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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알렉스 경의 검은 주인만큼이나 곧고 쭉 뻗어 있었다. 흔한 장식 하나 없는 투박한 흑빛의 검이었다. 납작 엎드리는 와중에도 나는 힐끔 그를 살폈다.
알렉스 마운틴 경은 왕이 직접 뽑아 공주의 호위를 맡겼을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가진 기사였다. 스물여섯의 나이로 소드마스터의 지위에 오른 자는 지금까지 대륙의 역사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소드마스터답게 그는 근육도 실했다. 그가 입은 튜닉 아래에 마초처럼 울룩불룩한 근육이 아닌, 진정 검을 쓰는 자가 갖는 자잘한 잔근육이 있으리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황제와 대공> 책에서 알렉스 경은 대륙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갈색머리에 갈색 눈의 평범한 외모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당연히 그저 그런 서브 남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실제로 본 그는 무척 잘생겼다. 갈색의 머리카락은 오랫동안 연무장에서 훈련하며 보기 좋게 탄 구릿빛 피부와 매우 잘 어울렸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마음이 훈훈해지는 외모였다.
특히 꾹 다문 입매와 날카로운 턱선은 그의 무뚝뚝한 성품을 보여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한 번쯤 공략하고 싶어지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매우 불쌍한 애완동물의 흉내를 내면서도 속으로는 알렉스 경과 남주의 H신을 생각해 내려 애썼다. 알렉스 경의 구릿빛 상반신에 땀방울이 흐르고, 길게 찢어진 쌍꺼풀 없는 저 눈이 색기로 젖었지…….
꿀꺽, 침 넘어가네.
순간 알렉스 경이 움찔했다. 나의 음험한 시선을 느껴서일까? 칼끝이 예리하게 빛나는 듯이 보여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내가 이러고 망상할 때가 아닌데. 진짜로 그걸로 내리치려고? 설마 아니지? 열심히 현실 부정을 했지만 높게 솟은 검날에는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우으아! 우아. 우으으!”
“공주님? 비켜나십시오. 시녀장님, 공주님의 눈을 가려 주십시오.”
알렉스 경의 말에 공주는 더욱 필사적으로 내 앞을 지키고는 급기야 나를 꼭 안은 채 알렉스에게 등을 보였다. 올해 열일곱 살인 엘라인 공주의 행동은 마치 세 살짜리 어린애를 보는 것 같았다.
나를 꼭 껴안은 엘라인 공주는 온몸으로 결사반대의 뜻을 보이고 있었다. 역시 날 생각해 주는 건 공주님밖에 없다니까.
우, 으, 그런데 숨 막혀.
“국왕 전하께서 납십니다!”
두 사람의 대치를 깨듯이 시종이 그레이엄의 행차를 알렸다. 다행이다. 슬쩍 시계를 보니 내가 난장을 치고 공주가 나를 보호하는 사이에 그레이엄과 공주의 티타임 때가 다 된 모양이었다.
사실 티타임이라고 하기엔 애매했다. 공주는 우유를 마시며 그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을 때가 많았고, 왕은 그냥 공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오늘 국정은 이러니저러니 하고 불평 섞인 수다를 떨 뿐이었으니까.
아이고, 이 예쁜 귀염둥이들 같으니.
공주를 닮은 허니 블론드의 중년이 곧 공주에게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근엄하게 천천히 내지르던 발걸음이 나를 꼭 껴안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공주의 모습을 보자마자 내달리듯 빨라졌다.
“공주, 무슨 일이냐, 응? 왜 이 찬 바닥에 앉아 있는 게야?”
공주의 어깨를 감싸며 안절부절못하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딸 바보의 그것이었다. 아, 우리 아빠가 국왕의 반만 날 사랑했어도 내 성격이 이렇진 않았을 텐데.
“우으으, 우으으.”
“이리 온, 내 딸. 아빠가 안아 줄게.”
국왕이 아직도 훌쩍이는 엘라인 공주를 꼭 안고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나는 슬쩍 옆으로 빠졌다. 사고를 친 건 나였지만 혼나는 건 내가 아닐 게 뻔했다. 아이, 꼬시다.
“알렉스 경, 이게 무슨 일인가? 왜 내 딸이 울고 있는지 설명해 보도록 하게. 검을 꺼내 든 이유도. 공주 앞에서 검날을 보이다니……. 엘라인 공주가 놀라지 않았나!”
