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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난 눈앞의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지 나를 보면서 눈을 반짝이는 게 아주 또라이 중에서도 상또라이다웠다. 네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그 모든 생각들이 머리, 가슴, 배, 똥꼬 끝까지 몽땅 다 잘못됐다고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사고 구조가 너무 혁신적이라 어디서부터 잘못됐다고 말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취업 준비 하다가 대기업에 붙어서 3차로 임원 면접 들어갔는데 제일 개기름 좔좔 흐르는 임원에게서 남자 친구야 나야, 라는 질문을 들은 기분이랄까. 아아, 고구마 백 개 먹은 것 같은 이 부담감이여.
“저기…… 저 고백했으니까 오늘부터 1일이죠? 백작부인의 몸도 마음도 다 제 거죠? 첫날이니까 조금만 가져갈게요. 피 한 컵과 뒷다리 하나 정도 어떨까요?”
누구 멋대로 1일이야? 몸과 마음이 뭐?
난 정말이지, 이 순수하게 미친놈에게 고백과 연애를 독창적으로 정의해 준 또 다른 미친놈의 모가지를 붙잡고 덜렁덜렁 흔들어 주고 싶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핵폭탄을 멋대로 지상에 풀어놓으면 안 되지!
아무래도 시란의 눈깔을 보아하니 내가 표적이 된 것 같다. 뉴클리어 런치 디텍티드. 상큼한 이명이 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내 이마 한가운데에 빨간 점 찍은 것 같은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소름끼치니까.
시란은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결론을 냈다. 전형적인 스토커 집착남의 일방적인 사고였다. 스토킹으로 고민하는 어떤 네이트판 언니의 글에 ‘시원하게 욕해 주고 인연 끊으면 되지. 왜 그러고 있음? 가만히 있으면 만만하게 보고 더 달려 듬.’이라고 댓글을 달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당장 달려가서 댓글 다는 내 뒤통수를 아주 아프게 때려 주고 싶었다. 언니, 미안해. 내가 실언했어.
시란이 손을 들자 왼손에서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게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조금만 참아요. 죽지는 않으니까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시란이 다가오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저런 말을 웃으면서 진심을 담아 할 수 있지? 어떻게 저렇게 순수할 수 있는 거야?
나는 내 발톱을 사랑한다. 하얗고 일견 투명하게도 보이는 내 발톱은 요즘 들어 발톱깎이에 무참하게 잘려 나가기는 했지만 잘만 기르면 아름다운 초승달 모양으로 빛났다. 내가 성체가 된다면, 그 경도는 웬만한 검보다 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발톱이고 뭐고 그냥 뒤돌아 도망가고 싶었다. 내 발톱이 아무리 단단해도 저 흉흉하게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과 부딪치면 내 발톱 따위는 그냥 뎅겅할 것 같은데. 아니, 발톱이 아니라 앞발이 통째로 쓱 잘려 나갈 것 같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재빨리 도망이라도 쳤으면 좋았을 텐데 아까부터 다리가 땅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미친 꽃 또라이를 누가 좀 말려 줘! 미친놈아, 사랑은 쌍방통행이라고!
시란의 손이 위에서 아래로 나를 향해 뻗어져 왔다. 뭐 이리 빨라! 짐승의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그것은 내 뒷다리를 정확히 조준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펄쩍 뛰었다.
우, 움직였다! 난 환호 대신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잠깐만! 나 아직 고백 못 받았어, 우리 1일 아니야! 이건 무효야, 무효!”
“무효요?”
시란은 내 말이 의외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검은 기운을 거둬들였다.
“왜 무효예요? 난 고백했고, 그럼 사귀는 거잖아요.”
나는 빠르게 두뇌를 풀회전 했다. 여기서 말 잘해야 했다. 너무 절박하지 않게, 세 살 먹은 꼬꼬마도 이해할 수 있도록.
“그, 그거. 고백에 꼭 필요한 게 없어. 고백할 때는 꽃이 필요해. 그리고 반지도! 그게 없으면 여자한테 하는 고백은 무효야!”
신세대의 뉴 여성이 들으면 무슨 여성 비하적 표현이냐며 눈에 쌍심지를 켤 것 같은 발언이었지만, 다행히 시란에게는 먹히는 것 같았다. 미안해, 언니들. 지금은 당장 내가 죽게 생겼다고!
