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내가 듣는다 1화
제 1장. 옆집 남자 (1)
2050년, 과학의 발전으로 릴리트(Lilith)가 발견되면서 세계는 큰 변화를 맞았다. 릴리트는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 중의 하나로 인간의 정신과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 물질이다. 릴리트를 조작해서 무언가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신 감응력이 높은 일부 능력자들뿐이었다.
통칭 시공간 술사, 초능력자, 또는 릴리트의 아이들이라고도 불리는 자들의 출현으로 사람들은 기존의 과학 기술보다 한 차원 높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시공간 술사라고 하니 뭔가 거창하게 보이지만 그들은 결국 릴리트를 다루는 새로운 형태의 초능력자일 뿐이다. 그들은 릴리트로 단순히 물체를 구현할 뿐만 아니라 최근 각광받고 있는 가상현실 공간도 구현할 수 있었는데, 이런 능력을 활용하여 각계각층에서 다양하게 활약하고 있었다.
술사들은 희소하다는 점에서 대접받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공간 술사 중에도 급이 있었다. SS급이나 S급은 정부에서 진행하는 대형 프로젝트들을 주로 맡으며 천문학적인 보상을 받았고, A급이나 B급은 주로 대기업이나 정부, 연구소에 소속되어 일했다.
그와 달리, C급의 시공간 술사들은 주로 프리랜서 형태로 계약해서 일을 받았다. 높은 랭크의 능력자들도 능력을 많이 사용하면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었지만, C급 술사들은 특히 불안정했다. 그들은 정신 감응력을 사용하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여 쉽게 피로가 누적되었는데, 이 때문에 몸이 망가지거나 정신적으로 위험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C급 술사들은 주로 젊을 때 여러 프로젝트에 뛰어들어 많은 돈을 벌어 놓고, 힘이 부치게 되면 일을 그만두고 그동안 벌어 놓은 돈으로 평생을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세류 크리스토퍼 역시 C급 시공간 술사였다. C급 술사인 세류가 주로 프로젝트 계약을 진행하는 곳은 가상현실 사업의 1위 기업이라고 칭송받는 유니버스라는 곳이었다.
세류는 넓은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푹신한 벨벳 소파에는 그 혼자 앉아 있었고, 문가에는 비서인 듯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시립해 있었다. 그를 부른 김 부장은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유니버스는 법인 기업으로서는 아주 드물게도 SS급 시공간 술사를 한 명, A급 시공간 술사를 세 명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세류 같은 C급 술사에 대한 취급은 좋지 않은 편이었다.
세류는 눈앞에 놓인 식은 커피에 손을 가져가려다 그만두었다. 정신 집중이 필요한 일의 특성상 정신 감응력에 영향을 주는 카페인, 술, 담배, 마약 등등은 금지였다. 가끔 SS급 중에 마약 따위를 섭취하고 폭주하듯이 릴리트 구현을 하는 놈도 있다고 들었지만 C급인 자신에게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술사가 오는 것을 알면서도 커피를 내오다니. 대기업이다 보니 보수는 짭짤한 편이었지만 가끔 이런 식으로 굴 때는 짜증이 치밀어 오르곤 한다. 하지만 세류는 억지로 화를 삭였다. 이 일도 이제는 마지막이기 때문이었다.
나이는 아직 27세로 어린 편이었지만, 세류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를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바짝 돈을 벌어들이고 시공간 술사로서의 일에는 손을 뗄 예정이었다.
세류는 손목에 찬 시계를 쳐다보았다. 기다리라고 한 지 벌써 30분이 지났다.
“김 부장은 아직인가요.”
세류가 비서에게 조용히 물었다. 비서는 곤란한 얼굴로 시계를 흘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앞의 회의가 조금 길어지시는 모양입니다. 곧 오실 겁니다.”
세류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또다. 김 부장은 사람과의, 특히 세류와의 시간 약속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프리한 사람이었다. 이름은 김영진. 세류의 고등학교 동창이며 그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때 응접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선글라스를 끼고 은색 모피 코트를 걸친 김 부장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침에 미용실을 갔다 왔는지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가 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고등학교 때 김영진은 누구보다도 조용하고 얌전한,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는데 그 반동인지 현재는 자신만의 세계에 사는 행복한 관심종자가 되어 버렸다. 세류는 그를 짠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었다.