그레이엄의 서슬 퍼런 호령에 알렉스 경이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지체 없이 무릎을 꿇었다. 늘 온화하던 그레이엄이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데도 알렉스 경은 침착했다.
“국왕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솔로니 백작부인께서 공주님의 귀중한 옥체에 피를 보였습니다. 왕족의 몸에 손을 댄 자는 곧 왕을 향해 반기를 드는 자이므로, 왕가의 무궁한 안녕과 흔들리지 않는 존엄을 위하여 칼을 빼 들었습니다. 처분 후 왕족 앞에서 칼을 빼 든 죄는 보직을 왕께 되돌리고 근신하며 받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놈의 고양이가 먼저 잘못했음. 콱 죽이고 나도 때려치우려고. 알아들었음?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리는데.
군더더기 없는 알렉스 경의 설명에 왕의 화가 좀 누그러진 듯이 보였다. 알렉스 경은 국왕 모르게 나를 째려보았다. 왕이 명령만 내린다면 당장이라도 도로 칼을 빼 들 것 같은 기세여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나는 몸을 바싹 낮추고 애처롭게 울었다.
“니야아아옹.”
왕과 알렉스 경을 번갈아 보던 엘라인 공주가 알렉스 경의 흉흉한 기운을 읽었는지 빠르게 도리질 치며 왕을 바라보았다.
“우으아아. 우으으, 우으으아.”
“그래그래, 엘리야. 무서웠어? 아냐, 아냐. 백작부인은 괜찮을 거야. 아빠 믿지? 응, 알렉스 경에게는 내가 예쁘게 말해 둘게요. 그런데 우리 공주님 아야 했어? 어디?”
망설이던 공주가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손등에 핏빛 선이 한 줄 생겨 있었다. 국왕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공주가 발작할 테니 전속 의사는 부를 수 없었다.
그레이엄이 고민하는 듯이 보이기에 내가 슬쩍 공주의 옆에 붙어 그녀의 상처 위에 앞발을 올렸다. 하얀 빛이 잠시 반짝였고, 내가 앞발을 치우자 상처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래 위치로 돌아가 다시 바싹 엎드렸다.
그레이엄, 나 이렇게 좀 쓸모 있는 고양이야. 막 죽이고 그러면 안 되겠지? 그치? 나는 최대한 불쌍해 보이려고 귀도 뒤로 눕혔다.
그레이엄이 나에게서 눈을 돌리고는 다정한 눈빛으로 공주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감쌌다.
“우리 엘리 여기 아팠어요? 자, 아빠가 호오호오 해 줄게. 호오호오.”
딸 바보 아빠의 호오호오에 엘라인 공주가 까르르 웃었다. 국왕은 엘라인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다 멈추고는 나에게 다른 한 손을 내밀었다.
“백작부인, 앞발 좀 줘 보지.”
나는 얌전히 앞발을 국왕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은 국왕도 알고 우리를 지켜보는 알렉스 경도 알고 있었다.
불면 꺼질까 쥐면 날아갈까 공주를 아끼는 국왕이 야생의 습성이 아직 남아 있는 나를 공주 곁에 계속 두었던 건 내가 사람의 말을 기똥차게 잘 알아먹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나의 분홍빛 젤리 같은 발바닥을 꾹 눌러 발톱을 나오게 한 국왕은 살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솔로니 백작부인, 요새 발톱을 제대로 손질하지 못했나 보군. 발톱이 꼭 날카로운 갈고리 같아. 윗사람의 시중을 드는 것은 아랫것들의 의무인데, 전속 시녀들이 많이 바빴나 보지? 윗사람의 시중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시녀들이 윗분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여 백작부인이 큰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그 죄는 아랫것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백작부인?”
“야아옹.”
이심은 전심이라고, 그레이엄이 친히 내 마음을 읽어 일목요연하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마리 외 전속 시녀들이 비단 공을 만드느라 다크서클이 좀 내려온 건 사실이지만, 그것과 내 발톱 손질을 게을리한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기사들은 지금 즉시 솔로니 백작부인의 모든 시녀들을 포박하라. 차후 내가 직접 죄를 묻겠다.”
