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외계인, 지구에 내리다 1화
나 혼자 길을 걷고, 나 혼자 TV를 보고.
나 혼자 취해 보고, 이렇게 매일 울고불고.
사랑 참 달콤했어.
이별이란 그림자 안에서 오늘도 잠 못 자.
나직하게 흥얼거리는 남자 목소리.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에 전혀 안 어울리는 SISTAR의 나혼자(Alone).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조화에 픽 웃고 말았다. 대체 이 평일 한낮의 버스 안에서 저렇게 뻔뻔하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강심장은 누구일까.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보니……. 어라, 멀쩡한 인간이다.
넥타이를 약간 느슨하게 풀고 옆자리에 서류 가방을 놓아 둔 남자는 열어 둔 창문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있었다. 그리고 묵묵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며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그 낯간지러운 가사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뻔뻔함이라고 할까, 여유라고 할까.
그 무심함이 인상적이어서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네? 해고요?”
“음. 아무래도 요즘은 경기가 안 좋으니까…….”
나름대로 곤란한 얼굴을 만들어 지으며 눈앞의 인간이 말했다. 사실, 점장이 곤란할 게 뭐 있겠어. 마음에 안 드는 인간 하나 잘라 내면 그만인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아무리 요즘 경기가 안 좋은 게 사실이라지만 그렇다고 이제까지 1년 가까이 열심히 일 잘하던 사람을 잘라야 할 이유는 없잖아. 다 당신이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 아냐. 뭔가 뒤가 구린 것이 있으니 나에게 똑바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거잖아.
“본점에서 내려온 이야기야. 쓸데없는 인원은 감축하라고.”
쓸데없는 인원? 웃기네. 당신 눈은 장식이야? 나 말고 지금 저기 카운터에서 힐끔거리고 있는 저 인간을 봐. 만날 큰소리만 치고 돈만 축내는 놈이 바로 저놈이야.
이 조그만 편의점에, 아침 8시에 정시 출근해서―가끔 땡땡이도 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가끔 당신이 필요하다고 SOS 신호 보내면 쉬는 날 대타까지 뛴 나를 자르고 저 돈벌레 녀석은 살려 둔다? 하, 웃기네. 이래서 알바도 인맥이란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냐고.
“나라고 뭐, 아무리 알바지만 오랫동안 같이 일해 왔던 식구 같은 직원을 자르고 싶겠어? 나도 을이다 보니…… 사정이 어쩔 수 없고…….”
“……그럼 오늘까지 일당 계산돼서 나오겠네요.”
“그, 그렇지.”
점장의 유일한 장점이자 수많은 단점 중에 하나가 마음이 약하다는 거다. 이쪽에서 강하게 나가면 자기 마음에 안 들더라도 대놓고 싫은 소리를 못 한다는 거. 뭐, 그 덕분에 내가 좀 편하게 일을 하긴 했지.
“통장으로 넣어 주세요. 이번 주까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알았어. 그럼 이제…….”
갑자기 점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모습을 보니 더 속이 뒤틀리기는 하지만 괜히 시간을 끌수록 더 나만 비참해지는 거니까.
“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가게를 나서는 내 등 뒤로 점장의 안심하는 한숨 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 정말 저기서 일하는 거 나쁘지 않았는데.
가끔 술 취한 사람들이 들어와 행패를 부리기는 했지만 월급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주고, 남는 도시락도 가져갈 수 있어서 괜찮았었는데. 잘렸다는 억울함보다 조금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 없어졌다는 생각에 왠지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아아, 어디로 가야 하나.”
웅크리고 있던 몸을 쭉 펴니 뼈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른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공중에 붕 뜬 기분이다. 마땅히 갈 데도 없고, 평소에는 죽어라 가기 싫던 학교도 방학을 해 버렸으니 정말 갈 만한 곳이 없다. 이번 방학은 그래도 착실히 일 좀 해 보려고 했는데.
“시원이 녀석, 학교에 있을라나…….”
그러고 보니 그 녀석, 방학 동안 연구실에 있을 거라고 했지. 슬슬 학교나 가 볼까……. 뭐, 녀석이 싫어하든 말든 가면 밥 한 끼는 사 주겠지. 난 오늘 잘린 몸이니까.
어슬렁거리다가 마음을 굳히자마자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행선지를 정하고 나니 왠지 기분도 유쾌해졌다.