“미리 와 계셨군요.”
김영진이 그렇게 말하며 저벅저벅 걸어와 소파에 앉았다. 그가 들어오자 뒤에 있던 사람들이 응접실의 문을 닫았다. 마치 왕자라도 된 듯한 행동이었지만 세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유니버스에는 능력자들이 많은 만큼 또라이가 많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김영진이 바텐더에게 주문하듯이 비서에게 손짓했다.
“내가 항상 먹는 걸로 부탁해.”
“알겠습니다.”
비서가 조용히 물러갔다. 뒤에서 커피를 내리는 소리가 났다. 김영진은 늦은 주제에 사과 한마디도 없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파일을 펴서 그것을 살폈다. 세류는 선글라스를 끼고도 그 글자들이 보이는 건지 아니면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래요……. C급 시공간 술사, 세류 크리스토퍼 씨. 당신을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저희 유니버스에서 새로 추진하는 가상현실 프로젝트의 공간 구현을 당신에게 맡기고 싶어서입니다.”
C급을 꼭 강조할 필요가 있는 걸까. A급과 주로 접촉하다 보니 술사의 소중함을 모르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그럼에도 세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김영진이 파일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가상현실 프로젝트의 공식 명칭은 ‘아이아이’. 부 명칭은…… 결국에는 사랑이, 사랑이…….”
서류가 잘 보이지 않는지 더듬거리던 김영진이 결국 선글라스를 벗었다. 휙 하고 선글라스를 벗어 탁자에 올려놓은 그는 파일을 한번 보더니 자기 딴에는 멋져 보인다고 생각하는,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세류를 향해 말했다.
“결국엔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다! 메이킹 러브 프로그램입니다.”
뭐라고? 메이킹 러브? 뭐? 세류는 살짝 패닉에 빠졌다. 유니버스에서도 그런 프로그램을 만드나? 김영진이 비서가 건네는 커피를 받아 들고 호록 마셨다. 그리고 덧붙여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까놓고 말하자면 가상현실 섹스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죠. 저희 유니버스는 가상현실의 지배자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성과를 이룩해 냈지만 단 하나 발을 대지 않은 것이 인간의 본능과 관련된 이 분야입니다. 수요가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었지만 회사가 구축한 이미지를 훼손시킬 수 있어 뛰어들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죠. 하지만 최근 저희를 빠르게 추격해 오고 있는 후발주자인 언더크래프트에서 이 분야의 프로그램 제작에 착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 역시 여기에 손을 대기로 한 겁니다.”
“김 부장.”
세류는 조용히 김영진을 불렀다. 김영진이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신지요.”
“지금 저에게…… 마지막 의뢰로 가상현실 섹스 프로그램의 구현을 부탁하시는 게 맞습니까?”
세류는 믿을 수가 없어 그에게 다시 질문했다. 여러모로 불안정한 C급 시공간 술사는 릴리트 구현의 성질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특히 그는 C급 시공간 술사지만 정신 감응력만큼은 A급만큼 높아서, 프로그램 구현 시에 다른 술사들보다도 더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만약 A급이라면 정신 배리어를 만들며 진행할 수도 있겠지만 C급이라 그런 고급 기술은 불가능하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프로그램의 테스팅도 아니고. 아니,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테스팅이라고 해도 안 하겠지만, 구현이라니.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 세류 씨는 기초 모듈의 구현만 맡아 주시면 됩니다. 상세한 프로그램 제작은 저희 사에 소속되어 있는 A급 시공간 술사분이 맡아 주시기로 했습니다. 중간에 카오스 상태에만 빠지지 않으면 영향을 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영진이 세류의 표정을 보고 다급하게 대답했다. 영진은 소싯적 세류의 더러운 성질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세류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패악을 부릴 일이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지만, 그를 알고 지내는 동안 고착된 습관은 무시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릴리트 구현은 첨예한 정신 집중을 기본으로 한다. 가상현실 프로그램 제작 역시 원리는 같았다. 릴리트로 정신 감응력이 뛰어나지 않은 일반인이 가상현실을 체험할 수 있는 형태로 시공간을 구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구현 도중에 정신이 흐트러져 비정상적으로 릴리트 구현이 중단될 시에는 카오스라고 불리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래도 생각의 뫼비우스 띠에만 빠지지 않으면 카오스 상태에 빠질 확률은 현저하게 낮은 편이다. 그제야 세류는 안심한 얼굴을 했다.
