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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내가 듣는다 5화
제 1장. 옆집 남자 (5)
아이들에게는 빠르게 퇴출 명령이 떨어졌다. 물론 연구소에 오래 소속되었던 만큼 그들에게는 막대한 금전적인 보상이 따랐다. 몇몇은 그것에 만족했지만, 연구소를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했던 제니는 그러지 못했다.
제니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바로 짐을 싸야 했다. 디노에게는 따로 숙소가 제공되었지만, 디노는 그곳에 가지 않고 이전의 숙소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제니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제니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연구원들은 완고하다. 제니를 그대로 있게 달라고 말해도 분명 통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제니의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창문 밖에서 붉은 석양빛이 안으로 들어왔다. 캐리어 안으로 옷가지를 집어넣던 제니의 손이 멈추었다.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입술을 깨무는 게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억지로 가슴속에 묻고 있는 듯했다.
디노는 그림처럼 침대에 앉아 캐리어를 덮는 제니를 바라보았다. 제니의 눈동자는 전에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디노는 제니가 얼마나 연구소에 남아 있고 싶어 했는지, 대능력자로 각성하고 싶어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 제니가 떠나야 하는 사실이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그의 자리를 빼앗은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캐리어를 바로 세운 제니는 디노를 보지 않은 채로 방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멈췄다. 석양이 눈앞에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고, 붉게 물든 문을 열려 했던 제니의 손이 힘을 잃고 떨어졌다. 제니가 조용히 디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디노.”
디노는 고개를 들었다. 제니의 목소리에 밖으로 내뱉지 못한 비명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제니는 고개를 돌려 디노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깨물며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왜 하필 너야……?”
디노는 그 얼굴에서 배신감을 읽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엇부터 부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니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 디노. 널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은…… 네가 미워.”
캐리어가 끌리는 소리가 들린 뒤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디노는 석양으로 붉게 물든 방 안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복도에서 들리는 울음소리가 제니의 것이 아니길 바라는 부질없는 바람을 담으며, 그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렇게 제니가 연구소를 떠난 뒤, 디노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아이가 연구소를 떠난 뒤로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몇 년이 지난 뒤에, 제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구소 근처에 나타났다.
제니는 연구소에 관한 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고, 디노는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답해 주었다. 연구소의 몇몇과 육체적인 교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을 땐 폭소까지 터트렸는데, 예전처럼 웃음을 되찾은 거 같아 디노는 그저 반갑기만 했다.
디노는 제니에게서 느껴지는 기감으로 제니가 지금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제니가 자신에게 말해 준다면 그것을 축하해 줄 셈이었다. 하지만 제니는 누군가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대신, 테이블 위에 놓인 디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은근한 눈으로 말했다.
“그럼, 나랑도 할래?”
디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니를 바라보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거부할 수 없었다. 서로 깊은 사정을 묻지 않아서일까, 이 이상한 관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디노~ 나 오늘도 가도 돼냐?
제니의 부름에 디노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제니는 어제도 자신의 집에 찾아왔었다. 독립 축하 겸 찾아온 거라고 했지만 역시 평소처럼 섹스로 끝났다. 디노는 제니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다가, 세류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고 나서 디노는 뒤늦게 살짝 놀랐다. 그는 원래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다. 예전의 사건 뒤로 다른 사람의 의지보다 그의 생각이 우선시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새로운 이웃인 세류의 ‘아무나’라는 말이 아직도 가슴 언저리에 꽂힌 채 남아 있었다. 아마 자신은 어울리지 않게도 그 거절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야……. 내가 가고 나서 그새 약속 잡은 거야?
제니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디노는 지금 제니 옆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니의 상대도 이 관계를 알고 있는 건가. 아마도 제니가 진짜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지금 옆에 있는 그 사람이겠지.
디노는 문득 제니가 왜 자신과 섹스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상식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애인이 있는데 왜 굳이 나와 섹스를 하려는 걸까. 디노가 나지막하게 제니를 불렀다.
“제니.”
-어? 왜왜.
“넌 왜 나랑 하는 거야?”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제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 끝에 제니가 왜 그런 말을 하냐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좋으니까 그렇지.
디노는 제니의 그 ‘좋음’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니는 대답을 했지만, 디노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아니었다. 디노가 잠시 침묵하자 제니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갑자기 뭐야? 네가 이런 걸 다 묻고.
