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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제국으로 가는 여정을 꾸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고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아니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공주가 갑작스럽게 황비 모집에 참가하기 위해 여행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왕국의 모든 눈과 귀가 우리에게로 쏠리는 것 같았다.
사실 그럴 만했던 게 추수감사절은 옛적에 지났고, 창고에는 오곡백과까지는 아닐지라도 먹을 게 그득했다. 원래 파트라 왕국에서는 평민이고 귀족이고 할 것 없이 심심하면 대부분 사냥을 즐겼는데, 지금은 길이 얼어 미끄럽고 추운 날씨에 굶주린 동물들이 포악해질 시기라 목숨 내놓고 사냥할 생각이 아니라면 조용히 벽난로 근처에서 군고구마나 까먹고 핫초코나 홀짝이는 게 여러모로 나을 때였다.
그렇게 사람들이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이는 시기였다. 사람들이 모이면 제일 재미있는 게 뭐다? 뒷담화가 아니겠는가. 본인 없으면 나라님 욕도 한댔는데. 공주의 나이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생겼을지, 후견인은 누가 될지, 제국에 함께 갈 일행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지 등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니 듣는 재미도 쏠쏠할 게 틀림없었다.
들뜬 민심과는 달리 궁정 내의 각료들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해쓱해졌다. 과중한 업무 강도 탓이었다. 무려 왕위 계승 서열 1위의 행차였고, 마차로도 두 달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제국이 강성하다고는 하지만 무리하게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에 아직 중앙으로 통하는 대로조차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았고 변두리는 치안 또한 좋지 않았다. 제국이 구차하게 황제를 팔아 황비 모집 참가비 명목으로 조공을 쓸어 담으려는 이유는 돈 들어갈 데가 많아서이기도 했다.
한 달 전, 국왕은 주요 관료들을 소집했다. 시각은 저녁과 새벽 사이로 전쟁이 나지 않는 한 유례없는 파격적인 부름이었다. 한밤중에 불려 온 관료들은 이유를 알지 못해 좁은 회의실에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나는 일찌감치 회의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나중에 그레이엄이 따로 내게 이야기를 해 주겠지만, 직접 보는 재미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국왕이 곧 도착했다. 관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국왕은 짧은 인사를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크흐, 그게 있어야 되는데. 왜 있잖아. 부드럽고 폭신폭신하고 짭짤하고 영화 볼 때 빠질 수 없는 거, 그거. 진짜 좋은 건데, 딱 집어 말할 수도 없고.
“엘라인 공주를 제국의 황비 후보로 보내려 하오.”
왕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말 그대로 폭탄이었다. 돈 먹는 폭탄. 특히 재정 담당 대신들의 얼굴이 단박에 흙빛으로 변했다.
공주를 보내는 것은 매년 의례적으로 적당한 귀족 자제와 함께 조공을 보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작년에 어느 귀족 가문의 차녀를 보내는데도 나라가 휘청한다며 재무 대신이 울상을 짓지 않았던가.
공주가 간다고 하면 호위 인력에 전속 시녀들, 요리 및 잡무를 볼 인원만 해도 한 다스였다. 거기다 공주니까 호위는 적어도 기사 급이 두 자리 이상이고. 빌려야 하는 말과 마차, 숙박까지 생각하면 이 작은 나라는 공주 하나 보내려고 왕궁 기둥뿌리라도 뽑아 팔아야 할 거다.
입만 뻐끔대는 재무 대신을 향해 국왕이 슬그머니 말을 보탰다.
“이번에 발견한 다이아몬드 광산 있지 않소?”
순간 재무 대신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게 보였다. 거상들에게 단기 채굴권을 보장하고 돈을 빌리면 이 손실을 메꿀 수 있을까? 기한은 언제까지로 잡지? 이자율은? 아니, 애초에 공주님을 왜 제국에 보내는 거야?
“그거 지참금으로 보낼 거요.”
재무 대신의 얼굴에서 미친! 하는 소리가 육성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우와, 표정으로 욕하는 거 나 이때 처음 봤다.
재무 대신은 소설 속이라 그런지 나이 일흔은 잡수셨을 것 같은 할아버지였는데도 피부가 갓 태어난 아기 피부처럼 뽀얬다. 그런데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왕이 입을 뗀 단 몇 초 만에 소설 버프가 사라지고 검버섯이 피어나는 게 실시간으로 보일 정도였다.
