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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내가 듣는다 6화
제 2장. 해프닝 (1)
세류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어제 옆집 남자에게 경고한 뒤로 하루 동안 옆집에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말하면 알아먹는다니까.”
옆집 남자가 했던 황당한 제안도 이제 와서는 귀엽게 느껴졌다. 4차원이라도 말이 안 통하는 것은 아니구나. 덕분에 세류는 어제 하려고 했던 일을 다 마칠 수 있었다.
작업실에 붙여 놓은 계획표를 보며 세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 작업 공간 구현은 다 했고, 이제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어제 잘 자서인지 그의 얼굴은 오랜만에 반들반들 빛이 났다. 컨디션이 좋아진 덕에 오늘도 저녁이 되기 전에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데스크에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일어난 세류는 어제 장 봐 온 것들로 만든 카레를 먹고, 오랜만에 침대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했다.
이것이 바로 디노라는 옆집 남자가 이사 오기 전의 세류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옆집 남자가 또다시 돌발 행동을 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런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질 것이다.
침대에 앉아 오랜만에 좋아하는 추리소설을 읽던 세류는 옆집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탕, 하는 소리에 그의 귀가 쫑긋 섰다.
그제야 세류는 깨달았다. 어제 유난히 조용하다 했더니, 디노는 어제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류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말귀를 알아들은 게 아니었군.’
세류는 오전 동안의 착각을 수정했다. 그는 책을 읽으려 노력했지만, 옆집이 신경 쓰여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도 할 것이냐, 아니면 내 말을 듣고 조용히 할 것이냐.
그 여부에 따라 앞으로 옆집 남자와 자신의 관계는 달라질 것이다. 옆집 남자와 끝나지 않는 소음 배틀을 하느냐, 정다운 이웃이 되느냐는 그가 이제부터 취할 행동에 달려 있었다. 세류는 책을 보는 것을 포기하고 벽으로 귀를 기울였다.
옆집에서 모르는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벽에 귀를 딱 붙이지도 않았는데 목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둘은 벽 옆 침대에 있는 모양이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세류가 급박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의 꿀잠으로 놀라운 컨디션 회복을 맛본 그는 이 평화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작게 속닥거리는 소리가 난 뒤, 더 이상 별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휴우…….”
세류는 정말 다행이라는 듯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디노가 제 말을 제대로 머릿속에 넣어 둔 모양이었다. 멀리서 작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긴 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옆집 남자에 대한 호감도가 조금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시공간 구현을 하는 만큼 정신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불순물이 끼어들면 카오스 상태에 빠질 위험이 높았다. 세류는 안심한 얼굴로 잘 준비를 했다.
우우웅—
세류는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아직 아침 7시도 안 됐는데,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짜증이 묻어나는 손동작으로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영진이었다.
-세류, 살아 있냐?
세류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짜증을 냈다.
“김 부장, 죽을래? 지금 6시 40분이야.”
-그래, 좋은 아침이야. 어제 네가 서버에 백업해 둔 기초 작업 공간 구현 파일 봤어.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꽤 빠르네.
영진이 이런 협박은 익숙하다는 듯이 넘기며 자기 할 말만 했다. 하지만 말이 빨라지는 것을 보니 아예 겁을 먹지 않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건이나 말해.”
영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그게, 너 혹시 최근에 아이슬링거 연구소랑 연관된 적 있어?
“뭐? 갑자기 거기가 왜 나와.”
가늘게 뜨여 있던 세류의 눈이 커졌다. 짐작 가는 곳이 있긴 했다. 아이슬링거 연구소의 마크를 떡하니 팔에 달고 다니는 옆집 남자. 영진이 말했다.
-지금 살펴보니까 며칠 전에 거기서 비밀리에 네 정보를 요청한 기록이 있어서 말이야. 그…… 예전처럼 뭐 이상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니지?
잠이 싹 가셨다. 세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뻗친 머리를 손으로 대충 쓸어 넘기며 말했다. 김영진은 자신의 친구지만, 유니버스 소속이다. 대능력자의 존재를 그에게 알리는 것은 귀찮은 일을 부를 뿐이다.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사고 이후에 김영진은 자신을 곧 터질 듯한 폭탄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안 그래도 일 많은 녀석에게 고민할 거리를 더 얹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리가 있냐. 계속 집에 박혀서 작업만 했는데.”
-뭐…… 파일 보니까 그런 것 같더라. 하여간 수상한 곳이야. 대능력자를 신봉하는 단체에서 SS급도 아니고 C급 시공간 술사 정보는 왜 요청한대.
“내가 C급인 거에 불만 있냐.”
영진이 그런 게 아니라며 웃어넘겼다. 별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의 목소리에서 아까의 조심스러움이 사라졌다. 영진이 쾌활하게 말했다.
-어쨌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우리 회사와 계약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네가 작업을 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줄 의무가 있으니까.
