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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나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왜냐하면 몹시 언짢기 때문이다.
공주님의 옥체를 상하게 한 죄는 내 전속 시녀였던 마리와 일당들이 다 짊어졌다. 그날 이후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정확히는 내통죄로 지하 감옥에서 심문받고 있겠지. 그건 꽤 사이다이긴 한데.
문제는 아직 그 후임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 솔로니 백작부인. 제발 가만히 계셔 주세요.”
시녀장 앤을 돕는 시녀들 중 제일 막내인 초코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나를 바라보며 떨고 있었다. 초코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내 전용 발톱 깎이였다. 초코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내 앞발로 손을 뻗었다.
“하아아악.”
그녀의 손이 내 앞발에 닿자마자 본능적으로 나는 하악거렸다. 내 꼬리가 일자로 꼿꼿이 섰다.
아, 쫌, 싫다고!
“히이익, 죄송해요! 죄송해요, 백작부인! 하지만 발톱을 자르지 않으면 또 공주님께서 상처 입으실지 모르니 꼭 발톱 정리를 잘해 두라는 국왕 전하의 엄명이 있었어요.”
초콜릿색의 큰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난 눈물에 약하다. 심지어 아직 열세 살밖에 안 된 쬐끄만 여자애가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물론 난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속 알맹이는 사람이잖아?
나는 엘라인의 전속 시녀장 앤을 째려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을 의식한 듯 고개를 부자연스럽게 꺾으며 시선을 피했다. 너 일부러 그런 거지? 그지? 내가 어린 것에 약하다는 거 알고 일부러 초코 들이민 거지?
발톱만 깎는 거라면 나도 본능을 가라앉히고 참아 줄 순 있었다. 이래 봬도 나 백작부인이고, 영지는 없지만 나라에서 따박따박 품위 유지비도 나오거든. 내 고급진 만찬이며 시녀 월급 같은 게 어디서 나왔겠나.
이 사치스러운 생활이 다 공주님 덕분이니까 공주님의 안녕을 위해서 발톱 손질 정도야 꾹 참아 줄 수 있다고.
하지만.
“캬옹! 꺄아앙!”
나는 체통도 잊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내 앞발이 닿는 곳마다 쬐끄만 빨간 도장이 꾹꾹 찍혔다.
“마, 많이 아프세요, 백작부인? 죄송해요. 제가 아직 서툴러서…… 흐윽!!”
너 눈 안 달렸어? 발톱 아래 혈관 있잖아, 혈관! 끝만 살짝 잘라야지, 넌 애완동물 한번 안 키워 봤냐! 눈깔을 포크로 콱 찍어서 시럽 담가 먹어 줄까 보다!
“갸옹, 갸옹. 갸옹. 갸옹.”
내 말이 초코의 귀에 들어갔다면 아마 초코는 충격받고 시녀 일을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고양이다. 마구 퍼부은 내 말은 당연하게도 몽땅 고양이가 야옹거리는 소리로 자체 순화 되어 버렸다.
그렇다. 이놈의 기집애는 지지리 발톱을 못 깎았다! 열세 살이면 초딩으로 치면 만렙이며 한 초등학교의 짱 먹는 최고 학년이건만, 이 지지배는 어찌하여 고양이 발톱 깎는 것 하나 못한단 말인가.
물론, 공주님 시녀의 필수 과목 중에 애완동물 발톱 깎기 뭐 이런 게 있는가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내가 너무 아파 보였던지 발톱깎이를 잡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초코에게 앤이 외쳤다.
“초코, 그냥 빨리 잘라! 지금 그만두면 죽도 밥도 안 돼!”
저기요, 시녀장님? 나 아픈데? 피 났는데? 적어도 치료는 해 줘야 되는 거 아냐?
초코는 당황한 듯하다가 뒤에서 응원하는 시녀장을 보더니 뭔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백작부인, 저기…… 여섯 개만 더 하면 돼요. 저 노력할게요.”
그런 노력은 하지 마, 안 돼, 그만둬!
아아, 사고는 언년이들이 쳤는데 고생은 왜 나의 몫인가.

◇ ◆ ◇


“아아. 솔로니 백작부인. 어서 와.”
깊은 밤이었지만 국왕은 아직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집무실 문 앞에는 당연히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동물인 나는 어디든 프리패스란 말이지. 나는 집무실 책상 위로 단번에 뛰어 올라가서는 그대로 서류들을 깔개 삼아 다리를 쭉 뻗고 누워 버렸다.
“꺄아아아옹.”
날 봐, 날 보라고.
내 비단보다 부드러운 긴 털이 여기저기 뭉쳐 있는 거, 내 발톱 끝에 피딱지 붙어 있는 거 안 보여? 일 처리 진짜 이딴 식으로 할래? 대체 내 시녀들은 언제 충원되는 거야?
“꺄아아아아아아아옹.”
내가 시위하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던 국왕이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마, 많이 피곤해 보이네. 타이밍을 잘못 잡았나?