달려온 근위병들이 국왕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당황한 시녀들을 둘러쌌다. 어린 처녀들에 불과한 그들은 병사들에게 둘러싸이자 비로소 자신들이 친 장난이 그냥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듯이 보였다.
나는 나를 보호해 준 어여쁜 소녀를 바라보았다. 공주는 방긋 웃고 있었다. 사실 소녀라고 불리기에는 훌쩍 커 버려 이제는 살짝 여인의 느낌이 나기도 했다.
올해 열일곱 살의 엘라인은 국왕 그레이엄의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혈육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탄생의 기쁨은 잠시였다. 엘라인은 돌이 채 지나기 전부터 자폐 증상을 보였고, 나이가 들수록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엘라인의 자폐증은 회복 마법으로 호전될 수 있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자를 접하면 보이는 공격적인 행동으로 인해 엘라인은 치료도 받지 못하고 열여섯 해 동안 유폐되다시피 해 비밀리에 길러졌다. 그때의 엘라인은 사람은커녕 광증에 미친 짐승 같았다며 시녀들은 지금도 때때로 수군거렸다.
그 시절, 공주를 돌본 것은 전 왕비이자 엘라인 공주의 친모였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세상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을 내게 알려 준 이가 그레이엄이었다.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한낱 고양이에 불과한 나를 안고 토닥이며 국왕은 엘라인 공주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한 나라의 국왕이 미물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때부터 그레이엄이 좋아졌다.
말은 물론, 그 어떤 표정도 없이 나무 막대로 바닥만 끊임없이 두드리고 있던 인형 같던 소녀와의 첫 만남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내 어미와 아비였던 한 쌍의 보석고양이는 본디 황제에게 진상되기 위한 것이었다. 황제의 물건은 그 자식까지 모두 황제에게 속했다. 그러나 희귀한 보석고양이의 특성을 안 국왕이 몰래 내 어미의 자식들 중 하나인 나를 빼돌린 것이었다.
자칫하면 국가 간의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었던 국왕의 대담한 행동은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그리고 큰 효과를 보았다. 나를 곁에 둔 엘라인 공주는 호전되기 시작했고 이제 다양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엘라인 공주가 나아질수록 그레이엄은 나를 진짜 백작부인처럼 소중하게 대했다.
“딸, 이제 아빠랑 차 마시자. 아빠가 우리 공주님과 너무 놀고 싶었어요. 저기 나쁜 시녀들은 아빠가 나중에 막 혼내 줄게.”
“아우아……. 아바. 아빠. 마마. 우유.”
서투르게 입을 떼는 엘라인에게서 처음으로 그를 지칭하는 단어가 나오자, 그레이엄의 눈이 커졌다. 그 눈은 살짝 붉어지더니, 이내 촉촉이 젖어 들며 기쁨으로 물들었다.
“엘리, 내 딸! 그래, 아빠다, 아빠. 아바마마도 좋고, 아빠도 좋다. 뭐든 좋아. 잘했다, 내 딸. 우리 사랑스러운 공주.”
국왕이 엘라인 공주를 영차 들더니 하늘을 향해 높이 들고 빙빙 비행기를 태워 주기 시작했다. 엘라인 공주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국왕도 껄껄 웃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었지만, 그 역시 국왕이기 이전에 아버지였다. 아픈 손가락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알렉스 경이 나를 안아 들어 품었다. 얜 왜 이래? 아까는 날 죽일 듯이 굴더니.
“장난은 적당히 해라, 백작부인. 내가 시간을 끌지 않았으면 넌 다른 경비병에게 단칼에 목이 잘렸을 거다.”
실수였어, 일부러가 아니라. 해명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완벽한 내가 못 하는 것도 하나쯤은 있어야지. 낮게 미이우우 하고 울었더니 알렉스가 알아듣고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녀들이 끌려간 문 쪽과 알렉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역시 알렉스가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해 주었다.
“걱정되겠지만, 네 전속 시녀들은 아마 다시 보긴 힘들 거다. 네 죄 때문에 끌려가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일 때문이다. 그들은 귀족파와의 내통 혐의가 있다. 여태 증거가 없어 잡아들이지 못했는데 이번 꼬투리가 좋았어. 국왕 전하가 직접 심문하겠다고 하시는 것도 아마 그쪽을 캐려 하시는 거겠지.”