그 말을 들으니 이사에 대한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세류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마지막 일을 마칠 때까지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이곳에 있고 싶다.
“그래. 비싼 거 먹고 싶으면 연락할게.”
-안 할 거면서. 어쨌든 그럼 됐어. 조만간 애들이랑 같이 보자고.
영진은 이제 아침 회의 준비를 해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세류는 꺼진 전화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옆집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하여간 여러모로 귀찮게 만드네.
아이슬링거 연구소에서 정보를 요청했다니. 아마도 그들은 디노가 살게 될 맨션의 이웃들이 어떤 사람인지 조사했던 것일 테다. C급 시공간 술사인 자신에게 특별히 신경 쓰지는 않겠지만 뭔가 거슬렸다.
세류는 타인과 필요 이상으로 관계하는 것이 싫었다. 관계라는 끈으로 이어진 사람들은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주고받고 마는 것이다. 그래. 그게 어떤 것이든.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과거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세류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침대 구석에 던지고 다시 몸을 뉘였다. 심장에 손을 대어 보니 마음의 파동이 불안정했다. 이런 마음으로는 일을 시작할 수 없다.
그가 가만히 눈을 감았을 때였다. 옆집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에서 두런두런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하네. 이런 아침부터 호출이라니. 어제 일 마치고 돌아온 거지? 거기서 너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야?”
“……글쎄요.”
그렇게 답하는 디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빠른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세류는 그것에 신경 쓰지 않고 잠을 청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 폐허로 변해 있었다.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무기 개발기지를 파괴하는 임무였지만, 그 기지에는 분명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손이 떨렸다. 디노는 자신의 눈을 가려 버렸다. 통신기에서 박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항상 그랬듯이 그에게 보고했다. 떨리는 손과 다르게 자신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담담했다. 그게 싫었다.
“……임무, 완료했습니다.”
통신기에서 치하의 말이 들렸다. 하지만 디노의 귀에는 그런 것이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언제까지…….’
생각은 언제나 그렇듯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퇴각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디노는 도망치듯이 그 장소를 벗어났다. 연구소에서 체크를 받고 밖으로 나온 그의 표정은 유난히 멍했다.
그때 제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은 집에 놀러 가고 싶다는 요청을 디노는 거부하지 못했다. 시간은 아직 오후 5시, 아직 조금 이르니까 괜찮을지도 모른다.
세류는 눈을 떴다. 바로 시계를 확인한 그는 흠칫 놀랐다. 벌써 오후 4시가 되어 있었다. 그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에 싫은 과거를 떠올려서일까,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다.
“엄청 많이 잤네.”
세류는 태평한 얼굴로 하품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어딘가 평소보다 어두웠다. 대충 끼니를 때운 그는 다시 계획표 앞에 섰다. 빨리 구현을 끝내고 여유롭게 테스팅을 하려면 할 일은 그날그날 끝내 놓아야 했다.
‘컨디션이 영 아닌데.’
세류는 한쪽 어깨를 주물렀다. 오늘은 그만둘까. 그러고 보니 며칠 동안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작업을 마친답시고 무리를 하긴 했다. 그 김영진이 작업 속도가 빠르다고 할 정도니 그동안 열심히 일한 거다.
하지만 계획표에 쓰여 있는 오늘 할 일 목록에 계속 눈길이 갔다. 하긴 일을 안 한다고 해도 기분이 별로라서 제대로 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럴 거면 그냥 할 일을 하는 것이 나았다.
세류는 계획표 앞에 서서 가만히 심장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심장박동은 규칙적이다. 정신 에너지는 조금 고갈되어 있었지만,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시작하자.
세류는 피로를 털어 버리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데스크에 앉았다. 그리고 디바를 착용한 뒤 눈을 감았다. 기동을 시작하자 눈앞에 거대한 가상공간이 펼쳐졌다.
기초 작업 공간을 이리저리 넘어 다니며 세류는 영진에게서 받았던 서류대로 시뮬레이션 공간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상태는 역시 좋지 않았다. 머리가 멍하면서도 뒷골이 뭉친 듯이 땅겼다.
컨디션 난조 때문인지 사고가 1에서 2로 이어지지 않고 자꾸 3으로 건너뛰는 일이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초록색 맵 위에 구현했던 시뮬레이션 공간의 하얀 벽이 일그러졌다가 다시 펴지길 반복했다. 세 번째로 벽 구현에 실패한 그는 생각했다.
‘오늘은 역시 날이 아닌가 보다.’
몸 상태를 점검해 보니 머리가 멍할 뿐 아니라 목도 칼칼했다. 그냥 기분이 안 좋은 줄 알았는데, 몸살 기운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러면 카오스 상태에 빠지기 쉽다. 이런 일을 많이 겪어 본 세류는 바로 기동을 종료하려 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세류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 때문에 기동 종료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당황하자 여태까지 그나마 평온하게 유지하고 있던 정신 파동이 널을 뛰었다. 눈앞에 펼쳐져 있던 초록색 맵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안 돼. 이러면 카오스 상태가…….’
