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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2화
과거 1 (1)
사일러스와 가윈, 처음부터 이들의 관계가 최악이었던 건 아니다. 어리석은 가윈의 미움과 원망, 사일러스의 길 잃은 자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먼 과거의 인연이 있다.
그의 이름은 앤슬리 아너스.
가윈의 소꿉친구이자 지금은 죽어 땅에 묻힌 그의 옛 연인이다.
***
앤슬리와 가윈은 어릴 적부터 교류가 있는 사이였다.
사실 할아버지 대의 인연이 없었더라면, 둘의 인연이 닿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가윈은 방계 혈족이라도 상류 가문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집안 출신이었고, 앤슬리는 귀족이라고 한들 평범하디평범한 집안의 차남에 불과하였으므로. 더욱이 앤슬리는 태생이 병약하여 집 밖은커녕 침대 밖으로 나오는 일조차 거의 없었다. 밖에서 목마를 타며 나무막대를 휘두르는 것을 즐겼던 가윈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앤슬리 집안의 저택에 방문했던 날, 가윈은 병약한 차남을 소개받았다. 둘이 동갑이라는 시답잖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둘의 성정은 판이하였으므로, 이들이 잘 어울릴 수 있으리란 예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앤슬리와 가윈을 소개해 준 어른들조차 두 꼬마가 사이좋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의외로 둘은 잘 맞았다. 어린 앤슬리와 가윈은 금세 친해져 작별 인사를 할 때쯤 되어서는 꼭 다음에 다시 만나자며 손가락을 걸었다.
서로의 어떤 면에서 매력을 느꼈을지는 모를 일이나, 둘은 제법 좋은 소꿉친구가 되었다. 사고뭉치에 장난꾸러기 공자였던 가윈은 허약한 앤슬리를 통해 배려를 배웠고, 갓난아기 시절부터 부모님과 시중인, 의사 외에는 사람을 많이 만난 적 없어 낯가림이 심하던 앤슬리는 가윈과 교류하며 사교성을 길렀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우정이 풋정으로 변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어른들이 그들의 우정을 예상하지 못했듯, 둘이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질 것이라는 사실 또한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상류 계급의 통념상 둘이 특별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앤슬리는 베타였다.
우아한 페로몬을 향수처럼 감싸고 다니는 것을 기본 소양으로 여기는 고상한 특권 계층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인종이었다. 흔히 말하길, 귀족의 푸른 피란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을 의미했다. 강렬하고 매력적인 페로몬을 가진 알파, 오메가는 예로부터 숭배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타는 좋은 혼인 상대가 아니었다. 애당초 혼인 시장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급 낮은’ 부류였다. 상대를 홀리는 매력적인 향도 나지 않았을뿐더러, 베타와의 결합에서는 알파나 오메가를 낳을 확률이 확연히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물론 알파와 오메가 부모 사이에서도 돌연변이처럼 느닷없이 베타 자식이 태어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앤슬리가 그랬다. 부모, 형제, 조부모, 사촌이 죄 알파와 오메가였는데, 유독 앤슬리만 다리 밑에서 주워 온 듯 형질이 다른 베타였다. 의사는 앤슬리의 몸이 약한 탓에 태내에서 페로몬 샘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베타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했다.
사실 앤슬리 같은 존재는 어느 집안에든 간혹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이들은 반편이 취급을 받긴 했으나 귀족은 귀족이었다. 이런 ‘잘못 태어난 베타’들은 보통 후사를 볼 필요가 없는 재취 자리에나 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베타 앤슬리와 전도유망한 알파 가윈의 교제란 결코 축복받을 수 없었다. 앤슬리는 베타, 심지어 남성 베타였다. 아이를 품을 태 자체가 없는 몸이다. 보수적인 가풍을 가진 가윈의 집안에서 절대 허락할 리 없는 관계였다.
