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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의 고양이 1권
1화
챕터 1) 이세계의 고양이


나는 기분 좋게 가르릉거렸다. 따뜻한 손길이 나의 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맑고 고운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손은 다시 내 배를 쓸어 간질였다.
나는 고양이였다. 공주님의 고양이.
원래부터 내가 고양이였던 것은 아니다. 나는 사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26세의 백수 처녀가 이세계로 날아오게 된 것은 순전히 기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보랏빛으로 변한 밥솥 안의 밥을 두고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다. 알바 비를 받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책을 왕창 지른 게 문제였다.
빈속에 위가 쓰라렸다. 결국은 본능이 이겼고, 당연하게도 배탈이 났다.
고시원에 딱 한 장밖에 없는 이불 속에 기어 들어가 끙끙 앓으면서도 책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니, 놓을 수가 없었다! 최애 작가님의 신작이었다. 어찌 아니 읽을쏘냐. 옛말에 학문에 정진하면 학질도 떨어진다고 했다.
한참 책을 읽다 잠이 들었는데 농담처럼 작가님이 꿈에 나왔다. 얼굴도 모르는 작가님이었지만 그냥 작가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은 마녀같이 차려입고 있었는데, 챙 넓은 마녀 모자에 가려져 눈도 코도 보이지 않았다. 드러난 완만한 턱선이 어쩐지 덕이 많아 보였다. 비슷한 라인이 뭐가 있냐면…… 맞다, 할머니 따라가서 본 불당 안의 부처님 턱선이 딱 저랬다. 부처님과 작가님이라, 묘하게 어울리는 조합이다.
“독자님, 책 사 줘서 고마워요. 답례로 내 책 안으로 보내 줄게요. 빙의물이나 환생물 아시죠? 그렇게 주인공이 되시는 거예요. 원하시는 캐릭터가 있으면 말해 주세요.”
작가님이 말씀하시는데 이상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왜 내 쪽을 보고 말씀을 안 하시지? 그러고 보니 작가님은 눈도 안 마주치고 아련히 먼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몸을 꼬는 것 같기도 하다. 서, 설마 작가님, 대인기피증 같은 게 있으신가?
조금 안쓰러웠지만 왠지 아는 척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도 작가님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손에 든 책을 보았다. <황제와 대공>. 작가님의 따끈따끈한 신작이었다.
이 책의 세계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심지어 캐릭터를 골라잡을 수 있다니! 갑자기 앞구르기 세 번에 텀블링을 뛰고 싶어졌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다는 건 아니고, 마음이 그랬다고.
“저, 작가님! 그러면 제가 하고 싶은 거 뭐든지 다 되는 거예요?”
“네,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황제도 되고 대공도 되고 드래곤도 돼요. 남자의 몸에 빙의되는 게 좀 부담스러우시면 조연인 공주가 되어서 남주들을 함락하는 루트를 타셔도 돼요. 그냥 그 세계 안에서 독자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시는 거예요.”
“잠깐만요. 생각 좀 해도 되죠?”
나는 책의 내용을 상기했다.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종이책은 아직 다 못 읽었지만 인터넷으로는 완결까지 3번 넘게 정주행 한 나였다. 결정했어, 너로 정했다!
“그럼 고양이요! 그 조연 공주가 고양이 한 마리 키웠죠?”
세상에서 제일가는 상팔자가 뭐냐고 묻는다면, 그건 동물이다. 그냥 동물이 아니라 상위 0.0001%가 키우는 동물이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개 전용 호텔에 미용은 물론이고 개한테 우울증이 올까 봐 개 전담 우울증 치료사도 있는 세상이 아닌가.
성현들께서도 일찌감치 명언을 만드셨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고.
“고양이요? 저기, 사람도 많잖아요. 훨씬 강하고 아름다운 등장인물도 많은데 정말 고양이로 괜찮겠어요?”
작가님이 오히려 놀라서 내게 물었다.