글쎄. 나는 왜 그런 의미 없는 물음을 던진 걸까. 디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 그래. 어쨌든 그럼 또 시간 비면 나한테 먼저 연락 주기다. 그리고 주중에 연구소에 한번 같이 가자. 오랜만에 박사님 얼굴이나 보게.
“응.”
디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니는 항상 용건이 끝나면 바로 전화를 끊었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제니가 조금 조심스럽게 디노의 이름을 불렀다.
-디노.
“왜?”
-넌 말이야. 그 힘을 사용해서 특별히 무언가 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생각해 보았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글쎄…….”
제니가 어딘가 탈력감이 느껴지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넌 여전하구나.
그의 음성은 어쩐지 화가 난 것처럼 들렸다. 디노가 당황해하는 사이 제니는 평소의 밝은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그런 걸로 알고 이만 끊을게. 안녕, 디노.
디노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그는 잠시 끊어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연구소에 함께 있었을 때는 제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의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디노는 깊어지려는 생각의 끈을 일부러 끊었다. 어찌 됐건 디노에게 잠깐 실망한 듯했던 제니는 그의 곁에 남아 주었다. 지금은 그걸로 괜찮은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디노는 바로 아이슬링거 연구소로 향했다. 그가 살고 있는 13구역에는 아이슬링거 연구소와, C급 시공간 술사들만 보유하고 있어 영향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벤델 연구소만이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슬링거 연구소의 위치는 업계 관계자에게만 알려져 있었기에 사람들은 13구역을 벤델 연구소만 있는 변두리 지역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디노가 13구역의 오래된 맨션에 이사 오게 된 것도 연구소 간의 파벌 싸움에서 디노라는 키 카드를 지키기 위한 아이슬링거 연구소의 책략 때문이었다.
아이슬링거 연구소의 외관은 겉으로 보면 매우 평범했다. 작은 전기 울타리만이 쳐져 있는 넓게 펼쳐진 사유지 안에 흰색 건물이 여러 개 솟아올라 있었는데, 특히 가운데에는 제일 커다란 돔 형식의 건물은 그냥 평범한 천체 관측소처럼 보였다.
하지만 연구소의 지하에는 사유지의 3분의 2를 덮을 만한 거대한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서 많은 실험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몇 차례의 신분검사를 거친 뒤, 카드키를 인식기에 가져다 대자 돔 건물의 입구가 열렸다. 디노가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와 함께 안에서 흰 연구복을 입은 사람이 튀어나왔다.
“디노!”
순해 보이는 밀색 머리에 안경을 낀 이 연구자는 아렌, 젠하이거 박사의 직속 연구원이다. 아렌이 디노의 팔을 잡으며 안으로 잡아끌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 호출은 확인했어?”
“호출……이요?”
“호출기 가지고 다니라고 말했었잖아.”
디노는 그제야 방의 서랍 안에 두고 온 납작한 검은색의 기계를 떠올렸다. 아렌이 디노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금 너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연구소 쪽에 또 임무 요청이 들어왔거든.”
또인가. 디노는 눈을 내리깔았다. 가끔 비밀리에 각 나라에서 아이슬링거 연구소로 특수 임무를 요청하곤 했다. 나라에서는 연구소에게 거액을 지급하고, 그 대가로 연구소는 대능력자를 파견하여 그들의 바람을 이루어 주는 간단한 공식이었지만, 정작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디노에게 있어서는 하나하나가 큰 부담이었다.
“파괴인가요, 재생인가요.”
결벽적으로 보이는 흰색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며 디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디바이스로 한껏 무언가를 계속 읽고 있던 아렌이 ‘응?’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뒤늦게 디노의 질문을 이해하고 입을 열었다.
“분류하자면 파괴…… 쪽이려나. 컨디션에 문제는 없지?”
아렌은 대능력자를 부를 정도의 파괴 임무를 입에 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 사람들의 비틀린 성격은 예전부터 보아 와서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가끔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디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다고 해도 조금 이따가 바이탈 체크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두고.”
