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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지구에 내리다 2화
“그래서 잘렸어?”
“내가 무슨 힘이 있어? 그만두라는데 그만둬야지.”
입 안에 들어 있는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하자 시원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짜식, 까탈스럽기는. 우리 사이에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한두 해인가.
“틀림없이 그 돈벌레 자식이 점장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야. 일가친척 중 한 명이라든가, 아는 동생이라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내연의 관계라든가.”
“내연?”
시원의 말꼬리가 살짝 리듬을 타고 내려갔다 올라왔다. 안경테 너머로 미간이 살짝 움직였다. 뭔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을 때의 습관이었다.
“당연하지. 그게 아니고서야, 나처럼 유능하고 사교성 좋은 점원을 자르고 그 돈벌레 자식을 남길 리가 없잖아.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그 편의점은 이제 망하는 길밖에 안 남았어.”
“……밥 먹자.”
얼굴을 보지 않아도 한심하다고 여기고 있는 게 느껴졌다.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 시원이는 열심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내 말이 맞는데…….”
“밥.”
성시원은 저게 문제라고. 딱 한 마디로 사람들을 제압하는 기술이 탁월하다는 것. ‘밥’이란 한 단어에 힘을 실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는 기술은 저 녀석, 성시원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저런 성깔로 조교 일에 학부 애들 실습 감독까지 하니 애들만 불쌍하지.
“만날 나만 구박해.”
“……네가 계산할래?”
“아, 아니야. 먹을게. 먹으면 되잖아. 입 다물고 밥 먹으면 되잖아.”
농담하지 마! 나 같은 극빈자가 무슨 재주로 이 밥값을 감당하냐고. 모처럼 얻어먹는 거라 비싼 걸로 골랐는데.
시원이를 꼬셔서 일부러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고깃집에 와서 등갈비를 시켰다. 내가 사야 했다면 학교 앞의 5천 원짜리 정식으로 했겠지만.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방학 동안 놀 수도 없잖아.”
“음……. 다른 알바를 찾아봐야지. 방학 동안 열심히 일해서 등록금도 모아야 하고, 월세도 내야 하고.”
“……그래?”
“응.”
입맛이 조금 떨어졌다. 생활에 대해 생각하면 아무래도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홀로 생활을 하며 학비를 내는 건 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집에서 지원을 받으면 또 모르지만 그럴 사정이 못 된다. 마음 같아서야 학교를 때려치우고 싶지만 부모님에게 학교만은 졸업하겠다고 약속을 했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이라도 탈 수 있다면야 조금 편할지도 모르지만 평균 성적만 유지하던 내가, 공부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제치고 장학금을 따는 것은 지금 다시 대학에 붙는 것만큼 힘든 일이기도 했다.
결국 뭔가 몸으로 뛰는 일밖에 할 수 없다는 소리인데, 방학 때 알바를 하나 더 하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일자리를 하나 구하는 것과 둘을 구하는 건 엄연히 달랐다. 1년만 더 버티면 된다고 해도 그 1년이 내게는 너무 길었다.
“내가 알아봐 줄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원이가 불쑥 물었다.
“응?”
“알바.”
이게 뭔 소리야?
“정말?”
“내일 연구실에 한 번 더 들려서 이력서랑 자기 소개서 주고 가. 가지고 있다가 괜찮은 곳에 내줄 테니까. 일주일 안에 구해 줄게.”
“알았어, 알았어.”
목이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큰일이겠어. 제일 큰 골칫거리가 해결되는데. 역시 사람은 이래서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모양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을 만들어 주니.
“좋아한다, 성시원.”
“……헛소리하고 있네.”
시원이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밥이나 먹어.”
“응.”
아아, 정말 자꾸 웃음이 나와서 참을 수가 없다.
알고 있어? 너로 인해 내가 너무나 행복해진다는 거. 그때마다 공중에 떠 있는 내 두 발이 지구에 살짝 닿는 느낌이 들어. 그것이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일인지 너는 모르겠지.