내가 저 대신이었으면 당장 국왕의 목을 졸라 버렸을 거다. ‘내 꿀피부 돌려내!’ 이러면서.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왕이 헛바람이 단단히 들어서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하는구나 싶었겠지.
재무 대신이 무릎을 꿇으며 ‘저언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기술을 선보이려는데, 어디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공주님께서도 이제 결혼하실 적령기가 되었지요. 제국의 황제는 공주님의 훌륭한 반려가 되어 주실 겁니다. 공주님의 귀하신 행차에 저희 대공가에서도 성의를 다하겠습니다.”
이플란트 대공가의 수장이자 파트라 왕국의 유일한 대공, 그루피 대공이었다. 연한 물빛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겨 빗은 그는 가벼운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철벽이 느껴졌다.
왕이 그를 바라보았고, 잠시 둘의 시선이 얽혔다. 둘은 장인과 사위 사이였으나 또한 최악의 정적(政敵)이기도 했다. 그루피 대공은 왕의 처를 독살했고, 반역죄를 빌미로 삼아 그녀의 가문을 멸족시켰다.
그렇게 들어앉은 여자가 이플란트 대공가의 차녀 아나이스 왕비였다. 장인이 된 대공에게 답례하고자 국왕은 새로이 아내가 된 여자의 남동생을 사고로 위장하여 왕의 사냥터에서 활로 쏘아 죽였다.
처남을 죽인 날 왕은 나를 찾았다. 그루피 대공, 그자만은 아무래도 좋아지지 않는다고, 그레이엄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푸념하듯 말했다. 그 쓸쓸하면서도 슬픈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왕이 웃었다.
“공작이 생각하기에도 이 결혼이 좋은 결정이라고 같소?”
공작이 대답했다.
“전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신하는 따르는 것이 도리이겠지요. 투자한 만큼 큰 이득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겠습니다.”
모든 책임을 그레이엄에게로 돌리는 실로 정치적인 대답이었다. 어떤 이유든 간에 결혼이 엎어지면 국왕은 그나마도 없던 자신의 지지 기반을 잃게 될 것이다.
국왕의 눈이 잠시 나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흔들림 없는 눈빛이었다.
“대공의 호의는 감사히 받겠소. 최대한으로 원조해 준다면 더욱 좋겠지. 그럼 이제 큰 문제는 없겠군.”
왕의 의지는 단호했고, 대공가의 지원이 약속되자 그제야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모자란 여행 경비는 대공가가 보이지 않는 압력을 행사해 귀족 가문마다 각출했다고 들었다.
덕분에 한 달 여 동안 왕궁의 인력들은 열심히 경비를 모으고 인원을 고르고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했다. 관리들은 업무 과다에 시달렸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초대형 폭탄은 왕궁을 괴멸 직전으로 몰고 갔다.
나이 먹을 대로 먹은 관료들이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왕궁을 시체처럼 걸어 다니는 것을 보는 것도 이제는 싫증이 난다. 뭐,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니까. 나이 들어 고생하는 건 복에 겨워 넘치는 거 아니겠어?
나는 매우 피곤해하는 관료들을 생각해 깊은 밤, 가끔 관료들의 집무실에 놀러가 주었다. 나는 회복 마법의 정수이자 꼬랑내 나는 신발장 안의 방향제 같은 거였다. 작정을 하고 회복 마법을 폴폴 흘리는 나와 잠깐 있으면 핫식스 여섯 병을 원샷 한 것처럼 몸이 개운해지고 나를 오랫동안 곁에 두면 역류성 식도염, 치질, 변비 같은 각종 고질병이 나았다.
왼쪽에 있는 빈 종이에 손바닥에 땀나게 뭔가를 적고 또 그것을 오른쪽으로 옮겨 놓는 관리들을 보다가 나는 기지개를 폈다. 나는 고양이다. 고양이는 야행성이다.
몸이 뻐근한 게 가만히 앉아 있기는 뭐해서 대충 옆에 쌓여 있는 서류들을 툭툭 건드리며 놀았다. 서류들은 어쩜 저렇게 높이, 빽빽하게 잘 쌓아 두었을까 싶을 정도로 높이 쌓여 있었고, 그건 내가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툭, 친 앞발 한 방에 와장창, 펜을 꽂아 놓은 통이 바닥에 엎어지고 뒤차기 한 방에 잉크병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책상에서 서류 더미로, 다시 그것을 박차고 나가 책장으로 뛰어올랐다. 서쪽에서 들여왔다는 대형 도자기가 서서히 기울어지며 바닥에 부딪쳤다.