이게 무슨 소리야? 뜻밖의 말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레이엄은 소국의 국왕이었다. 왕권이 약해 귀족파와의 대립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소국의 국왕. 전 왕비가 죽은 이유도 귀족파가 독살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내 전속 시녀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바뀐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새삼 내통 혐의가 생겼다는 건 처음부터 내통을 시킬 생각으로 자기 사람을 꽂았다는 얘기렸다? 자폐증이 심했던 엘라인 공주가 내 덕분에 상태가 호전되니 잽싸게 연락을 취한 거겠지.
나 때문에 된서리를 맞는 것 같아 마음 안 좋았는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매우 괘씸했다. 나는 스르륵 알렉스의 품을 빠져나와서는 냐앙, 하고 그를 불렀다. 갈 데가 있었다.
내가 알렉스를 대동하고 도착한 곳은 시녀들, 그중에서도 마리의 방이었다. 내 전속 시녀들은 밤마다 마리의 방에 모여 바느질을 하곤 했는데, 알렉스의 얘기를 듣고 보니 의심스러운 곳이 있었다.
나는 방의 한쪽에 놓인 화장대의 밑판을 소리 나게 툭툭 머리로 받았다. 나를 가만히 보던 알렉스가 화장대 아래에서 비밀 서랍을 찾아냈다. 그 안에는 편지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바깥과 주고받은 편지였다.
난 또 집에 두고 온 남자 친구나 애인이랑 연락하는 줄 알았지. 나도 내 시녀들의 사생활 정도는 지켜 주는 여자라고. 하지만 돌아가는 정황상 내가 생각했던 그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편지 하나를 꺼내 읽은 알렉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빼도 박도 못할 내통의 증거로군. 찾아 주어서 고맙다, 솔로니. 이런 게 더 있나?”
나는 미양, 하고 울었다. 당연히 더 있었다. 사람과 달리 고양이는 아무도 견제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왕성 안의 구석까지 다 꿰고 있는 사람, 아니 고양이야. 요리사 케빈이랑 요리 보조 마리안이 식품 창고에서 뽀뽀한 것도 다 안다. 얼레리꼴레리.
아참, 내 전속 시녀들이 이 일로 다 잘리면 내 시중은 누가 드는 거지?
알렉스 경의 검은 주인만큼이나 곧고 쭉 뻗어 있었다. 흔한 장식 하나 없는 투박한 흑빛의 검이었다. 납작 엎드리는 와중에도 나는 힐끔 그를 살폈다.
알렉스 마운틴 경은 왕이 직접 뽑아 공주의 호위를 맡겼을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가진 기사였다. 스물여섯의 나이로 소드마스터의 지위에 오른 자는 지금까지 대륙의 역사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소드마스터답게 그는 근육도 실했다. 그가 입은 튜닉 아래에 마초처럼 울룩불룩한 근육이 아닌, 진정 검을 쓰는 자가 갖는 자잘한 잔근육이 있으리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황제와 대공> 책에서 알렉스 경은 대륙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갈색머리에 갈색 눈의 평범한 외모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당연히 그저 그런 서브 남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실제로 본 그는 무척 잘생겼다. 갈색의 머리카락은 오랫동안 연무장에서 훈련하며 보기 좋게 탄 구릿빛 피부와 매우 잘 어울렸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마음이 훈훈해지는 외모였다.
특히 꾹 다문 입매와 날카로운 턱선은 그의 무뚝뚝한 성품을 보여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한 번쯤 공략하고 싶어지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매우 불쌍한 애완동물의 흉내를 내면서도 속으로는 알렉스 경과 남주의 H신을 생각해 내려 애썼다. 알렉스 경의 구릿빛 상반신에 땀방울이 흐르고, 길게 찢어진 쌍꺼풀 없는 저 눈이 색기로 젖었지…….
꿀꺽, 침 넘어가네.
순간 알렉스 경이 움찔했다. 나의 음험한 시선을 느껴서일까? 칼끝이 예리하게 빛나는 듯이 보여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내가 이러고 망상할 때가 아닌데. 진짜로 그걸로 내리치려고? 설마 아니지? 열심히 현실 부정을 했지만 높게 솟은 검날에는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우으아! 우아. 우으으!”
“공주님? 비켜나십시오. 시녀장님, 공주님의 눈을 가려 주십시오.”