“네, 괜찮아요. 완전 괜찮아요. 저는 막 주인공 돼서 책임감 막중하고 해야 할 일 많고, 그런 거 싫어해요. 전 조용히 왕성에서 주는 밥 받아먹고 등 따시게 살고 싶어요.”
“음…… 그럼 그렇게 해요. 특이하시네요. 다른 사람들은 이것저것 뭐 물어보던데, 궁금한 것 없어요? 빙의됐다가 언제 돌아올지, 기억은 남아 있을지, 뭐 그런 거요.”
“안 궁금해요. 그냥 가서 푹 쉬다 오고 싶어요. 때 되면 오겠죠. 아주 못 와도 상관없구요. 저기, 괜찮으면 지금 바로 가도 돼요?”
“정말 괜찮겠어요? 이렇게 급하게 가려는 사람은 없었는데…….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대답해도 돼요.”
어째 작가님께서는 나를 만류하고 내가 조급해하는 분위기였다. 난 원래 이렇게 막 행동력 있는 성격이 아닌데, 그때는 어떻게든 빨리 가고 싶었다.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이지 않은가. 오히려 이 타이밍에 딱 꿈에서 깨서 ‘아, 시발 꿈.’ 이러면 진짜 너무 슬플 것 같았다.
“진짜로 정말로 괜찮아요!”
“좋아요, 보내 줄게요. 자, 이리 와요.”
작가님께서 가까이 오더니 갑자기 나를 품에 폭 안았다. 완전 당황스러웠다! 아, 으아니, 작가님, 전 스킨십 싫어요! 벗어나려고 버둥대는데 작가님께서 날 꼭 껴안은 팔을 풀지 않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주 즐거운 여행이 될 거예요, 독자님.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요. 가면, 독자님이 하고 싶으셨던 거 뭐든지 하면서 사세요. 거기선 그래도 돼요. 내 세계 안이니까요.”
나는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야? 밥 먹고 잠자고 똥 누면 그만이지, 뭐 하는 게 더 있나?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엄청나게 밝은 빛이 나를 감쌌다. 눈은 시렸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빛이었다. 어, 그런데 내 몸이 떠 있는 것 같은데? 공중에 둥둥 뜬 것 같은 이 느낌은 대체 뭘까?
그 느낌은 정말 잠시였다. 나는 뱃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흐기야라아라악!”
그렇게 난 이세계로 날아와서 고양이가 되었다.

◇ ◆ ◇


고양이로 다시 태어난 나는 나쁘지 않았다. 사실은 끝내줬다.
어느 귀족의 진상품으로 왕의 앞에 놓인 나의 어미는 하늘을 닮은 푸른색과 농익어 가는 보리밭을 떠올리게 하는 황녹색의 오드아이를 가진 보석고양이였다고 한다.
왕성으로 운반되어 오는 동안 함께 진상된 수컷 보석고양이와의 사이에서 일곱 마리의 보석고양이가 태어났다. 왕에게 선택된 건 나였다. 그건 내가 같이 태어난 고양이들 중 유일하게 어미를 닮아 푸른색과 황녹색의 오드아이였던 동시에, 형제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고양이였기 때문이다.
뭐, 왜, 불만 있어?
그레이엄이라고 불리는 국왕은 나를 공주님에게 주었다. 엘라인 공주님은 아빠를 닮은 허니 블론드에 푸른 눈을 한 아주 어여쁜 여자아이였다. 인형처럼 예쁜 공주는 심한 자폐증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공주님 근처에는 신분에 맞지 않게 사람이 적었다. 전속 기사 하나와 시녀장, 나와 내 전속 시녀들 정도가 다였다. 시녀장 이외의 사람이 손을 대면 공주는 왕성이 떠나가게 하루 종일 비명을 질렀다. 그건 지옥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그래서 앤 브라이트 시녀장은 후작부인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공주의 모든 시중을 혼자 도맡아 했다. 설리번 선생님과 헬렌 켈러가 저랬을까 싶은 장면이 몇 번이나 연출되었다. 밥 먹을 때는 전쟁이었다. 세 끼 중 두 번은 숟가락과 음식물이 하늘을 날았다.
