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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3화
과거 1 (2)
-결혼, 결혼, 그놈의 결혼!
비단 그렉의 재촉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담에 대한 압박이 커졌다. 상류층 인사의 결혼 적령기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막 22세가 된 가윈에게는 그야말로 중매가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물밀듯 몰려들었다.
잘생긴 용모에 건강한 신체, 훌륭한 가문, 충분한 재산. 후계권에서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 흠이었지만, 도리어 그 덕에 더욱 안정적인 면이 있었다. 가주의 직계 자식들은 치열하게 후계권을 두고 다투고 있으니 어느 한쪽에 배팅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주가 뒷배를 보아주는 가윈은?
벌써 미래가 창창했다. 가윈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적령기 오메가를 자식으로 가진 부모들은 눈에 불을 켜고 그의 저택으로 중매서와 초상화를 보냈다. 집사가 말하길, ‘이때 날아왔던 서신들만 해도 엄청나서 나무 장작을 살 필요가 없었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앤슬리는 여전히 병약했다. 외출이라고는 가윈의 저택에 방문하는 것뿐이었으므로 바깥소식에는 귀가 어두웠다. 가윈으로서는 다행이었다. 불티나게 날아오는 청혼서를 재빠르게 태워 버리는 것만으로도 앤슬리에게 사실을 숨길 수 있었으므로.
가윈에게 혼담이 쇄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앤슬리는 슬픔과 죄책감에 숨이 막혀 기절해 버릴지도 몰랐다.
가윈이 앤슬리 모르게 중매서를 처리하고, 주변의 맞선 권유를 거절하는 것에 진저리가 날 때쯤 그렉이 다시 한번 혼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가윈,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하지 않을 테냐?
-전 앤슬리와 혼인할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한다는 쪽에 더 가깝겠지요.
가윈이 퉁명스레 답했다. 결혼의 ‘결’ 자만 들어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심지어 연인인 앤슬리에게는 아무것도 밝힐 수 없으니, 갑갑증만 더해 갔다.
-베타는 아무 소용이 없어, 가윈. 아이가 있어야 해. 네 재산을 물려줄, 피 섞인 알파가 필요하지. 자고로 명망 있는 가문의 어엿한 알파라면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 후사가 없다면 가정을 꾸리는 의미가 없고, 남들 보기에도 좋지 않아.
-아이는 방계에서 입양하면 됩니다. 불임 부부는 그래 오지 않았습니까? 패트릭 숙부도 그랬고요.
-그것과는 다르지 않으냐. 그 집안은 상대가 좋았다. 더군다나 베타는…… 심지어 남자 베타는 아예 타고나길 배태할 수 없는 몸이잖나.
-저는 이 주제로 더는 백부와 입씨름하기 싫습니다. 이미 우리 관계를 인정해 주셨던 것이 몇 년 전 일입니다. 계속 번복하는 이유가 무엇이신지요!
가윈은 책상을 내리쳤다.
-네가 그사이 철이 들 것으로 생각했다, 가윈.
-저는 충분히 철이 들었습니다!
-아니, 너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 알파가 되었다면 한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자식을 낳지 않으면 네게 내 재산 한 푼, 명성 단 한 줌도 물려주지 않겠다! 아직 나는 상속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았어, 가윈! 네가 그 비루먹은 베타와 붙어먹는 꼴을 볼 바엔 길거리 거지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고 말지!
-백부님!
백부의 강경한 태도에 가윈은 기함했다.
그렉에게 미리 상속받은 지분의 사업은 순항을 이루고 있었으나 규모가 작았다. 더군다나 그렉이 가진 사업체의 하위 산업에 속했으므로 백부의 조력 없이는 번창하기는커녕 말아먹기에 십상이었다. 그렉은 가윈을 길거리에 내앉히겠다는 노골적인 위협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렉 백부……!
-가윈, 한 사람분의 일은 곧잘 해내는 것을 보아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영 아닌 모양이구나. 이만 나가 보아라. 그리고 조금 더 시일이 지나 머리가 식었을 때쯤 다시 보자꾸나. 내 따로 기별을 줄 테니 그때까지 무엇이 옳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가윈은 집무실에서 내쫓기듯 끌려 나왔다.