와장창!
휘익! 우다다다! 다다닥!
야호, 씬난다!
한바탕 신나게 우다다를 하고 나니 제법 후련했다. 돌아 나오면서 바라본 집무실은 폐허가 따로 없었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서류 더미들은 공중을 날았다가 하나둘 차분히 바닥에 쌓여 갔다. 잉크병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까만 속을 비싼 카페트 위에 게워 내고 있었다. 관료들은 혼이 나간 표정으로 내 등을 바라보았다.
어허, 앉아만 있으면 골병들어요. 주기적으로 몸도 움직이고 스트레칭도 해야 허리디스크가 안 온다니까?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거야. 음, 감사할 필요까진 없고.
결코 바빠진 그레이엄이 엘라인과의 티파티를 멈추어서 그런 게 아니다. 정말로 진짜다.
◇ ◆ ◇
나도 제법 바빴다. 낮에는 엘라인 곁에서 잠을 잤고 밤에는 회복 마법을 몸 안에 박아 넣었다. 엘라인은 이제 한두 마디 정도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오랫동안 궁을 비우는 만큼 회복 마법을 내 안에 충분히 채워 놓아야 했다. 궁정 마법사가 밤새 내게 자신의 마력과 회복 주문들을 남김없이 쏟아붓고는 코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따분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내가 가끔 불쌍한 관료들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그들의 귀중한 마력과 주문을 쓰고 있다는 건 비밀이었다. 비밀 있는 여자가 신비로워 보인다잖아.
나의 신비로움을 지켜 주기 위해 또 한 명의 할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아, 저러다 골로 가겠는데.
내가 태평하게 그 꼴을 감상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렇다, 왕이나 공주가 아니라 내 손님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솔로니 백작부인. 저는 시란이라고 합니다.”
기껏해야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그는 예의 바르게 나를 대했지만 이상하게도 난 되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예법은 배웠지만 속성으로 배워서 아무 데나 막 갖다 붙이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 아니, 애초에 고양이를 처음 보면 머리나 쓰다듬지 자기소개 하면서 악수하자고 손 내밀지는 않잖아. 나에게 한 인사 자체는 완벽했다. 고양이에게 하기에는 과해서 그렇지.
나는 팽 코웃음을 치고는 정원을 향해 우아하게 걸어갔다. 나사 빠진 애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정원을 산책하면서 새를 사냥하는 놀이를 하는 게 훨씬 즐거울 것 같다.
그는 예쁜 금발과 태양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처럼 창백하리만큼 흰 피부를 갖고 있었다. 눈은 푸른색이었는데 그레이엄의 눈이 좀 더 연한 아이스블루라면 시란의 눈은 진한 물색으로 아쿠아블루에 가까웠다. 시란은 늘씬한 체형에 상당한 미남이었다. 뭐,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
공부만 하는 샌님 같아 보여 못 쫓아올 줄 알았더니 그는 생각 외로 잘 따라왔다. 햇빛을 받은 그의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었다. 그냥 실내에서 볼 때는 평범한 금발이었는데 빛을 받으니 연녹색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오오, 어떻게 사람 머리카락이 빛 받았다고 바뀌지? 무슨 마법인가?
내가 쳐다보니 시란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부끄러워하는 게 맞겠지? 그러면서도 날 보는 눈빛은 뭐랄까, 뭔가를 엄청 갖고 싶은데 꾹 참고 있는 어린애 같았다.
“이건 선물입니다. 한번 써 보세요.”
은근슬쩍 가까이 온 시란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내 귀에 푹, 하고 뭔가를 찔러 넣었다.
“으아악!!!”
나는 펄쩍 뛰었다. 아, 아파!
“너 뭐하는 놈이야? 고양이한테 귀가 얼마나 민감한지 알아? 죽여 버릴 테다!”
억, 이게 뭐야. 이 옥구슬이 또르르 굴러가는 것 같은 미성은. 설마 내 목소리?
“이게 뭐야? 너 나한테 무슨 짓 했어?”
