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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나라의 하인 2화
0. 운명으로부터 (2)


얼마나 뛰었을까. 전속력으로 도망치던 하인은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주택가 사이에서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주변을 살폈다.
‘주택가란 다 거기서 거기 같단 말이야.’
등 뒤는 주변이 한적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다시 앞을 보았다. 그러다 찰나 마주친 남자를 피하지 못했다.
빗소리를 뚫고 비명 소리가 거나하게 울렸고, 그가 욕설을 내뱉으며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겨우 멎은 피가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씨발…….”
짜증을 내며 상대편을 확인했다. 자신보다 더 과장되게 엉덩방아를 찧고 허공에 잠깐 머물던 양손으로 땅을 짚는 모습이 마치 한 편의 슬랩스틱 영화 같았다.
발아래에 웬 지팡이 하나가 도르르 구르고 있었다.
“…….”
“…….”
그는 인상을 구긴 채 신발에서부터 얼굴까지 단번에 훑어보았다. 축축한 바닥에 앉은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꼭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올곧게 자신을 향하는 얼굴이 마치 도와 달라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하인은 짜증스레 남자를 야리고 다리를 무심하게 뛰어넘었다. 애초에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데다 멀쩡한 남자에게 괜찮냐는 둥의 호의를 보여 줄 만큼 자신의 처지가 여유롭지도 않았다. 아니, 더욱 시급한 때였다.
“저, 저기 그렇게 가시면…….”
그런데 그가 자신을 붙잡았다. 바짓가랑이를 잡았고, 이어 셔츠 자락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팔을 잡는 순간 멍하게 있던 하인이 짜증스레 남자의 손을 내쳤다.
그가 불쾌한 얼굴로 남자를 응시했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오늘이 재수 옴 붙은 날임을 인정했다.
“씨팔. 그렇게 가면 뭐?”
남자에게로 몸을 바짝 붙이며 그가 물었다. 남자가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하자 하인은 남자의 어깨를 밀었다.
“엇!”
쓰러지듯 휘청거리는 몸뚱이가 황급히 하인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가 손을 내치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먼저 떨어지긴 했지만 짜증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저기, 그게, 죄송…해요. 근데…….”
“하…….”
미안하다며 멋쩍게 웃는 남자를 보며 하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새벽녘 술집 계단에서 술에 취한 남성이 자신을 지나치려다 미끄러지며 벽과 부딪친 일이 있었다.
두세 계단밖에 되지 않는 높이에서 미끄러진 남자가 ‘사람을 치네……’라면서 과장되게 어깨를 부여잡았었다. 그러곤 경찰을 운운하며 공갈치려 했고, 그때 그는 남자가 원하는 대로 가차 없이 두들겨 패 주었었다.
눈만 떠도 코 베어 가는 세상이라며 하인이 남자를 응시했다. 외모로 사람을 견주는 것은 할 짓이 못 됐다.
‘참 좆스런 세상이란 말이야.’
그 좆의 중심에 본인이 있었지만 당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면 달라지는 이야기였다. 재수 없는 오늘을 상기하며 자신을 붙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 줄까, 하고 고민하는데 눈앞에 택시가 보였다.
빈 차임을 알리는 빨간 불빛이 번쩍인다.
“씨발. 너 운 좋은 줄 알아.”
하인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선심 쓰듯 남자에게 건넸고, 가슴팍으로 던지듯 내밀어진 지갑을 남자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받고 있었다. 그것도 덥석. 너무 당연하다는 듯.
하인은 그의 행동이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화낼 겨를이 없었다. 택시가 출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출발하려던 택시를 잡은 그가 묵직해진 몸을 뒷좌석에 실었다.

***


그칠 생각이 없는 비에 시간은 흐르고, 언제고 휴대폰이 울릴까 발을 동동 굴리던 연호는 결국 움직이기로 했다. 우산을 사고, 한 발짝, 두 발짝 헤아리며 걷기를 몇 분. 어느새 집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안전한 공간에서 편하게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연호가 지팡이를 느슨하게 쥐었다. 동시에 발걸음을 빨리했고, 다음 순간 연호는 누군가가 온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넘어졌다. 우산 위로 내리는 정신 사나운 빗소리도 한몫했다.
“으악!”
인지할 새도 없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연호가 소리쳤다. 바닥과 충돌한 엉덩이가 아픈 게 아니었다. ‘엄마야’와 같은 놀란 마음에 뿜어져 나온 소리였다.