그렇게 얼굴을 벅벅 문지르던 국왕은 나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미안, 백작부인. 그리고 알렉스 경에게 들었어. 내통한 편지를 찾아 줬다고. 덕분에 심문이 많이 쉬워졌어. 편지를 얼굴 앞에 들이밀었더니 술술 불더군. 편지에 적힌 지시 중에는 발톱을 깎지 말고, 일부러 백작부인을 학대해서 난리를 치게 하라는 지시도 있었어.”
아, 이런. 내 허리를 꼬집은 것도 지시를 받은 거였다고? 아예 마리의 팔을 확 긁어 놓을걸. 나는 쩝 입맛을 다셨다. 국왕이 그런 내 등을 슬슬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었다.
“시녀들에게 공을 들인 건 아나이스 왕비 쪽이었어. 새로 뽑을 시녀들을 그녀의 손이 안 닿는 사람으로 고르려니 시간이 좀 걸리는 중이야.”
고릉고릉고릉, 저절로 목에서 기분 좋은 울림이 흘러나왔다. 국왕이 정성껏 쓰다듬어 주는 손길은 언제나 기분 좋았다.
“백작부인의 손에 엘라인이 다치는 건 시간문제였어. 아나이스 왕비의 목적은 공주를 상처 입혔다는 명목으로 백작부인을 엘리에게서 떨어뜨리는 거였겠지. 벌을 받아 죽으면 더 좋고. 지금으로선 백작부인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엘리가 정상인으로서 생활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니까 말이지.”
나는 혀를 내밀어 살짝 콧등을 핥았다. 으흠, 음험한 여자네.
나를 볼 때마다 싱긋 웃지만 왠지 서늘했던 푸른 머리카락의 미인을 떠올렸다. 고약한 심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음모를 꾸밀 줄은 몰랐다.
“아나이스는 야망이 있는 여자야. 전 왕비가 죽고 나서 그동안 벼르고 있던 이플란트 대공가가 가문 차원에서 억지로 들이밀었지.”
지금까지 들은 얘기론 아무리 봐도 이나이스 비와 이플란트 대공가는 네 적인 것 같아. 웬만하면 나도 좀 안 친하게 지내고 싶네. 그런데 피할 수 없다니, 왕이라는 것도 되게 힘든 일인 거구나.
“아나이스가 아들을 낳는다면 자연스럽게 그녀와 그녀의 아들, 그리고 대공가에 권력이 넘어갈 거야. 그들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왕위 찬탈이지. 이나이스가 아직 젊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볼 수도 있어. 덕분에 엘라인은 그 지위에 비해서 그들에게 아직 견제 받지 않고 있지. 일단 기준 미달이기도 하고.”
그래서 엘라인을 지키기 위해 아나이스를 품고 있는 거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아나이스 비와 그녀가 낳을, 그녀의 아이들의 행복은 어떻게 되는 건데. 내 고릉거리는 소리가 뚝 끊겼다.
“그렇게 비난만 하지는 마, 백작부인. 아나이스 왕비의 왕자 출산은 귀족파는 물론이고 중도파들까지도 바라는 일이니까. 이플란트 대공이 아직 후계에 대한 욕심을 부리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칼을 거꾸로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거든.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과정에선 많은 피가 뿌려지겠지.”
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그들이 반정에 성공한다면 새 왕은 아름다운 아나이스와 결혼해서 이플란트 대공가의 비호를 등에 업은 꼭두각시 왕이 될 거야. 아니, 그녀 스스로가 여왕의 자리에 오르려 할지도 모르겠군.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이러나저러나 내 목과 엘리의 목을 붙여 두려면 지금이 가장 나은 방법이란 얘기지.”
최선은 대공가의 야심을 분쇄하는 거겠지만, 그게 안 되니 선택한 차악일거다. 작은 왕국의 흔들리는 왕위에 앉은 그레이엄은 나와는 다른 위치에 있고 다른 생각을 해야만 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의 선택에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그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차악이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그레이엄을 위해서.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을 핥았다. 그게 그레이엄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그 뒤로도 그레이엄은 서류를 보면서 드문드문 이야기를 했다. 국왕파 누구를 이번에 승진을 시키려고 했는데 귀족파가 너무 강경해서 좌절했다느니, 이번에 새로 등용한 관리 하나가 참 사람이 괜찮아서 엘라인과 한번 엮어 볼까 생각만 했다는 소소한 얘기까지. 나는 꾸벅꾸벅 졸며 그의 이야기를 즐겁게 들었다.
야심한 밤 집무실에 울리는 낮게 깔린 중저음의 목소리가 간간이 이어지는 것을 누워 감상하자니 발가락 사이가 간질간질했다. 서류에 눈을 박은 국왕의 손은 여전히 내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몸을 뒤집어 배를 내보이려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 내가 배를 보이려 하다니, 방심했다! 나는 솔로니, 되게 고고하고 자존심 강한 고양이라고!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참 눈 호강이 되는 외모다.