아렌은 다시 노트패드의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엘리베이터 안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지만,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구진에게 있어서 디노는 그저 ‘연구 재료’일 뿐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랬으니 이 기묘한 관계는 아마 평생 변하지 않을 것이다. 디노에게도 그것은 당연한 상식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대능력자이기 때문에 연구소에 소속되어 그들이 주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젠하이거 박사는 그들이 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화면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입력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는 아렌이 두 번째로 불렀을 때에야 뒤를 돌아보았다.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본 젠하이거는 디노를 보고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인자한 얼굴로 디노에게 다가와 그의 두 팔을 잡았다.
“오오. 디노, 건강해 보여 다행이구나.”
디노는 이사한 후에 계속 해 왔던 일상 보고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제 일자의 보고를…….”
“아니, 그건 일단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 해도 늦지 않단다.”
젠하이거 박사가 디노를 화면 쪽으로 이끌었다. B국에서 보내온 입체 영상이 화면 앞에 청록색으로 떠 있었다. 젠하이거 박사는 디노에게 임무 내용을 설명했다. 아렌 연구원이 미리 말했던 것처럼 이번 임무는 파괴였다. 그것도 대형의. 하지만 디노에게는 거부권이 없었다.
젠하이거 박사는 빠르게 설명을 끝내고 디노에게 임무에 대한 상세 설명이 들어 있는 디바이스를 건넸다. 디노는 디바이스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
“박사님, 제니가 보고 싶어 해요.”
“오, 그런가? 제니가.”
젠하이거가 살짝 눈을 빛냈다. 그러더니 디노에게 떠보듯이 말했다.
“디노. 계속 생각했지만, 전에 함께 생활하던 아이들 중에…… 제니와 제일 친밀한 것 같더구나.”
젠하이거의 눈빛에 디노는 살짝 불길함을 느꼈다. 하지만 디노는 거짓말을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더구나 제니는 젠하이거 박사를 만나고 싶어 했다. 수습할 수 없는 거짓을 말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디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젠하이거 박사가 주름진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그는 디노의 팔 위쪽을 느리게 두드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니는 나에게도 특별한 아이였지. 짧은 인연이었지만 이리 따라 주니 정말 기쁘구나. 다음 주에 같이 연구소에 오도록 하렴.”
디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젠하이거가 다시 한번 끌끌 웃었다. 그 뒤로 디노는 아렌에게 바이탈 체크 및 여러 검사를 받았고, 검사를 받으며 디바이스에 입력된 임무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아렌이 디노의 귀에 달린 전송장치를 다시 한 번 체크하고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디노, 임무 내용은 다 외웠지? 지금 바로 출발할 거야.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항상 말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네 몸이야. 네가 다치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알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몸을 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렌이 디노를 올려다보며 자랑스러운 아이를 보듯이 웃었다. 디노는 그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아렌은 웃고 있지만, 지금 자신은 제가 가진 능력으로 무언가를 파괴하러 떠나는 것이다. 웃을 수 없었다.
“그럼 잘 다녀와.”
디노는 손을 공중에 뻗었다. 그의 다리 사이에 인공적으로 생성된 바람이 맴돌다가 그의 몸을 감쌌다. 그는 바로 하늘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아래에 돔 형태의 하얀색 연구소가 보였다. 천체 관측소처럼 부분적으로 검은 천장이 덮여 있는 연구소가 마치 눈동자처럼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디노는 고개를 흔들고 목적지에 집중했다. 손바닥을 펴고 사방에 펼쳐진 릴리트를 느꼈다. 넓은 공간이 가상의 맵으로 머릿속에 구현되었다. 자신은 그것을, 굽혀서 접는다.
다음 순간 그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불이 번져 가는 건물들이 보였다. 디노는 그것을 빛이 사라진 눈동자로 바라본 뒤, 릴리트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국가에서 요청한 것인 만큼 세밀한 조정이 필요했던지라 하루가 꼬박 걸렸다. 디노는 임무를 마치고 연구소에 돌아와 보고한 뒤, 다시 수십 가지의 검사를 받았다. 샤워실에서 샤워하고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멈춰 있던 생각들이 언어로 형상화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디노는 한 손으로 눈가를 짚었다. 비린 철의 냄새와 타는 냄새, 그리고 귀를 메우던 끔찍한 소리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다. 디노는 크게 숨을 뱉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덤덤했다. 몸에는 흔한 상처 하나 없었다. 하지만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 같았다.