“과연, 꽃과 반지를 주고 목숨을 사는 계약 관계인 거군요. 반지는 어떤 아티팩트인가요? 아무래도 대상이 고급질수록 더 귀한 아티팩트를 바쳐야겠죠?”
“네, 그렇죠. 고양……이보다도 더 이해력이 좋아…… 으시네요. 잘 이해하고 계세요.”
고양이 풀 뜯어 먹는 소리 하고 있네, 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말을 바꿨다. 난 소중하니까. 은근슬쩍 존댓말도 썼다.
체계적으로 미친놈이라 그런지 내가 한 헛소리를 그는 논리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시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우음, 아티팩트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자, 잠깐!”
나는 급하게 말을 막았다. 야 이, 그건 반칙이지!
내 뒷다리의 안녕을 위해 반지는 최대한 구하기 힘들어야 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면 더 좋고. 난 머리를 쥐어짰다. 불가능한 일, 불가능한 일.
“만들어 낸 정도로는 안돼요. 저는 세상에서 몇 안 남은 보석고양이니까, 웬만한 것은 받을 수 없어요. 음, 그렇죠. 적어도 드래곤의 아티팩트 정도는 되어야 해요.”
“내가 만든 것도 성능 좋은데요.”
시란이 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흰 뺨에 바람을 넣어 볼록하게 부풀렸다. 서, 설마 삐진 거야? 응?
“드래곤은 인간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환상의 마수 아닌가요? 우리 사부님도 드래곤은 본 적이 없다고 하셨어요.”
시란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러니까 고백이 이뤄지기 힘든 거죠. 혹시 주변에 고백해서 이뤄졌다는 사람 있나요?”
시란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없어요.”
유레카! 그래, 미친놈 주변에는 미친놈만 있을 줄 알았지. 그러니까 나한테 고백 어쩌고 하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라고. 난 너 같은 미친놈이랑 몸 버려 가며 오래오래 동고동락할 생각 없거든.
고마워, 섹시한 내 뇌야. 덕분에 내 귀중한 피 한 컵과 뒷다리를 구했어.
“고백이 그렇게 어려운 거면, 할 수 없죠.”
시란은 도로 검은 마나를 팔에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좀 아깝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분해해 놓고 얼려 뒀다 큰 건에 써먹을게요.”
하지 마, 미친놈아!
고속 마법을 따블로 걸었는지 시란은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와 검은 기운을 흩뿌렸다. 나는 직감했다. 이건 피할 수 없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시란이 다가오는 모습이 천천히 내 머리에 박혀 왔다.
채애애앵!
익숙한 형체가 나와 시란의 사이를 막아섰다. 알렉스였다. 그의 등이 이렇게 든든하고 널찍하게 보일 때가 없었다. 그의 투박한 검이 돌 긁는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지만 다행히 부러지거나 하지 않고 시란의 검은 기운과 팽팽하게 맞섰다.
나는 얼이 빠진 채로 생각했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인데.
아무리 마법으로 몸을 강화했다고 하지만 상대는 검술의 달인인 소드마스터였다. 애초에 싸우는 방법부터 다른 것이다. 알렉스가 그를 상대하자 시란은 점차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시란이 눈에 띄게 당황한 게 보였다. 희한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봤지? 어디서?
시란의 검은 기운을 피해 몸을 숙이며 알렉스가 시란의 발을 걸었다.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진 시란은 일어나지 못했다. 시란의 목에 알렉스의 검이 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칼을 든 알렉스 경의 얼굴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는 늘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가끔은 살짝 웃기도 했다. 이렇게 냉정하고 차가운 알렉스는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새삼 낯설었다.
아, 생각났다. 시란이 누구인지.
그는 엑스트라 1이었다. 서브 남주인 알렉스와 대공이 만나는 장면에 등장했던. 이 미친놈은 마성의 게이에게도 발정해서 사랑하니까 죽이겠다고(왜 꼭 사랑을 죽음과 연결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달려드는데, 그걸 막아선 게 알렉스였다.