시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개발한 건데, 마나를 매개로 마법 생물의 말을 인간의 말로 치환시키는 마도구예요. 솔로니 님과 빨리 친해지고 싶어서 만들었어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런 마도구를 뚝딱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고? 이 남자가? 소름이 오싹 돋았다. 나는 완전 희귀한 마법 생물이다. 눈앞에 보이는 건 연구를 엄청 많이 사랑하는 잘생긴 아마, 마법사인 것 같다.
이거 촉이 안 좋아. 좀, 많이 안 좋아.
내가 선물을 받아 줬다고 생각했는지 시란이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아참, 저는 이플란트 대공가에서 보내서 왔어요. 마법사인데, 이번 여정에 필요하실 것 같아 성의를 보인다고 전해 달래요. 저 원래 거기 소속은 아닌데…… 지난번에 연구하다가 해 먹은 게 많아서 이번에 따라가면 그거 탕감해 준다고 해서 왔거든요.”
마법사에서 원 아웃. 이플란트 대공가에서 보냈다는 시점에서 투 아웃.
“사실 안 그래도 오고 싶었어요. 보석고양이는 희귀하거든요. 왜 희귀한지 알아요? 마법사들이 보이는 족족 실험 재료로 써먹어서 그래요.”
시, 실험 재료에서 쓰리 아웃. 꿀꺽,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얘 몰라, 뭐야, 무서워!
우물쭈물 검지를 겹치는 손가락 장난을 하며 말하는 시란의 앞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뒤가 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도망치기가 마땅치 않았다. 내가 왜 여기 왔지, 반성해라, 과거의 나!
“솔로니 님, 전 많은 거 안 바래요. 솔직히 이제 개체 수도 몇 마리 안 남았고…… 굵직한 거 한 방에 막 써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사실 이번 일 끝나면 대공가에 안 돌아가도 되니까, 엘라인 공주님이 다 나으시면 솔로니 님을 저에게 달라고 하려고 했어요. 그냥 평생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솔로니 님. 제게 가끔, 아주 가아끔…… 피랑 살점 조금 주시면 돼요. 물론 치료도 잘 해 드릴게요.”
그러고는 시란은 얼굴을 붉히며 덧붙였다.
“이거…… 고백 맞죠?”
뭐래, 이 미친놈이!
제국으로 가는 여정을 꾸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고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아니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공주가 갑작스럽게 황비 모집에 참가하기 위해 여행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왕국의 모든 눈과 귀가 우리에게로 쏠리는 것 같았다.
사실 그럴 만했던 게 추수감사절은 옛적에 지났고, 창고에는 오곡백과까지는 아닐지라도 먹을 게 그득했다. 원래 파트라 왕국에서는 평민이고 귀족이고 할 것 없이 심심하면 대부분 사냥을 즐겼는데, 지금은 길이 얼어 미끄럽고 추운 날씨에 굶주린 동물들이 포악해질 시기라 목숨 내놓고 사냥할 생각이 아니라면 조용히 벽난로 근처에서 군고구마나 까먹고 핫초코나 홀짝이는 게 여러모로 나을 때였다.
그렇게 사람들이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이는 시기였다. 사람들이 모이면 제일 재미있는 게 뭐다? 뒷담화가 아니겠는가. 본인 없으면 나라님 욕도 한댔는데. 공주의 나이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생겼을지, 후견인은 누가 될지, 제국에 함께 갈 일행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지 등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니 듣는 재미도 쏠쏠할 게 틀림없었다.
들뜬 민심과는 달리 궁정 내의 각료들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해쓱해졌다. 과중한 업무 강도 탓이었다. 무려 왕위 계승 서열 1위의 행차였고, 마차로도 두 달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제국이 강성하다고는 하지만 무리하게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에 아직 중앙으로 통하는 대로조차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았고 변두리는 치안 또한 좋지 않았다. 제국이 구차하게 황제를 팔아 황비 모집 참가비 명목으로 조공을 쓸어 담으려는 이유는 돈 들어갈 데가 많아서이기도 했다.
한 달 전, 국왕은 주요 관료들을 소집했다. 시각은 저녁과 새벽 사이로 전쟁이 나지 않는 한 유례없는 파격적인 부름이었다. 한밤중에 불려 온 관료들은 이유를 알지 못해 좁은 회의실에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나는 일찌감치 회의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나중에 그레이엄이 따로 내게 이야기를 해 주겠지만, 직접 보는 재미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국왕이 곧 도착했다. 관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국왕은 짧은 인사를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크흐, 그게 있어야 되는데. 왜 있잖아. 부드럽고 폭신폭신하고 짭짤하고 영화 볼 때 빠질 수 없는 거, 그거. 진짜 좋은 건데, 딱 집어 말할 수도 없고.