차차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앤슬리는 가윈과 미래를 함께하기 어려울 것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아무리 바깥 물정을 모른다 해도 눈과 귀가 있는 이상, 베타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가윈은 굳건했다. 어린 알파는 연인이 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수백 번, 수천 번씩 절절한 사랑을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함께할 것이고 자신은 절대 신의를 저버리지 않겠다며 맹세했다. 앤슬리는 가윈의 고백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종내엔 저 또한 가윈을 누구보다 믿고 따르겠다며 이 뜨거운 사랑에 화답했다.
둘은 조심스레 사랑을 키워 나갔다.
첫 번째 시련이 찾아온 때는 가윈과 앤슬리가 열일곱이 되던 해였다. 예정된 시련이었다. 가윈의 백부이자 가문의 수장인 그렉이 둘의 관계를 눈치챈 것이다. 그는 가윈을 불러 앤슬리와 결별할 것을 명했다.
그렉은 조카인 가윈을 친아들만큼이나 아꼈다. 후계자 경합을 위해 자식들을 엄하게 키워서인지 친자식에게나 줄 애정을 조카에게 쏟아부었던 터다. 그는 개인 사업 일부를 뚝 떼어 물려주고 싶어 할 정도로 가윈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조카가 비실거리는 데다 후사조차 낳을 수 없는 베타와 미래를 약속하다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렉은 강경한 태도로 교제를 반대했고, 가윈은 온 힘을 다해 백부에게 반항했다. 사랑에 눈이 먼 어린 알파는 자신은 앤슬리가 아니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며 가주 집무실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욱하는 성질이 있긴 했으나 집안 어른들 앞에서는 고분고분했던 가윈이다. 그렉은 조카의 반항 어린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렉이 보기에 가윈은 어디 내놓아도 남부럽지 않을 옹골찬 알파였다. 그런데 고작 비루먹은 베타와 붙어먹는 꼴이라니!
-좋은 혼처를 잡아 결혼시키고, 남부럽지 않은 사업가로 키울 생각을 했건만!
그렉은 크게 노해 가윈을 방에 가뒀다. 창문에는 못질을 하고 문 앞에는 경비를 세웠다. 그리고 시간마다 조카를 찾아가 윽박지르기도 하고 살살 달래며 회유하기도 했다.
가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백부의 말에 따박따박 말대답했다. 마지막엔 물과 음식까지 거부하며 단식 투쟁까지 벌일 정도였다.
-……내가 졌다, 가윈.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조카 이기는 백부 없었다. 그렉은 침통하게 패배를 선언했다. 말라 가는 조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앤슬리! 우리 교제를 허락받았어!
가윈은 뛸 듯이 기뻐하며 앤슬리에게 달려가 그들 사랑의 승전보를 알렸다.
그러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렉은 그의 연애를 묵인해 주었을 뿐, 혼인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렉은 가문 안팎에서 수십 년을 구른 노련한 정치가이자 사업가였다. 그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가윈의 손에 쥔 것들이 많아지기를, 그리고 누리고 있는 특권을 도저히 버릴 수 없을 만큼 충분히 속물다워지기를 기다렸다.
풋내기 알파인 가윈이 백부의 시커먼 속내를 알 리 없었다. 그는 그렉이 준 유예 기간 동안 앤슬리와 꿀 같은 연애를 즐겼다.
성인식을 치르고 차차 나이가 들어 가며 가윈은 더욱더 많은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부모에게서 독립해 저택을 소유하게 되었고, 백부인 그렉에게서 작은 사업 하나를 물려받았다. 작은 일부터 시작해 조금씩 감각을 키워 가라는 뜻에서였다.
그렉은 가윈이 이대로 일을 잘 이끌어 간다면 몇 년 안에 주요한 사업 하나를 더 넘겨주고, 은퇴 후에는 자신이 이끄는 사업 전반을 모두 가윈에게 물려주기로 약속했다.
백부가 이리 바람을 넣어 놓았으니, 자연스레 가윈은 백부의 사업을 제 것처럼 생각했다. 먼 훗날 성공한 사업가가 된 본인의 모습을 그리며 열성적으로 일을 배웠다. 물론 그의 청사진 안에는 여전히 밝게 웃고 있는 그의 연인, 앤슬리가 있었다.