아이고, 이런 데서 시란이 죽어 버리면 공략이 왕창 꼬이는데! 엘라인 공주가 무사히 황비가 되려면 대공과 만났을 때 시란이 꼭 필요하다고! 나는 방금 전까지 엄청난 위기에 몰렸던 것도 잊고 발을 동동 굴렀다.
“혹시 시란 님이 아니십니까? 아, 알렉스 경도 계셨군요. 반갑습니다, 알렉스 경. 오랜만에 뵙지요? 솔로니 백작부인도 계셨군요! 잘됐네요.”
온화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회색 머리카락에 물빛 눈동자의 사람 좋아 보이는 남성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마구 쏘아붙이고 싶었다. 이 꼬라지 안 보여? 잘 되긴 뭐가 잘돼!
“대련 중이셨나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시란 님께 볼일이 있어서요. 시란 님, 전 피스 아스티어 자작이라고 합니다. 시란 님과 함께 공주님의 여정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일단은 외교 담당이지만, 실상은 얼굴마담에 허리 굽히는 게 일상인 말단 공무원이랍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태평한 말에 흉흉하던 분위기가 어쩐지 훈훈하게 바뀌었다. 피스 자작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별말 하지 않았는데도 평화의 햇살 같은 게 그에게서 마구 뿜어져 나와서, 강제로 평화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도 무슨 마법 같은 건가? 피이스으!
“아, 시란 님께서 다른 분들께 본인 소개를 안 하신 것 같네요. 이쪽은 마법사 시란 님이십니다. 이플란트 가문에서 보내 주셨죠. 웬만한 공격과 방어 마법에도 능통하시고, 회복 마법도 왕국 내에서 따라올 분이 없다고 합니다. 아주 귀중한 인재시지요. 시란 님, 이쪽은 알렉스 경입니다. 어린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된 재능 있는 기사이십니다. 오랜 시간 공주님을 모셔 왔고 당연히 이번 일정도 함께하시죠. 이런, 다들 재능 있는 분들이시군요.”
수, 수다스럽다. 그리고 묘하게 설명을 엄청나게 하고 있어!
아무튼 피스 자작은 시간이 얼마 없다며 시란의 팔을 붙잡고 저만치 멀리 가 버렸다. 볼일 있다는 게 시란을 데려가는 거였나. 시란도 내게서 볼일을 다 봤는지 피스 자작의 손에 순순히 끌려가 주고 있었다. 다신 오지 마라, 퉤퉤퉤!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앞에는 알렉스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묘하게 몸에서 힘이 빠져서 나는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철퍼덕 앉았다. 알렉스가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말을 걸었다.
“이제야 빼놓은 정신을 챙긴 것 같군. 괜찮나, 솔로니?”
어, 응? 나? 아니, 나 괜찮은지 물어보려고 그러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나 괜찮아. 어디 베인 데도 없고.”
무심코 대답하는데 알렉스의 표정이 묘했다. 그가 나를 덥석 안아 들었다.
“솔로니, 말을 할 수 있나? 언제부터지? 원래 가능한 건가?”
“아…… 아냐! 방금 만난 마법사가 마도구라면서 내 귀에 뭘 박아 놓고 간 이후로 말할 수 있게 됐어. 이거 되게 신기하다? 그치?”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래, 나 완전 괜찮고 말짱하고 말도 지금부터 하게 된 거니까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보지 좀 마. 심장 떨려 죽겠어. 와, 진짜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숨 막히게 잘생겼잖아.
“피가 난다.”
알렉스의 손이 조심스럽게 마도구가 박힌 쪽의 귀를 손으로 쓸었다. 마…… 만지지 마! 내 귀는 진짜로 정말로 예민하다고.
내 분홍빛 귀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알렉스가 내 귀의 상처를 핥았다. 그러니까, 할짝 하고. 이…… 무슨! 미친!
“무, 무슨 짓이야, 알렉스!”
“소독이다. 그나저나 목소리 좋군.”
“뭐?”
“칭찬이다.”
아니, 칭찬은 고마운데. 침 바른다고 소독 같은 거 안 된다고. 아, 나는 왜 자꾸 저 얼굴에 눈이 박히지. 진짜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 탓이다. 난 종을 뛰어넘은 사랑 같은 건 전혀, 저언혀 흥미 없다고!