“엘라인 공주를 제국의 황비 후보로 보내려 하오.”
왕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말 그대로 폭탄이었다. 돈 먹는 폭탄. 특히 재정 담당 대신들의 얼굴이 단박에 흙빛으로 변했다.
공주를 보내는 것은 매년 의례적으로 적당한 귀족 자제와 함께 조공을 보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작년에 어느 귀족 가문의 차녀를 보내는데도 나라가 휘청한다며 재무 대신이 울상을 짓지 않았던가.
공주가 간다고 하면 호위 인력에 전속 시녀들, 요리 및 잡무를 볼 인원만 해도 한 다스였다. 거기다 공주니까 호위는 적어도 기사 급이 두 자리 이상이고. 빌려야 하는 말과 마차, 숙박까지 생각하면 이 작은 나라는 공주 하나 보내려고 왕궁 기둥뿌리라도 뽑아 팔아야 할 거다.
입만 뻐끔대는 재무 대신을 향해 국왕이 슬그머니 말을 보탰다.
“이번에 발견한 다이아몬드 광산 있지 않소?”
순간 재무 대신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게 보였다. 거상들에게 단기 채굴권을 보장하고 돈을 빌리면 이 손실을 메꿀 수 있을까? 기한은 언제까지로 잡지? 이자율은? 아니, 애초에 공주님을 왜 제국에 보내는 거야?
“그거 지참금으로 보낼 거요.”
재무 대신의 얼굴에서 미친! 하는 소리가 육성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우와, 표정으로 욕하는 거 나 이때 처음 봤다.
재무 대신은 소설 속이라 그런지 나이 일흔은 잡수셨을 것 같은 할아버지였는데도 피부가 갓 태어난 아기 피부처럼 뽀얬다. 그런데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왕이 입을 뗀 단 몇 초 만에 소설 버프가 사라지고 검버섯이 피어나는 게 실시간으로 보일 정도였다.
내가 저 대신이었으면 당장 국왕의 목을 졸라 버렸을 거다. ‘내 꿀피부 돌려내!’ 이러면서.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왕이 헛바람이 단단히 들어서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하는구나 싶었겠지.
재무 대신이 무릎을 꿇으며 ‘저언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기술을 선보이려는데, 어디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공주님께서도 이제 결혼하실 적령기가 되었지요. 제국의 황제는 공주님의 훌륭한 반려가 되어 주실 겁니다. 공주님의 귀하신 행차에 저희 대공가에서도 성의를 다하겠습니다.”
이플란트 대공가의 수장이자 파트라 왕국의 유일한 대공, 그루피 대공이었다. 연한 물빛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겨 빗은 그는 가벼운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철벽이 느껴졌다.
왕이 그를 바라보았고, 잠시 둘의 시선이 얽혔다. 둘은 장인과 사위 사이였으나 또한 최악의 정적(政敵)이기도 했다. 그루피 대공은 왕의 처를 독살했고, 반역죄를 빌미로 삼아 그녀의 가문을 멸족시켰다.
그렇게 들어앉은 여자가 이플란트 대공가의 차녀 아나이스 왕비였다. 장인이 된 대공에게 답례하고자 국왕은 새로이 아내가 된 여자의 남동생을 사고로 위장하여 왕의 사냥터에서 활로 쏘아 죽였다.
처남을 죽인 날 왕은 나를 찾았다. 그루피 대공, 그자만은 아무래도 좋아지지 않는다고, 그레이엄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푸념하듯 말했다. 그 쓸쓸하면서도 슬픈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왕이 웃었다.
“공작이 생각하기에도 이 결혼이 좋은 결정이라고 같소?”
공작이 대답했다.
“전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신하는 따르는 것이 도리이겠지요. 투자한 만큼 큰 이득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겠습니다.”
모든 책임을 그레이엄에게로 돌리는 실로 정치적인 대답이었다. 어떤 이유든 간에 결혼이 엎어지면 국왕은 그나마도 없던 자신의 지지 기반을 잃게 될 것이다.