‘아…… 진짜…….’
축축하고, 딱딱하고, 거친 아스팔트의 감촉에 연호가 한숨을 삼켰다.
비 오는 날을 질색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이런 일 때문이었다. 이렇게 우산에 가려져 자신을 못 보는 경우가 더러 생기고는 했다. 앞을 볼 수 있었다면 자신이라도 잘 피해 가겠지만 연호는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피해 가 주는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미안함을 느끼고, 작아지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돌아오는 게 외면이라면…….
“씨팔. 그렇게 가면 뭐?”
연호는 매섭게 손을 내쳤을 뿐만 아니라 귀찮다는 듯, 짜증 난다는 듯 일방적으로 화를 내는 그가 무서웠다. 비단 거친 욕설 때문만은 아니었다. 낯선 이에게서 욕을 듣는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무서웠고, 선뜻 도와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냥 이러고 있기도 어려웠다. 도움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현재 자신은 타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손을 떠난 지팡이를 찾아 주었으면 했고, 길도 알려 주었으면 했고, 사과도 하고 싶은. 불안과 걱정과 미안한 마음이 한데 어우러져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깜깜한 세상이 더욱 철벽처럼 다가왔다.
“운 좋은 줄 알아.”
침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중 들린 그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무언가를 자신에게 주는 것도 고마웠다. 습관적으로 물건을 받아 들면서도 연호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곧장 깨닫지 못했다. 멀어지는 발소리에 연호가 다급히 소리쳤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게 지팡이도, 우산도 뭣도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저기요!”
언뜻 손안에 느껴진 그것은 지갑이었다.
“뭐야…….”
연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방을 만졌다. 지퍼가 단단히 잠겨 있었다. 묵직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절대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왜…….”
어느새 빗줄기가 약해지고 있었다.
낯선 지갑을 쥔 채 연호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곱게 다물고 있던 입술이 내밀어지고, 눈썹이 가운데로 몰렸다.
“불쌍해서?”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한없이 기분이 나빠진 연호가 지갑을 내던졌다. 철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연호는 금세 지갑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투덜거리며, 길바닥에 쪼그려 앉은 연호가 축축한 아스팔트 바닥을 더듬거렸다. 반듯한 지갑을 찾아 가방에 넣고, 뒤이어 지팡이와 우산을 찾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아.”
자신이 있는 방향이 헷갈렸다. 이쪽이던가, 이쪽이던가.
“아, 진짜.”
어두워진 낯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담벼락이라도 닿으면 어찌 되었든 찾아갈 수 있을 텐데, 위축된 탓에 움직일수록 집과 더 멀어지고 있었다. 나중에는 헛발길질하듯 같은 자리만 빙빙 맴도는 모습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미친 사람쯤으로 보일 법했다.
“분명 근천데.”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연호가 한탄했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화가 났다. 그러다 화살이 덜컥 자신만 두고 떠난 사람에게로 향했다.
“사람이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사고 난 이후 여러 일들이 있었다. 은연중에 혹은 대놓고 멸시와 동정을 보내오기도 했다. 장애인이라고 도와줘야 한다는 의식이 낮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외견상으론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선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이 더러 있었다.
타인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화를 내던 연호가 이번엔 자신을 탓했다. 어김없이 그날의 사고를 떠올리며 자신을 비하하기에 이르렀고, 그러다 별안간 들리는 발소리에 생각이 끊어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연호가 귀를 기울였다. 방금 일을 생각하면 무섭긴 했지만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잘 알고 있기에 서글픈 마음이 오래가지 않았다
지팡이를 그러쥐며, 연호가 소리에 집중했다.
한 발, 두 발, 세 발.
“저기요!”
꽤 가깝다고 느꼈을 때쯤 연호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보다 남자의 목소리가 더 크고 우렁찼다.
“근방에 수상한 남자 못 봤어?”
굵직하고 걸걸한 목소리가 연호를 코앞에서 두고 소리쳤다. 하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이야기인지라 연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회색 셔츠에 까만 정장 입은 남잔데. 키는 이 정도에 피 흘리고 있는 새끼…….”
그러다 남자가 대뜸 어깨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씨발. 봤으면 봤다, 못 봤으면 못 봤다고 하란 말이야!”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우악스럽게 겁을 주는데 대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연호는 단순히 무섭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몸을 벌벌 떨며, 연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걸 또 어떻게 오해했는지 남자가 더욱 드세게 옷자락을 쥐고 흔든다.