“말이 통하는 건 잘됐군.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마라. 지난번 시녀들의 사건처럼, 아직은 사람들을 방심하게 만드는 네 역할이 필요해.”
“말 안 해도 알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나.”
나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몰라서 물어? 아니, 나도 모르니 대답을 못 하겠다. 그냥 좀 지금 내가 감정 과잉인 것 같아. 그동안 너무 편안한 왕궁 생활에 안주했나 봐. 죽을 뻔하고 귀 뽀뽀 좀 받았다고 막 감정이 널을 뛰네.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후우, 침착하자. 침착하자.
“소리 안 지를 테니까 내려 줘.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야? 나 되게 도도하다고? 아무한테나 막 안기는 그런 여자 아니라고?”
“여자라고?”
알렉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괜히 뜨끔해서 나는 급히 말을 바꿨다.
“아니 여자가 아니라, 음, 여자 고양이! 그러니까 암컷 고양이!”
알렉스는 내가 한 말을 듣고 뭐가 그리 의심스러운지 내 코에 자기 코가 스칠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마주 댔다. 흐악, 숨 막힌다. 나 누가, 그것도 남자가 나 안고 이렇게 가까이 얼굴마주치고 그러는 거 진짜 처음이란 말야.
그러지 마, 알렉스. 나는 저쪽 세계에서도 여중, 여고, 여대 트리 탔다고. 모태 솔로라고. 그러니까 나 좀 놔줘, 엉엉.
나는 고양이 특유의 기술, 연체동물 흉내 내기를 써서 알렉스의 품을 빠져나왔다. 백날 나 안아 봐라, 내가 가만히 안겨 있나. 아니, 백 번 안으라는 말은 아니고. 어휴, 오늘 왜 이렇게 덥냐.
알렉스는 내가 빠져나간 품이 허전했는지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 뭔가 되게 부끄럽고 무안하니, 그래, 지금은 그걸 해야 한다. 도망치자!
엘, 엘라인 공주에게 가야지. 나는 엘라인 공주를 위한 치료제니까.
나는 우다다다 달렸다. 내가 지금 달리는 것은 우다다를 하는 것이며,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며 오글거려서 그러는 게 아니다.
아, 정말이라니까!
난 눈앞의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지 나를 보면서 눈을 반짝이는 게 아주 또라이 중에서도 상또라이다웠다. 네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그 모든 생각들이 머리, 가슴, 배, 똥꼬 끝까지 몽땅 다 잘못됐다고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사고 구조가 너무 혁신적이라 어디서부터 잘못됐다고 말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취업 준비 하다가 대기업에 붙어서 3차로 임원 면접 들어갔는데 제일 개기름 좔좔 흐르는 임원에게서 남자 친구야 나야, 라는 질문을 들은 기분이랄까. 아아, 고구마 백 개 먹은 것 같은 이 부담감이여.
“저기…… 저 고백했으니까 오늘부터 1일이죠? 백작부인의 몸도 마음도 다 제 거죠? 첫날이니까 조금만 가져갈게요. 피 한 컵과 뒷다리 하나 정도 어떨까요?”
누구 멋대로 1일이야? 몸과 마음이 뭐?
난 정말이지, 이 순수하게 미친놈에게 고백과 연애를 독창적으로 정의해 준 또 다른 미친놈의 모가지를 붙잡고 덜렁덜렁 흔들어 주고 싶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핵폭탄을 멋대로 지상에 풀어놓으면 안 되지!
아무래도 시란의 눈깔을 보아하니 내가 표적이 된 것 같다. 뉴클리어 런치 디텍티드. 상큼한 이명이 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내 이마 한가운데에 빨간 점 찍은 것 같은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소름끼치니까.
시란은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결론을 냈다. 전형적인 스토커 집착남의 일방적인 사고였다. 스토킹으로 고민하는 어떤 네이트판 언니의 글에 ‘시원하게 욕해 주고 인연 끊으면 되지. 왜 그러고 있음? 가만히 있으면 만만하게 보고 더 달려 듬.’이라고 댓글을 달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당장 달려가서 댓글 다는 내 뒤통수를 아주 아프게 때려 주고 싶었다. 언니, 미안해. 내가 실언했어.
시란이 손을 들자 왼손에서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게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조금만 참아요. 죽지는 않으니까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시란이 다가오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저런 말을 웃으면서 진심을 담아 할 수 있지? 어떻게 저렇게 순수할 수 있는 거야?