세류는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원래라면 이 정도로 맵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데, 오늘은 몸살 때문인지 상태가 이상했다. 요동치는 릴리트를 진정시키느라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직 평소처럼 안정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세류는 가까스로 맵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때였다.
그러나 그때, 타이밍을 맞춘 듯이 옆집에서 예의 ‘그’ 소리가 들렸다.
“아……! 흐읏!”
아. 시발.
세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지금 아직 저녁도 아닌데. 그는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화가 났다. 그에 따라 심장 박동이 기관차처럼 폭주하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할 정신에 잡생각들이 날아들었다.
내가 이거 끄기만 하면 가만두나 봐라.
사람 말을 귓등으로 듣고 있어. 내가 분명히 작업한다고 했는데.
순진한 얼굴로 또 끌어들였어. 또!
이 미친놈이 진짜! 정말 하루도 안 하면 몸에 가시가 돋나!
얼굴에 한 방 갈기고 싶다. 아니, 두 방은 갈겨야겠어.
잠시간 옆집 남자에 대한 분노로 몸을 떨던 세류는 맵이 크게 요동쳤을 때 그제야 이변을 알아차렸다. 구축된 맵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맵은 재기동하면 원래대로 돌아올 테지만,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몸은 무겁고, 몸살 기운까지 있는데 기동 중에 잡생각마저 끼어들다니 최악이다. 카오스에 빠지기 제일 쉬운 상태가 아닐 수 없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세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초보자도 아니고, 이딴 자극으로 카오스 상태라니. 그동안 스트레스를 받긴 받은 모양이었다.
‘아, 망했네.’
맵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머리 어딘가에서 폭탄이 터지는 느낌이 났다. 세류의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세류는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면서 억지로 움직여 데스크에 있는 빨간 비상 버튼을 눌렀다.
‘진짜 깨어나면 저 새끼 죽일 거야.’
세류는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맵의 바닥에 깔렸던 초록색 선의 검은색 큐브들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까무룩 정신을 잃어버렸다.
비상 버튼이 훌륭하게 작동하여 세류는 무사히 술사 전용 병원으로 옮겨가 진찰을 받았다. 다행히 그는 금방 깨어났으며, 몸에 충격을 조금 받은 것 빼고는 정신에도 문제가 없었다. 그는 병원에서 한숨 푹 자고 다음 날 맨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병원에 있을 때의 세류는 계속 웃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카오스 상태에서 별 충격 없이 회복한 기쁨으로 세류가 웃고 있다고 멋대로 착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숨겨 왔던 폭력성을 안에 응축하느라 긍정적인 감정이 밖으로 표출됐을 뿐이다. 도중에 세류가 걱정되어 병원을 찾아온 영진도 평소와 다르게 웃고 있는 세류를 보고 부리나케 도망갔다. 그는 과거의 세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였다.
세류는 기다렸다. 폭력성을 표출할 순간을. 그리고 퇴원하자마자 바로 맨션으로 달려갔다. 역을 나온 세류의 얼굴은 누가 봐도 빡침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맨션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간 세류는 자신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옆집 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상대가 겁을 집어먹고 숨어 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필사적인 인내심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쾅쾅쾅.
둔탁한 소리가 맨션 복도를 울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디노는 집에 있었다. 문을 연 디노가 의아한 얼굴로 세류를 바라보았다.
“네. 무슨 일…….”
세류는 바로 디노의 멱살을 붙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열렸던 문이 힘없이 자동으로 닫혔다. 현관의 벽에 밀어 붙여진 디노는 명백하게 당황한 얼굴로 허둥댔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세류가 침착하게 그에게 쏘아붙였다.
“어제 무슨 소리 못 들었습니까?”
“네? 소리라니…….”
세류가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그쪽 때문에 나 실려 가는 소리 말입니다.”
디노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세류는 멱살 잡은 손을 끌어당겨 위협적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세류가 화를 참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말했죠, 소리 조심하라고, 이쪽에 엄청 민폐라고. 난 말이죠. 시공간 술사입니다. 지금 프로젝트 진행 중인데, 그쪽 때문에 어제 황천길 갈 뻔했어요.”
세류가 왼쪽 손목을 디노의 눈앞에 보란 듯이 디밀었다. 링거가 꽂혔던 자국이 선명했다. 디노가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저기, 미안합…….”
저번처럼 곧바로 사과하려는 모습에 세류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씨발. 또 저렇게 순진한 얼굴로 사과하지. 사과는 아주 잘해요. 사과만!!!’