잠자코 숨죽이고 있던 그렉이 다시 한번 마수를 뻗친 것은 이즈음이었다.
어느 날, 그렉은 자기 옆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조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자고로 가정이 있어야 제대로 된 알파가 되는 법이지. 알파가 집안을 다스리는 법을 보면 그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단다.
가윈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렇습니까?
-너도 일가를 이루어야 할 나이가 되지 않았느냐.
-뭐, 저도 곧 결혼해야 할 나이긴 하죠.
-난 네가 늦지 않게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
-저는 당장 이번 달에라도 결혼할 수 있습니다, 백부. 미래를 약속한 상대가 있으니까요.
그렉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그러나 네가 말하는 그이와는 안 되지. 베타는 안 돼.
백부의 날카로운 대답에 그제야 가윈은 서류를 보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부님, 저는 앤슬리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앤슬리여야만 행복할 수 있어요.
-자고로 상류층 알파는 좋은 오메가를 만나 멀쩡한 자식을 보아야만 신용을 받고 권위를 표할 수 있다. 가윈, 너도 이제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 주변에서 너와 그 베타 사이를 반대하니 오기가 생겨 반항하는 것은―
-더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렉의 호통에 가윈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의자가 거칠게 뒤로 밀려 쓰러졌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백부. 남은 서류는 제 집에서 마저 처리한 후 내일 아침까지 하인을 통해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보고 있던 장부를 낚아챈 후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전처럼 물불 못 가리고 길길이 날뛰지는 않았다. 요 몇 년간 백부에게 일을 배우며 부쩍 눈치가 늘어난 덕이었다.
……혹은 이전보다 속물적으로 변했거나.
‘무작정 날뛰기엔 이젠 내가 물려줄 것들이 아쉽거든. 암, 가윈. 사랑에 완전히 눈이 멀어 행동할 때는 지났고말고. 훌륭한 알파라면 현실도 직시해야 하는 법이다.’
그렉은 희끗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사랑 따위에 연연하는 가윈이 한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전보다 나아진 태도에 흡족한 마음 또한 들었다.
과거 1 (1)
사일러스와 가윈, 처음부터 이들의 관계가 최악이었던 건 아니다. 어리석은 가윈의 미움과 원망, 사일러스의 길 잃은 자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먼 과거의 인연이 있다.
그의 이름은 앤슬리 아너스.
가윈의 소꿉친구이자 지금은 죽어 땅에 묻힌 그의 옛 연인이다.
앤슬리와 가윈은 어릴 적부터 교류가 있는 사이였다.
사실 할아버지 대의 인연이 없었더라면, 둘의 인연이 닿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가윈은 방계 혈족이라도 상류 가문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집안 출신이었고, 앤슬리는 귀족이라고 한들 평범하디평범한 집안의 차남에 불과하였으므로. 더욱이 앤슬리는 태생이 병약하여 집 밖은커녕 침대 밖으로 나오는 일조차 거의 없었다. 밖에서 목마를 타며 나무막대를 휘두르는 것을 즐겼던 가윈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앤슬리 집안의 저택에 방문했던 날, 가윈은 병약한 차남을 소개받았다. 둘이 동갑이라는 시답잖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둘의 성정은 판이하였으므로, 이들이 잘 어울릴 수 있으리란 예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앤슬리와 가윈을 소개해 준 어른들조차 두 꼬마가 사이좋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의외로 둘은 잘 맞았다. 어린 앤슬리와 가윈은 금세 친해져 작별 인사를 할 때쯤 되어서는 꼭 다음에 다시 만나자며 손가락을 걸었다.
서로의 어떤 면에서 매력을 느꼈을지는 모를 일이나, 둘은 제법 좋은 소꿉친구가 되었다. 사고뭉치에 장난꾸러기 공자였던 가윈은 허약한 앤슬리를 통해 배려를 배웠고, 갓난아기 시절부터 부모님과 시중인, 의사 외에는 사람을 많이 만난 적 없어 낯가림이 심하던 앤슬리는 가윈과 교류하며 사교성을 길렀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우정이 풋정으로 변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어른들이 그들의 우정을 예상하지 못했듯, 둘이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질 것이라는 사실 또한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상류 계급의 통념상 둘이 특별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앤슬리는 베타였다.