“그럼 기본 시공간 구현만 맡으면 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참고로…… 보수가 아주 짭짤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제가 특별히 저희 사와 오랜 인연을 맺어 온 세류 크리스토퍼 씨에게 부탁드리는 거죠.”
김영진이 윙크했다. 그것을 가볍게 무시한 세류는 그가 내민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 보기 시작했다. 친절하게도 A급 시공간 술사인 제라드 멜튼이 이미 기본 시공간 맵을 짜 놓은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세류는 그 위에 기본 시공간 구현만 하면 된다. 세류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기본 시공간 구축은 그의 특기였다.
마지막 경력이 가상현실 섹스 프로그램이 된다는 것이 좀 찝찝하긴 하지만 유니버스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이니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마지막 보수 항목이…….
액수를 바라보며 점점 펴지는 세류의 얼굴을 보고 영진이 칭찬해 달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이번만큼은 잘했다, 김 부장.’
세류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영진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계약서에 사인했다.
계약을 성공적으로 끝낸 기념으로 그들은 악수를 했다. 영진이 ‘나중에 고기 사’라고 입 모양으로 이야기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몸을 키우는 데 재미를 붙인 그는 고기 덕후가 되어 있었다. ‘그래’라고 세류가 입 모양으로 대답하자 영진이 신나는 표정을 지었다.
유니버스에 소속되어 일과 관련된 관계 속에서 치이면서 예전에 함께했던 친구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는 영진은 짬을 내어 예전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이내 비서 등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큼큼, 헛기침하더니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상세한 사항은 전송 장치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럼 좋은 결과물 기대하겠습니다.”
영진은 살짝 흘러내린 모피 코트를 다시 망토처럼 걸치고 응접실을 나갔다. 세류는 손에 들린 계약서 봉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이왕 맡은 일,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야지. 제작 마감기한은 6개월 후였지만 집중력을 발휘하면 일을 그보다 더 빨리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유니버스 사에서 나온 세류는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만세 하듯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어마어마한 보수! 그것만 있다면 도심에 새로운 집을 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희망에 그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스카이 라인을 타고 집으로 향하며 그는 레일 아래에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건물들을 내려다보았다.
세류가 지금 사는 곳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 지역의 맨션으로, 집이 복도식으로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스카이 라인 역이 근처에 있어 교통은 좋은 편이었지만 오래된 맨션이다 보니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정신 감응력을 사용해야 하는 입장에서 소음이 정신집중에 방해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주위 사람이나 물건에 관심이 없는 그에게 있어선 별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이라 상관없었다. 그리고 근 6개월간은 옆집이 비어 있어서 가끔 위층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 이외에 별다른 소음도 없었다.
“어?”
맨션 앞에 도착한 세류는 거대 드론이 이삿짐으로 추정되는 짐들을 꾸준히 나르는 것을 발견했다. 밖에서 훤히 보이는 복도식이었기에 그는 드론이 짐을 나르는 곳이 어디인지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가 사는 집의 옆집이었다.
‘누가 이사 온 모양이군.’
철저한 개인주의인 그는 일부러 이웃을 찾아가 반가운 인사를 건넬 생각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 이웃집을 살펴보는 일 없이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앗.”
하지만 그때 옆집에서 나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어딘가 멍해 보이는 눈빛을 가진 검은 머리카락의 덩치가 큰 남자였다. 순해 보이는 눈매가 마치 대형견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남자는 세류를 보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세류는 어색하게 대답하고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세류는 땀을 삐질 흘렸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마치 변태하듯이 극단적인 외향적 성격을 가지게 된 김영진과 달리, 고등학교 때 나름 외향적이었던 세류는 시공간 술사로서 일을 맡게 되면서 철저하게 내향적인 사람이 되었다. 이웃과 하하 호호 웃으면서 인사치레를 나누는 것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럼 이만.”