그래, 설마 굶기야 하겠어. 저번 달 월급 받은 것도 아직 남았고, 얼마 되진 않겠지만 이번 달 것도 들어올 테니. 까짓것 이제 막 방학이 시작됐잖아. 스물네 살, 꽃다운 나이의 인간 이무영. 겨울 방학 사흘 만에 다시 백수가 되었을 뿐이잖아.
“야, 이거 얼마큼 퍼야 돼?”
“봉지 가득 채워.”
“하나 채웠는데…….”
“봉지 전부 다 채워. 다섯 개밖에 안 되잖아.”
“야, 농담이지? 얼어붙기 시작한 땅을 파는 게 쉬워?”
“나도 같이하고 있잖아.”
“…….”
말이나 못 하면.
“밥 사 달라며. 몰라?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시원아…….”
“빨리하고 밥 먹으러 가. 배고파.”
아, 정말 돈이 없는 게 웬수다. 이제 막 백수가 된 마당에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니 거스를 수도 없고.
“자꾸 헛소리하면 더 늦어지니까 빨리해. 나도 손 시려.”
“알았어…….”
아아, 인간 이무영. 신세가 왜 이리됐지? 알바 잘린 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산속에서 흙이나 퍼야 하다니.
학교에 도착해서 과학동에 와 보니 예상대로 성시원은 과 연구실에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시원아, 밥 사……’까지 말했을 때, 그 녀석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유난히 반가운 얼굴로 날 맞이할 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내 손에는 다섯 개의 비닐봉지, 꽃삽, 목장갑 하나가 들려 있었고, 시원의 손에 이끌려 학교에서 자연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러브 로드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 경과한 지금, 이렇게 친구 성시원의 명령으로 봉지 가득 흙을 퍼 담고 있는 중이다.
“대체 이걸로 뭘 한단 말이야…….”
“애들 재시용이야. 멍청한 것들이 배지를 오염시키는 바람에 원래 자라야 할 균 대신에 곰팡이만 가득 자랐어. 그래서 교수님이 방학이든 뭐든 상관 않고 재시 친다 하신 거지. 덕분에 이 한겨울에 내가 이 고생인 거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시원이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방선균은 토양에 많으니까, 흙에서 추출하는 게 제일 편해. 야, 이왕이면 나무뿌리 근처 흙으로 퍼. 퍼낸 자리는 제대로 덮어 놓고.”
“손 시려…….”
난 몸을 움직이는 쪽이 아니라 머리를 쓰는 학구파라구. 게다가 난 문과고, 너네 학부도 아닌데……. 이렇게 땅 밑에서 꼼지락거리며 살고 있는 균 따위,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이무영, 꾸물대지 말고 빨리해.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가야지.”
차라리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는 건데. 괜히 밥 얻어먹으려다 팔자에 없는 노동이나 하고. 난 목 밑으로는 쓸모없는데. 난 움직이면 죽는데.
입이 툭 튀어나온 채 일하고 있던 내가 답답했는지 시원이 다가왔다. 이미 녀석은 열 개의 봉지―그렇게 큰 건 아니었지만―에 흙을 가득 채워 놓은 후였다. 역시 많이 해 본 놈은 다르다니까.
“하아……. 몇 봉지 담았어?”
“……네 봉지.”
“나쁘지 않네. 가자. 어두워지기 전에 이거 연구실에 올려놔야 해.”
“그런데 무슨 학부 실험에 이렇게 많은 게 필요해?”
“애들 거는 세 개면 충분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사 1년 차 거. 이왕 하는 김에 다 챙겨야지.”
그럼 그렇지. 아무리 재시지만 학부 실험에 이렇게 많은 건 필요 없지. 학교가 자선 사업하는 곳도 아니고, 학생들에게 그렇게 잘 대해 줄 리가……. 가만, 그렇다면 내가 괜한 고생한 거 아냐?
으아,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젠장, 이게 다 성시원. 너…….
“왜? 불만 있어?”
입 밖으로 한 마디도 내지 않고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을 뿐이었는데 양손에 봉지를 여덟 개나 들고 가던 성시원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툭 내뱉었다.
“저녁 사 줄 테니까 입 집어넣고 따라와. 그래도 생각해서 여섯 개만 들게 했더니…….”