“그 새끼 어디로 갔어?”
남자는 연호가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양 물었다.
“씨발새꺄. 똑바로 말 안 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
연호는 처음 당해 보는 협박과 압박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누, 누구……. 아니, 저,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씨발. 이 새끼가!”
굵직한 손이 목을 압박해 왔다. 거기서 연호가 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처지를 시시콜콜 알리는 것밖에 없었다.
“몰라요. 누, 누구를 말하는 건지요! 제가 시각장애인이라서…… 앞을 못 봐요. 누가 지나가도 알지 못한다구요!”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다른 때보다 더 절박한 목소리였다. 말하면서 눈물까지 터졌다. 훌쩍이며 거듭 자신에 대해 설명하자, 그때쯤에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남자는 손을 들어 연호를 내려칠 듯한 행동을 취했다. 몇 번을 더 같은 행동을 취한 남자는 그제야 연호를 손아귀에서 놓았다.
“하, 병신이잖아.”
몸이 크게 휘청거렸지만 다행히 넘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배려 없는 소리가 가슴을 마구 할퀴어 댔다. 입술을 꾹 다문 채 꾸역꾸역 상황을 받아들인 연호가 뜨거운 숨과 함께 남자를 붙잡았다.
“후, 길 좀 알려 주시고 가세요.”
“뭐?”
“방향을 잃었거든요. 편의점이 보이는 방향이 이쪽인가요? 아니면 이쪽?”
연호는 최대한 멀쩡한 듯이 물었다. 조금 전까지 화가 났던 얼굴도, 겁먹은 폼도 아니었다. 단순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 같았다.

***


연호가 가방에서 열쇠를 꺼냈다. 험난했던 여정의 끝은 다행히도 해피엔딩이었다. 열쇠를 문고리에 끼워 넣으며 연호가 코를 훌쩍였다. 하지만 울거나 하진 않았다. 손등으로 코를 비비며 문고리를 돌렸다.
“익!”
이로서 벌써 세 번째다. 문을 열기도 전에 예고도 없이 열린 문에 연호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다행히 간신히 균형을 잡은 탓에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심장이 미친 듯 벌렁거렸다.
“아, 깜짝이야. 누구세요? 정이? 엄마?”
“차연호!”
아, 엄마구나. 오늘따라 더욱이 반가운 목소리였던지라 연호가 더욱 해맑게 모친을 반겼다.
“언제 왔어요?”
“너, 진짜! 말도 안 하고 늦은 밤에 그렇게 나가면 어떡하니!”
“아, 요 앞 편의점에요. 산책도 할 겸……”
“몇 신데 산책이야.”
“……몇 시예요?”
“9시도 넘었어. 몇 시에 나갔어?”
“……시간은 확인 안 했는데. 근데 얼마 안 됐을 거예요. 편의점 갔다가 바로 온 거니까.”
태연한 척 대꾸했지만 집을 나설 때 저녁 8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를 똑똑히 들었었다.
‘하…… 어쩐지.’
연호는 그제야 왜 이렇게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바깥에 있었으니 당연했다.
“비도 오는데 정말.”
“나갈 땐 비가 안 왔어요. 갑자기 온 거예요.”
“그럼 전화를 했어야지.”
“곧 그칠 줄 알았어요.”
“그러면 우산이라도 사서 왔어야지…….”
연호가 골목길 어딘가에 버려져 있을 우산을 떠올렸다.
“알아요. 죄송해요. 다음부턴 일찍 다닐게요.”
다른 때라면 아니라고 생각했을 연호였지만, 이번에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에서야 부모님의 우려가 깊숙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근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회식이라면서요.”
“피곤해서 일찍 왔지. 다음부턴 전화라도 하고 나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려고.”
거듭 되풀이되는 말에 연호가 화제를 돌렸다.
“엄마, 나 추운데.”
연호가 홀딱 젖은 채로 입술을 달달 떨었다. 새파래진 입술은 누가 봐도 추위에 오래 서 있었던 행색이었다. 양손으로 팔뚝을 쓰다듬으며 애처로운 듯한 표정을 짓자 엄마의 잔소리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잘한다. 잘해! 얼른 들어가.”
“그냥 들어가요? 물 떨어질 텐데.”