알렉스 경의 말에 공주는 더욱 필사적으로 내 앞을 지키고는 급기야 나를 꼭 안은 채 알렉스에게 등을 보였다. 올해 열일곱 살인 엘라인 공주의 행동은 마치 세 살짜리 어린애를 보는 것 같았다.
나를 꼭 껴안은 엘라인 공주는 온몸으로 결사반대의 뜻을 보이고 있었다. 역시 날 생각해 주는 건 공주님밖에 없다니까.
우, 으, 그런데 숨 막혀.
“국왕 전하께서 납십니다!”
두 사람의 대치를 깨듯이 시종이 그레이엄의 행차를 알렸다. 다행이다. 슬쩍 시계를 보니 내가 난장을 치고 공주가 나를 보호하는 사이에 그레이엄과 공주의 티타임 때가 다 된 모양이었다.
사실 티타임이라고 하기엔 애매했다. 공주는 우유를 마시며 그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을 때가 많았고, 왕은 그냥 공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오늘 국정은 이러니저러니 하고 불평 섞인 수다를 떨 뿐이었으니까.
아이고, 이 예쁜 귀염둥이들 같으니.
공주를 닮은 허니 블론드의 중년이 곧 공주에게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근엄하게 천천히 내지르던 발걸음이 나를 꼭 껴안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공주의 모습을 보자마자 내달리듯 빨라졌다.
“공주, 무슨 일이냐, 응? 왜 이 찬 바닥에 앉아 있는 게야?”
공주의 어깨를 감싸며 안절부절못하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딸 바보의 그것이었다. 아, 우리 아빠가 국왕의 반만 날 사랑했어도 내 성격이 이렇진 않았을 텐데.
“우으으, 우으으.”
“이리 온, 내 딸. 아빠가 안아 줄게.”
국왕이 아직도 훌쩍이는 엘라인 공주를 꼭 안고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나는 슬쩍 옆으로 빠졌다. 사고를 친 건 나였지만 혼나는 건 내가 아닐 게 뻔했다. 아이, 꼬시다.
“알렉스 경, 이게 무슨 일인가? 왜 내 딸이 울고 있는지 설명해 보도록 하게. 검을 꺼내 든 이유도. 공주 앞에서 검날을 보이다니……. 엘라인 공주가 놀라지 않았나!”
그레이엄의 서슬 퍼런 호령에 알렉스 경이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지체 없이 무릎을 꿇었다. 늘 온화하던 그레이엄이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데도 알렉스 경은 침착했다.
“국왕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솔로니 백작부인께서 공주님의 귀중한 옥체에 피를 보였습니다. 왕족의 몸에 손을 댄 자는 곧 왕을 향해 반기를 드는 자이므로, 왕가의 무궁한 안녕과 흔들리지 않는 존엄을 위하여 칼을 빼 들었습니다. 처분 후 왕족 앞에서 칼을 빼 든 죄는 보직을 왕께 되돌리고 근신하며 받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놈의 고양이가 먼저 잘못했음. 콱 죽이고 나도 때려치우려고. 알아들었음?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리는데.
군더더기 없는 알렉스 경의 설명에 왕의 화가 좀 누그러진 듯이 보였다. 알렉스 경은 국왕 모르게 나를 째려보았다. 왕이 명령만 내린다면 당장이라도 도로 칼을 빼 들 것 같은 기세여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나는 몸을 바싹 낮추고 애처롭게 울었다.
“니야아아옹.”
왕과 알렉스 경을 번갈아 보던 엘라인 공주가 알렉스 경의 흉흉한 기운을 읽었는지 빠르게 도리질 치며 왕을 바라보았다.
“우으아아. 우으으, 우으으아.”
“그래그래, 엘리야. 무서웠어? 아냐, 아냐. 백작부인은 괜찮을 거야. 아빠 믿지? 응, 알렉스 경에게는 내가 예쁘게 말해 둘게요. 그런데 우리 공주님 아야 했어? 어디?”
망설이던 공주가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손등에 핏빛 선이 한 줄 생겨 있었다. 국왕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공주가 발작할 테니 전속 의사는 부를 수 없었다.
그레이엄이 고민하는 듯이 보이기에 내가 슬쩍 공주의 옆에 붙어 그녀의 상처 위에 앞발을 올렸다. 하얀 빛이 잠시 반짝였고, 내가 앞발을 치우자 상처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래 위치로 돌아가 다시 바싹 엎드렸다.