성시원은 가볍게 혀를 차고는 다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하긴, 시원이가 가지고 가는 것을 본다면 내가 불평할 처지는 못 된다. 대체 몸 어디에서 저 힘이 나오는 건지, 가느다란 몸으로 내 짐의 두 배를 들고 가면서도 전혀 지친 기색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성시원은 남자인 내가 봐도 꽤 괜찮은 놈이다. 키도 적당히 크고―본인은 179라고 말하지만 175인 내가 보기에는 훨씬 더 큰 것 같다. 제법 올려다보는 기분이니까― 군살이 보이지 않는 마른 몸매는 늘 연구실에 박혀 있는 놈답지 않게 날렵한 느낌을 줬다. 선이 좀 날카롭지만 그것이 인기 좋은 원인이기도 했다.
석사 과정 1년 차인데도 불구하고 선배들을 제치고 교수들의 신임을 받는 걸 보면 머리도 꽤 좋은 편이고. 친구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어딜 내놔도 아깝지 않은 남자다.
지구에 하나뿐인 ‘외계인’인 나, 이무영의 유일한 친구. 내가 아주 많이 좋아하는,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친구’.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모두 지구인일까, 하는 생각. 생긴 건 모두 비슷하지만 혹시 그중에는 지구인이 아닌 외계 생명체가 모습을 숨기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왜, 그 영화도 있지 않은가. 지구인인 척하고 살아가는 외계인들의 이야기, 맨 인 블랙(Man in Black).
명절에 시원이와 놀다 처음 그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내가 생각하던 것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구인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내 상상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떡 일어나 ‘거봐, 내 말 맞잖아’ 하고 소리쳤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 내 절친 성시원에게 눈에 별이 보이도록 한 대 얻어맞고 말았다. 헛소리 말고 영화나 보라고.
아아, 얼마나 무정한 놈이란 말인가. 나의 가녀린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아마 살면서 그렇게 감동적으로 본 영화는 없었을 거다. 지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던지. 시원이는 그런 내용의 영화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지만 나에게는 본모습을 숨기고 살아가는 외계인들만 보였다.
그날 이후 나는 혹시나 그런 외계인들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주위 사람들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생겼지만 아무리 찾아도 외계인 같은 이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모두 지구인. 나처럼 공중에 떠다니는 외계인이 아닌 지구에 안착하여 땅 위에 두 다리를 딛고 살아가는 지구인들이었다. 가끔 공중에 뭔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나와 같은 외계인은 아니다. 그리고 이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나만 홀로 두고.
그러니까 이 지구상에 외계인은 ‘나’뿐인 거다. 지구에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덜떨어진 외계인.
나 혼자 길을 걷고, 나 혼자 TV를 보고.
나 혼자 취해 보고, 이렇게 매일 울고불고.
사랑 참 달콤했어.
이별이란 그림자 안에서 오늘도 잠 못 자.
나직하게 흥얼거리는 남자 목소리.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에 전혀 안 어울리는 SISTAR의 나혼자(Alone).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조화에 픽 웃고 말았다. 대체 이 평일 한낮의 버스 안에서 저렇게 뻔뻔하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강심장은 누구일까.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보니……. 어라, 멀쩡한 인간이다.
넥타이를 약간 느슨하게 풀고 옆자리에 서류 가방을 놓아 둔 남자는 열어 둔 창문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있었다. 그리고 묵묵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며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그 낯간지러운 가사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뻔뻔함이라고 할까, 여유라고 할까.
그 무심함이 인상적이어서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네? 해고요?”
“음. 아무래도 요즘은 경기가 안 좋으니까…….”
나름대로 곤란한 얼굴을 만들어 지으며 눈앞의 인간이 말했다. 사실, 점장이 곤란할 게 뭐 있겠어. 마음에 안 드는 인간 하나 잘라 내면 그만인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아무리 요즘 경기가 안 좋은 게 사실이라지만 그렇다고 이제까지 1년 가까이 열심히 일 잘하던 사람을 잘라야 할 이유는 없잖아. 다 당신이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 아냐. 뭔가 뒤가 구린 것이 있으니 나에게 똑바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거잖아.
“본점에서 내려온 이야기야. 쓸데없는 인원은 감축하라고.”
쓸데없는 인원? 웃기네. 당신 눈은 장식이야? 나 말고 지금 저기 카운터에서 힐끔거리고 있는 저 인간을 봐. 만날 큰소리만 치고 돈만 축내는 놈이 바로 저놈이야.
이 조그만 편의점에, 아침 8시에 정시 출근해서―가끔 땡땡이도 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가끔 당신이 필요하다고 SOS 신호 보내면 쉬는 날 대타까지 뛴 나를 자르고 저 돈벌레 녀석은 살려 둔다? 하, 웃기네. 이래서 알바도 인맥이란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냐고.
