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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4화
과거 1 (3)


-너는 그저 네 피를 이은 후계 알파 하나만 만들면 된다. 결혼이 은밀했던 만큼 이혼 또한 은밀하게 진행해 주마. 이후로는 조용히 베타와 결혼 생활을 즐기도록 해라. 네 자식을 키우고 싶지 않다면 내게 맡겨도 좋아. 그때쯤엔 아마 내 후계자도 정해져 있을 테니 나도 제법 적적하겠지. 늘그막에 조카 손주 하나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
원래의 가윈이었다면 수락할 리 없는 조건이었으나…….
-어찌 되었건 네게도 흠결이 되는 일이니 네 혼인과 파혼은 주위에 최대한 알리지 않도록 하마. 너 또한 네 베타가 이 사실을 알기를 원하지 않을 테고, 나 또한 부끄러운 집안 사정을 널리 퍼뜨리고 싶지 않아. 아이만 낳으면 된다, 가윈. 그것만 하면 너는 네 베타와 행복할 수 있다. 내가 네 뒷배가 되어 주마.
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살살 꾀어내는 뱀 같은 수법을 쓰니, 마음이 흔들리고 있던 가윈으로서는 넘어갈 수밖에.
-……정말 약속하시는 것이지요?

***


가윈이 마음을 정하자, 적당한 오메가를 물색하고 혼인을 준비하기까지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혼인 상대의 이름은 사일러스로, 보잘것없는 귀족 집안의 차남이었다. 그의 가문은 몇 대 전까지는 학자 집안으로 제법 이름 높았으나, 현재에 이르러서는 어지간한 중산 계급보다 못한 처지였다.
뻔한 이야기였다. 선대의 성취는 과거의 영광이 되어 버렸고, 선조의 연구서는 가난을 이기지 못해 동전 몇 닢 푼돈으로 팔아넘긴 지 오래다. 그러나 귀족 가문 특유의 허영만은 남아 돈벌이보다 씀씀이가 컸으므로 언제나 빚에 쫓겨 허덕였다.
가윈은 혈통은 보장되지만, 권력과 금전으로 쉬이 잡아 흔들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고, 오메가의 집안은 돈이 필요했다. 이익 관계가 무척 잘 들어맞았다.
오메가 차남인 사일러스는 외양이 수수한 데다 성정이 유약하여 좋은 혼처를 얻기는커녕, 나이 든 알파의 재취 자리에나 팔려 갈 수 있을까 싶던 상황이었다. 이런 사일러스에게 수도의 명망 높은 가문에서 혼담이 들어온 것이다. 사일러스의 집안에 있어서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상대는 번듯한 초혼의 젊은 알파인 데다 입이 떡 벌어질 수준의 막대한 지참금과 지원을 약속했다. 덧붙여 혼인에 대해 입을 다물어 준다면 그 배가 되는 패물을 주겠다고 약조했다.
사실 지나치게 격에 맞지 않은 혼담인 데다 수상하기 그지없는 조건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심사숙고해 볼 법했으나, 궁핍한 삶에 질릴 대로 질린 사일러스의 부모는 자세한 정황조차 묻지 않고 굴러들어 온 황금 호박을 그대로 꿀꺽 집어삼켜 버렸다.
이후 그렉은 사일러스의 부친을 은밀히 불러 사일러스가 건강한 알파를 낳아 준다면 마차 세 대 분의 황금을 주겠으며, 이들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한 그의 집안에 대한 추가적인 지원이 있을 것을 알렸다. 이혼을 최대한 막아 보려는 심사였다. 사일러스는 어느 곳 하나 그렉의 마음에 차는 부분이 없었지만, 적어도 베타인 앤슬리보다는 나았다.
그런 고로 혼담이 들어온 지 딱 보름 만에 사일러스가 혼인을 위해 상경하게 되었을 때, 가족 친지들이 그에게 해 주었던 말이라고는 ‘너는 이 집안의 대들보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잘 버텨라.’, ‘알파는 오메가 하기 나름이다. 어떻게든 꼭 붙잡고 있어라.’, ‘꼭 알파를 낳아 우리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힘들 때면 가족들과 네 형님, 어린 동생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견디렴.’ 따위의 속물적인 격려뿐이었다.
실지로 그의 미래에 대해 축복하거나 행복한 결혼 생활에 대한 조언을 건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실상, 그들 중 아무도 사일러스가 겪을 비참한 결혼 생활에 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수도에 도착한 사일러스는 서약식 날이 되어서야 제 배우자가 될 이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둘은 대외적으로는 시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핑계로 결혼식은 생략하고 서약식만 간단히 진행했다. 사일러스는 결혼식 없는 혼인 관계를 과연 정상적으로 지속할 수 있을지 불안에 떨었으나, 그가 이래저래 말을 올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에 그저 입술을 꾹 깨물며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서약식은 양측 참관인(보통은 부모)의 입회하에, 서로가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식이었다. 보통은 가까운 양가 친인척을 초대해 작은 결혼식 형태로 진행하였으며, 법률가 앞에서 공식 혼인 증명서에 서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일러스와 가윈의 서약식은 지극히 무미건조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참관객이라고는 가윈의 부모와 그렉, 그리고 가문에 속한 법률가뿐인 냉랭한 결합의 현장이었다. 사일러스 측의 입회인 자리에는 후견인이라는 명목으로 그렉이 부모를 대신해 앉아 있었다.