세류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아니, 지금은 사과받는 걸로 끝낼 생각도 없었다. 어제의 일은 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일어난 일이기도 했지만, 그동안의 스트레스는 바로 이 옆집 남자, 디노가 제공한 것이었다. 밤에 못 자는 것부터 아이슬링거 연구소가 뒷조사하는 것까지 모두.
세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 하루도 못 참을 만큼??”
“그게…….”
디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제는 연이어서 파괴 임무를 맡았던지라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손을 감싸 오는 유혹을 뿌리칠 여유도, 거절할 용기도 없었다. 그의 부탁이 생각났지만 밤이 아니라 낮이라서 괜찮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됐던 것이었다.
실려 갔다니. 어제 어렴풋이 들었던 소리가 그것인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디노는 떨리는 눈으로 세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세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붉어진 얼굴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아무래도 처음 생긴 이웃에게 미움을 산 것 같다. 친해지고 싶었는데.
하려던 말을 멈추고 우울한 표정을 짓는 디노를 보고 있자니 세류는 혈압이 올랐다. 아니, 말을 하면 끝까지 하든가. 왜 자기가 더 피해 받은 얼굴이야?
처음에는 덩치도 큰 주제에 눈썹을 내리며 눈치를 보는 디노를 보고 대형견 같다고, 그래서 말로 타이르면 제대로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바로 사과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누그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순해 보이는 얼굴로 황당한 제안이나 하고, 밤에 조심해 달라고 했더니 오히려 일하는 낮에 그러는 걸로 봐서는 보통 놈이 아니었다.
이쪽에서 목줄을 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그딴 건 없고 오히려 저쪽이 가는 대로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짜증이 난 세류는 디노의 멱살을 잡은 채로 그를 앞뒤로 흔들며 소리쳤다.
“아악!!! 진짜!!!!”
디노의 큰 몸체가 세류가 하는 대로 흔들렸다. 세류는 그런 그를 보며 생각했다. 이놈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순진해 보이는 주제에 할 건 다 하고, 말도 들어 처먹질 않는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나랑도 하고 싶어 했지? 세류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순간적으로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목줄이 없으면 목줄을 채우면 된다. 그것도 아주 단단한 걸로. 그의 사고가 이상한 곳으로 굴러갔다.
“아~ 그러고 보니 그쪽 나랑도 하고 싶어 했지? 그럼 차라리 나랑 하든가. 내가 일 안 할 때, 그리고 안 잘 때!”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멍해진 디노가 세류를 바라보았다. 기세를 탄 세류가 목소리를 높이며 입을 놀렸다.
“근데, 그럼 나랑만 해야 돼. 난 집착이 더럽게 강한 놈이라서 사귀는 사람이랑 다른 녀석이 붙어먹는 꼴은 못 보거든.”
“저기.”
“할 거야, 안 할 거야?”
디노가 홀린 듯이 세류를 보면서 대답했다.
“……그러죠, 그럼.”
세류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나 방금 뭐라고 지껄였지. 얘는 뭐에 알겠다고 한 거야? 세류가 멍청하게 디노를 보며 목소리를 냈다.
“어?”
세류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자기가 무슨 개소리를 지껄였는지도 다 기억이 났다. 왜 그딴 말을 한 거지. 어제 카오스 상태에 빠졌다고 머리가 맛이 간 건가. 사귀어? 내가? 누구랑? 얘랑?
그건 자신의 방침에도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누구랑 제대로 관계할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는데, 말을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어 버렸다. 지금이라도 없었던 일로 할까. 세류는 고민했다.
그때 디노가 멱살을 쥐고 있던 세류의 손을 살짝 감싸면서 말했다. 아직 제정신이 아닌지 어딘가 멍청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럼…… 이제 우리 애인 사이인 건가요?”
세류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디노를 올려다보았다. 어쨌거나 사귄다고 해서 꼭 관계를 해야 한다는 법도 없고, 이런 목줄이라도 채워 놓지 않으면 이놈은 또 다른 녀석을 집에 끌어들일 게 뻔했다. 그건 싫었다.
“어…… 어.”
세류가 디노의 옷깃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디노가 세류의 왼손을 들어 올려 링겔 자국 밑에 입을 맞췄다.
“아프게 해서 미안합니다.”
디노가 미안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살포시 껴안았다. 단단한 품에 안기게 된 세류는 아직도 혼란이 남아 있는 찜찜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이게 아닌데.’
하지만 이미 저질러 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대답이 없자 디노가 다시 용서해 달라는 듯 ‘정말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역시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목소리만큼은 제 취향이었다. 정말 미안해하는 것 같아 세류는 어색한 손길로 그의 등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밝은 햇살이 맨션을 비췄다. 머리맡에 둔 알람이 울리자마자 세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동안 나빴던 컨디션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오늘은 몸 상태도 괜찮았고, 정신도 맑았다. 세류는 익숙하게 양치를 하고 거실로 나가서 간단하게 아침을 차려 먹었다.
