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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엘라인 공주의 방에는 공주는 없고 의외의 인물이 공주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국왕 그레이엄이었다. 나는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보고 지금이 그와 엘라인의 티타임 때라는 것을 상기했다.
“야오옹.”
“아아. 왔나, 백작부인.”
내가 그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자 그레이엄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풀쩍 침대 위에 뛰어올라 그의 엉덩이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종을 다 물렸는지 방 안에는 나와 그레이엄뿐이었다.
“짬이 나서 잠깐 와 봤어. 혹시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엘라인은 시녀장과 외출했다더군.”
요즘 엘라인 공주는 앤과 함께 왕궁의 여기저기에 얼굴을 비추었다. 제국을 향해 출발하기 전 왕성 내부에서 외곽 성문까지 진행될 퍼레이드에서 공주가 인사를 해야 하는데, 갑작스럽게 많은 인원을 대하기보다는 소수의 인원을 먼저 공주에게 노출시키는 게 좋겠다는 왕궁 전속 의사의 제안 때문이었다.
원래 그녀의 신분대로라면 티파티부터 시작해서 대규모 무도회를 열어 사교계에 제대로 데뷔를 해야 했지만, 여행 경비를 대기에도 허리가 휘는 판에 그런 파티를 열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있다고 해도 엘라인은 아직 늙은 여우과 음험한 늑대들이 득시글한 사교계에 데뷔할 정도로는 나아지지 않았고.
이쪽 세계에 자폐 증상을 치료할 수 있는 마법이 존재해서 다행이었다. 현실 세계에선 엘라인 같은 중증 자폐는 치료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까.
여기는 의복이나 음식은 구식이면서도 마법의 발달과 효용에 있어서는 현실 세계완 비교도 안 되게 정말 놀랍도록 발달해 있었다. 물론 그런 혜택이 돈 있고 빽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라는 건 현실 세계나 여기나 별로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난 지금 여기서는 최상류층에 속해 있으니까, 그리고 이게 책 속의 세계에서 겪는 임상 체험이라는 걸 아니까 웬만한 일은 체험 활동 하듯 즐겁게 만끽할 수 있었다.
나중에 이 모든 게 끝나면 기억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서 오히려 끔찍하려나? 작가님이 내게 선택권을 준다면 참 좋겠다. 잘생긴 남자도 한명쯤 데리고 돌아갈 수 있으면 더 좋고. 흐흐흐.
아, 나 지금 되게 질 나쁜 인신매매단처럼 웃은 것 같아.
어쨌든 엘라인은 요즘 여정 준비로 고생하는 관료들과 왕궁을 떠나기 전 그녀를 따르던 가신들을 격려해 준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작업장을 무작정 쳐들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공주님 얼굴 한 번 보는 것보다 하루 쉬게 해 주는 게 더 고마울 것 같지만, 원래 아랫사람들의 의견과 윗사람들의 의사는 늘 엇갈리기 마련이니까.
그레이엄의 따뜻한 손가락들이 세심하게 내 귓가를 어루만져 주고서는 목을 따라 허리선까지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아, 기분 좋다. 시란의 일로 쌓인 스트레스가 눈 녹듯이 사라지며 눈이 사르륵 감겼다.
“퍼레이드는 관료들이 머리를 쥐어짜 만들어 낸 합작품이야. 이왕 황비 후보에 도전할 거면 확실하게 어필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 내 생각으로는 이런 벽지에서 하는 퍼레이드가 제국까지 가닿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꾸뻑꾸뻑 졸면서 그레이엄의 말을 들었다. 그레이엄은 나와 둘만 있을 때는 경어가 아닌 평어를 사용했다. 조금은 내게 마음을 열어 주고 있는 걸까.
“다이아몬드 광산과 작지만 풍부한 자원을 가진 왕국의 계승권, 그리고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꽁꽁 감추어져 있던 신비로운 공주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다면서 재무 대신이 목소리를 높이더라고. 덧붙여서 재무 대신은 퍼레이드에서 공주에게 가까울수록 더 비싼 자릿세를 받아서 여행 경비에 보태겠다며 눈을 반짝이더군.”
나 재무 대신님 팬 될 것 같아. 대신님, 어렸을 때 꿈과 희망이 담긴 소설 좀 읽으셨나 봐요. 게다가 탁월한 경제 수완까지. 존경합니다, 대신님.
“어쨌거나, 퍼레이드가 끝나고 나면 처음으로 공개된 엘라인의 눈부신 외모와 그녀가 목에 건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 원석에 대한 이야기가 공주의 마차보다 더 빠르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제국에 전해지겠지. 아, 다이아몬드 원석은 대충 마력으로 가공할 거야. 아직 그 정도 크기로 캔 게 없거든. 애초에 검은 다이아몬드 광산이고.”