좋아해, 성시원. 정말로, 진심으로, 네가 좋아.
시원이한테 연락이 온 건 사흘이 지난 후였다.
그 사흘 동안 나는 집 청소도 하고 밀린 빨래도 하고, 쓰레기를 버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그냥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며 뒹구는 것으로 보내고 있었다.
평일의 텔레비전이란 지독스레 재미없는 것만 골라 방영하고 있었고, 케이블 대신 나의 문화생활을 책임져 주던 낡은 컴퓨터가 고장 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뒹구는 것밖에 없었다. 물론 시원이에게 얘기하면 책이나 읽으라고 핀잔을 주겠지만 가끔 이렇게 멍하니 누워 몸의 감각이 부유하는 것을 느끼는 것도 해 볼 만한 일이었다.
온몸에 힘을 빼고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을 즐기는 것. 유영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그 부유하는 감각을 즐기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또 방에서 굴러다니고 있지?
귀신. 독심술도 모자라 이제는 천리안까지 가지고 있냐?
-나와. 오후에 면접 보러 갈 데가 있어.
“오늘 오후?”
-나도 같이 가고 싶지만 오후에 애들이 실험하러 오거든. 지도 찍어 보낼 테니까 검색해서 찾아가.
너무 갑작스레 일이 진행되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뭐라고 투덜댔다가는 잔소리만 실컷 듣고 알바 자체가 날아갈 수 있으니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알았어. 조금 있다 갈게.”
아아,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이무영이라.
“끝나고 밥 먹을까?”
-……끊어.
괜히 한 마디 더 해서 욕 얻어먹는 멍청한 인간, 이무영이여.
칼같이 끊어진 전화에 왠지 모를 즐거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접 보고 시원이한테 가야지. 말은 매정하게 해도 가서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얼굴로 훌쩍이고 있으면 그래도 밥은 주는 녀석이니까. 살짝 눈썹을 움직이며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 시원이 녀석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슬슬 시계를 보니 11시 10분. 대충 씻고 나가면 적어도 1시까지는 도착할 것 같다. 갑자기 몸이 가벼워졌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움직였다.
생각보다 바람이 시원했다.
겨울바람이 시원하다는 말이 어이없긴 하지만 작년보다 훨씬 따뜻한 날씨 탓인지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겨울이란 놈은 화끈하게 추운 게 좋다. 추워서 벌벌 떨고 이를 갈아야 봄이 왔을 때 기분이 좋다고나 할까. 남들이 들으면 웃긴다고 할지 모르지만 겨울은 원래 그래야 하는 거다. 여름이 더워야 하는 것처럼.
화끈하게 춥거나, 화끈하게 더운 날씨는 적어도 생각이란 놈이 머리에서 난리를 치는 것을 막아 주니까. 생각이란 놈이 지나치게 날뛰면 너무 지쳐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우울을 부르고, 우울은 또…….
시원하게 느껴지던 바람이 조금씩 차가워지기 시작할 무렵, 버스가 도착했다. 지하철로 가는 것이 시간도 절약되고 늦는 일도 없지만,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한 지 6년째가 되어 가는데도 답답한 땅속으로 가는 것보다는 바깥 풍경이 보이는 쪽이 좋았다.
버스를 타고 서울을 관통해야 하는 거리를 가야 하거나 시간이 아슬아슬할 때는 예외지만 적어도 바깥이 보이면 내가 어디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 표지판 하나로 위치를 파악한다는 건 너무 바보같이 느껴진다. 깜깜하고, 빛이라고는 전기로 빛나는 등이 전부인 그런 건 정말 답답했다.
“……혼자…… 밥을 먹고…….”
그때였다. 머릿속의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 무렵, 갑자기 낮은 목소리 하나가 귀에 파고들었다.
낮고 조금은 거친 목소리. 하지만 울림이 깊어 왠지 한 번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목소리. 너무 낮게 웅얼거려서 금방 알아듣긴 힘들지만 꽤 발음이 정확해서…….