세류는 담담하게 말을 내뱉고 지문 코드를 찍어 문을 열었다. 남자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들어가자 뒤에서 자동으로 문이 닫혔다.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된 날 하필 옆집에 누가 이사를 오다니. 부디 앞으로 별문제가 없길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의뢰 상세 사항을 한번 훑어본 세류는 작업실의 데스크에 앉아 구현에 도움이 되는 ‘디바’라는 장비들을 착용하고 기본 시공간 맵을 기동해 보았다. 역시 유니버스 사의 A급 시공간 술사인 제라드 멜튼이 만든 것이라서 그런지 초록색으로 구현된 시공간 맵은 완벽했으며, 다음 술사가 구현하기 쉽게 군데군데 좌표를 지정해 두는 치밀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세류는 눈을 감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구상이 머릿속에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그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아까부터 미세하게 귀를 간질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지만 점점 크고 또렷하게 들려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하앗, 아앗, 앗! 으으응……!!!”
그것은 앓는 소리와 비슷했다. 아니, 앓는 소리 같은 게 아니라 저건 완벽히 신음 소리였다. 집중을 방해받은 세류는 눈을 감은 채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갑자기 일어난 이상 상황에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지만, 프로인 세류는 침착하게 기동을 종료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나타났던 초록색의 맵이 사라지고 휑한 작업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뭐, 뭐야.”
세류는 떨리는 눈으로 신음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벽. 그 신음은 세류의 집과 옆집 사이의 벽에서 나고 있었다. 벽이 멋대로 신음을 내뱉고 있을 리는 없으니 그건 옆집에서 나는 소리일 것이다. 세류는 맨션의 구조상 그의 작업실이 옆집의 침실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도 없었던 옆집에 사람이 이사 왔으니 작은 소음 문제가 있을 거라는 것은 이미 예상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은 생활 소음 정도였다. 첫날부터 남자 신음소리 따위가 벽을 타고 들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류는 패닉에 빠져 벽을 바라본 채로 잠시 굳어 있었다. 잠시 멈추었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세류가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신음 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도중에 도대체 뭘 부탁하는지 모르겠지만 애원하는 목소리까지 들렸다.
운동을 하는 듯한 덩치의 순해 보이던 옆집 남자가 저 신음을 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세류는 이어지는 상상에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노골적인 소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사 갈까.’
그는 잠시 동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밤을 새우고 말았다. 세류는 주먹으로 벽을 짚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는 길게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어제 애원하는 소리 이후 더 신음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예민한 그에게는 충분한 자극이었다.
밤새 이사할까 말까만 수십 번을 생각했다. 비록 C급이긴 하지만 시공간 술사이기 때문에 모아 놓은 돈이 꽤 있었다. 하지만 이 집은 그가 어릴 때부터 살던 곳이기도 하고, 이제는 없는 부모님과의 추억이 곳곳에 어려 있었다. 게다가 도심에 떡하니 좋은 집을 사서 이사 가는 것도 아니고, 신음 따위에 쫓기듯이 나가는 건 뭔가 지는 것 같아서 싫었다.
‘이사 온 기념으로 애인이라도 초대한 모양이지. 설마 또 그러겠어.’
세류는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주방에서 찬물을 한껏 들이켜고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일단 기초 시공간 구성 계획을 짜기로 했다. 꼼꼼한 성격인 세류는 일을 미루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전 오후 내내 작업실에 머무르며 기초 계획서를 작성했다. 안경을 끼고 노트북을 두드리면서도 계속해서 옆집을 힐끔거렸다. 다행히 낮 동안에는 옆집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루 동안 조용한 작업실에서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충족감을 누린 세류는 저녁을 대충 때운 뒤 작업실 한쪽에 놓여 있는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웠다. 시간은 저녁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했어.’
세류는 눈을 꼭 감고 이불을 목 끝까지 올리며 생각했다.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생각보다 더 세세하게 작성된 계획서대로라면, 4개월 이내에 기초 시공간 구현을 마치고 남은 2개월 동안 여유롭게 테스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 밤을 새워서인지 눕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마가 찾아왔다. 오늘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세류는 밀려오는 잠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세류는 눈을 떴다. 왜 깨어났는지도 모르게 그냥 눈이 떠졌다. 잠을 방해받아 퀭해진 눈이 형광 시계를 찾아 움직였다. 밤 11시였다.