나는 내 발톱을 사랑한다. 하얗고 일견 투명하게도 보이는 내 발톱은 요즘 들어 발톱깎이에 무참하게 잘려 나가기는 했지만 잘만 기르면 아름다운 초승달 모양으로 빛났다. 내가 성체가 된다면, 그 경도는 웬만한 검보다 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발톱이고 뭐고 그냥 뒤돌아 도망가고 싶었다. 내 발톱이 아무리 단단해도 저 흉흉하게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과 부딪치면 내 발톱 따위는 그냥 뎅겅할 것 같은데. 아니, 발톱이 아니라 앞발이 통째로 쓱 잘려 나갈 것 같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재빨리 도망이라도 쳤으면 좋았을 텐데 아까부터 다리가 땅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미친 꽃 또라이를 누가 좀 말려 줘! 미친놈아, 사랑은 쌍방통행이라고!
시란의 손이 위에서 아래로 나를 향해 뻗어져 왔다. 뭐 이리 빨라! 짐승의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그것은 내 뒷다리를 정확히 조준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펄쩍 뛰었다.
우, 움직였다! 난 환호 대신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잠깐만! 나 아직 고백 못 받았어, 우리 1일 아니야! 이건 무효야, 무효!”
“무효요?”
시란은 내 말이 의외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검은 기운을 거둬들였다.
“왜 무효예요? 난 고백했고, 그럼 사귀는 거잖아요.”
나는 빠르게 두뇌를 풀회전 했다. 여기서 말 잘해야 했다. 너무 절박하지 않게, 세 살 먹은 꼬꼬마도 이해할 수 있도록.
“그, 그거. 고백에 꼭 필요한 게 없어. 고백할 때는 꽃이 필요해. 그리고 반지도! 그게 없으면 여자한테 하는 고백은 무효야!”
신세대의 뉴 여성이 들으면 무슨 여성 비하적 표현이냐며 눈에 쌍심지를 켤 것 같은 발언이었지만, 다행히 시란에게는 먹히는 것 같았다. 미안해, 언니들. 지금은 당장 내가 죽게 생겼다고!
“과연, 꽃과 반지를 주고 목숨을 사는 계약 관계인 거군요. 반지는 어떤 아티팩트인가요? 아무래도 대상이 고급질수록 더 귀한 아티팩트를 바쳐야겠죠?”
“네, 그렇죠. 고양……이보다도 더 이해력이 좋아…… 으시네요. 잘 이해하고 계세요.”
고양이 풀 뜯어 먹는 소리 하고 있네, 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말을 바꿨다. 난 소중하니까. 은근슬쩍 존댓말도 썼다.
체계적으로 미친놈이라 그런지 내가 한 헛소리를 그는 논리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시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우음, 아티팩트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자, 잠깐!”
나는 급하게 말을 막았다. 야 이, 그건 반칙이지!
내 뒷다리의 안녕을 위해 반지는 최대한 구하기 힘들어야 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면 더 좋고. 난 머리를 쥐어짰다. 불가능한 일, 불가능한 일.
“만들어 낸 정도로는 안돼요. 저는 세상에서 몇 안 남은 보석고양이니까, 웬만한 것은 받을 수 없어요. 음, 그렇죠. 적어도 드래곤의 아티팩트 정도는 되어야 해요.”
“내가 만든 것도 성능 좋은데요.”
시란이 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흰 뺨에 바람을 넣어 볼록하게 부풀렸다. 서, 설마 삐진 거야? 응?
“드래곤은 인간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환상의 마수 아닌가요? 우리 사부님도 드래곤은 본 적이 없다고 하셨어요.”
시란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러니까 고백이 이뤄지기 힘든 거죠. 혹시 주변에 고백해서 이뤄졌다는 사람 있나요?”
시란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없어요.”
유레카! 그래, 미친놈 주변에는 미친놈만 있을 줄 알았지. 그러니까 나한테 고백 어쩌고 하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라고. 난 너 같은 미친놈이랑 몸 버려 가며 오래오래 동고동락할 생각 없거든.
고마워, 섹시한 내 뇌야. 덕분에 내 귀중한 피 한 컵과 뒷다리를 구했어.