“닦으면 되지 무슨 걱정이니.”
머뭇거리던 연호가 죄송하다며 작게 외친 뒤 후다닥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넘어진다며 걱정하는 목소리가 한차례 들렸지만 연호는 안전하게 화장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집은 연호가 유일하게 마음을 놓고 다닐 수 있는 공간이었다. 누군가가 사물의 위치만 바꾸지 않는다면 유유자적 혼자 다니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불안도 무서움도 없었다. 아주 가끔은 헷갈릴 때가 있긴 했지만 대개는 자유로운 장소였다.
화장실로 들어간 연호가 훌러덩 옷을 벗었다. 웃옷을 벗어 문틈으로 집어 던지곤, 넘어질까 싶어 변기에 앉아 낑낑거리며 바지를 벗었다. 속옷마저 벗으려는 그때에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엄마, 나 갈아입을 옷 가지러 가야 하는데.”
연호가 화장실 문을 살짝 열었다. 좁은 문틈 사이로 얼굴의 반 정도를 내밀며 난감하다는 기색을 내보이자 엄마는 바닥을 닦다 말고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다.
“고마워요.”
“따뜻하게 씻고 나와. 감기 안 걸리게.”
“걱정 마세요.”
문틈 사이로 손을 뻗어 옷을 받은 연호가 후딱 문을 닫았다. 물 온도를 몇 번에 걸쳐 조절하곤 만족스럽게 샤워기를 건 뒤 따뜻한 물 아래에 서 있었다. 가볍게 몸을 씻고 머리를 감아 헹구는데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심장이 사정없이 뛰기 시작했다.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엔 괜한 불안이 스몄다.
조심스레 수도꼭지를 잠근 연호가 대충 몸에 물기만 제거하곤 수건을 허리에 둘렀다. 걸쇠를 풀기 무섭게 연호는 순식간에 화장실 밖으로 이동했다.
“엄마!”
양팔을 우악스럽게 잡는 손에 연호가 얼굴을 붉혔다.
자신의 어머니라지만 연호는 제 몸을 보여 주는 걸 꺼렸다. 팬티 바람으로 돌아다녔던 적도 분명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어디야? 응? 어디니!”
손바닥이 몸을 여기저기 더듬고 있었다. 연호는 그 손길이 모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불쾌했고, 짜증 났고, 무서웠다.
“엄마! 그만해요! 도대체 뭐하는 건데요!”
“왜 말을 안 해!”
“그러니까 무슨 말을요!”
“다쳤잖아. 다쳤는데 왜 말을 안 해!”
엄마의 찢어지는 음성에 연호가 눈시울을 붉혔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보이지 않는 연호에게 규칙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호는 오로지 분위기와 목소리만으로 추측할 뿐이었고, 그것으로 타인의 기분을 가늠하는 건 때때로 너무 힘든 일이었다.
“엄마, 나 엄마가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이해 못했어. 뭐 때문에 화났어요? 설명을 해 줘야 알잖아요. 도대체 뭐 때문인데요.”
연호가 울먹였다. 정신없이 몰아붙이던 모친도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을 거뒀다.
“피가, 피가 있잖니……. 옷에…… 네 옷에 말이다……. 혹시나 사고가 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모친은 비에 젖은 연호의 옷을 세탁기에 넣다가 소매에 묻어난 피를 보았다. 옷을 펼쳐 보니 소매뿐만 아니라 팔꿈치와 가슴 부근에도 핏자국이 있었고, 그래서 정신없이 연호를 몰아세운 것이었다.
“아니에요. 사고 안 났어요. 다치지도 않았고. 멀쩡하다구요.”
그날의 사고는 비단 자신만 바꿔 놓은 건 아니었다. 모친의 불안을 인식한 연호가 몇 번이고 아니라며 모친을 안심시켰다.
“진짜예요. 다친 데 없어요. 편의점에 갔다 왔다니까요?”
“그럼, 이건 뭐니. 혹시…… 이상한 사람이라도 만났어?”
“그런 일도 없어요. 이상한……”
고개를 내젖던 연호가 이내 두 사람을 떠올렸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에이, 아니에요. 그런 일 없었어요. 어디서 묻었나 봐요. 아까 비 온다고 사람들이 막 편의점으로 몰려들었거든요.”
얘기하는 게 득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연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어차피 두 번 만날 일은 없었다.
