참가비는 옛 시절 사일러스였다면 상상할 수 없을 만치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심지어 단 한 번의 입장에 필요한 비용인 것을 감안하면, 굉장한 사치였다.
하지만 사일러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빼어 내밀었다. 링은 얇았으나, 알알이 박힌 보석들은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 결혼 예물로 받은 패물 더미 안에서 빼내 온 반지였다. 안내인은 외알 안경을 빛내며 반지 알을 이리저리 비추어 보고는 아주 극진한 태도로 그를 안내했다.
안내인은 사일러스가 고액의 입장료를 내주었다며 살롱 출입증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금박 딱지를 손에 쥐여 주었다. 얼굴을 가리는 얇은 가면 또한 주었다. 참가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유지해 준다는 명목이었으나, 실상 눈가만 겨우 가리는 가면으로 얼굴을 숨기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철저히 남을 가장하더라도 턱 선, 몸태, 작은 제스처만 보아도 정체는 금방 까발려졌다. 수도 안 상류층 인사들이라고 해 보아야 거기서 거기였다.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는 것이다. 가면은 실지로 얼굴을 감추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이곳, 파티마 홀 살롱에서 있을 어떠한 추문과 불륜도 공식적으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얄팍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사일러스는 눈매만 가려 주는 얄팍한 흰 가면을 쓰고 복도를 지나 홀에 입장했다.
너른 홀 안은 이미 사람들로 붐볐다. 홀은 비정기적으로 내부 장식을 바꿔 특별한 분위기를 주곤 했는데, 이날은 붉은 비단이 천장에서부터 걸려 하늘거리고, 이국의 기묘한 향초가 곳곳에 피어나고 있었다. 가면을 쓴 남녀가 비밀스러운 음료를 홀짝이며 삼삼오오 모여 소곤거리거나 끈적한 스킨십을 나누었다. 몇몇은 격정적으로 서로의 몸을 더듬다 휘장 뒤 공간으로 몸을 감추기도 했다.
사일러스는 낯선 분위기에 얼뜨기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살면서 이리도 많은 인파를 한꺼번에 접한 일이 있었던가? 어린 시절에는 가난한 촌구석에서 자란 데다, 수도에 올라온 후로도 정식 외출이라곤 해 본 적 없는 사일러스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화려한 광경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용기를 내 저택을 나서 운 좋게도 은밀한 모임에 입장할 수 있었으나, 이 이상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결국 사일러스는 이리저리 눈만 굴리다 회장 한구석에 놓인 의자에 몸을 기대앉았다. 가만히 앉아 구경이라도 하고 갈 생각이었다.
한편, 사일러스의 등장으로 회장 내부가 다소 술렁거렸다.
“저이는 누구지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 아는 사람 있나?”
회장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교양 있는 상류 예법을 익힌 자들이었으므로,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은 없었다. 다만 은밀히 눈을 굴려 상대를 관찰하고, 슬그머니 입가를 가려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참내기의 정체가 밝혀지기까지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저 사람, 그…… 집안의 오메가인 것 같다는데?”
공식 석상에는 나선 적 없는 사일러스였으나, 소문에 밝은 몇몇은 이미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사일러스의 정체와 출신이 알려지자, 그는 순식간에 노골적인 가십의 중심이 되었다.
“들은 바로는 혼인한 지 10년이 지났다는데.”
“가윈, 그치에게 아이가 있었던가? 계약 결혼이라 하더라도 아이는 낳고 각자 살림하는 게 정상일 텐데 어째서 아직 애가 없지?”
“아니, 들리는 말로는 애를 못 가져서 거의 내쳐졌다나?”
“이 정도면 알파 쪽이 밖에서 애를 데려오는 것이 백배 낫지.”
“그쪽 가주 되는 사람이 조카를 그리도 아끼는데 조카 손주를 못 보니 어찌나 원통할까.”
“아니, 제가 듣기로는 그렇게 목석이고 잠자리에서 못난 나머지 있던 것도 죄 시들 지경이라 알파가 그리 밖으로 나돈다고—”
“그 사람, 가윈이 나도는 걸 보면 그럴싸한 말이죠. 그가 어디 빠지는 알파는 아니니…….”
“그럼 저 오메가는 맞불 작전이라도 놓겠다는 건가?”
“글쎄…… 모를 일이지.”
“그렇다기엔 좀…….”
“좀, 보잘것없어 보이는데.”
사일러스는 바쁘게 오가는 눈길과 속삭임들을 눈치챘다. 사람들이 모두 저를 힐끗거리며 한 마디씩 던지고 있었다. 눈가에 비웃음이 스치는 것으로 보아 분명 좋은 내용은 아닐 터다. 뻔했다. 매력 없는 오메가, 불운을 불러온 뻔뻔한 오메가, 제 주제를 모르고 버티고 앉은 오메가, 아이조차 못 가지는 돌덩이.
뻔뻔하고 호탕한 성격이라도 타고났다면 사람들 사이에 끼어 말이라도 한번 붙여 보거나 귀에 뻔히 들릴 정도로 못된 말들을 수군거리는 이들에게 무어라 한마디라도 해 줄 텐데. 숫기 없는 사일러스로서는 이 낯선 공간, 낯선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력을 다 소모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라면, 어두운 밤 홀로 텅 빈 방 안에 앉아 지난 10년의 외로움과 슬픔을 반추하는 것보다야 부끄러움에 휩싸여 주위를 둘러보는 작금의 상황이 훨씬 덜 불행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사일러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북적이니 쓸쓸하지는 않구나.”
그를 향한 무수한 추측과 가십은 차치하더라도, 이쯤 되면 누구라도 사일러스에게 말 한마디 걸어 볼 법했다. 그런 장소였다. 저질스러운 호기심과 치기 어린 장난이 허락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사일러스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는데, 단순히 민망한 추문 때문은 아니었다. 이 회장 안에 있는 이들 중에 악질적인 소문 하나 없는 자는 단 하나도 없을 테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 근거가 없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모두 어지간한 가십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인사인 것이다.
그런데 사일러스에게 사람 하나 얼씬하지 않는 까닭은 어째서인가?
단순한 이유였다. 그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사일러스는 썩 매력적인 오메가가 아니었다. 제 딴에 홀로 차려입고 왔다 해도 제대로 관리받지 못해 수수하고 초라한 외양에, 사랑받아 보지 못한 사람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심지어 페로몬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호르몬에 성적 이끌림을 느끼는 알파, 오메가로서는 전혀 호감 갈 상대가 아닌 것이다. 이래서는 음침하고 미숙한 베타와 별다를 바 없지 않은가.
결국 외출 첫날, 사일러스는 누구와도 대화해 보지 못한 채 홀로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 상황이 수치스럽게 느껴질 법했으나,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회장 한구석에 앉아 달콤한 음료를 홀짝이며 얌전히 주위를 살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