디노는 가진 능력 때문에 세상에 기록되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이슬링거 연구소는 대능력자를 발굴해 내고 그의 존재를 세상에 공표하는 대신, 철저하게 연구 소재로 사용하길 원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기적이었다. 단 한 번의 발견이 아닌, 앞으로도 수많은 대능력자를 발견하거나, 혹은 창조하는 것.
그래서 디노는 릴리트 구현이 본래 창조를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비밀리에 파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창조를 위한 술사들의 본능에 위배되는 일이었기에 그는 임무가 끝날 때쯤이면 가슴에 품고 있던 소중한 것을 빼앗긴 느낌을 느끼곤 했다.
아렌의 배웅을 받으며 연구소를 나온 디노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하늘에서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찾았다. 파괴로 인해 비어 버린 공백을 메울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취미활동, 사교활동, 약물은 모두 일반적이지 않은 그가 영위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달콤하게 팔을 감아 오는 손들을 뿌리치지 못했던 이유는, 단순히 거부할 수 없어서만이 아니라 나름대로 그 공백을 사랑이라는 것으로 채우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난 아니니까.’
하지만 세류는 아니라고 한다. 보통 사람인 그는 자신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자신이 틀린 걸까? 알 수 없었다. 디노는 결론을 내는 것에 서툴렀다. 항상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해 선택해 주었으니까.
세류 같은 사람은, 이 텅 빈 느낌을 어떻게 채우는 걸까. 여전히 알 수가 없다.
디노는 한동안 연구소의 문 앞에 서서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누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디노? 검사받으러 왔던 거야?”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는 연구소 관계자 중의 하나였다. 능력 확장을 연구하는 부서에 소속된 사람이었던가. 그와도 과거에 몇 번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
그는 디노가 반응하기도 전에 달려와 껴안았다. 코끝에 끼치는 익숙한 향기에 디노는 그를 거부하지 않고 눈을 가만히 내리깔았다. 유혹해 오는 따뜻한 손길을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강하지 않았다.
현관으로 들어서며 불을 켜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상대의 입술이 달려들었다. 디노는 흥분한 상대가 내뱉은 따뜻한 숨을 살짝 들이켜며 그와 입술을 겹쳤다. 그러곤 이 집에 이사 온 뒤부터 그랬던 것처럼 상대를 침대로 데려와 눕혔다.
상대가 디노의 목을 두 팔로 감았다. 키스를 조르는 행동에 응해 주려던 디노는 그제야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해 달라고 했었지. 세류의 짜증이 섞인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와서 상대를 돌려보낼 수는 없었지만, 디노는 세류를 다시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래?”
디노가 행동을 멈추자 상대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디노는 고개를 숙이며 그의 입에 자신의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쉿― 소리를 냈다.
“뭐야. 갑자기.”
상대가 키득댔다. 디노가 설명했다.
“옆집에 다 들린대.”
“아 진짜?? 대박. 알았어, 알았어.”
눈을 동그랗게 뜬 상대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디노를 끌어당겨 입술에 키스한 뒤에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했다.
“근데 디노는 너무 잘하니까, 나도 모르게 소리 내 버릴지도 몰라.”
그가 유혹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디노가 달려들기를 기대하는 듯했지만, 그는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이웃과 안부를 묻는 교과서적인 관계는커녕 더 이상 자신에게 말도 붙여 주지 않을 것이다.
디노는 그를 번쩍 들어서 안아 올렸다. 그러곤 성큼성큼 거실로 가서 검은색의 기다란 가죽 소파 위에 그를 내려놓았다. 고급 소파이니 몸에 부담이 가진 않을 것이다.
“진짜? 여기서?”
“응. 오늘은, 여기서.”
디노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바뀐 장소에 어벙벙한 표정을 했지만, 혀가 얽히자 곧 상대도 그에 응해 오며 디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의 입 안은 따뜻했다. 디노는 혀로 느끼는 곳을 쓸고 입술을 빨았다. 그리고 입술이 떨어졌을 때, 상대의 달콤한 숨결이 얼굴로 퍼졌다. 디노는 몽롱한 눈이 세상에 자신밖에 없다는 듯이 매달려 오는 것을 좋아했다. 제일 민감한 부위를 상대방의 살 속에 묻으며 연결되어 있다고, 사랑을 주고받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하지만 항상 달다고 느꼈던 입맞춤은, 오늘따라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디노는 그 생각을 억지로 떨쳐 버리기 위해 눈을 감아 버렸다.