“근데, 진짜 피예요? 케첩이나 그런 거 아니고요?”
연호가 농담조로 물었다. 모친은 눈 감고도 피 정도는 구분할 줄 아는 마취과 의사였다.
“얘는 지금 누구보고.”
어느새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모친이 대꾸했다. 그제야 안심한 연호가 다시금 화장실로 향했다.
몸이 차게 식어 있었다. 뜨겁게 물 온도를 조절한 연호가 바깥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되감기를 하듯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고, 문득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회색 셔츠에 까만 정장 입은 남잔데. 키는 이 정도에 피 흘리고 있는 새끼…….”
두 번째 남자가 첫 번째 남자를 찾고 있었다는 것. 첫 번째 남자가 다쳤다는 것. 그것으로 첫 번째 남자가 자신에게 지갑을 주고 간 이유가 설명되진 않았지만 지갑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택시에서 내린 하인은 곧장 사무실로 올라갔다. 택시 기사의 의심의 눈초리와 폭언이 들렸지만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2층 사무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휘청휘청 흔들렸다.
문 앞에 도착한 그가 철문을 발로 찼다. 쾅 소리와 함께 옆구리에서 후두둑 떨어진 피가 발밑을 적시자 입술을 짓이겼다.
“어떤 새끼야!”
남수가 욕설을 퍼부으며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다 눈에 띈 이가 하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남수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헉! 하인 형님.”
당당하던 어깨가 잔뜩 작아졌다. 하지만 바닥에 떨구어진 피를 확인하고는 불쑥 하인에게 달라붙었다. 그런 남수를 신경질적으로 밀쳐 낸 하인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가재미를 닮은 눈이 쫓아왔다.
“내려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린 하인이 자신을 쫓아오는 남수에게 명령했다.
“예?”
“내려가서 택시비 주라고. 가는 길에 피도 좀 닦고.”
더 길게 이야기하기가 귀찮았다. 하인이 쓰러지듯 소파에 안착했고, 하인이 남긴 핏자국을 따라 남수의 시선이 쫓아오고 있었다. 정녕 자신의 눈으로 본 게 피가 맞는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그러다 마주친 시선에 남수가 계단 아래로 곧장 내달렸다.
“하.”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옆구리의 아릿한 통증에 신음이 절로 터졌다. 택시의 좌석이 안락한 탓인지 도중부터 유난히 아팠다.
씨발. 씨발. 씨발. 매끈한 입술이 욕을 토해 낸다. 연거푸. 계속. 그러고는 빗물에 축축하게 젖은 재킷을 벗어 바닥으로 내던졌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그에겐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겉치레용 사무실이라도 바닥이 더럽다거나 물건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꼴을 보지 못하는 편이었다.
일선에 있어서는 더욱 까다로웠다. 결벽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뒤끝이 없는 일을 좋아했다. 사람을 사귀는 데에도 예외는 없었다. 어중간하게 적도 아군도 아닌 사람을 옆에 두는 일은 없었다. 오로지 내 편만 있을 뿐이었다.
더럽디더러운 오늘을 상기하는 그때에, 발칵 문이 열리고 손에 밀대를 쥔 남수가 들어왔다. 형광등 아래의 하인을 보고는 조심스레 문을 닫는다.
하인이 뿌린 핏자국을 닦으며 남수가 차츰차츰 소파로 이동했다. 바닥에 짓눌린 재킷을 보고 잔뜩 날이 선 하인을 살핀다. 빗물에 젖은 채였지만 유난히 새카맣게 변한 자국을 보면 옆구리에서부터 상처가 났음을 알 수 있었다.
소파 인근에 도착한 남수가 넌지시 물었다.
“형님, 어떻게 된 겁니까?”
거래를 하러 갔다가 온다는 사람이 피 칠갑을 하고 나타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남수가 아는 범위 내에서 하인은 저만치 다치고 올 인물이 아니었다.
남수는 더 이상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하인에게 쪼아 물었다.
“예? 형님? 거래하러 간다더니 칼질이라도 하러 간 거였습니까?”
같은 조직원으로서 쌓아 올린 관계가 10년이었다. 스무 살에 하인이 정식으로 조직에 들어왔고, 그때만 해도 하인은 남수의 밑에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남수의 위에 하인이 올라섰다. 3-4년 사이에 급변한 관계였고, 거기에 불만이 생길 법도 했지만 남수는 나서서 좋아하는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