어, 잠깐만. 검은 다이아몬드 광산? 하얀 게 아니라? 내가 읽은 책에 나온 다이아몬드 광산은 반투명한 다이아몬드인데? 왜 반지 만들고 목걸이 만드는, 그 매우매우 쬐깐한 주제에 가격은 사람 뺨때기를 후려치는 바로 그거 말야.
나는 다이아 광산에 대한 얘기를 더 듣고 싶었는데 그레이엄은 딴소리만 술술 풀어냈다. 묘하게 열띤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보니 딸 바보 스위치가 제대로 켜진 것 같았다. 안 돼. 이 모드의 그레이엄은 답이 없다.
대놓고 뭐라 말을 하려다가 꾹 참았다.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아직은 그레이엄에게도 비밀로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내 딸이지만 예쁘잖아? 제국의 어떤 혼처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걸. 표정 없을 때는 그것대로 인형처럼 예쁘고, 웃을 때는 코이누르 여신이 강림한 것처럼 아름다워. 조막같이 예쁜 입술을 움직여 아빠, 하고 말할 때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다고. 이 애가 내 딸이다! 내가 이 천사님의 아빠다! 하고 목마 태워 덩실덩실 춤추고 싶다니까.”
이 남자에게 딸이란 뭐다? 전부다. 나를 향한 그레이엄의 마음이 아파트 현관문에 달린 조그만 방범용 유리 구멍이라면 딸내미를 향한 마음은 대한민국 국보 1호 남대문 같은 거다. 아, 진짜 눈꼴 시려서 옆에 못 있겠네.
열일곱 딸내미를 목마 태워 다니겠다고? 이 남자가 진짜. 팔불출이란 게 이런 건가.
엘라인이 정말 엄청, 몹시 예쁘기는 하지만 이 딸 바보 아빠의 입에서 찬사의 말이 나오니 나까지 남우세스러워진다.
적당히 하라고, 쫌. 내가 살짝 손가락을 깨물자 그레이엄은 찔끔하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야 다시 다이아 광산 이야기로 돌아왔다.
“사실 다이아 광산은 우리가 다 먹기에는 너무 컸어. 백작부인도 알겠지만 그게 왜 이제야 발견이 되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매장량이 어마어마하거든. 아직은 비밀로 하고 있지만 곧 황제의 귀에도 들어갈 거라고 생각해. 제국이 대륙 중앙을 평정한 것은 그가 가진 무패의 중갑기병만큼이나 정보부가 유능하기 때문이라는 평이니까. 발견은 우리가 했지만 우리에게는 그걸 지킬 힘이 없지.”
힘이 없지, 라고 말할 때 그레이엄은 쓴웃음을 지었다. 눈썹 사이의 주름이 더욱 깊어지는 듯해서 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러지 마, 그레이엄. 나이 들어 보인다고. 모처럼 그림같이 멋져 보이게 태어났는데.
“공주의 결혼과 다이아몬드 광산을 엮는 아이디어는 내가, 아니 백작부인이 냈지만, 판은 재상이 짰어. 늦든 빠르든 제국에 통째로 빼앗길 테니 최대한 실리를 취해 보자고 하더군. 중도파인 재상이 광산을 깨끗이 포기하고 움직여 준 건 다행이었지만 그루피 대공이 적극적으로 협력한 건 뜻밖이었어.”
그루피 대공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작게 하악거렸다. 그의 의도야 뻔하지 않은가. 제국까지는 먼 길이다. 길은 험하고 치안은 불안하다. 실제로 제국으로 가는 조공이 잘 조직된 도적패들에게 털리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다. 이번 행렬이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었다.
가려져 있던 공주를 대대적으로 공개함으로써 공주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도를 왕창 높여 놓았다. 퍼레이드 때는 최고조에 달하겠지. 호감도는 곧 왕실에 대한 자부심과 충성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행여나 공주의 행렬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면 공주에게 가졌던 호감은 양날의 검이 되어 무책임하고 능력 없는 왕가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질 것이다.
심지어 이번 사절단은 이플란트 가문의 대대적인 후원으로 꾸려진 여장이었다. 대공의 사람들이 행렬 인원 속에 속속들이 침투해 있을 거라는 얘기다. 우리 일행은 바깥의 도적 떼보다 오늘 그녀를 지키던 사람이 그 칼의 방향을 바꾸어 그녀에게 검을 향하지는 않을지를 먼저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일행 중에서 이플란트 대공가의 사람들을 골라낼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플란트 대공가의 후원이 없었다면 출발조차 못 했을 테니까.