왕가의 피를 이은 자들의 특징인 허니 블론드가 국왕 그레이엄의 눈가에서 찰랑거렸다. 원래는 엘라인처럼 반짝이는 금발이었을 머리카락이 끝부터 살짝 은빛으로 탈색되어 가고 있었고, 푸른 눈동자는 보석처럼 맑게 빛났다.
올해 서른여덟 살이 된 그레이엄은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어느 한군데를 꼭 집어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느 각도에서 보나 조각 미남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비율 좋은 얼굴 생김이랄까.
눈썹 사이의 깊은 주름은 국왕으로서의 위엄을 이백 프로 끌어 올려 주었다. 무뚝뚝해 보이기도 하지만 최근 엘라인을 향한 딸 바보 미소로 인해 생긴 눈가의 잔주름이 인상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일국의 국왕 지위에 앉아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그레이엄은 홀로 집무실에 가만히 있을 때도 왠지 모를 애수와 사색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 이런 중년이 분위기 진한 재즈 바에 앉아서 언더락 잔을 앞에 놓고 상처(喪妻)한 사연 같은 것을 바텐더와 잔잔하게 얘기하고 있으면 진짜 나도 모르게 가서 말 걸어 버릴 것 같다…….
아, 나. 침 나오네. 정신 차리자!
나는 벌떡 일어나서 발가락 하나하나를 꼼지락거리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하품은 덤이었다. 아, 입 냄새 나면 안 되는데.
걱정 마, 그레이엄.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약소국의 국왕으로 태어나 겪는 찌질한 고민 따위는 그레이엄에게 진짜 안 어울려. 그레이엄은 잘생겼잖아?
나는 슬쩍 서류 뭉치들 사이에 껴 있는 서류 하나를 찾아 발로 툭툭 건드려 국왕 앞에 내밀었다. 그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인 산맥 중부, 몽타 산 분화구에서 대량의 다이아몬드 발견. 국가 차원의 대규모 개발 요함.
나는 서류 뭉치를 앞발로 하나씩 날리며 다음 서류를 찾았다. 누르스름한 서류 용지들이 바닥에 나비처럼 팔랑팔랑 떨어졌다. 저거 정리하려면 고생 좀 하겠네.
아, 찾았다.
상트 제국의 황비 후보 모집 중. 희망자는 월말까지 접수할 것.
대륙 중앙의 패권자, 상트 제국. 제국의 황제는 해마다 황비 후보자를 구하고 있었다.
매년 있는 황비 모집 공고에서 중요한 건 황비 후보로 오는 여자가 아니라 그에 따라오는 지참금과 조공이라는 걸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다이아몬드 광산이 지참금이라면 참가비로 꿀꺽하기에는 너무 컸다. 체할 만큼 말이지.
이걸 그냥 꿀꺽했다간 황비 모집이 허울뿐이라는 걸 온 대륙에 광고하는 꼴이 될 것이다.
<황제와 대공>을 읽은 나는 당연히 다이아몬드 광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 다이아몬드 광산을 지참금 삼아 엘라인 공주가 제국으로 시집가거든. 무려 황비로!
엘라인이 황비가 되면, 약소국의 왕은 제국의 황제를 등에 업고 겨우 변방 소국의 대공가에 쩔쩔매던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왕권을 쥐게 될 것이다. 엘라인이 낳은 아이가 왕권을 이어받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야심만만한 대공가에게 휘둘리진 않을 거고 만만한 방계의 아이를 후계로 삼아 왕권을 안정시킬 수도 있다.
뭐, 재수 없으면 그대로 황제가 엘라인과의 결혼을 빌미로 파트라 왕국을 통째로 제국에 편입시키는 불상사도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적어도 내가 읽은 책에선 그런 미친 전개는 없었다. 대공이랑 엘라인 공주가 친했거든.
이러나저러나 적어도 대공가의 반정으로 왕가 전체가 숙청당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지다.
그러니까 질러, 그레이엄.
내가 밀어 준 두 서류를 번갈아 보던 그레이엄이 결국 뭔가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해 볼 만한 도박이라고 판단한 듯싶었다. 정신없이 펜대를 놀리며 뭔가 써 내려가는 국왕을 뒤로하고 나는 집무실 바깥으로 나왔다.
가릉거리는 내 신호를 읽고 문을 열어 주었던 근위 기사가 나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그놈 참 우직한 놈이로세. 고양이한테 인사하고 싶니? 하긴, 계급이 깡패긴 하지.
나는 드문드문 경비를 서는 기사들이 있는 복도를 내달렸다. 우다다다!! 넓은 복도를 내달리는 한밤의 질주는 끝내주게 기분이 좋다. 이것도 내가 동물이기에 가능한 특권이겠지.
마주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새롭게 불어오는 바람에 올라탄 듯한 기분에 내 털도 약간은 부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