제 2장. 해프닝 (1)
세류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어제 옆집 남자에게 경고한 뒤로 하루 동안 옆집에서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말하면 알아먹는다니까.”
옆집 남자가 했던 황당한 제안도 이제 와서는 귀엽게 느껴졌다. 4차원이라도 말이 안 통하는 것은 아니구나. 덕분에 세류는 어제 하려고 했던 일을 다 마칠 수 있었다.
작업실에 붙여 놓은 계획표를 보며 세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 작업 공간 구현은 다 했고, 이제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어제 잘 자서인지 그의 얼굴은 오랜만에 반들반들 빛이 났다. 컨디션이 좋아진 덕에 오늘도 저녁이 되기 전에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데스크에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일어난 세류는 어제 장 봐 온 것들로 만든 카레를 먹고, 오랜만에 침대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했다.
이것이 바로 디노라는 옆집 남자가 이사 오기 전의 세류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옆집 남자가 또다시 돌발 행동을 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런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질 것이다.
침대에 앉아 오랜만에 좋아하는 추리소설을 읽던 세류는 옆집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탕, 하는 소리에 그의 귀가 쫑긋 섰다.
그제야 세류는 깨달았다. 어제 유난히 조용하다 했더니, 디노는 어제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류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말귀를 알아들은 게 아니었군.’
세류는 오전 동안의 착각을 수정했다. 그는 책을 읽으려 노력했지만, 옆집이 신경 쓰여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도 할 것이냐, 아니면 내 말을 듣고 조용히 할 것이냐.
그 여부에 따라 앞으로 옆집 남자와 자신의 관계는 달라질 것이다. 옆집 남자와 끝나지 않는 소음 배틀을 하느냐, 정다운 이웃이 되느냐는 그가 이제부터 취할 행동에 달려 있었다. 세류는 책을 보는 것을 포기하고 벽으로 귀를 기울였다.
옆집에서 모르는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벽에 귀를 딱 붙이지도 않았는데 목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둘은 벽 옆 침대에 있는 모양이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세류가 급박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의 꿀잠으로 놀라운 컨디션 회복을 맛본 그는 이 평화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작게 속닥거리는 소리가 난 뒤, 더 이상 별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휴우…….”
세류는 정말 다행이라는 듯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디노가 제 말을 제대로 머릿속에 넣어 둔 모양이었다. 멀리서 작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긴 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옆집 남자에 대한 호감도가 조금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시공간 구현을 하는 만큼 정신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불순물이 끼어들면 카오스 상태에 빠질 위험이 높았다. 세류는 안심한 얼굴로 잘 준비를 했다.
우우웅—
세류는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아직 아침 7시도 안 됐는데,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짜증이 묻어나는 손동작으로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영진이었다.
-세류, 살아 있냐?
세류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짜증을 냈다.
“김 부장, 죽을래? 지금 6시 40분이야.”
-그래, 좋은 아침이야. 어제 네가 서버에 백업해 둔 기초 작업 공간 구현 파일 봤어.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꽤 빠르네.
영진이 이런 협박은 익숙하다는 듯이 넘기며 자기 할 말만 했다. 하지만 말이 빨라지는 것을 보니 아예 겁을 먹지 않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건이나 말해.”
영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그게, 너 혹시 최근에 아이슬링거 연구소랑 연관된 적 있어?
“뭐? 갑자기 거기가 왜 나와.”
가늘게 뜨여 있던 세류의 눈이 커졌다. 짐작 가는 곳이 있긴 했다. 아이슬링거 연구소의 마크를 떡하니 팔에 달고 다니는 옆집 남자. 영진이 말했다.
-지금 살펴보니까 며칠 전에 거기서 비밀리에 네 정보를 요청한 기록이 있어서 말이야. 그…… 예전처럼 뭐 이상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니지?
잠이 싹 가셨다. 세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뻗친 머리를 손으로 대충 쓸어 넘기며 말했다. 김영진은 자신의 친구지만, 유니버스 소속이다. 대능력자의 존재를 그에게 알리는 것은 귀찮은 일을 부를 뿐이다.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사고 이후에 김영진은 자신을 곧 터질 듯한 폭탄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안 그래도 일 많은 녀석에게 고민할 거리를 더 얹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리가 있냐. 계속 집에 박혀서 작업만 했는데.”
-뭐…… 파일 보니까 그런 것 같더라. 하여간 수상한 곳이야. 대능력자를 신봉하는 단체에서 SS급도 아니고 C급 시공간 술사 정보는 왜 요청한대.
“내가 C급인 거에 불만 있냐.”
영진이 그런 게 아니라며 웃어넘겼다. 별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의 목소리에서 아까의 조심스러움이 사라졌다. 영진이 쾌활하게 말했다.
-어쨌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우리 회사와 계약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네가 작업을 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줄 의무가 있으니까.