서약식 당시, 사일러스는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그리고 냉랭한 분위기 사이에서 내내 주눅 들어 있었다. 서약식의 핵심이라고 해 봐야 결국 준비된 혼인 서류를 또박또박 읽고 그 아래에 본명을 정자로 쓰기만 하는 것이 다였다.
-아, 얼룩이……!
무척 긴장한 사일러스는 제 이름자를 쓰다 종이 위에 그만 부자연스러운 잉크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 그러나 철자를 알아보는 데는 큰 문제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서류는 교체 없이 그대로 제출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는 애증과 후회로 얼룩진 그들 혼인 관계에 대한 전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토록 엉망인 대우를 받아 가면서도 당시 열일곱에 불과했던 사일러스는 마음속 한구석에 자그마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서약식 때 처음으로 마주한 제 배우자라는 알파는 번듯하니 잘생긴 알파였다.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것들에 둘러싸여 자라난 이답게 행동거지는 당당했고, 매사 움직임이 기품 있었다. 사일러스는 궁핍한 시골구석에서 자란 탓에 그처럼 세련된 알파를 처음 보았다. 덕분에 그는 공식적으로 가윈의 배우자가 된 첫날밤, 텅 빈 침실을 홀로 지키며 밤잠을 설쳤다.
‘무뚝뚝해 보이셨지만 많이 나쁜 분은 아니신 것 같아. 많이 바쁘신 탓에 결혼식도 생략하고, 첫날밤도 미뤄졌지만, 앞으로 저분과 잘 지낼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러나 꿈결 같은 착각은 하루도 채 가지 못했다. 다음 날 가윈과 사일러스는 오찬을 함께했는데, 저를 흘낏거리며 귓등을 붉히는 사일러스를 향해 가윈이 입을 연 것이다.
-내 아이를 낳은 후 이혼해 주면 좋겠어.
-……네?
사일러스는 멍청히 입을 벌려 묻다 입 안에 든 음식물을 흘릴 뻔했다.
-이야기는 듣지 못했던가? 하긴, 그쪽 집안은 자초지종도 제대로 듣지 않고 덥석 혼담을 받아들였으니……. 우리는 조건부 결혼을 했어. 아이를 낳으면 나와 이혼해 줘. 알파를 낳으면 그만한 큰 사례를 하지. 양육권은 우리 쪽이 가질 거야. 그리고 이혼에 대해서는…… 당신 평판에는 누가 가겠지만 좋은 저택과 평생 사치하고 살 만큼의 위자료를 지급하도록 하지.
사일러스는 쥐고 있던 스푼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것도 잊고 고개를 들었다. 물기 어린 눈동자가 충격으로 잘게 떨렸다.
-……혹시, 저, 그, 씨받이…… 그, 아이를 얻기 위해 저에게 혼담을 넣으신……?
-나는 오랜 연인이 있어. 그는 몸이 약한 데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지. 하지만 나는 후사를 보아야만 해서 이렇게……. 아무쪼록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없는 관계란 것은 알지만, 당신에게도 나쁠 것은 없는 일이야. 그만큼 충분한 사례를 할 테니. 또한, 당신에게 실례일 말이긴 하지만, 이 정도 조건이라면 당신이 잡을 수 있는 최고의 선택지 아니었던가?
가윈은 충격에 입술을 깨무는 사일러스의 얼굴을 보며 ‘아마 내가 아니었다면 너는 나이 많은 알파나 베타의 후처로나 들어갔을걸.’ 하는 말을 애써 삼켰다.
그는 식사 시간 동안 그들의 형식적 결혼 생활을 시작함에 앞서 주의해 줄 점을 몇 가지 당부했다.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연인인 앤슬리의 몸이 약한 만큼 그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다. 그는 나의 결혼 소식을 모른다. 그러니 별채에 자리를 줄 테니 되도록 조용히 지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별채라 해서 허름하거나 대우가 부족한 점은 전혀 없을 것이다. 나는 내 아이를 낳아 줄 당신을 충분히 존중하겠다. 그러니 당신 또한 큰 문제 없이 나와의 계약을 존중해 주면 좋겠다.
사일러스는 가윈의 말을 들으며 반쯤 넋이 나간 채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그의 부모는 혼담을 받아들였고, 서약서에 서명까지 끝낸 상황이었다. 사실상 사후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이혼은 큰 흠이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사일러스 입장에서는 혼인을 무를 수 있을 리 없었다.
더욱이 사일러스는 숫기 없고 겁 많은 성격이었다. 일언반구 없이 결혼을 통보한 부모에게도 아무 말 하지 못했던 그가 가윈에게 무엇이라 항의하겠는가. 그저 쓰린 속을 부여잡고 현실에 수긍할 뿐.
가타부타 말없이 고분고분 고개만 끄덕이다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가윈로서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자리였다. 그는 제 선택에 박수를 보냈다. 사일러스는 얌전하고 순종적이었다. 앞으로도 오늘처럼 행동해 준다면 큰 문제 없이 아이를 낳아 이혼하고, 앤슬리와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 사일러스 또한 편안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