국왕의 눈이 잠시 나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흔들림 없는 눈빛이었다.
“대공의 호의는 감사히 받겠소. 최대한으로 원조해 준다면 더욱 좋겠지. 그럼 이제 큰 문제는 없겠군.”
왕의 의지는 단호했고, 대공가의 지원이 약속되자 그제야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모자란 여행 경비는 대공가가 보이지 않는 압력을 행사해 귀족 가문마다 각출했다고 들었다.
덕분에 한 달 여 동안 왕궁의 인력들은 열심히 경비를 모으고 인원을 고르고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했다. 관리들은 업무 과다에 시달렸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초대형 폭탄은 왕궁을 괴멸 직전으로 몰고 갔다.
나이 먹을 대로 먹은 관료들이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왕궁을 시체처럼 걸어 다니는 것을 보는 것도 이제는 싫증이 난다. 뭐,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니까. 나이 들어 고생하는 건 복에 겨워 넘치는 거 아니겠어?
나는 매우 피곤해하는 관료들을 생각해 깊은 밤, 가끔 관료들의 집무실에 놀러가 주었다. 나는 회복 마법의 정수이자 꼬랑내 나는 신발장 안의 방향제 같은 거였다. 작정을 하고 회복 마법을 폴폴 흘리는 나와 잠깐 있으면 핫식스 여섯 병을 원샷 한 것처럼 몸이 개운해지고 나를 오랫동안 곁에 두면 역류성 식도염, 치질, 변비 같은 각종 고질병이 나았다.
왼쪽에 있는 빈 종이에 손바닥에 땀나게 뭔가를 적고 또 그것을 오른쪽으로 옮겨 놓는 관리들을 보다가 나는 기지개를 폈다. 나는 고양이다. 고양이는 야행성이다.
몸이 뻐근한 게 가만히 앉아 있기는 뭐해서 대충 옆에 쌓여 있는 서류들을 툭툭 건드리며 놀았다. 서류들은 어쩜 저렇게 높이, 빽빽하게 잘 쌓아 두었을까 싶을 정도로 높이 쌓여 있었고, 그건 내가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툭, 친 앞발 한 방에 와장창, 펜을 꽂아 놓은 통이 바닥에 엎어지고 뒤차기 한 방에 잉크병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책상에서 서류 더미로, 다시 그것을 박차고 나가 책장으로 뛰어올랐다. 서쪽에서 들여왔다는 대형 도자기가 서서히 기울어지며 바닥에 부딪쳤다.
와장창!
휘익! 우다다다! 다다닥!
야호, 씬난다!
한바탕 신나게 우다다를 하고 나니 제법 후련했다. 돌아 나오면서 바라본 집무실은 폐허가 따로 없었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서류 더미들은 공중을 날았다가 하나둘 차분히 바닥에 쌓여 갔다. 잉크병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까만 속을 비싼 카페트 위에 게워 내고 있었다. 관료들은 혼이 나간 표정으로 내 등을 바라보았다.
어허, 앉아만 있으면 골병들어요. 주기적으로 몸도 움직이고 스트레칭도 해야 허리디스크가 안 온다니까?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거야. 음, 감사할 필요까진 없고.
결코 바빠진 그레이엄이 엘라인과의 티파티를 멈추어서 그런 게 아니다. 정말로 진짜다.
나도 제법 바빴다. 낮에는 엘라인 곁에서 잠을 잤고 밤에는 회복 마법을 몸 안에 박아 넣었다. 엘라인은 이제 한두 마디 정도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오랫동안 궁을 비우는 만큼 회복 마법을 내 안에 충분히 채워 놓아야 했다. 궁정 마법사가 밤새 내게 자신의 마력과 회복 주문들을 남김없이 쏟아붓고는 코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따분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내가 가끔 불쌍한 관료들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그들의 귀중한 마력과 주문을 쓰고 있다는 건 비밀이었다. 비밀 있는 여자가 신비로워 보인다잖아.
나의 신비로움을 지켜 주기 위해 또 한 명의 할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아, 저러다 골로 가겠는데.
내가 태평하게 그 꼴을 감상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렇다, 왕이나 공주가 아니라 내 손님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솔로니 백작부인. 저는 시란이라고 합니다.”