“나 혼자 길을 걷고, 나 혼자 TV를 보고……. ……울고불고.”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중얼거리듯 낮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노래라고 하기에는 높낮이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중얼거리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약간이지만 분명한 리듬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걸 노래라고 해야 할지, 그냥 단순한 흥얼거림이라고 해야 할지. 낯익은 가사가, 그리고 그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찾아내기 위해 버스 안을 둘러보았지만 노래를 부를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평일 한낮의 버스 안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어 타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운전기사 아저씨를 제외하고는 네 명이 전부였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머리를 가볍게 까닥거리고 있는 여학생, 창에 기대어 가볍게 졸고 있는 중년의 아줌마 한 명, 애인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열심히 통화 중인 남학생 하나, 그리고 내 대각선 앞에 앉아 있는 코트를 입은 남자 한 명이 전부인데…….
설마.
“사랑 참 달콤했어. 이별이란 그림자 안에서 오늘도 잠 못 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 좋은 목소리가 똑똑히 귀에 들어왔다.설마, 저렇게 무심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는 저 아저씨가 저걸 부르고 있는 거야? 저 낯 뜨거운 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실례인 줄 알면서도, 아니, 그걸 인식도 못한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남자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내 시선은 완전히 그 남자를 향해 있었고, 나의 시선을 느꼈을 게 분명한데도 남자는 꿋꿋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주위는 전혀 상관 않는다는 얼굴로,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바깥을 내다보며, 아주 진지하게.
그 무심할 정도의 태연함이라니. 너무나 진지하고 전형적인 샐러리맨의 표본처럼 보이는 남자가 부르는 걸 그룹의 노래.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너무나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익숙한 느낌도 들고.
정말이지 너무나 즐겁다. 이래서 지하철보다는 버스가 좋다니까. 지하철에서 저런 사람이 저런 노래를 불러 봐. 미친놈 취급밖에 더 받나. 응, 하지만 듣기 좋아. 저 남자의 목소리가.
조용한 버스 안에서의 건조하지만 나직한 흥얼거림이 창밖의 풍경과 함께 조용히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잘렸어?”
“내가 무슨 힘이 있어? 그만두라는데 그만둬야지.”
입 안에 들어 있는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하자 시원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짜식, 까탈스럽기는. 우리 사이에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한두 해인가.
“틀림없이 그 돈벌레 자식이 점장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야. 일가친척 중 한 명이라든가, 아는 동생이라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내연의 관계라든가.”
“내연?”
시원의 말꼬리가 살짝 리듬을 타고 내려갔다 올라왔다. 안경테 너머로 미간이 살짝 움직였다. 뭔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을 때의 습관이었다.
“당연하지. 그게 아니고서야, 나처럼 유능하고 사교성 좋은 점원을 자르고 그 돈벌레 자식을 남길 리가 없잖아.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그 편의점은 이제 망하는 길밖에 안 남았어.”
“……밥 먹자.”
얼굴을 보지 않아도 한심하다고 여기고 있는 게 느껴졌다.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 시원이는 열심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내 말이 맞는데…….”
“밥.”
성시원은 저게 문제라고. 딱 한 마디로 사람들을 제압하는 기술이 탁월하다는 것. ‘밥’이란 한 단어에 힘을 실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는 기술은 저 녀석, 성시원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저런 성깔로 조교 일에 학부 애들 실습 감독까지 하니 애들만 불쌍하지.
“만날 나만 구박해.”
“……네가 계산할래?”
“아, 아니야. 먹을게. 먹으면 되잖아. 입 다물고 밥 먹으면 되잖아.”
농담하지 마! 나 같은 극빈자가 무슨 재주로 이 밥값을 감당하냐고. 모처럼 얻어먹는 거라 비싼 걸로 골랐는데.
시원이를 꼬셔서 일부러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고깃집에 와서 등갈비를 시켰다. 내가 사야 했다면 학교 앞의 5천 원짜리 정식으로 했겠지만.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방학 동안 놀 수도 없잖아.”