그레이엄, 나 이렇게 좀 쓸모 있는 고양이야. 막 죽이고 그러면 안 되겠지? 그치? 나는 최대한 불쌍해 보이려고 귀도 뒤로 눕혔다.
그레이엄이 나에게서 눈을 돌리고는 다정한 눈빛으로 공주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감쌌다.
“우리 엘리 여기 아팠어요? 자, 아빠가 호오호오 해 줄게. 호오호오.”
딸 바보 아빠의 호오호오에 엘라인 공주가 까르르 웃었다. 국왕은 엘라인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다 멈추고는 나에게 다른 한 손을 내밀었다.
“백작부인, 앞발 좀 줘 보지.”
나는 얌전히 앞발을 국왕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은 국왕도 알고 우리를 지켜보는 알렉스 경도 알고 있었다.
불면 꺼질까 쥐면 날아갈까 공주를 아끼는 국왕이 야생의 습성이 아직 남아 있는 나를 공주 곁에 계속 두었던 건 내가 사람의 말을 기똥차게 잘 알아먹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나의 분홍빛 젤리 같은 발바닥을 꾹 눌러 발톱을 나오게 한 국왕은 살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솔로니 백작부인, 요새 발톱을 제대로 손질하지 못했나 보군. 발톱이 꼭 날카로운 갈고리 같아. 윗사람의 시중을 드는 것은 아랫것들의 의무인데, 전속 시녀들이 많이 바빴나 보지? 윗사람의 시중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시녀들이 윗분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여 백작부인이 큰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그 죄는 아랫것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백작부인?”
“야아옹.”
이심은 전심이라고, 그레이엄이 친히 내 마음을 읽어 일목요연하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마리 외 전속 시녀들이 비단 공을 만드느라 다크서클이 좀 내려온 건 사실이지만, 그것과 내 발톱 손질을 게을리한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기사들은 지금 즉시 솔로니 백작부인의 모든 시녀들을 포박하라. 차후 내가 직접 죄를 묻겠다.”
달려온 근위병들이 국왕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당황한 시녀들을 둘러쌌다. 어린 처녀들에 불과한 그들은 병사들에게 둘러싸이자 비로소 자신들이 친 장난이 그냥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듯이 보였다.
나는 나를 보호해 준 어여쁜 소녀를 바라보았다. 공주는 방긋 웃고 있었다. 사실 소녀라고 불리기에는 훌쩍 커 버려 이제는 살짝 여인의 느낌이 나기도 했다.
올해 열일곱 살의 엘라인은 국왕 그레이엄의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혈육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탄생의 기쁨은 잠시였다. 엘라인은 돌이 채 지나기 전부터 자폐 증상을 보였고, 나이가 들수록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엘라인의 자폐증은 회복 마법으로 호전될 수 있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자를 접하면 보이는 공격적인 행동으로 인해 엘라인은 치료도 받지 못하고 열여섯 해 동안 유폐되다시피 해 비밀리에 길러졌다. 그때의 엘라인은 사람은커녕 광증에 미친 짐승 같았다며 시녀들은 지금도 때때로 수군거렸다.
그 시절, 공주를 돌본 것은 전 왕비이자 엘라인 공주의 친모였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세상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을 내게 알려 준 이가 그레이엄이었다.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한낱 고양이에 불과한 나를 안고 토닥이며 국왕은 엘라인 공주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한 나라의 국왕이 미물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때부터 그레이엄이 좋아졌다.
말은 물론, 그 어떤 표정도 없이 나무 막대로 바닥만 끊임없이 두드리고 있던 인형 같던 소녀와의 첫 만남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내 어미와 아비였던 한 쌍의 보석고양이는 본디 황제에게 진상되기 위한 것이었다. 황제의 물건은 그 자식까지 모두 황제에게 속했다. 그러나 희귀한 보석고양이의 특성을 안 국왕이 몰래 내 어미의 자식들 중 하나인 나를 빼돌린 것이었다.
자칫하면 국가 간의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었던 국왕의 대담한 행동은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그리고 큰 효과를 보았다. 나를 곁에 둔 엘라인 공주는 호전되기 시작했고 이제 다양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엘라인 공주가 나아질수록 그레이엄은 나를 진짜 백작부인처럼 소중하게 대했다.