이후로 가윈은 한동안 그렉을 만날 수 없었다. 세를 확장하고 있던 가윈의 사업은 그렉의 압박에 연일 최악에 최악을 갱신했다.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렉은 연말 일정으로 바쁘다는 이유를 들어 가윈의 방문을 거절했다.
가윈은 매몰찬 백부의 태도에 배신감을 느꼈다. 매사 그를 아끼며 지지해 주던 그렉이었기에 분노는 더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나날이 엉망이 되어 가는 장부를 확인할 때마다 백부에 대한 분노, 혹은 배신감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분노가 사그라든 자리에는 불안이 차올랐다. 그렉의 말마따나 흥분이 가라앉고 머리가 차가워질수록 백부의 노호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네게 내 재산 한 푼, 명성 단 한 줌도 물려주지 않겠다! 아직 나는 상속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았어, 가윈! 네가 그 비루먹은 베타와 붙어먹는 꼴을 볼 바엔 길거리 거지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고 말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니, 그럴 리는 없지만…….’
가윈은 서재 안에 틀어박혔다. 그는 여전히 앤슬리를 열렬히 사랑했으나, 미래에 움켜쥐게 될 부와 명예 또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렉의 말을 곱씹을수록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사랑에 눈이 먼 어린 알파 가윈과 냉정한 사업가 가윈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둘은 팽팽히 대립했다.
가윈의 머릿속, 사랑에 눈먼 로맨티시스트가 말했다.
‘중요한 것은 앤슬리지, 부와 명예가 아니야. 너는 앤슬리에게 온 마음을 바치기로 약속했어. 지금도 그 맹세는 여전하잖아? 그렉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사랑을 선택해!’
그러자 그렉이 키워 낸 탐욕스러운 사업가 가윈이 반박했다.
‘그래서 야반도주라도 할 셈이야? 사랑이 다가 아니야. 그만한 금전이 있어야 행복이 성립해. 너 또한 일하며 돈을 불리는 데 재미를 붙여 가고 있었잖아? 어째서 네게 주어진 축복을 걷어차는 거야?’
‘앤슬리를 버리기라도 하라고?’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라면 유산은 더더욱 포기해서는 안 돼. 앤슬리는 값비싼 보약과 극진한 보살핌 없이는 하루도 못 가 쓰러지고 말걸. 그리고 돈이 없으면 앤슬리를 어떻게 돌볼 건데? 그리고 너 또한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버릴 수 있어? 아니, 아무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몰려오는 현실의 파도 앞에선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 거야. 솔직히 알고 있잖아. 이제는 사랑만 볼 수 없어. 현실 또한 직시해야 해. 백부의 말대로 너는 이제 성인이야. 어른스럽게 판단해야 한다고.’
고민의 나날이었다. 가윈의 머릿속에서는 매일같이 어리석은 사랑꾼 알파와 속물적인 사업가가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어찌나 고민이 많은지 밤잠조차 못 이뤄 낯빛이 시커멓게 죽었다. 앤슬리마저 가윈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였다.
그때마다 가윈은 연인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도움을 청하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약한 마음을 다잡고 부드럽게 웃음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 괜찮아. 요즘 일이 많아서 그래. 너도 알잖아? 연말에는 일이 많아지는 걸. 요즘 이런저런 숫자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더니 그런가 봐.
***
보름 만에 그렉에게서 기별이 왔다.
[가윈, 이제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가윈은 백부의 연락을 받고 전날 밤을 꼬박 새워 고민했으나, 여전히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가윈, 안색이 많이 상했구나.
몇 주 만에 보는 백부는 무척 안타까운 표정으로 조카를 포옹했다. 일그러진 얼굴로 가윈을 내쫓던 마지막 만남은 없던 일인 양, 다시 인자한 큰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카의 양어깨를 부여잡았다.
-너도 고민이 많았겠지만 나 또한 많은 생각을 했단다. 네게 말이 너무 심했어……. 네 얼굴이 이리도 상한 모습을 보니 영, 속이 좋지 않아.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신다면 제 사랑과 미래 모두를 축복해 주실 수 없으신지요?
가윈은 백부의 측은지심에 기대 보고자 희망에 찬 눈길로 그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렉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다. 네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럴 수 없다.
-그렉 백부, 이건 제게 너무 어려운 선택입니다…….