제 1장. 옆집 남자 (5)
아이들에게는 빠르게 퇴출 명령이 떨어졌다. 물론 연구소에 오래 소속되었던 만큼 그들에게는 막대한 금전적인 보상이 따랐다. 몇몇은 그것에 만족했지만, 연구소를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했던 제니는 그러지 못했다.
제니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바로 짐을 싸야 했다. 디노에게는 따로 숙소가 제공되었지만, 디노는 그곳에 가지 않고 이전의 숙소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제니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제니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연구원들은 완고하다. 제니를 그대로 있게 달라고 말해도 분명 통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제니의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창문 밖에서 붉은 석양빛이 안으로 들어왔다. 캐리어 안으로 옷가지를 집어넣던 제니의 손이 멈추었다.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입술을 깨무는 게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억지로 가슴속에 묻고 있는 듯했다.
디노는 그림처럼 침대에 앉아 캐리어를 덮는 제니를 바라보았다. 제니의 눈동자는 전에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디노는 제니가 얼마나 연구소에 남아 있고 싶어 했는지, 대능력자로 각성하고 싶어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 제니가 떠나야 하는 사실이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그의 자리를 빼앗은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캐리어를 바로 세운 제니는 디노를 보지 않은 채로 방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멈췄다. 석양이 눈앞에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고, 붉게 물든 문을 열려 했던 제니의 손이 힘을 잃고 떨어졌다. 제니가 조용히 디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디노.”
디노는 고개를 들었다. 제니의 목소리에 밖으로 내뱉지 못한 비명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제니는 고개를 돌려 디노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깨물며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왜 하필 너야……?”
디노는 그 얼굴에서 배신감을 읽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엇부터 부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니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 디노. 널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은…… 네가 미워.”
캐리어가 끌리는 소리가 들린 뒤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디노는 석양으로 붉게 물든 방 안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복도에서 들리는 울음소리가 제니의 것이 아니길 바라는 부질없는 바람을 담으며, 그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렇게 제니가 연구소를 떠난 뒤, 디노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아이가 연구소를 떠난 뒤로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몇 년이 지난 뒤에, 제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구소 근처에 나타났다.
제니는 연구소에 관한 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고, 디노는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답해 주었다. 연구소의 몇몇과 육체적인 교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을 땐 폭소까지 터트렸는데, 예전처럼 웃음을 되찾은 거 같아 디노는 그저 반갑기만 했다.
디노는 제니에게서 느껴지는 기감으로 제니가 지금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제니가 자신에게 말해 준다면 그것을 축하해 줄 셈이었다. 하지만 제니는 누군가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대신, 테이블 위에 놓인 디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은근한 눈으로 말했다.
“그럼, 나랑도 할래?”
디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니를 바라보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거부할 수 없었다. 서로 깊은 사정을 묻지 않아서일까, 이 이상한 관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디노~ 나 오늘도 가도 돼냐?
제니의 부름에 디노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제니는 어제도 자신의 집에 찾아왔었다. 독립 축하 겸 찾아온 거라고 했지만 역시 평소처럼 섹스로 끝났다. 디노는 제니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다가, 세류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고 나서 디노는 뒤늦게 살짝 놀랐다. 그는 원래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다. 예전의 사건 뒤로 다른 사람의 의지보다 그의 생각이 우선시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새로운 이웃인 세류의 ‘아무나’라는 말이 아직도 가슴 언저리에 꽂힌 채 남아 있었다. 아마 자신은 어울리지 않게도 그 거절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야……. 내가 가고 나서 그새 약속 잡은 거야?
제니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디노는 지금 제니 옆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니의 상대도 이 관계를 알고 있는 건가. 아마도 제니가 진짜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지금 옆에 있는 그 사람이겠지.
디노는 문득 제니가 왜 자신과 섹스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상식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애인이 있는데 왜 굳이 나와 섹스를 하려는 걸까. 디노가 나지막하게 제니를 불렀다.
“제니.”
-어? 왜왜.
“넌 왜 나랑 하는 거야?”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제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 끝에 제니가 왜 그런 말을 하냐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좋으니까 그렇지.
디노는 제니의 그 ‘좋음’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니는 대답을 했지만, 디노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아니었다. 디노가 잠시 침묵하자 제니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갑자기 뭐야? 네가 이런 걸 다 묻고.