제 1장. 옆집 남자 (1)
2050년, 과학의 발전으로 릴리트(Lilith)가 발견되면서 세계는 큰 변화를 맞았다. 릴리트는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 중의 하나로 인간의 정신과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 물질이다. 릴리트를 조작해서 무언가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신 감응력이 높은 일부 능력자들뿐이었다.
통칭 시공간 술사, 초능력자, 또는 릴리트의 아이들이라고도 불리는 자들의 출현으로 사람들은 기존의 과학 기술보다 한 차원 높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시공간 술사라고 하니 뭔가 거창하게 보이지만 그들은 결국 릴리트를 다루는 새로운 형태의 초능력자일 뿐이다. 그들은 릴리트로 단순히 물체를 구현할 뿐만 아니라 최근 각광받고 있는 가상현실 공간도 구현할 수 있었는데, 이런 능력을 활용하여 각계각층에서 다양하게 활약하고 있었다.
술사들은 희소하다는 점에서 대접받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공간 술사 중에도 급이 있었다. SS급이나 S급은 정부에서 진행하는 대형 프로젝트들을 주로 맡으며 천문학적인 보상을 받았고, A급이나 B급은 주로 대기업이나 정부, 연구소에 소속되어 일했다.
그와 달리, C급의 시공간 술사들은 주로 프리랜서 형태로 계약해서 일을 받았다. 높은 랭크의 능력자들도 능력을 많이 사용하면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었지만, C급 술사들은 특히 불안정했다. 그들은 정신 감응력을 사용하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여 쉽게 피로가 누적되었는데, 이 때문에 몸이 망가지거나 정신적으로 위험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C급 술사들은 주로 젊을 때 여러 프로젝트에 뛰어들어 많은 돈을 벌어 놓고, 힘이 부치게 되면 일을 그만두고 그동안 벌어 놓은 돈으로 평생을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세류 크리스토퍼 역시 C급 시공간 술사였다. C급 술사인 세류가 주로 프로젝트 계약을 진행하는 곳은 가상현실 사업의 1위 기업이라고 칭송받는 유니버스라는 곳이었다.
세류는 넓은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푹신한 벨벳 소파에는 그 혼자 앉아 있었고, 문가에는 비서인 듯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시립해 있었다. 그를 부른 김 부장은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유니버스는 법인 기업으로서는 아주 드물게도 SS급 시공간 술사를 한 명, A급 시공간 술사를 세 명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세류 같은 C급 술사에 대한 취급은 좋지 않은 편이었다.
세류는 눈앞에 놓인 식은 커피에 손을 가져가려다 그만두었다. 정신 집중이 필요한 일의 특성상 정신 감응력에 영향을 주는 카페인, 술, 담배, 마약 등등은 금지였다. 가끔 SS급 중에 마약 따위를 섭취하고 폭주하듯이 릴리트 구현을 하는 놈도 있다고 들었지만 C급인 자신에게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술사가 오는 것을 알면서도 커피를 내오다니. 대기업이다 보니 보수는 짭짤한 편이었지만 가끔 이런 식으로 굴 때는 짜증이 치밀어 오르곤 한다. 하지만 세류는 억지로 화를 삭였다. 이 일도 이제는 마지막이기 때문이었다.
나이는 아직 27세로 어린 편이었지만, 세류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를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바짝 돈을 벌어들이고 시공간 술사로서의 일에는 손을 뗄 예정이었다.
세류는 손목에 찬 시계를 쳐다보았다. 기다리라고 한 지 벌써 30분이 지났다.
“김 부장은 아직인가요.”
세류가 비서에게 조용히 물었다. 비서는 곤란한 얼굴로 시계를 흘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앞의 회의가 조금 길어지시는 모양입니다. 곧 오실 겁니다.”
세류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또다. 김 부장은 사람과의, 특히 세류와의 시간 약속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프리한 사람이었다. 이름은 김영진. 세류의 고등학교 동창이며 그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때 응접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선글라스를 끼고 은색 모피 코트를 걸친 김 부장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침에 미용실을 갔다 왔는지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가 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고등학교 때 김영진은 누구보다도 조용하고 얌전한,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는데 그 반동인지 현재는 자신만의 세계에 사는 행복한 관심종자가 되어 버렸다. 세류는 그를 짠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었다.