“고백이 그렇게 어려운 거면, 할 수 없죠.”
시란은 도로 검은 마나를 팔에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좀 아깝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분해해 놓고 얼려 뒀다 큰 건에 써먹을게요.”
하지 마, 미친놈아!
고속 마법을 따블로 걸었는지 시란은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와 검은 기운을 흩뿌렸다. 나는 직감했다. 이건 피할 수 없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시란이 다가오는 모습이 천천히 내 머리에 박혀 왔다.
채애애앵!
익숙한 형체가 나와 시란의 사이를 막아섰다. 알렉스였다. 그의 등이 이렇게 든든하고 널찍하게 보일 때가 없었다. 그의 투박한 검이 돌 긁는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지만 다행히 부러지거나 하지 않고 시란의 검은 기운과 팽팽하게 맞섰다.
나는 얼이 빠진 채로 생각했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인데.
아무리 마법으로 몸을 강화했다고 하지만 상대는 검술의 달인인 소드마스터였다. 애초에 싸우는 방법부터 다른 것이다. 알렉스가 그를 상대하자 시란은 점차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시란이 눈에 띄게 당황한 게 보였다. 희한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봤지? 어디서?
시란의 검은 기운을 피해 몸을 숙이며 알렉스가 시란의 발을 걸었다.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진 시란은 일어나지 못했다. 시란의 목에 알렉스의 검이 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칼을 든 알렉스 경의 얼굴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는 늘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가끔은 살짝 웃기도 했다. 이렇게 냉정하고 차가운 알렉스는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새삼 낯설었다.
아, 생각났다. 시란이 누구인지.
그는 엑스트라 1이었다. 서브 남주인 알렉스와 대공이 만나는 장면에 등장했던. 이 미친놈은 마성의 게이에게도 발정해서 사랑하니까 죽이겠다고(왜 꼭 사랑을 죽음과 연결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달려드는데, 그걸 막아선 게 알렉스였다.
아이고, 이런 데서 시란이 죽어 버리면 공략이 왕창 꼬이는데! 엘라인 공주가 무사히 황비가 되려면 대공과 만났을 때 시란이 꼭 필요하다고! 나는 방금 전까지 엄청난 위기에 몰렸던 것도 잊고 발을 동동 굴렀다.
“혹시 시란 님이 아니십니까? 아, 알렉스 경도 계셨군요. 반갑습니다, 알렉스 경. 오랜만에 뵙지요? 솔로니 백작부인도 계셨군요! 잘됐네요.”
온화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회색 머리카락에 물빛 눈동자의 사람 좋아 보이는 남성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마구 쏘아붙이고 싶었다. 이 꼬라지 안 보여? 잘 되긴 뭐가 잘돼!
“대련 중이셨나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시란 님께 볼일이 있어서요. 시란 님, 전 피스 아스티어 자작이라고 합니다. 시란 님과 함께 공주님의 여정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일단은 외교 담당이지만, 실상은 얼굴마담에 허리 굽히는 게 일상인 말단 공무원이랍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태평한 말에 흉흉하던 분위기가 어쩐지 훈훈하게 바뀌었다. 피스 자작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별말 하지 않았는데도 평화의 햇살 같은 게 그에게서 마구 뿜어져 나와서, 강제로 평화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도 무슨 마법 같은 건가? 피이스으!
“아, 시란 님께서 다른 분들께 본인 소개를 안 하신 것 같네요. 이쪽은 마법사 시란 님이십니다. 이플란트 가문에서 보내 주셨죠. 웬만한 공격과 방어 마법에도 능통하시고, 회복 마법도 왕국 내에서 따라올 분이 없다고 합니다. 아주 귀중한 인재시지요. 시란 님, 이쪽은 알렉스 경입니다. 어린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된 재능 있는 기사이십니다. 오랜 시간 공주님을 모셔 왔고 당연히 이번 일정도 함께하시죠. 이런, 다들 재능 있는 분들이시군요.”
수, 수다스럽다. 그리고 묘하게 설명을 엄청나게 하고 있어!