“딸, 이제 아빠랑 차 마시자. 아빠가 우리 공주님과 너무 놀고 싶었어요. 저기 나쁜 시녀들은 아빠가 나중에 막 혼내 줄게.”
“아우아……. 아바. 아빠. 마마. 우유.”
서투르게 입을 떼는 엘라인에게서 처음으로 그를 지칭하는 단어가 나오자, 그레이엄의 눈이 커졌다. 그 눈은 살짝 붉어지더니, 이내 촉촉이 젖어 들며 기쁨으로 물들었다.
“엘리, 내 딸! 그래, 아빠다, 아빠. 아바마마도 좋고, 아빠도 좋다. 뭐든 좋아. 잘했다, 내 딸. 우리 사랑스러운 공주.”
국왕이 엘라인 공주를 영차 들더니 하늘을 향해 높이 들고 빙빙 비행기를 태워 주기 시작했다. 엘라인 공주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국왕도 껄껄 웃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었지만, 그 역시 국왕이기 이전에 아버지였다. 아픈 손가락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알렉스 경이 나를 안아 들어 품었다. 얜 왜 이래? 아까는 날 죽일 듯이 굴더니.
“장난은 적당히 해라, 백작부인. 내가 시간을 끌지 않았으면 넌 다른 경비병에게 단칼에 목이 잘렸을 거다.”
실수였어, 일부러가 아니라. 해명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완벽한 내가 못 하는 것도 하나쯤은 있어야지. 낮게 미이우우 하고 울었더니 알렉스가 알아듣고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녀들이 끌려간 문 쪽과 알렉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역시 알렉스가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해 주었다.
“걱정되겠지만, 네 전속 시녀들은 아마 다시 보긴 힘들 거다. 네 죄 때문에 끌려가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일 때문이다. 그들은 귀족파와의 내통 혐의가 있다. 여태 증거가 없어 잡아들이지 못했는데 이번 꼬투리가 좋았어. 국왕 전하가 직접 심문하겠다고 하시는 것도 아마 그쪽을 캐려 하시는 거겠지.”
이게 무슨 소리야? 뜻밖의 말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레이엄은 소국의 국왕이었다. 왕권이 약해 귀족파와의 대립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소국의 국왕. 전 왕비가 죽은 이유도 귀족파가 독살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내 전속 시녀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바뀐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새삼 내통 혐의가 생겼다는 건 처음부터 내통을 시킬 생각으로 자기 사람을 꽂았다는 얘기렸다? 자폐증이 심했던 엘라인 공주가 내 덕분에 상태가 호전되니 잽싸게 연락을 취한 거겠지.
나 때문에 된서리를 맞는 것 같아 마음 안 좋았는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매우 괘씸했다. 나는 스르륵 알렉스의 품을 빠져나와서는 냐앙, 하고 그를 불렀다. 갈 데가 있었다.
내가 알렉스를 대동하고 도착한 곳은 시녀들, 그중에서도 마리의 방이었다. 내 전속 시녀들은 밤마다 마리의 방에 모여 바느질을 하곤 했는데, 알렉스의 얘기를 듣고 보니 의심스러운 곳이 있었다.
나는 방의 한쪽에 놓인 화장대의 밑판을 소리 나게 툭툭 머리로 받았다. 나를 가만히 보던 알렉스가 화장대 아래에서 비밀 서랍을 찾아냈다. 그 안에는 편지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바깥과 주고받은 편지였다.
난 또 집에 두고 온 남자 친구나 애인이랑 연락하는 줄 알았지. 나도 내 시녀들의 사생활 정도는 지켜 주는 여자라고. 하지만 돌아가는 정황상 내가 생각했던 그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편지 하나를 꺼내 읽은 알렉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빼도 박도 못할 내통의 증거로군. 찾아 주어서 고맙다, 솔로니. 이런 게 더 있나?”
나는 미양, 하고 울었다. 당연히 더 있었다. 사람과 달리 고양이는 아무도 견제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왕성 안의 구석까지 다 꿰고 있는 사람, 아니 고양이야. 요리사 케빈이랑 요리 보조 마리안이 식품 창고에서 뽀뽀한 것도 다 안다. 얼레리꼴레리.
아참, 내 전속 시녀들이 이 일로 다 잘리면 내 시중은 누가 드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