“나라고 뭐, 아무리 알바지만 오랫동안 같이 일해 왔던 식구 같은 직원을 자르고 싶겠어? 나도 을이다 보니…… 사정이 어쩔 수 없고…….”
“……그럼 오늘까지 일당 계산돼서 나오겠네요.”
“그, 그렇지.”
점장의 유일한 장점이자 수많은 단점 중에 하나가 마음이 약하다는 거다. 이쪽에서 강하게 나가면 자기 마음에 안 들더라도 대놓고 싫은 소리를 못 한다는 거. 뭐, 그 덕분에 내가 좀 편하게 일을 하긴 했지.
“통장으로 넣어 주세요. 이번 주까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알았어. 그럼 이제…….”
갑자기 점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모습을 보니 더 속이 뒤틀리기는 하지만 괜히 시간을 끌수록 더 나만 비참해지는 거니까.
“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가게를 나서는 내 등 뒤로 점장의 안심하는 한숨 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 정말 저기서 일하는 거 나쁘지 않았는데.
가끔 술 취한 사람들이 들어와 행패를 부리기는 했지만 월급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주고, 남는 도시락도 가져갈 수 있어서 괜찮았었는데. 잘렸다는 억울함보다 조금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 없어졌다는 생각에 왠지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아아, 어디로 가야 하나.”
웅크리고 있던 몸을 쭉 펴니 뼈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른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공중에 붕 뜬 기분이다. 마땅히 갈 데도 없고, 평소에는 죽어라 가기 싫던 학교도 방학을 해 버렸으니 정말 갈 만한 곳이 없다. 이번 방학은 그래도 착실히 일 좀 해 보려고 했는데.
“시원이 녀석, 학교에 있을라나…….”
그러고 보니 그 녀석, 방학 동안 연구실에 있을 거라고 했지. 슬슬 학교나 가 볼까……. 뭐, 녀석이 싫어하든 말든 가면 밥 한 끼는 사 주겠지. 난 오늘 잘린 몸이니까.
어슬렁거리다가 마음을 굳히자마자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행선지를 정하고 나니 왠지 기분도 유쾌해졌다.
그래, 설마 굶기야 하겠어. 저번 달 월급 받은 것도 아직 남았고, 얼마 되진 않겠지만 이번 달 것도 들어올 테니. 까짓것 이제 막 방학이 시작됐잖아. 스물네 살, 꽃다운 나이의 인간 이무영. 겨울 방학 사흘 만에 다시 백수가 되었을 뿐이잖아.
“야, 이거 얼마큼 퍼야 돼?”
“봉지 가득 채워.”
“하나 채웠는데…….”
“봉지 전부 다 채워. 다섯 개밖에 안 되잖아.”
“야, 농담이지? 얼어붙기 시작한 땅을 파는 게 쉬워?”
“나도 같이하고 있잖아.”
“…….”
말이나 못 하면.
“밥 사 달라며. 몰라?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시원아…….”
“빨리하고 밥 먹으러 가. 배고파.”
아, 정말 돈이 없는 게 웬수다. 이제 막 백수가 된 마당에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니 거스를 수도 없고.
“자꾸 헛소리하면 더 늦어지니까 빨리해. 나도 손 시려.”
“알았어…….”
아아, 인간 이무영. 신세가 왜 이리됐지? 알바 잘린 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산속에서 흙이나 퍼야 하다니.
학교에 도착해서 과학동에 와 보니 예상대로 성시원은 과 연구실에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시원아, 밥 사……’까지 말했을 때, 그 녀석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유난히 반가운 얼굴로 날 맞이할 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내 손에는 다섯 개의 비닐봉지, 꽃삽, 목장갑 하나가 들려 있었고, 시원의 손에 이끌려 학교에서 자연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러브 로드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 경과한 지금, 이렇게 친구 성시원의 명령으로 봉지 가득 흙을 퍼 담고 있는 중이다.
“대체 이걸로 뭘 한단 말이야…….”
“애들 재시용이야. 멍청한 것들이 배지를 오염시키는 바람에 원래 자라야 할 균 대신에 곰팡이만 가득 자랐어. 그래서 교수님이 방학이든 뭐든 상관 않고 재시 친다 하신 거지. 덕분에 이 한겨울에 내가 이 고생인 거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시원이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방선균은 토양에 많으니까, 흙에서 추출하는 게 제일 편해. 야, 이왕이면 나무뿌리 근처 흙으로 퍼. 퍼낸 자리는 제대로 덮어 놓고.”
“손 시려…….”