글쎄. 나는 왜 그런 의미 없는 물음을 던진 걸까. 디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 그래. 어쨌든 그럼 또 시간 비면 나한테 먼저 연락 주기다. 그리고 주중에 연구소에 한번 같이 가자. 오랜만에 박사님 얼굴이나 보게.
“응.”
디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니는 항상 용건이 끝나면 바로 전화를 끊었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제니가 조금 조심스럽게 디노의 이름을 불렀다.
-디노.
“왜?”
-넌 말이야. 그 힘을 사용해서 특별히 무언가 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생각해 보았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글쎄…….”
제니가 어딘가 탈력감이 느껴지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넌 여전하구나.
그의 음성은 어쩐지 화가 난 것처럼 들렸다. 디노가 당황해하는 사이 제니는 평소의 밝은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그런 걸로 알고 이만 끊을게. 안녕, 디노.
디노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그는 잠시 끊어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연구소에 함께 있었을 때는 제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의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디노는 깊어지려는 생각의 끈을 일부러 끊었다. 어찌 됐건 디노에게 잠깐 실망한 듯했던 제니는 그의 곁에 남아 주었다. 지금은 그걸로 괜찮은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디노는 바로 아이슬링거 연구소로 향했다. 그가 살고 있는 13구역에는 아이슬링거 연구소와, C급 시공간 술사들만 보유하고 있어 영향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벤델 연구소만이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슬링거 연구소의 위치는 업계 관계자에게만 알려져 있었기에 사람들은 13구역을 벤델 연구소만 있는 변두리 지역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디노가 13구역의 오래된 맨션에 이사 오게 된 것도 연구소 간의 파벌 싸움에서 디노라는 키 카드를 지키기 위한 아이슬링거 연구소의 책략 때문이었다.
아이슬링거 연구소의 외관은 겉으로 보면 매우 평범했다. 작은 전기 울타리만이 쳐져 있는 넓게 펼쳐진 사유지 안에 흰색 건물이 여러 개 솟아올라 있었는데, 특히 가운데에는 제일 커다란 돔 형식의 건물은 그냥 평범한 천체 관측소처럼 보였다.
하지만 연구소의 지하에는 사유지의 3분의 2를 덮을 만한 거대한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서 많은 실험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몇 차례의 신분검사를 거친 뒤, 카드키를 인식기에 가져다 대자 돔 건물의 입구가 열렸다. 디노가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와 함께 안에서 흰 연구복을 입은 사람이 튀어나왔다.
“디노!”
순해 보이는 밀색 머리에 안경을 낀 이 연구자는 아렌, 젠하이거 박사의 직속 연구원이다. 아렌이 디노의 팔을 잡으며 안으로 잡아끌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 호출은 확인했어?”
“호출……이요?”
“호출기 가지고 다니라고 말했었잖아.”
디노는 그제야 방의 서랍 안에 두고 온 납작한 검은색의 기계를 떠올렸다. 아렌이 디노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금 너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연구소 쪽에 또 임무 요청이 들어왔거든.”
또인가. 디노는 눈을 내리깔았다. 가끔 비밀리에 각 나라에서 아이슬링거 연구소로 특수 임무를 요청하곤 했다. 나라에서는 연구소에게 거액을 지급하고, 그 대가로 연구소는 대능력자를 파견하여 그들의 바람을 이루어 주는 간단한 공식이었지만, 정작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디노에게 있어서는 하나하나가 큰 부담이었다.
“파괴인가요, 재생인가요.”
결벽적으로 보이는 흰색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며 디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디바이스로 한껏 무언가를 계속 읽고 있던 아렌이 ‘응?’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뒤늦게 디노의 질문을 이해하고 입을 열었다.
“분류하자면 파괴…… 쪽이려나. 컨디션에 문제는 없지?”
아렌은 대능력자를 부를 정도의 파괴 임무를 입에 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 사람들의 비틀린 성격은 예전부터 보아 와서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가끔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디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다고 해도 조금 이따가 바이탈 체크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두고.”