우아한 페로몬을 향수처럼 감싸고 다니는 것을 기본 소양으로 여기는 고상한 특권 계층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인종이었다. 흔히 말하길, 귀족의 푸른 피란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을 의미했다. 강렬하고 매력적인 페로몬을 가진 알파, 오메가는 예로부터 숭배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타는 좋은 혼인 상대가 아니었다. 애당초 혼인 시장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급 낮은’ 부류였다. 상대를 홀리는 매력적인 향도 나지 않았을뿐더러, 베타와의 결합에서는 알파나 오메가를 낳을 확률이 확연히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물론 알파와 오메가 부모 사이에서도 돌연변이처럼 느닷없이 베타 자식이 태어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앤슬리가 그랬다. 부모, 형제, 조부모, 사촌이 죄 알파와 오메가였는데, 유독 앤슬리만 다리 밑에서 주워 온 듯 형질이 다른 베타였다. 의사는 앤슬리의 몸이 약한 탓에 태내에서 페로몬 샘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베타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했다.
사실 앤슬리 같은 존재는 어느 집안에든 간혹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이들은 반편이 취급을 받긴 했으나 귀족은 귀족이었다. 이런 ‘잘못 태어난 베타’들은 보통 후사를 볼 필요가 없는 재취 자리에나 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베타 앤슬리와 전도유망한 알파 가윈의 교제란 결코 축복받을 수 없었다. 앤슬리는 베타, 심지어 남성 베타였다. 아이를 품을 태 자체가 없는 몸이다. 보수적인 가풍을 가진 가윈의 집안에서 절대 허락할 리 없는 관계였다.
차차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앤슬리는 가윈과 미래를 함께하기 어려울 것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아무리 바깥 물정을 모른다 해도 눈과 귀가 있는 이상, 베타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가윈은 굳건했다. 어린 알파는 연인이 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수백 번, 수천 번씩 절절한 사랑을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함께할 것이고 자신은 절대 신의를 저버리지 않겠다며 맹세했다. 앤슬리는 가윈의 고백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종내엔 저 또한 가윈을 누구보다 믿고 따르겠다며 이 뜨거운 사랑에 화답했다.
둘은 조심스레 사랑을 키워 나갔다.
첫 번째 시련이 찾아온 때는 가윈과 앤슬리가 열일곱이 되던 해였다. 예정된 시련이었다. 가윈의 백부이자 가문의 수장인 그렉이 둘의 관계를 눈치챈 것이다. 그는 가윈을 불러 앤슬리와 결별할 것을 명했다.
그렉은 조카인 가윈을 친아들만큼이나 아꼈다. 후계자 경합을 위해 자식들을 엄하게 키워서인지 친자식에게나 줄 애정을 조카에게 쏟아부었던 터다. 그는 개인 사업 일부를 뚝 떼어 물려주고 싶어 할 정도로 가윈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조카가 비실거리는 데다 후사조차 낳을 수 없는 베타와 미래를 약속하다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렉은 강경한 태도로 교제를 반대했고, 가윈은 온 힘을 다해 백부에게 반항했다. 사랑에 눈이 먼 어린 알파는 자신은 앤슬리가 아니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며 가주 집무실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욱하는 성질이 있긴 했으나 집안 어른들 앞에서는 고분고분했던 가윈이다. 그렉은 조카의 반항 어린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렉이 보기에 가윈은 어디 내놓아도 남부럽지 않을 옹골찬 알파였다. 그런데 고작 비루먹은 베타와 붙어먹는 꼴이라니!
-좋은 혼처를 잡아 결혼시키고, 남부럽지 않은 사업가로 키울 생각을 했건만!
그렉은 크게 노해 가윈을 방에 가뒀다. 창문에는 못질을 하고 문 앞에는 경비를 세웠다. 그리고 시간마다 조카를 찾아가 윽박지르기도 하고 살살 달래며 회유하기도 했다.