그 말을 들으니 이사에 대한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세류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마지막 일을 마칠 때까지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이곳에 있고 싶다.
“그래. 비싼 거 먹고 싶으면 연락할게.”
-안 할 거면서. 어쨌든 그럼 됐어. 조만간 애들이랑 같이 보자고.
영진은 이제 아침 회의 준비를 해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세류는 꺼진 전화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옆집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하여간 여러모로 귀찮게 만드네.
아이슬링거 연구소에서 정보를 요청했다니. 아마도 그들은 디노가 살게 될 맨션의 이웃들이 어떤 사람인지 조사했던 것일 테다. C급 시공간 술사인 자신에게 특별히 신경 쓰지는 않겠지만 뭔가 거슬렸다.
세류는 타인과 필요 이상으로 관계하는 것이 싫었다. 관계라는 끈으로 이어진 사람들은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주고받고 마는 것이다. 그래. 그게 어떤 것이든.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과거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세류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침대 구석에 던지고 다시 몸을 뉘였다. 심장에 손을 대어 보니 마음의 파동이 불안정했다. 이런 마음으로는 일을 시작할 수 없다.
그가 가만히 눈을 감았을 때였다. 옆집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에서 두런두런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하네. 이런 아침부터 호출이라니. 어제 일 마치고 돌아온 거지? 거기서 너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야?”
“……글쎄요.”
그렇게 답하는 디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빠른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세류는 그것에 신경 쓰지 않고 잠을 청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 폐허로 변해 있었다.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무기 개발기지를 파괴하는 임무였지만, 그 기지에는 분명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손이 떨렸다. 디노는 자신의 눈을 가려 버렸다. 통신기에서 박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항상 그랬듯이 그에게 보고했다. 떨리는 손과 다르게 자신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담담했다. 그게 싫었다.
“……임무, 완료했습니다.”
통신기에서 치하의 말이 들렸다. 하지만 디노의 귀에는 그런 것이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언제까지…….’
생각은 언제나 그렇듯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퇴각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디노는 도망치듯이 그 장소를 벗어났다. 연구소에서 체크를 받고 밖으로 나온 그의 표정은 유난히 멍했다.
그때 제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은 집에 놀러 가고 싶다는 요청을 디노는 거부하지 못했다. 시간은 아직 오후 5시, 아직 조금 이르니까 괜찮을지도 모른다.
세류는 눈을 떴다. 바로 시계를 확인한 그는 흠칫 놀랐다. 벌써 오후 4시가 되어 있었다. 그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에 싫은 과거를 떠올려서일까,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다.
“엄청 많이 잤네.”
세류는 태평한 얼굴로 하품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어딘가 평소보다 어두웠다. 대충 끼니를 때운 그는 다시 계획표 앞에 섰다. 빨리 구현을 끝내고 여유롭게 테스팅을 하려면 할 일은 그날그날 끝내 놓아야 했다.
‘컨디션이 영 아닌데.’
세류는 한쪽 어깨를 주물렀다. 오늘은 그만둘까. 그러고 보니 며칠 동안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작업을 마친답시고 무리를 하긴 했다. 그 김영진이 작업 속도가 빠르다고 할 정도니 그동안 열심히 일한 거다.
하지만 계획표에 쓰여 있는 오늘 할 일 목록에 계속 눈길이 갔다. 하긴 일을 안 한다고 해도 기분이 별로라서 제대로 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럴 거면 그냥 할 일을 하는 것이 나았다.
세류는 계획표 앞에 서서 가만히 심장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심장박동은 규칙적이다. 정신 에너지는 조금 고갈되어 있었지만,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시작하자.
세류는 피로를 털어 버리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데스크에 앉았다. 그리고 디바를 착용한 뒤 눈을 감았다. 기동을 시작하자 눈앞에 거대한 가상공간이 펼쳐졌다.
기초 작업 공간을 이리저리 넘어 다니며 세류는 영진에게서 받았던 서류대로 시뮬레이션 공간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상태는 역시 좋지 않았다. 머리가 멍하면서도 뒷골이 뭉친 듯이 땅겼다.
컨디션 난조 때문인지 사고가 1에서 2로 이어지지 않고 자꾸 3으로 건너뛰는 일이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초록색 맵 위에 구현했던 시뮬레이션 공간의 하얀 벽이 일그러졌다가 다시 펴지길 반복했다. 세 번째로 벽 구현에 실패한 그는 생각했다.
‘오늘은 역시 날이 아닌가 보다.’
몸 상태를 점검해 보니 머리가 멍할 뿐 아니라 목도 칼칼했다. 그냥 기분이 안 좋은 줄 알았는데, 몸살 기운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러면 카오스 상태에 빠지기 쉽다. 이런 일을 많이 겪어 본 세류는 바로 기동을 종료하려 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세류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 때문에 기동 종료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당황하자 여태까지 그나마 평온하게 유지하고 있던 정신 파동이 널을 뛰었다. 눈앞에 펼쳐져 있던 초록색 맵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안 돼. 이러면 카오스 상태가…….’