가윈은 힘없이 뒤로 물러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행복을 위해서는 사랑도, 명예도 모두 필요했다.
-가윈, 나도 네가 이리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기쁘지만은 않구나. 너는 내가 가장 아끼는 조카다. 어쩌면 내 친아들보다 더 아낄 수도 있겠지. 그만큼 나는 네가 흠결 하나 없는 완벽한 인생을 살았으면 한다. 그러니 그 베타와의 관계를 용납할 수가 없어.
-그러나 저는 앤슬리가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네 꼴을 보니 알겠구나. 고작 사랑 따위에 마음을 빼앗겨 이런 모습을…….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그렉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물러난다는 듯, 은근한 목소리로 가윈을 꾀었다.
-가윈. 그 베타와의 교제를 허락해 주겠다.
-결혼이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백부.
-결혼은, 조건이 있어.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 피가 섞인 알파를 낳아 주기만 한다면, 네게 약속한 것들을 모두 물려주겠다. 그리고 네 연인과의 결혼을 기쁜 마음으로 축복해 주마.
베타 남성인 앤슬리가 아이를 낳는다니, 어불성설이었다.
-백부님의 말씀이 앤슬리와 재산,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입니까? 제 귀에는 별다를 바 없이 들립니다. 앤슬리는 베타이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가져야만 우리 둘의 관계를 인정해 주신다니, 돌덩이를 심어 열매를 맺으란 말도 이보다 덜 황당할 지경입니다. 결국 앤슬리를 영원히 인정해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 아닙니까?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야.
그렉은 손을 내저으며 가윈으로서는 솔깃할 수밖에 없는 제안들을 내세웠다.
-첫 혼인은 오메가와 하라는 뜻이다. 누구든 오메가 배우자를 맞이해 그 사이에서 아이를 본다면 이혼을 허락해 주마. 적어도 네 자식이 사생아는 되지 않아야 하지 않겠느냐. 식은 비밀리에 치러 주마. 상대는 누구라도 좋다. ……아니, 그래도 작위는 가지고 있는 편이 좋겠구나. 그래야 쓸 만한 피가 나올 테니…….
-…….
과거 1 (2)
-결혼, 결혼, 그놈의 결혼!
비단 그렉의 재촉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담에 대한 압박이 커졌다. 상류층 인사의 결혼 적령기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막 22세가 된 가윈에게는 그야말로 중매가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물밀듯 몰려들었다.
잘생긴 용모에 건강한 신체, 훌륭한 가문, 충분한 재산. 후계권에서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 흠이었지만, 도리어 그 덕에 더욱 안정적인 면이 있었다. 가주의 직계 자식들은 치열하게 후계권을 두고 다투고 있으니 어느 한쪽에 배팅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주가 뒷배를 보아주는 가윈은?
벌써 미래가 창창했다. 가윈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적령기 오메가를 자식으로 가진 부모들은 눈에 불을 켜고 그의 저택으로 중매서와 초상화를 보냈다. 집사가 말하길, ‘이때 날아왔던 서신들만 해도 엄청나서 나무 장작을 살 필요가 없었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앤슬리는 여전히 병약했다. 외출이라고는 가윈의 저택에 방문하는 것뿐이었으므로 바깥소식에는 귀가 어두웠다. 가윈으로서는 다행이었다. 불티나게 날아오는 청혼서를 재빠르게 태워 버리는 것만으로도 앤슬리에게 사실을 숨길 수 있었으므로.
가윈에게 혼담이 쇄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앤슬리는 슬픔과 죄책감에 숨이 막혀 기절해 버릴지도 몰랐다.
가윈이 앤슬리 모르게 중매서를 처리하고, 주변의 맞선 권유를 거절하는 것에 진저리가 날 때쯤 그렉이 다시 한번 혼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가윈,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하지 않을 테냐?
-전 앤슬리와 혼인할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한다는 쪽에 더 가깝겠지요.
가윈이 퉁명스레 답했다. 결혼의 ‘결’ 자만 들어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심지어 연인인 앤슬리에게는 아무것도 밝힐 수 없으니, 갑갑증만 더해 갔다.