기껏해야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그는 예의 바르게 나를 대했지만 이상하게도 난 되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예법은 배웠지만 속성으로 배워서 아무 데나 막 갖다 붙이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 아니, 애초에 고양이를 처음 보면 머리나 쓰다듬지 자기소개 하면서 악수하자고 손 내밀지는 않잖아. 나에게 한 인사 자체는 완벽했다. 고양이에게 하기에는 과해서 그렇지.
나는 팽 코웃음을 치고는 정원을 향해 우아하게 걸어갔다. 나사 빠진 애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정원을 산책하면서 새를 사냥하는 놀이를 하는 게 훨씬 즐거울 것 같다.
그는 예쁜 금발과 태양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처럼 창백하리만큼 흰 피부를 갖고 있었다. 눈은 푸른색이었는데 그레이엄의 눈이 좀 더 연한 아이스블루라면 시란의 눈은 진한 물색으로 아쿠아블루에 가까웠다. 시란은 늘씬한 체형에 상당한 미남이었다. 뭐,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
공부만 하는 샌님 같아 보여 못 쫓아올 줄 알았더니 그는 생각 외로 잘 따라왔다. 햇빛을 받은 그의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었다. 그냥 실내에서 볼 때는 평범한 금발이었는데 빛을 받으니 연녹색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오오, 어떻게 사람 머리카락이 빛 받았다고 바뀌지? 무슨 마법인가?
내가 쳐다보니 시란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부끄러워하는 게 맞겠지? 그러면서도 날 보는 눈빛은 뭐랄까, 뭔가를 엄청 갖고 싶은데 꾹 참고 있는 어린애 같았다.
“이건 선물입니다. 한번 써 보세요.”
은근슬쩍 가까이 온 시란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내 귀에 푹, 하고 뭔가를 찔러 넣었다.
“으아악!!!”
나는 펄쩍 뛰었다. 아, 아파!
“너 뭐하는 놈이야? 고양이한테 귀가 얼마나 민감한지 알아? 죽여 버릴 테다!”
억, 이게 뭐야. 이 옥구슬이 또르르 굴러가는 것 같은 미성은. 설마 내 목소리?
“이게 뭐야? 너 나한테 무슨 짓 했어?”
시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개발한 건데, 마나를 매개로 마법 생물의 말을 인간의 말로 치환시키는 마도구예요. 솔로니 님과 빨리 친해지고 싶어서 만들었어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런 마도구를 뚝딱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고? 이 남자가? 소름이 오싹 돋았다. 나는 완전 희귀한 마법 생물이다. 눈앞에 보이는 건 연구를 엄청 많이 사랑하는 잘생긴 아마, 마법사인 것 같다.
이거 촉이 안 좋아. 좀, 많이 안 좋아.
내가 선물을 받아 줬다고 생각했는지 시란이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아참, 저는 이플란트 대공가에서 보내서 왔어요. 마법사인데, 이번 여정에 필요하실 것 같아 성의를 보인다고 전해 달래요. 저 원래 거기 소속은 아닌데…… 지난번에 연구하다가 해 먹은 게 많아서 이번에 따라가면 그거 탕감해 준다고 해서 왔거든요.”
마법사에서 원 아웃. 이플란트 대공가에서 보냈다는 시점에서 투 아웃.
“사실 안 그래도 오고 싶었어요. 보석고양이는 희귀하거든요. 왜 희귀한지 알아요? 마법사들이 보이는 족족 실험 재료로 써먹어서 그래요.”
시, 실험 재료에서 쓰리 아웃. 꿀꺽,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얘 몰라, 뭐야, 무서워!
우물쭈물 검지를 겹치는 손가락 장난을 하며 말하는 시란의 앞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뒤가 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도망치기가 마땅치 않았다. 내가 왜 여기 왔지, 반성해라, 과거의 나!
“솔로니 님, 전 많은 거 안 바래요. 솔직히 이제 개체 수도 몇 마리 안 남았고…… 굵직한 거 한 방에 막 써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사실 이번 일 끝나면 대공가에 안 돌아가도 되니까, 엘라인 공주님이 다 나으시면 솔로니 님을 저에게 달라고 하려고 했어요. 그냥 평생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솔로니 님. 제게 가끔, 아주 가아끔…… 피랑 살점 조금 주시면 돼요. 물론 치료도 잘 해 드릴게요.”
그러고는 시란은 얼굴을 붉히며 덧붙였다.
“이거…… 고백 맞죠?”
뭐래, 이 미친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