세류는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원래라면 이 정도로 맵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데, 오늘은 몸살 때문인지 상태가 이상했다. 요동치는 릴리트를 진정시키느라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직 평소처럼 안정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세류는 가까스로 맵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때였다.
그러나 그때, 타이밍을 맞춘 듯이 옆집에서 예의 ‘그’ 소리가 들렸다.
“아……! 흐읏!”
아. 시발.
세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지금 아직 저녁도 아닌데. 그는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화가 났다. 그에 따라 심장 박동이 기관차처럼 폭주하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할 정신에 잡생각들이 날아들었다.
내가 이거 끄기만 하면 가만두나 봐라.
사람 말을 귓등으로 듣고 있어. 내가 분명히 작업한다고 했는데.
순진한 얼굴로 또 끌어들였어. 또!
이 미친놈이 진짜! 정말 하루도 안 하면 몸에 가시가 돋나!
얼굴에 한 방 갈기고 싶다. 아니, 두 방은 갈겨야겠어.
잠시간 옆집 남자에 대한 분노로 몸을 떨던 세류는 맵이 크게 요동쳤을 때 그제야 이변을 알아차렸다. 구축된 맵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맵은 재기동하면 원래대로 돌아올 테지만,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몸은 무겁고, 몸살 기운까지 있는데 기동 중에 잡생각마저 끼어들다니 최악이다. 카오스에 빠지기 제일 쉬운 상태가 아닐 수 없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세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초보자도 아니고, 이딴 자극으로 카오스 상태라니. 그동안 스트레스를 받긴 받은 모양이었다.
‘아, 망했네.’
맵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머리 어딘가에서 폭탄이 터지는 느낌이 났다. 세류의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세류는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면서 억지로 움직여 데스크에 있는 빨간 비상 버튼을 눌렀다.
‘진짜 깨어나면 저 새끼 죽일 거야.’
세류는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맵의 바닥에 깔렸던 초록색 선의 검은색 큐브들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까무룩 정신을 잃어버렸다.
비상 버튼이 훌륭하게 작동하여 세류는 무사히 술사 전용 병원으로 옮겨가 진찰을 받았다. 다행히 그는 금방 깨어났으며, 몸에 충격을 조금 받은 것 빼고는 정신에도 문제가 없었다. 그는 병원에서 한숨 푹 자고 다음 날 맨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병원에 있을 때의 세류는 계속 웃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카오스 상태에서 별 충격 없이 회복한 기쁨으로 세류가 웃고 있다고 멋대로 착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숨겨 왔던 폭력성을 안에 응축하느라 긍정적인 감정이 밖으로 표출됐을 뿐이다. 도중에 세류가 걱정되어 병원을 찾아온 영진도 평소와 다르게 웃고 있는 세류를 보고 부리나케 도망갔다. 그는 과거의 세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였다.
세류는 기다렸다. 폭력성을 표출할 순간을. 그리고 퇴원하자마자 바로 맨션으로 달려갔다. 역을 나온 세류의 얼굴은 누가 봐도 빡침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맨션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간 세류는 자신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옆집 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상대가 겁을 집어먹고 숨어 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필사적인 인내심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쾅쾅쾅.
둔탁한 소리가 맨션 복도를 울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디노는 집에 있었다. 문을 연 디노가 의아한 얼굴로 세류를 바라보았다.
“네. 무슨 일…….”
세류는 바로 디노의 멱살을 붙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열렸던 문이 힘없이 자동으로 닫혔다. 현관의 벽에 밀어 붙여진 디노는 명백하게 당황한 얼굴로 허둥댔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세류가 침착하게 그에게 쏘아붙였다.
“어제 무슨 소리 못 들었습니까?”
“네? 소리라니…….”
세류가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그쪽 때문에 나 실려 가는 소리 말입니다.”
디노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세류는 멱살 잡은 손을 끌어당겨 위협적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세류가 화를 참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말했죠, 소리 조심하라고, 이쪽에 엄청 민폐라고. 난 말이죠. 시공간 술사입니다. 지금 프로젝트 진행 중인데, 그쪽 때문에 어제 황천길 갈 뻔했어요.”
세류가 왼쪽 손목을 디노의 눈앞에 보란 듯이 디밀었다. 링거가 꽂혔던 자국이 선명했다. 디노가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저기, 미안합…….”
저번처럼 곧바로 사과하려는 모습에 세류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씨발. 또 저렇게 순진한 얼굴로 사과하지. 사과는 아주 잘해요. 사과만!!!’