-베타는 아무 소용이 없어, 가윈. 아이가 있어야 해. 네 재산을 물려줄, 피 섞인 알파가 필요하지. 자고로 명망 있는 가문의 어엿한 알파라면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 후사가 없다면 가정을 꾸리는 의미가 없고, 남들 보기에도 좋지 않아.
-아이는 방계에서 입양하면 됩니다. 불임 부부는 그래 오지 않았습니까? 패트릭 숙부도 그랬고요.
-그것과는 다르지 않으냐. 그 집안은 상대가 좋았다. 더군다나 베타는…… 심지어 남자 베타는 아예 타고나길 배태할 수 없는 몸이잖나.
-저는 이 주제로 더는 백부와 입씨름하기 싫습니다. 이미 우리 관계를 인정해 주셨던 것이 몇 년 전 일입니다. 계속 번복하는 이유가 무엇이신지요!
가윈은 책상을 내리쳤다.
-네가 그사이 철이 들 것으로 생각했다, 가윈.
-저는 충분히 철이 들었습니다!
-아니, 너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 알파가 되었다면 한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자식을 낳지 않으면 네게 내 재산 한 푼, 명성 단 한 줌도 물려주지 않겠다! 아직 나는 상속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았어, 가윈! 네가 그 비루먹은 베타와 붙어먹는 꼴을 볼 바엔 길거리 거지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고 말지!
-백부님!
백부의 강경한 태도에 가윈은 기함했다.
그렉에게 미리 상속받은 지분의 사업은 순항을 이루고 있었으나 규모가 작았다. 더군다나 그렉이 가진 사업체의 하위 산업에 속했으므로 백부의 조력 없이는 번창하기는커녕 말아먹기에 십상이었다. 그렉은 가윈을 길거리에 내앉히겠다는 노골적인 위협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렉 백부……!
-가윈, 한 사람분의 일은 곧잘 해내는 것을 보아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영 아닌 모양이구나. 이만 나가 보아라. 그리고 조금 더 시일이 지나 머리가 식었을 때쯤 다시 보자꾸나. 내 따로 기별을 줄 테니 그때까지 무엇이 옳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가윈은 집무실에서 내쫓기듯 끌려 나왔다.
이후로 가윈은 한동안 그렉을 만날 수 없었다. 세를 확장하고 있던 가윈의 사업은 그렉의 압박에 연일 최악에 최악을 갱신했다.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렉은 연말 일정으로 바쁘다는 이유를 들어 가윈의 방문을 거절했다.
가윈은 매몰찬 백부의 태도에 배신감을 느꼈다. 매사 그를 아끼며 지지해 주던 그렉이었기에 분노는 더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나날이 엉망이 되어 가는 장부를 확인할 때마다 백부에 대한 분노, 혹은 배신감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분노가 사그라든 자리에는 불안이 차올랐다. 그렉의 말마따나 흥분이 가라앉고 머리가 차가워질수록 백부의 노호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네게 내 재산 한 푼, 명성 단 한 줌도 물려주지 않겠다! 아직 나는 상속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았어, 가윈! 네가 그 비루먹은 베타와 붙어먹는 꼴을 볼 바엔 길거리 거지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고 말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니, 그럴 리는 없지만…….’
가윈은 서재 안에 틀어박혔다. 그는 여전히 앤슬리를 열렬히 사랑했으나, 미래에 움켜쥐게 될 부와 명예 또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렉의 말을 곱씹을수록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사랑에 눈이 먼 어린 알파 가윈과 냉정한 사업가 가윈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둘은 팽팽히 대립했다.
가윈의 머릿속, 사랑에 눈먼 로맨티시스트가 말했다.
‘중요한 것은 앤슬리지, 부와 명예가 아니야. 너는 앤슬리에게 온 마음을 바치기로 약속했어. 지금도 그 맹세는 여전하잖아? 그렉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사랑을 선택해!’
그러자 그렉이 키워 낸 탐욕스러운 사업가 가윈이 반박했다.
‘그래서 야반도주라도 할 셈이야? 사랑이 다가 아니야. 그만한 금전이 있어야 행복이 성립해. 너 또한 일하며 돈을 불리는 데 재미를 붙여 가고 있었잖아? 어째서 네게 주어진 축복을 걷어차는 거야?’