아렌은 다시 노트패드의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엘리베이터 안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지만,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구진에게 있어서 디노는 그저 ‘연구 재료’일 뿐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랬으니 이 기묘한 관계는 아마 평생 변하지 않을 것이다. 디노에게도 그것은 당연한 상식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대능력자이기 때문에 연구소에 소속되어 그들이 주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젠하이거 박사는 그들이 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화면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입력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는 아렌이 두 번째로 불렀을 때에야 뒤를 돌아보았다.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본 젠하이거는 디노를 보고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인자한 얼굴로 디노에게 다가와 그의 두 팔을 잡았다.
“오오. 디노, 건강해 보여 다행이구나.”
디노는 이사한 후에 계속 해 왔던 일상 보고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제 일자의 보고를…….”
“아니, 그건 일단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 해도 늦지 않단다.”
젠하이거 박사가 디노를 화면 쪽으로 이끌었다. B국에서 보내온 입체 영상이 화면 앞에 청록색으로 떠 있었다. 젠하이거 박사는 디노에게 임무 내용을 설명했다. 아렌 연구원이 미리 말했던 것처럼 이번 임무는 파괴였다. 그것도 대형의. 하지만 디노에게는 거부권이 없었다.
젠하이거 박사는 빠르게 설명을 끝내고 디노에게 임무에 대한 상세 설명이 들어 있는 디바이스를 건넸다. 디노는 디바이스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
“박사님, 제니가 보고 싶어 해요.”
“오, 그런가? 제니가.”
젠하이거가 살짝 눈을 빛냈다. 그러더니 디노에게 떠보듯이 말했다.
“디노. 계속 생각했지만, 전에 함께 생활하던 아이들 중에…… 제니와 제일 친밀한 것 같더구나.”
젠하이거의 눈빛에 디노는 살짝 불길함을 느꼈다. 하지만 디노는 거짓말을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더구나 제니는 젠하이거 박사를 만나고 싶어 했다. 수습할 수 없는 거짓을 말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디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젠하이거 박사가 주름진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그는 디노의 팔 위쪽을 느리게 두드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니는 나에게도 특별한 아이였지. 짧은 인연이었지만 이리 따라 주니 정말 기쁘구나. 다음 주에 같이 연구소에 오도록 하렴.”
디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젠하이거가 다시 한번 끌끌 웃었다. 그 뒤로 디노는 아렌에게 바이탈 체크 및 여러 검사를 받았고, 검사를 받으며 디바이스에 입력된 임무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아렌이 디노의 귀에 달린 전송장치를 다시 한 번 체크하고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디노, 임무 내용은 다 외웠지? 지금 바로 출발할 거야.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항상 말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네 몸이야. 네가 다치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알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몸을 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렌이 디노를 올려다보며 자랑스러운 아이를 보듯이 웃었다. 디노는 그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아렌은 웃고 있지만, 지금 자신은 제가 가진 능력으로 무언가를 파괴하러 떠나는 것이다. 웃을 수 없었다.
“그럼 잘 다녀와.”
디노는 손을 공중에 뻗었다. 그의 다리 사이에 인공적으로 생성된 바람이 맴돌다가 그의 몸을 감쌌다. 그는 바로 하늘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아래에 돔 형태의 하얀색 연구소가 보였다. 천체 관측소처럼 부분적으로 검은 천장이 덮여 있는 연구소가 마치 눈동자처럼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디노는 고개를 흔들고 목적지에 집중했다. 손바닥을 펴고 사방에 펼쳐진 릴리트를 느꼈다. 넓은 공간이 가상의 맵으로 머릿속에 구현되었다. 자신은 그것을, 굽혀서 접는다.
다음 순간 그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불이 번져 가는 건물들이 보였다. 디노는 그것을 빛이 사라진 눈동자로 바라본 뒤, 릴리트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국가에서 요청한 것인 만큼 세밀한 조정이 필요했던지라 하루가 꼬박 걸렸다. 디노는 임무를 마치고 연구소에 돌아와 보고한 뒤, 다시 수십 가지의 검사를 받았다. 샤워실에서 샤워하고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멈춰 있던 생각들이 언어로 형상화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디노는 한 손으로 눈가를 짚었다. 비린 철의 냄새와 타는 냄새, 그리고 귀를 메우던 끔찍한 소리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다. 디노는 크게 숨을 뱉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덤덤했다. 몸에는 흔한 상처 하나 없었다. 하지만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 같았다.