“음……. 다른 알바를 찾아봐야지. 방학 동안 열심히 일해서 등록금도 모아야 하고, 월세도 내야 하고.”
“……그래?”
“응.”
입맛이 조금 떨어졌다. 생활에 대해 생각하면 아무래도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홀로 생활을 하며 학비를 내는 건 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집에서 지원을 받으면 또 모르지만 그럴 사정이 못 된다. 마음 같아서야 학교를 때려치우고 싶지만 부모님에게 학교만은 졸업하겠다고 약속을 했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이라도 탈 수 있다면야 조금 편할지도 모르지만 평균 성적만 유지하던 내가, 공부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제치고 장학금을 따는 것은 지금 다시 대학에 붙는 것만큼 힘든 일이기도 했다.
결국 뭔가 몸으로 뛰는 일밖에 할 수 없다는 소리인데, 방학 때 알바를 하나 더 하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일자리를 하나 구하는 것과 둘을 구하는 건 엄연히 달랐다. 1년만 더 버티면 된다고 해도 그 1년이 내게는 너무 길었다.
“내가 알아봐 줄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원이가 불쑥 물었다.
“응?”
“알바.”
이게 뭔 소리야?
“정말?”
“내일 연구실에 한 번 더 들려서 이력서랑 자기 소개서 주고 가. 가지고 있다가 괜찮은 곳에 내줄 테니까. 일주일 안에 구해 줄게.”
“알았어, 알았어.”
목이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큰일이겠어. 제일 큰 골칫거리가 해결되는데. 역시 사람은 이래서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모양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을 만들어 주니.
“좋아한다, 성시원.”
“……헛소리하고 있네.”
시원이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밥이나 먹어.”
“응.”
아아, 정말 자꾸 웃음이 나와서 참을 수가 없다.
알고 있어? 너로 인해 내가 너무나 행복해진다는 거. 그때마다 공중에 떠 있는 내 두 발이 지구에 살짝 닿는 느낌이 들어. 그것이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일인지 너는 모르겠지.
좋아해, 성시원. 정말로, 진심으로, 네가 좋아.
시원이한테 연락이 온 건 사흘이 지난 후였다.
그 사흘 동안 나는 집 청소도 하고 밀린 빨래도 하고, 쓰레기를 버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그냥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며 뒹구는 것으로 보내고 있었다.
평일의 텔레비전이란 지독스레 재미없는 것만 골라 방영하고 있었고, 케이블 대신 나의 문화생활을 책임져 주던 낡은 컴퓨터가 고장 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뒹구는 것밖에 없었다. 물론 시원이에게 얘기하면 책이나 읽으라고 핀잔을 주겠지만 가끔 이렇게 멍하니 누워 몸의 감각이 부유하는 것을 느끼는 것도 해 볼 만한 일이었다.
온몸에 힘을 빼고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을 즐기는 것. 유영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그 부유하는 감각을 즐기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또 방에서 굴러다니고 있지?
귀신. 독심술도 모자라 이제는 천리안까지 가지고 있냐?
-나와. 오후에 면접 보러 갈 데가 있어.
“오늘 오후?”
-나도 같이 가고 싶지만 오후에 애들이 실험하러 오거든. 지도 찍어 보낼 테니까 검색해서 찾아가.
너무 갑작스레 일이 진행되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뭐라고 투덜댔다가는 잔소리만 실컷 듣고 알바 자체가 날아갈 수 있으니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알았어. 조금 있다 갈게.”
아아,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이무영이라.
“끝나고 밥 먹을까?”
-……끊어.
괜히 한 마디 더 해서 욕 얻어먹는 멍청한 인간, 이무영이여.
칼같이 끊어진 전화에 왠지 모를 즐거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접 보고 시원이한테 가야지. 말은 매정하게 해도 가서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얼굴로 훌쩍이고 있으면 그래도 밥은 주는 녀석이니까. 살짝 눈썹을 움직이며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 시원이 녀석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슬슬 시계를 보니 11시 10분. 대충 씻고 나가면 적어도 1시까지는 도착할 것 같다. 갑자기 몸이 가벼워졌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움직였다.