피골이 상접해진 앤 시녀장을 보며 나는 고양이를 선택한 내 결정이 진짜 최고였다고 생각했다. 내 팔자가 상팔자였다. 그것도 최상의 팔자였다. 공주님의 것이 된 후 나는 나만의 젖어미에게서 젖을 먹었다. 누워 잠들라 치면 침상을 옮겨 놓아 주는 침상 담당 시녀도 있었다. 내 침상은 가장 부드러운 공단에 거위의 가장 부드러운 털을 뽑아 속을 채운 것이었다.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지는 않았지만 어미를 닮아 그 무엇보다 부드러운 백색의 긴 털을 솔로 살살 빗겨 주는 시녀만 셋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전속 요리사가 배속되었다. 내가 있는 파트라 왕국은 작지만 숲이 많은 아름다운 나라였다. 숲에서 잡히는 신선한 육재료를 바탕으로 한 훌륭한 요리들이 발달했다. 나는 왕족의 식탁에 올라가는 재료로 만든 생식을 매일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호의호식하는 동안 공주님도 많이 나아졌다. 국왕 그레이엄이 나를 공주에게 준 건 이유가 있었다.
나는 세상에 몇 안 되는 보석고양이였다. 보석고양이는 마법 종족으로 체내에 마법을 저장할 수도 있었고 또 그것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왕실 최고의 마법사가 넣은 회복 마법이 내 안에 매일매일 꽉 채워졌다. 내가 할 일은? 그냥 공주 옆에 있기만 하면 됐다. 먹고 잠자고 똥 누고 놀고. 그 와중에도 향주머니 같은 내 몸에서 흘러나온 회복 마법이 알아서 공주님을 치료해 주고 있었다. 나와 함께한 일 년여의 시간 동안 천천히 회복된 공주는 이제야 사람 같아 보였다. 여전히 대화는 안 되지만 말귀는 알아먹는 정도?
이세계에 와서 느낀 건데 여기의 회복 마법은 진짜 대단한 것 같다. 자폐증도 치료해 내다니. 우리 세계에 이런 마법이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이런 엄청난 기술이 있는 데도 그동안은 마법사가 근처에만 가도 공주가 난리를 쳐서 마법을 걸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니 다 내 공이었다. 에헴.
금실로 꿰매 만든 주먹만 한 비단 공은 공주님의 장난감인 동시에 내 장난감이기도 했다. 공주가 낚시줄에 매단 공을 살살 흔들어 대면 슬슬 나도 발동이 걸려서 몸을 낮추고 엉덩이를 씰룩댔다. 공주가 제법 유능한 낚시꾼이 되었기에 나는 잡을동말동 하면서도 번번이 비단공을 눈앞에서 놓쳐야 했다.
낚시놀이가 싫증이 나면 난 비단 공을 앞발로 꾹 누르고 이빨로 마구 깨물어 댔는데, 그러다 그 비싼 공을 터트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바로 지금처럼.
“야, 너, 정말…….”
내 침상 시녀인 마리가 내가 깨물고 있는 터진 비단 공을 보고 짜증 섞인 말을 흘렸다. 오늘만 다섯 개째잖아, 라는 뒷말이 들리는 듯했지만 난 모른 척했다. 태어난 지 일 년이 조금 넘은 나는 아직 한참 뛰어놀 때였다.
밖이라면 사냥으로 풀었겠지만 여긴 왕궁이다. 이걸 뺏으면 내가 네 손가락을 대신 물겠어, 마리.
비단 공을 만드는 것은 내 전속 시녀들의 일이다. 오늘도 마리와 다른 시녀들은 비단 공을 만드느라 밤잠을 줄여야 할 판이었다.