세류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아니, 지금은 사과받는 걸로 끝낼 생각도 없었다. 어제의 일은 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일어난 일이기도 했지만, 그동안의 스트레스는 바로 이 옆집 남자, 디노가 제공한 것이었다. 밤에 못 자는 것부터 아이슬링거 연구소가 뒷조사하는 것까지 모두.
세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 하루도 못 참을 만큼??”
“그게…….”
디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제는 연이어서 파괴 임무를 맡았던지라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손을 감싸 오는 유혹을 뿌리칠 여유도, 거절할 용기도 없었다. 그의 부탁이 생각났지만 밤이 아니라 낮이라서 괜찮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됐던 것이었다.
실려 갔다니. 어제 어렴풋이 들었던 소리가 그것인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디노는 떨리는 눈으로 세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세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붉어진 얼굴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아무래도 처음 생긴 이웃에게 미움을 산 것 같다. 친해지고 싶었는데.
하려던 말을 멈추고 우울한 표정을 짓는 디노를 보고 있자니 세류는 혈압이 올랐다. 아니, 말을 하면 끝까지 하든가. 왜 자기가 더 피해 받은 얼굴이야?
처음에는 덩치도 큰 주제에 눈썹을 내리며 눈치를 보는 디노를 보고 대형견 같다고, 그래서 말로 타이르면 제대로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바로 사과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누그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순해 보이는 얼굴로 황당한 제안이나 하고, 밤에 조심해 달라고 했더니 오히려 일하는 낮에 그러는 걸로 봐서는 보통 놈이 아니었다.
이쪽에서 목줄을 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그딴 건 없고 오히려 저쪽이 가는 대로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짜증이 난 세류는 디노의 멱살을 잡은 채로 그를 앞뒤로 흔들며 소리쳤다.
“아악!!! 진짜!!!!”
디노의 큰 몸체가 세류가 하는 대로 흔들렸다. 세류는 그런 그를 보며 생각했다. 이놈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순진해 보이는 주제에 할 건 다 하고, 말도 들어 처먹질 않는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나랑도 하고 싶어 했지? 세류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순간적으로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목줄이 없으면 목줄을 채우면 된다. 그것도 아주 단단한 걸로. 그의 사고가 이상한 곳으로 굴러갔다.
“아~ 그러고 보니 그쪽 나랑도 하고 싶어 했지? 그럼 차라리 나랑 하든가. 내가 일 안 할 때, 그리고 안 잘 때!”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멍해진 디노가 세류를 바라보았다. 기세를 탄 세류가 목소리를 높이며 입을 놀렸다.
“근데, 그럼 나랑만 해야 돼. 난 집착이 더럽게 강한 놈이라서 사귀는 사람이랑 다른 녀석이 붙어먹는 꼴은 못 보거든.”
“저기.”
“할 거야, 안 할 거야?”
디노가 홀린 듯이 세류를 보면서 대답했다.
“……그러죠, 그럼.”
세류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나 방금 뭐라고 지껄였지. 얘는 뭐에 알겠다고 한 거야? 세류가 멍청하게 디노를 보며 목소리를 냈다.
“어?”
세류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자기가 무슨 개소리를 지껄였는지도 다 기억이 났다. 왜 그딴 말을 한 거지. 어제 카오스 상태에 빠졌다고 머리가 맛이 간 건가. 사귀어? 내가? 누구랑? 얘랑?
그건 자신의 방침에도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누구랑 제대로 관계할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는데, 말을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어 버렸다. 지금이라도 없었던 일로 할까. 세류는 고민했다.
그때 디노가 멱살을 쥐고 있던 세류의 손을 살짝 감싸면서 말했다. 아직 제정신이 아닌지 어딘가 멍청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럼…… 이제 우리 애인 사이인 건가요?”
세류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디노를 올려다보았다. 어쨌거나 사귄다고 해서 꼭 관계를 해야 한다는 법도 없고, 이런 목줄이라도 채워 놓지 않으면 이놈은 또 다른 녀석을 집에 끌어들일 게 뻔했다. 그건 싫었다.
“어…… 어.”
세류가 디노의 옷깃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디노가 세류의 왼손을 들어 올려 링겔 자국 밑에 입을 맞췄다.
“아프게 해서 미안합니다.”
디노가 미안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살포시 껴안았다. 단단한 품에 안기게 된 세류는 아직도 혼란이 남아 있는 찜찜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이게 아닌데.’
하지만 이미 저질러 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대답이 없자 디노가 다시 용서해 달라는 듯 ‘정말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역시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목소리만큼은 제 취향이었다. 정말 미안해하는 것 같아 세류는 어색한 손길로 그의 등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밝은 햇살이 맨션을 비췄다. 머리맡에 둔 알람이 울리자마자 세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동안 나빴던 컨디션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오늘은 몸 상태도 괜찮았고, 정신도 맑았다. 세류는 익숙하게 양치를 하고 거실로 나가서 간단하게 아침을 차려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