생각보다 바람이 시원했다.
겨울바람이 시원하다는 말이 어이없긴 하지만 작년보다 훨씬 따뜻한 날씨 탓인지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겨울이란 놈은 화끈하게 추운 게 좋다. 추워서 벌벌 떨고 이를 갈아야 봄이 왔을 때 기분이 좋다고나 할까. 남들이 들으면 웃긴다고 할지 모르지만 겨울은 원래 그래야 하는 거다. 여름이 더워야 하는 것처럼.
화끈하게 춥거나, 화끈하게 더운 날씨는 적어도 생각이란 놈이 머리에서 난리를 치는 것을 막아 주니까. 생각이란 놈이 지나치게 날뛰면 너무 지쳐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우울을 부르고, 우울은 또…….
시원하게 느껴지던 바람이 조금씩 차가워지기 시작할 무렵, 버스가 도착했다. 지하철로 가는 것이 시간도 절약되고 늦는 일도 없지만,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한 지 6년째가 되어 가는데도 답답한 땅속으로 가는 것보다는 바깥 풍경이 보이는 쪽이 좋았다.
버스를 타고 서울을 관통해야 하는 거리를 가야 하거나 시간이 아슬아슬할 때는 예외지만 적어도 바깥이 보이면 내가 어디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 표지판 하나로 위치를 파악한다는 건 너무 바보같이 느껴진다. 깜깜하고, 빛이라고는 전기로 빛나는 등이 전부인 그런 건 정말 답답했다.
“……혼자…… 밥을 먹고…….”
그때였다. 머릿속의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 무렵, 갑자기 낮은 목소리 하나가 귀에 파고들었다.
낮고 조금은 거친 목소리. 하지만 울림이 깊어 왠지 한 번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목소리. 너무 낮게 웅얼거려서 금방 알아듣긴 힘들지만 꽤 발음이 정확해서…….
“나 혼자 길을 걷고, 나 혼자 TV를 보고……. ……울고불고.”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중얼거리듯 낮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노래라고 하기에는 높낮이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중얼거리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약간이지만 분명한 리듬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걸 노래라고 해야 할지, 그냥 단순한 흥얼거림이라고 해야 할지. 낯익은 가사가, 그리고 그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찾아내기 위해 버스 안을 둘러보았지만 노래를 부를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평일 한낮의 버스 안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어 타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운전기사 아저씨를 제외하고는 네 명이 전부였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머리를 가볍게 까닥거리고 있는 여학생, 창에 기대어 가볍게 졸고 있는 중년의 아줌마 한 명, 애인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열심히 통화 중인 남학생 하나, 그리고 내 대각선 앞에 앉아 있는 코트를 입은 남자 한 명이 전부인데…….
설마.
“사랑 참 달콤했어. 이별이란 그림자 안에서 오늘도 잠 못 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 좋은 목소리가 똑똑히 귀에 들어왔다.설마, 저렇게 무심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는 저 아저씨가 저걸 부르고 있는 거야? 저 낯 뜨거운 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실례인 줄 알면서도, 아니, 그걸 인식도 못한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남자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내 시선은 완전히 그 남자를 향해 있었고, 나의 시선을 느꼈을 게 분명한데도 남자는 꿋꿋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주위는 전혀 상관 않는다는 얼굴로,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바깥을 내다보며, 아주 진지하게.
그 무심할 정도의 태연함이라니. 너무나 진지하고 전형적인 샐러리맨의 표본처럼 보이는 남자가 부르는 걸 그룹의 노래.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너무나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익숙한 느낌도 들고.
정말이지 너무나 즐겁다. 이래서 지하철보다는 버스가 좋다니까. 지하철에서 저런 사람이 저런 노래를 불러 봐. 미친놈 취급밖에 더 받나. 응, 하지만 듣기 좋아. 저 남자의 목소리가.
조용한 버스 안에서의 건조하지만 나직한 흥얼거림이 창밖의 풍경과 함께 조용히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