‘앤슬리를 버리기라도 하라고?’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라면 유산은 더더욱 포기해서는 안 돼. 앤슬리는 값비싼 보약과 극진한 보살핌 없이는 하루도 못 가 쓰러지고 말걸. 그리고 돈이 없으면 앤슬리를 어떻게 돌볼 건데? 그리고 너 또한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버릴 수 있어? 아니, 아무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몰려오는 현실의 파도 앞에선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 거야. 솔직히 알고 있잖아. 이제는 사랑만 볼 수 없어. 현실 또한 직시해야 해. 백부의 말대로 너는 이제 성인이야. 어른스럽게 판단해야 한다고.’
고민의 나날이었다. 가윈의 머릿속에서는 매일같이 어리석은 사랑꾼 알파와 속물적인 사업가가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어찌나 고민이 많은지 밤잠조차 못 이뤄 낯빛이 시커멓게 죽었다. 앤슬리마저 가윈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였다.
그때마다 가윈은 연인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도움을 청하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약한 마음을 다잡고 부드럽게 웃음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 괜찮아. 요즘 일이 많아서 그래. 너도 알잖아? 연말에는 일이 많아지는 걸. 요즘 이런저런 숫자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더니 그런가 봐.
보름 만에 그렉에게서 기별이 왔다.
[가윈, 이제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가윈은 백부의 연락을 받고 전날 밤을 꼬박 새워 고민했으나, 여전히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가윈, 안색이 많이 상했구나.
몇 주 만에 보는 백부는 무척 안타까운 표정으로 조카를 포옹했다. 일그러진 얼굴로 가윈을 내쫓던 마지막 만남은 없던 일인 양, 다시 인자한 큰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카의 양어깨를 부여잡았다.
-너도 고민이 많았겠지만 나 또한 많은 생각을 했단다. 네게 말이 너무 심했어……. 네 얼굴이 이리도 상한 모습을 보니 영, 속이 좋지 않아.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신다면 제 사랑과 미래 모두를 축복해 주실 수 없으신지요?
가윈은 백부의 측은지심에 기대 보고자 희망에 찬 눈길로 그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렉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다. 네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럴 수 없다.
-그렉 백부, 이건 제게 너무 어려운 선택입니다…….
가윈은 힘없이 뒤로 물러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행복을 위해서는 사랑도, 명예도 모두 필요했다.
-가윈, 나도 네가 이리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기쁘지만은 않구나. 너는 내가 가장 아끼는 조카다. 어쩌면 내 친아들보다 더 아낄 수도 있겠지. 그만큼 나는 네가 흠결 하나 없는 완벽한 인생을 살았으면 한다. 그러니 그 베타와의 관계를 용납할 수가 없어.
-그러나 저는 앤슬리가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네 꼴을 보니 알겠구나. 고작 사랑 따위에 마음을 빼앗겨 이런 모습을…….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그렉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물러난다는 듯, 은근한 목소리로 가윈을 꾀었다.
-가윈. 그 베타와의 교제를 허락해 주겠다.
-결혼이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백부.
-결혼은, 조건이 있어.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 피가 섞인 알파를 낳아 주기만 한다면, 네게 약속한 것들을 모두 물려주겠다. 그리고 네 연인과의 결혼을 기쁜 마음으로 축복해 주마.
베타 남성인 앤슬리가 아이를 낳는다니, 어불성설이었다.
-백부님의 말씀이 앤슬리와 재산,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입니까? 제 귀에는 별다를 바 없이 들립니다. 앤슬리는 베타이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가져야만 우리 둘의 관계를 인정해 주신다니, 돌덩이를 심어 열매를 맺으란 말도 이보다 덜 황당할 지경입니다. 결국 앤슬리를 영원히 인정해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 아닙니까?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야.
그렉은 손을 내저으며 가윈으로서는 솔깃할 수밖에 없는 제안들을 내세웠다.
-첫 혼인은 오메가와 하라는 뜻이다. 누구든 오메가 배우자를 맞이해 그 사이에서 아이를 본다면 이혼을 허락해 주마. 적어도 네 자식이 사생아는 되지 않아야 하지 않겠느냐. 식은 비밀리에 치러 주마. 상대는 누구라도 좋다. ……아니, 그래도 작위는 가지고 있는 편이 좋겠구나. 그래야 쓸 만한 피가 나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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