아무튼 피스 자작은 시간이 얼마 없다며 시란의 팔을 붙잡고 저만치 멀리 가 버렸다. 볼일 있다는 게 시란을 데려가는 거였나. 시란도 내게서 볼일을 다 봤는지 피스 자작의 손에 순순히 끌려가 주고 있었다. 다신 오지 마라, 퉤퉤퉤!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앞에는 알렉스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묘하게 몸에서 힘이 빠져서 나는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철퍼덕 앉았다. 알렉스가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말을 걸었다.
“이제야 빼놓은 정신을 챙긴 것 같군. 괜찮나, 솔로니?”
어, 응? 나? 아니, 나 괜찮은지 물어보려고 그러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나 괜찮아. 어디 베인 데도 없고.”
무심코 대답하는데 알렉스의 표정이 묘했다. 그가 나를 덥석 안아 들었다.
“솔로니, 말을 할 수 있나? 언제부터지? 원래 가능한 건가?”
“아…… 아냐! 방금 만난 마법사가 마도구라면서 내 귀에 뭘 박아 놓고 간 이후로 말할 수 있게 됐어. 이거 되게 신기하다? 그치?”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래, 나 완전 괜찮고 말짱하고 말도 지금부터 하게 된 거니까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보지 좀 마. 심장 떨려 죽겠어. 와, 진짜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숨 막히게 잘생겼잖아.
“피가 난다.”
알렉스의 손이 조심스럽게 마도구가 박힌 쪽의 귀를 손으로 쓸었다. 마…… 만지지 마! 내 귀는 진짜로 정말로 예민하다고.
내 분홍빛 귀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알렉스가 내 귀의 상처를 핥았다. 그러니까, 할짝 하고. 이…… 무슨! 미친!
“무, 무슨 짓이야, 알렉스!”
“소독이다. 그나저나 목소리 좋군.”
“뭐?”
“칭찬이다.”
아니, 칭찬은 고마운데. 침 바른다고 소독 같은 거 안 된다고. 아, 나는 왜 자꾸 저 얼굴에 눈이 박히지. 진짜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 탓이다. 난 종을 뛰어넘은 사랑 같은 건 전혀, 저언혀 흥미 없다고!
“말이 통하는 건 잘됐군.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마라. 지난번 시녀들의 사건처럼, 아직은 사람들을 방심하게 만드는 네 역할이 필요해.”
“말 안 해도 알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나.”
나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몰라서 물어? 아니, 나도 모르니 대답을 못 하겠다. 그냥 좀 지금 내가 감정 과잉인 것 같아. 그동안 너무 편안한 왕궁 생활에 안주했나 봐. 죽을 뻔하고 귀 뽀뽀 좀 받았다고 막 감정이 널을 뛰네.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후우, 침착하자. 침착하자.
“소리 안 지를 테니까 내려 줘.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야? 나 되게 도도하다고? 아무한테나 막 안기는 그런 여자 아니라고?”
“여자라고?”
알렉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괜히 뜨끔해서 나는 급히 말을 바꿨다.
“아니 여자가 아니라, 음, 여자 고양이! 그러니까 암컷 고양이!”
알렉스는 내가 한 말을 듣고 뭐가 그리 의심스러운지 내 코에 자기 코가 스칠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마주 댔다. 흐악, 숨 막힌다. 나 누가, 그것도 남자가 나 안고 이렇게 가까이 얼굴마주치고 그러는 거 진짜 처음이란 말야.
그러지 마, 알렉스. 나는 저쪽 세계에서도 여중, 여고, 여대 트리 탔다고. 모태 솔로라고. 그러니까 나 좀 놔줘, 엉엉.
나는 고양이 특유의 기술, 연체동물 흉내 내기를 써서 알렉스의 품을 빠져나왔다. 백날 나 안아 봐라, 내가 가만히 안겨 있나. 아니, 백 번 안으라는 말은 아니고. 어휴, 오늘 왜 이렇게 덥냐.
알렉스는 내가 빠져나간 품이 허전했는지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 뭔가 되게 부끄럽고 무안하니, 그래, 지금은 그걸 해야 한다. 도망치자!
엘, 엘라인 공주에게 가야지. 나는 엘라인 공주를 위한 치료제니까.
나는 우다다다 달렸다. 내가 지금 달리는 것은 우다다를 하는 것이며,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며 오글거려서 그러는 게 아니다.
아, 정말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