그동안 엘라인 공주는 병증을 이유로 왕의 최측근 몇몇을 제외하고는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다. 공주의 병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루피 대공의 손에서 공주를 지켜 준 셈이다. 하지만 곧 왕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떨어질 공주는 무척이나 손쉬운 사냥감이 될 것이다.
그레이엄도 이 여행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게 이상하지. 그래서인지 한참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던 그가 어느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백작부인,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푸른 눈동자가 은은하게 흔들렸다. 그는 한 나라의 국왕이자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몸이 성치 않은 딸을 사지로 몰고 있었다.
“내 결정은 옳은 것이었나?”
그레이엄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그 몇 개 안 되는 선택지들마저도 하나같이 부정적인 결말을 예고했고, 그나마 나은 것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위험의 늪이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딸의 안전을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그는 짊어진 것이 너무 많았다. 한 나라의 국왕과 아버지 사이의 그 간극이 나락만큼 깊어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였다.
결국 선택을 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불안한 마음을 내비치는 것조차 틈이 되었기에 그는 결국 그의 대나무 숲으로 나를 택했다.
그에게 말을 걸지 않은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잘했어, 나. 쓰담쓰담. 나에게 그의 이야기를 발설할 입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레이엄은 내 앞에서도 침묵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건 싫었다.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동물의 탈을 쓰고 그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듣는 것은 비겁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지금, 나라는 존재가 무척이나 필요해 보였다.
그레이엄이 고개를 돌렸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메마른 눈에서 옥루가 뚝 떨어졌다. 그건 그의 눈물이고, 피고, 불안이고, 사랑이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나는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 결국 침묵했다.
나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적힌 소설을 몇 번이나 읽었고, 이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한때 나는 나에게 마음을 열어 주었던 그에게 공주가 안전할 거라고 알려 주려고 애썼던 적도 있었다.
나는 곧 그런 시도를 그만두었다. 그레이엄은 강한 사람이었다. 약소국의 국왕으로서 크고 작은 위험들을 겪어 나가면서도 그는 늘 최선을 다했다.
피가 흐르는 선택은 늘 있었다. 우선순위를 둬야만 했다. 강성했던 공주의 외가는 왕비가 죽은 이후 꾸준히 그 힘을 잃었다. 권리 하나에 권리 하나. 눈 먼 거래 같은 것은 없었다. 공주의 외가가 약화될수록 왕권은 조금씩 안정되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왕비의 외가에 남은 것은 목숨밖에 없었다. 탐욕스러운 이플라트 가문은 그것마저도 원했다.
반역죄를 빌미로 장인의 가문이 완전히 사라지는 대신, 국왕은 공주를 위해 황제에게로 가는 진상품―나였다―을 빼돌리고 대공가의 재산으로 솜씨 좋은 마법사들을 궁정 마법사로 초빙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레이엄은 자신의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걸고 치열하게 선택을 해야만 했고, 선택해 왔다. 그런 그레이엄을 보고 그에게 알량한 지식으로 예언해 주는 것은 그레이엄의 노력 모두를 부정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신이 우리의 고되고 힘든 일상에 침묵으로 답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고개를 숙이고 숨을 죽이며 우는 그가 느끼는 고통이 너무나 크고 무겁고 치열해 보여서, 질식할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핥아 주었다.
부디 나의 이 행동이 그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수 있기를.
“백작부인.”
그레이엄이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핥아. 까칠해 죽겠다고.”
엑. 이건 뭐야, 내 딴에는 위로해 준다고 해 준 건데! 난 무안해서 혀로 옆구리를 쓱쓱 핥았다. 내 혀에 송송 난 융털들이 빗처럼 내 털을 가지런히 해 주었다. 까칠하긴 뭐가 까칠해, 등 긁개로 손 안 닿는 곳 긁는 것처럼 시원하기만 하구만. 흥!
내가 푸릉,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리자 내 새침한 반응을 본 그레이엄이 맑게 웃었다. 그레이엄의 웃음소리는 슬픔을 날려 보내고 따뜻하고 포근한 그의 애정만을 남겼다.
“엘리를 부탁해. 나 대신 그녀를 지켜 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야옹, 하고 울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자신이 숨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딸을 걱정할 것이다. 언제, 어디에 있건 간에.
할 수만 있다면 그 스스로가 딸을 지켜 주고 싶겠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굳건히 버티는 것이 그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이자 최선이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까지 절박한 심정으로 딸을 보호하게 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