가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백부의 말에 따박따박 말대답했다. 마지막엔 물과 음식까지 거부하며 단식 투쟁까지 벌일 정도였다.
-……내가 졌다, 가윈.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조카 이기는 백부 없었다. 그렉은 침통하게 패배를 선언했다. 말라 가는 조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앤슬리! 우리 교제를 허락받았어!
가윈은 뛸 듯이 기뻐하며 앤슬리에게 달려가 그들 사랑의 승전보를 알렸다.
그러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렉은 그의 연애를 묵인해 주었을 뿐, 혼인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렉은 가문 안팎에서 수십 년을 구른 노련한 정치가이자 사업가였다. 그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가윈의 손에 쥔 것들이 많아지기를, 그리고 누리고 있는 특권을 도저히 버릴 수 없을 만큼 충분히 속물다워지기를 기다렸다.
풋내기 알파인 가윈이 백부의 시커먼 속내를 알 리 없었다. 그는 그렉이 준 유예 기간 동안 앤슬리와 꿀 같은 연애를 즐겼다.
성인식을 치르고 차차 나이가 들어 가며 가윈은 더욱더 많은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부모에게서 독립해 저택을 소유하게 되었고, 백부인 그렉에게서 작은 사업 하나를 물려받았다. 작은 일부터 시작해 조금씩 감각을 키워 가라는 뜻에서였다.
그렉은 가윈이 이대로 일을 잘 이끌어 간다면 몇 년 안에 주요한 사업 하나를 더 넘겨주고, 은퇴 후에는 자신이 이끄는 사업 전반을 모두 가윈에게 물려주기로 약속했다.
백부가 이리 바람을 넣어 놓았으니, 자연스레 가윈은 백부의 사업을 제 것처럼 생각했다. 먼 훗날 성공한 사업가가 된 본인의 모습을 그리며 열성적으로 일을 배웠다. 물론 그의 청사진 안에는 여전히 밝게 웃고 있는 그의 연인, 앤슬리가 있었다.
잠자코 숨죽이고 있던 그렉이 다시 한번 마수를 뻗친 것은 이즈음이었다.
어느 날, 그렉은 자기 옆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조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자고로 가정이 있어야 제대로 된 알파가 되는 법이지. 알파가 집안을 다스리는 법을 보면 그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단다.
가윈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렇습니까?
-너도 일가를 이루어야 할 나이가 되지 않았느냐.
-뭐, 저도 곧 결혼해야 할 나이긴 하죠.
-난 네가 늦지 않게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
-저는 당장 이번 달에라도 결혼할 수 있습니다, 백부. 미래를 약속한 상대가 있으니까요.
그렉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그러나 네가 말하는 그이와는 안 되지. 베타는 안 돼.
백부의 날카로운 대답에 그제야 가윈은 서류를 보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부님, 저는 앤슬리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앤슬리여야만 행복할 수 있어요.
-자고로 상류층 알파는 좋은 오메가를 만나 멀쩡한 자식을 보아야만 신용을 받고 권위를 표할 수 있다. 가윈, 너도 이제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 주변에서 너와 그 베타 사이를 반대하니 오기가 생겨 반항하는 것은―
-더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렉의 호통에 가윈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의자가 거칠게 뒤로 밀려 쓰러졌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백부. 남은 서류는 제 집에서 마저 처리한 후 내일 아침까지 하인을 통해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보고 있던 장부를 낚아챈 후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전처럼 물불 못 가리고 길길이 날뛰지는 않았다. 요 몇 년간 백부에게 일을 배우며 부쩍 눈치가 늘어난 덕이었다.
……혹은 이전보다 속물적으로 변했거나.
‘무작정 날뛰기엔 이젠 내가 물려줄 것들이 아쉽거든. 암, 가윈. 사랑에 완전히 눈이 멀어 행동할 때는 지났고말고. 훌륭한 알파라면 현실도 직시해야 하는 법이다.’
그렉은 희끗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사랑 따위에 연연하는 가윈이 한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전보다 나아진 태도에 흡족한 마음 또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