“미리 와 계셨군요.”
김영진이 그렇게 말하며 저벅저벅 걸어와 소파에 앉았다. 그가 들어오자 뒤에 있던 사람들이 응접실의 문을 닫았다. 마치 왕자라도 된 듯한 행동이었지만 세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유니버스에는 능력자들이 많은 만큼 또라이가 많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김영진이 바텐더에게 주문하듯이 비서에게 손짓했다.
“내가 항상 먹는 걸로 부탁해.”
“알겠습니다.”
비서가 조용히 물러갔다. 뒤에서 커피를 내리는 소리가 났다. 김영진은 늦은 주제에 사과 한마디도 없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파일을 펴서 그것을 살폈다. 세류는 선글라스를 끼고도 그 글자들이 보이는 건지 아니면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래요……. C급 시공간 술사, 세류 크리스토퍼 씨. 당신을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저희 유니버스에서 새로 추진하는 가상현실 프로젝트의 공간 구현을 당신에게 맡기고 싶어서입니다.”
C급을 꼭 강조할 필요가 있는 걸까. A급과 주로 접촉하다 보니 술사의 소중함을 모르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그럼에도 세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김영진이 파일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가상현실 프로젝트의 공식 명칭은 ‘아이아이’. 부 명칭은…… 결국에는 사랑이, 사랑이…….”
서류가 잘 보이지 않는지 더듬거리던 김영진이 결국 선글라스를 벗었다. 휙 하고 선글라스를 벗어 탁자에 올려놓은 그는 파일을 한번 보더니 자기 딴에는 멋져 보인다고 생각하는,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세류를 향해 말했다.
“결국엔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다! 메이킹 러브 프로그램입니다.”
뭐라고? 메이킹 러브? 뭐? 세류는 살짝 패닉에 빠졌다. 유니버스에서도 그런 프로그램을 만드나? 김영진이 비서가 건네는 커피를 받아 들고 호록 마셨다. 그리고 덧붙여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까놓고 말하자면 가상현실 섹스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죠. 저희 유니버스는 가상현실의 지배자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성과를 이룩해 냈지만 단 하나 발을 대지 않은 것이 인간의 본능과 관련된 이 분야입니다. 수요가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었지만 회사가 구축한 이미지를 훼손시킬 수 있어 뛰어들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죠. 하지만 최근 저희를 빠르게 추격해 오고 있는 후발주자인 언더크래프트에서 이 분야의 프로그램 제작에 착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 역시 여기에 손을 대기로 한 겁니다.”
“김 부장.”
세류는 조용히 김영진을 불렀다. 김영진이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신지요.”
“지금 저에게…… 마지막 의뢰로 가상현실 섹스 프로그램의 구현을 부탁하시는 게 맞습니까?”
세류는 믿을 수가 없어 그에게 다시 질문했다. 여러모로 불안정한 C급 시공간 술사는 릴리트 구현의 성질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특히 그는 C급 시공간 술사지만 정신 감응력만큼은 A급만큼 높아서, 프로그램 구현 시에 다른 술사들보다도 더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만약 A급이라면 정신 배리어를 만들며 진행할 수도 있겠지만 C급이라 그런 고급 기술은 불가능하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프로그램의 테스팅도 아니고. 아니,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테스팅이라고 해도 안 하겠지만, 구현이라니.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 세류 씨는 기초 모듈의 구현만 맡아 주시면 됩니다. 상세한 프로그램 제작은 저희 사에 소속되어 있는 A급 시공간 술사분이 맡아 주시기로 했습니다. 중간에 카오스 상태에만 빠지지 않으면 영향을 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영진이 세류의 표정을 보고 다급하게 대답했다. 영진은 소싯적 세류의 더러운 성질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세류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패악을 부릴 일이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지만, 그를 알고 지내는 동안 고착된 습관은 무시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릴리트 구현은 첨예한 정신 집중을 기본으로 한다. 가상현실 프로그램 제작 역시 원리는 같았다. 릴리트로 정신 감응력이 뛰어나지 않은 일반인이 가상현실을 체험할 수 있는 형태로 시공간을 구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구현 도중에 정신이 흐트러져 비정상적으로 릴리트 구현이 중단될 시에는 카오스라고 불리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래도 생각의 뫼비우스 띠에만 빠지지 않으면 카오스 상태에 빠질 확률은 현저하게 낮은 편이다. 그제야 세류는 안심한 얼굴을 했다.