나는 웬만한 고양이들보다 훨씬 더 컸다. 보석고양이들은 원래 다 이렇다고 하더라.
왕성 벽면에 장식된 거울을 볼 때면 나도 가끔 깜짝 놀랐다. 얼마나 크다고 설명해야 할까? 그냥 고양이들은 비교도 안 되고 표범? 재규어? 그쯤 되었다. 그나마 호랑이만 하지 않으니까 얼마나 다행이야. 한 주먹 안에 들어오던 삐약이에서 일 년 만에 폭풍 성장한 내 몸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째깐한 것들보다 큰 게 훨씬 위협적이고 우아하지 않은가.
보통 고양이들보다 입도 더 크고 발도 더 크니 비단 공 같은 건 당연히 우습게 터트렸다. 비단 공이 터질 때마다 마리가 나를 흘겨보니 얌전히 있던 나도 슬슬 짜증이 솟았다. 아, 가만히 있으면 이 가려운데 어떡하라고. 넌 어렸을 때 공갈젖꼭지 한 번 안 빨아 보고 자랐니?
크게 기지개를 한 번 펴고 일어나려는데 마리가 내 침상을 들어 그걸로 살짝 나를 가리고는 내 옆구리를 콱 꼬집었다. 캬앙! 눈앞이 번쩍했다. 요 년이?
나를 옆 눈으로 보면서 득의양양하게 웃는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깊은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래, 네가 제정신이 아니니까 이런 짓을 하는 게지.
그래도 내가 네 주인이다? 하극상은 용서할 수 없지. 암, 그렇고말고.
나는 발톱을 꺼내며 차갑게 웃었다. 목표는 예비 비단 공들이 들어 있는 자개함이었다.
내 낌새를 알아챘는지 마리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가 손을 내뻗었지만 이 빠르고 힘센 내가 겨우 시녀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나는 앞발로 자개함을 힘차게 걷어차고는 튀어나온 비단 공들을 향해 돌격했다. 갸아아앙. 연약한 비단 공들은 내가 발톱을 꺼내자마자 부욱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찢어졌다. 씹고 뜯고 맛보고 할퀴고! 이야, 하다 보니 그냥 너무 즐겁다! 역시 몸을 움직이는 건 즐거운 일이야.
한참 그렇게 깽판을 치는 나를 마리는 감히 말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맹수가 날뛰는데 이제 겨우 스물 갓 넘긴 여자애가 무슨 수로 막겠어. 손대지 마, 알았어? 지금 건드리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나도 모르니까!
이 구역 미친년은 나야! 헥헥, 아, 근데 너무 재밌잖아?
공들이 장렬히 산화하는 가운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우! 우! ……우으아!”
“공주님!”
흥분한 나의 발톱에 무언가 채였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공주가 손을 감싸고 앉아 있었다. 일순간에 몸이 굳었다. 대형 사고 쳤다!
한낮의 따뜻한 햇살처럼 반짝이는 긴 금발에 가려져 손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공주의 곱디고운 은백색의 드레스에는 이미 두세 방울의 선혈이 떨어져 있었다. 그녀의 고운 흰 이마가 고통으로 찌푸려졌다.
“니야아아옹…….”
나는 납작 엎드리고 귀를 뒤로 눕혔다. 왕족의 피를 봤으니 사고도 이런 사고가 없었다. 더군다나 공주는 파트라 왕국의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다. 한낱 고양이인 내게 백작부인의 작위를 주고 전속 시녀가 따르는 이유는 오로지 내 주인, 혹은 내 주인과 혼약한 자가 다음 왕위에 오르기 때문이었다.
시녀의 비명 소리를 듣고 번개같이 공주의 호위 기사가 달려 왔다. 알렉스 경이었다. 공주와 나를 번갈아 본 알렉스 경이 이윽고 상황을 파악했는지 지체 없이 칼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