디노는 가진 능력 때문에 세상에 기록되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이슬링거 연구소는 대능력자를 발굴해 내고 그의 존재를 세상에 공표하는 대신, 철저하게 연구 소재로 사용하길 원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기적이었다. 단 한 번의 발견이 아닌, 앞으로도 수많은 대능력자를 발견하거나, 혹은 창조하는 것.
그래서 디노는 릴리트 구현이 본래 창조를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비밀리에 파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창조를 위한 술사들의 본능에 위배되는 일이었기에 그는 임무가 끝날 때쯤이면 가슴에 품고 있던 소중한 것을 빼앗긴 느낌을 느끼곤 했다.
아렌의 배웅을 받으며 연구소를 나온 디노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하늘에서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찾았다. 파괴로 인해 비어 버린 공백을 메울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취미활동, 사교활동, 약물은 모두 일반적이지 않은 그가 영위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달콤하게 팔을 감아 오는 손들을 뿌리치지 못했던 이유는, 단순히 거부할 수 없어서만이 아니라 나름대로 그 공백을 사랑이라는 것으로 채우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난 아니니까.’
하지만 세류는 아니라고 한다. 보통 사람인 그는 자신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자신이 틀린 걸까? 알 수 없었다. 디노는 결론을 내는 것에 서툴렀다. 항상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해 선택해 주었으니까.
세류 같은 사람은, 이 텅 빈 느낌을 어떻게 채우는 걸까. 여전히 알 수가 없다.
디노는 한동안 연구소의 문 앞에 서서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누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디노? 검사받으러 왔던 거야?”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는 연구소 관계자 중의 하나였다. 능력 확장을 연구하는 부서에 소속된 사람이었던가. 그와도 과거에 몇 번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
그는 디노가 반응하기도 전에 달려와 껴안았다. 코끝에 끼치는 익숙한 향기에 디노는 그를 거부하지 않고 눈을 가만히 내리깔았다. 유혹해 오는 따뜻한 손길을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강하지 않았다.
현관으로 들어서며 불을 켜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상대의 입술이 달려들었다. 디노는 흥분한 상대가 내뱉은 따뜻한 숨을 살짝 들이켜며 그와 입술을 겹쳤다. 그러곤 이 집에 이사 온 뒤부터 그랬던 것처럼 상대를 침대로 데려와 눕혔다.
상대가 디노의 목을 두 팔로 감았다. 키스를 조르는 행동에 응해 주려던 디노는 그제야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해 달라고 했었지. 세류의 짜증이 섞인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와서 상대를 돌려보낼 수는 없었지만, 디노는 세류를 다시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래?”
디노가 행동을 멈추자 상대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디노는 고개를 숙이며 그의 입에 자신의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쉿― 소리를 냈다.
“뭐야. 갑자기.”
상대가 키득댔다. 디노가 설명했다.
“옆집에 다 들린대.”
“아 진짜?? 대박. 알았어, 알았어.”
눈을 동그랗게 뜬 상대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디노를 끌어당겨 입술에 키스한 뒤에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했다.
“근데 디노는 너무 잘하니까, 나도 모르게 소리 내 버릴지도 몰라.”
그가 유혹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디노가 달려들기를 기대하는 듯했지만, 그는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이웃과 안부를 묻는 교과서적인 관계는커녕 더 이상 자신에게 말도 붙여 주지 않을 것이다.
디노는 그를 번쩍 들어서 안아 올렸다. 그러곤 성큼성큼 거실로 가서 검은색의 기다란 가죽 소파 위에 그를 내려놓았다. 고급 소파이니 몸에 부담이 가진 않을 것이다.
“진짜? 여기서?”
“응. 오늘은, 여기서.”
디노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바뀐 장소에 어벙벙한 표정을 했지만, 혀가 얽히자 곧 상대도 그에 응해 오며 디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의 입 안은 따뜻했다. 디노는 혀로 느끼는 곳을 쓸고 입술을 빨았다. 그리고 입술이 떨어졌을 때, 상대의 달콤한 숨결이 얼굴로 퍼졌다. 디노는 몽롱한 눈이 세상에 자신밖에 없다는 듯이 매달려 오는 것을 좋아했다. 제일 민감한 부위를 상대방의 살 속에 묻으며 연결되어 있다고, 사랑을 주고받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하지만 항상 달다고 느꼈던 입맞춤은, 오늘따라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디노는 그 생각을 억지로 떨쳐 버리기 위해 눈을 감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