“그럼 기본 시공간 구현만 맡으면 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참고로…… 보수가 아주 짭짤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제가 특별히 저희 사와 오랜 인연을 맺어 온 세류 크리스토퍼 씨에게 부탁드리는 거죠.”
김영진이 윙크했다. 그것을 가볍게 무시한 세류는 그가 내민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 보기 시작했다. 친절하게도 A급 시공간 술사인 제라드 멜튼이 이미 기본 시공간 맵을 짜 놓은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세류는 그 위에 기본 시공간 구현만 하면 된다. 세류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기본 시공간 구축은 그의 특기였다.
마지막 경력이 가상현실 섹스 프로그램이 된다는 것이 좀 찝찝하긴 하지만 유니버스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이니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마지막 보수 항목이…….
액수를 바라보며 점점 펴지는 세류의 얼굴을 보고 영진이 칭찬해 달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이번만큼은 잘했다, 김 부장.’
세류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영진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계약서에 사인했다.
계약을 성공적으로 끝낸 기념으로 그들은 악수를 했다. 영진이 ‘나중에 고기 사’라고 입 모양으로 이야기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몸을 키우는 데 재미를 붙인 그는 고기 덕후가 되어 있었다. ‘그래’라고 세류가 입 모양으로 대답하자 영진이 신나는 표정을 지었다.
유니버스에 소속되어 일과 관련된 관계 속에서 치이면서 예전에 함께했던 친구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는 영진은 짬을 내어 예전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이내 비서 등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큼큼, 헛기침하더니 선글라스를 다시 쓰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상세한 사항은 전송 장치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럼 좋은 결과물 기대하겠습니다.”
영진은 살짝 흘러내린 모피 코트를 다시 망토처럼 걸치고 응접실을 나갔다. 세류는 손에 들린 계약서 봉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이왕 맡은 일,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야지. 제작 마감기한은 6개월 후였지만 집중력을 발휘하면 일을 그보다 더 빨리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유니버스 사에서 나온 세류는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만세 하듯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어마어마한 보수! 그것만 있다면 도심에 새로운 집을 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희망에 그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스카이 라인을 타고 집으로 향하며 그는 레일 아래에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건물들을 내려다보았다.
세류가 지금 사는 곳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 지역의 맨션으로, 집이 복도식으로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스카이 라인 역이 근처에 있어 교통은 좋은 편이었지만 오래된 맨션이다 보니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정신 감응력을 사용해야 하는 입장에서 소음이 정신집중에 방해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주위 사람이나 물건에 관심이 없는 그에게 있어선 별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이라 상관없었다. 그리고 근 6개월간은 옆집이 비어 있어서 가끔 위층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 이외에 별다른 소음도 없었다.
“어?”
맨션 앞에 도착한 세류는 거대 드론이 이삿짐으로 추정되는 짐들을 꾸준히 나르는 것을 발견했다. 밖에서 훤히 보이는 복도식이었기에 그는 드론이 짐을 나르는 곳이 어디인지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가 사는 집의 옆집이었다.
‘누가 이사 온 모양이군.’
철저한 개인주의인 그는 일부러 이웃을 찾아가 반가운 인사를 건넬 생각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 이웃집을 살펴보는 일 없이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앗.”
하지만 그때 옆집에서 나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어딘가 멍해 보이는 눈빛을 가진 검은 머리카락의 덩치가 큰 남자였다. 순해 보이는 눈매가 마치 대형견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남자는 세류를 보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세류는 어색하게 대답하고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세류는 땀을 삐질 흘렸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마치 변태하듯이 극단적인 외향적 성격을 가지게 된 김영진과 달리, 고등학교 때 나름 외향적이었던 세류는 시공간 술사로서 일을 맡게 되면서 철저하게 내향적인 사람이 되었다. 이웃과 하하 호호 웃으면서 인사치레를 나누는 것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럼 이만.”