난 몸을 움직이는 쪽이 아니라 머리를 쓰는 학구파라구. 게다가 난 문과고, 너네 학부도 아닌데……. 이렇게 땅 밑에서 꼼지락거리며 살고 있는 균 따위,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이무영, 꾸물대지 말고 빨리해.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가야지.”
차라리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는 건데. 괜히 밥 얻어먹으려다 팔자에 없는 노동이나 하고. 난 목 밑으로는 쓸모없는데. 난 움직이면 죽는데.
입이 툭 튀어나온 채 일하고 있던 내가 답답했는지 시원이 다가왔다. 이미 녀석은 열 개의 봉지―그렇게 큰 건 아니었지만―에 흙을 가득 채워 놓은 후였다. 역시 많이 해 본 놈은 다르다니까.
“하아……. 몇 봉지 담았어?”
“……네 봉지.”
“나쁘지 않네. 가자. 어두워지기 전에 이거 연구실에 올려놔야 해.”
“그런데 무슨 학부 실험에 이렇게 많은 게 필요해?”
“애들 거는 세 개면 충분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사 1년 차 거. 이왕 하는 김에 다 챙겨야지.”
그럼 그렇지. 아무리 재시지만 학부 실험에 이렇게 많은 건 필요 없지. 학교가 자선 사업하는 곳도 아니고, 학생들에게 그렇게 잘 대해 줄 리가……. 가만, 그렇다면 내가 괜한 고생한 거 아냐?
으아,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젠장, 이게 다 성시원. 너…….
“왜? 불만 있어?”
입 밖으로 한 마디도 내지 않고 원망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을 뿐이었는데 양손에 봉지를 여덟 개나 들고 가던 성시원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툭 내뱉었다.
“저녁 사 줄 테니까 입 집어넣고 따라와. 그래도 생각해서 여섯 개만 들게 했더니…….”
성시원은 가볍게 혀를 차고는 다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하긴, 시원이가 가지고 가는 것을 본다면 내가 불평할 처지는 못 된다. 대체 몸 어디에서 저 힘이 나오는 건지, 가느다란 몸으로 내 짐의 두 배를 들고 가면서도 전혀 지친 기색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성시원은 남자인 내가 봐도 꽤 괜찮은 놈이다. 키도 적당히 크고―본인은 179라고 말하지만 175인 내가 보기에는 훨씬 더 큰 것 같다. 제법 올려다보는 기분이니까― 군살이 보이지 않는 마른 몸매는 늘 연구실에 박혀 있는 놈답지 않게 날렵한 느낌을 줬다. 선이 좀 날카롭지만 그것이 인기 좋은 원인이기도 했다.
석사 과정 1년 차인데도 불구하고 선배들을 제치고 교수들의 신임을 받는 걸 보면 머리도 꽤 좋은 편이고. 친구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어딜 내놔도 아깝지 않은 남자다.
지구에 하나뿐인 ‘외계인’인 나, 이무영의 유일한 친구. 내가 아주 많이 좋아하는,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친구’.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모두 지구인일까, 하는 생각. 생긴 건 모두 비슷하지만 혹시 그중에는 지구인이 아닌 외계 생명체가 모습을 숨기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왜, 그 영화도 있지 않은가. 지구인인 척하고 살아가는 외계인들의 이야기, 맨 인 블랙(Man in Black).
명절에 시원이와 놀다 처음 그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내가 생각하던 것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구인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내 상상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떡 일어나 ‘거봐, 내 말 맞잖아’ 하고 소리쳤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 내 절친 성시원에게 눈에 별이 보이도록 한 대 얻어맞고 말았다. 헛소리 말고 영화나 보라고.
아아, 얼마나 무정한 놈이란 말인가. 나의 가녀린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아마 살면서 그렇게 감동적으로 본 영화는 없었을 거다. 지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던지. 시원이는 그런 내용의 영화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지만 나에게는 본모습을 숨기고 살아가는 외계인들만 보였다.
그날 이후 나는 혹시나 그런 외계인들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주위 사람들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생겼지만 아무리 찾아도 외계인 같은 이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모두 지구인. 나처럼 공중에 떠다니는 외계인이 아닌 지구에 안착하여 땅 위에 두 다리를 딛고 살아가는 지구인들이었다. 가끔 공중에 뭔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나와 같은 외계인은 아니다. 그리고 이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나만 홀로 두고.
그러니까 이 지구상에 외계인은 ‘나’뿐인 거다. 지구에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덜떨어진 외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