세류는 담담하게 말을 내뱉고 지문 코드를 찍어 문을 열었다. 남자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들어가자 뒤에서 자동으로 문이 닫혔다.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된 날 하필 옆집에 누가 이사를 오다니. 부디 앞으로 별문제가 없길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의뢰 상세 사항을 한번 훑어본 세류는 작업실의 데스크에 앉아 구현에 도움이 되는 ‘디바’라는 장비들을 착용하고 기본 시공간 맵을 기동해 보았다. 역시 유니버스 사의 A급 시공간 술사인 제라드 멜튼이 만든 것이라서 그런지 초록색으로 구현된 시공간 맵은 완벽했으며, 다음 술사가 구현하기 쉽게 군데군데 좌표를 지정해 두는 치밀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세류는 눈을 감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구상이 머릿속에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그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아까부터 미세하게 귀를 간질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지만 점점 크고 또렷하게 들려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하앗, 아앗, 앗! 으으응……!!!”
그것은 앓는 소리와 비슷했다. 아니, 앓는 소리 같은 게 아니라 저건 완벽히 신음 소리였다. 집중을 방해받은 세류는 눈을 감은 채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갑자기 일어난 이상 상황에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지만, 프로인 세류는 침착하게 기동을 종료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나타났던 초록색의 맵이 사라지고 휑한 작업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뭐, 뭐야.”
세류는 떨리는 눈으로 신음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벽. 그 신음은 세류의 집과 옆집 사이의 벽에서 나고 있었다. 벽이 멋대로 신음을 내뱉고 있을 리는 없으니 그건 옆집에서 나는 소리일 것이다. 세류는 맨션의 구조상 그의 작업실이 옆집의 침실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도 없었던 옆집에 사람이 이사 왔으니 작은 소음 문제가 있을 거라는 것은 이미 예상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은 생활 소음 정도였다. 첫날부터 남자 신음소리 따위가 벽을 타고 들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류는 패닉에 빠져 벽을 바라본 채로 잠시 굳어 있었다. 잠시 멈추었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세류가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신음 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도중에 도대체 뭘 부탁하는지 모르겠지만 애원하는 목소리까지 들렸다.
운동을 하는 듯한 덩치의 순해 보이던 옆집 남자가 저 신음을 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세류는 이어지는 상상에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노골적인 소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사 갈까.’
그는 잠시 동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밤을 새우고 말았다. 세류는 주먹으로 벽을 짚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는 길게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어제 애원하는 소리 이후 더 신음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예민한 그에게는 충분한 자극이었다.
밤새 이사할까 말까만 수십 번을 생각했다. 비록 C급이긴 하지만 시공간 술사이기 때문에 모아 놓은 돈이 꽤 있었다. 하지만 이 집은 그가 어릴 때부터 살던 곳이기도 하고, 이제는 없는 부모님과의 추억이 곳곳에 어려 있었다. 게다가 도심에 떡하니 좋은 집을 사서 이사 가는 것도 아니고, 신음 따위에 쫓기듯이 나가는 건 뭔가 지는 것 같아서 싫었다.
‘이사 온 기념으로 애인이라도 초대한 모양이지. 설마 또 그러겠어.’
세류는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주방에서 찬물을 한껏 들이켜고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일단 기초 시공간 구성 계획을 짜기로 했다. 꼼꼼한 성격인 세류는 일을 미루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전 오후 내내 작업실에 머무르며 기초 계획서를 작성했다. 안경을 끼고 노트북을 두드리면서도 계속해서 옆집을 힐끔거렸다. 다행히 낮 동안에는 옆집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루 동안 조용한 작업실에서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충족감을 누린 세류는 저녁을 대충 때운 뒤 작업실 한쪽에 놓여 있는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웠다. 시간은 저녁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했어.’
세류는 눈을 꼭 감고 이불을 목 끝까지 올리며 생각했다.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생각보다 더 세세하게 작성된 계획서대로라면, 4개월 이내에 기초 시공간 구현을 마치고 남은 2개월 동안 여유롭게 테스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 밤을 새워서인지 눕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마가 찾아왔다. 오늘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세류는 밀려오는 잠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세류는 눈을 떴다. 왜 깨어났는지도 모르게 그냥 눈이 떠졌다. 잠을 방해받아 퀭해진 눈이 형광 시계를 찾아 움직였다. 밤 11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