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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내가 듣는다 4화
제 1장. 옆집 남자 (4)
그건 싫었다. 자신에게 클레임을 걸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 주고 마실 것도 사 준 이였다. 연구소에서 보았던 책 속의 사람들처럼 그와 가끔 정다운 인사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
밤에 소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디노가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세류는 자신 몫의 이온음료를 다 마시고 이제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디노가 다급하게 말했다.
“세류 씨, 혹시 그 외에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없나요?”
“에, 네?”
자리에서 일어난 세류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디노를 내려다보았다. 큰 검은 눈동자는 어딘가 절박하게 보였다. 갑자기 원하는 걸 말하라고 해도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밤에 조용히 해 주는 것뿐이려나. 세류가 담담하게 말했다.
“글세요…… 그냥 밤에 조용히 해 주시면 좋겠네요. 6개월 동안은 집중해서 작업해야 해서, 방해받으면 곤란하거든요.”
“그건 물론이에요.”
디노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뭔가 부족하다. 이상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가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주로 이렇게 주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류는 기존에 존재했던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는 듯이 말한다. 그것은 어쩐지 디노와 전혀 관계를 쌓을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실제로 세류는 디노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아닌, 연구소에 소속된 사람 중에 디노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면, 다들 밝은 얼굴로 필요한 것을 말하곤 했는데. 세류의 반응은 뭔가 달랐다.
뭔가 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외에라도, 원하는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왜요?”
세류가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는 디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디노 때문에 피해를 받긴 했지만 이제 주의한다고 하니 자신들의 문제는 해결된 것과 다름없었다. 더 대화를 지속할 의미가 없었다.
“그게, 죄송해서…….”
“제가 디노 씨에게 원하는 거라…… 딱히 떠오르지 않네요. 그냥 밤에 조용히만 해 주시면 됩니다.”
세류가 딱 잘라 말했다. 디노는 그제야 세류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깨달았다. 연구소 사람들과 달리, 세류는 자신의 능력을 모른다. 디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르기에 원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거다.
그런 반응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디노는 뭔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세류에게 지금이라도 자신이 대능력자라는 것을 밝힌다면 그도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 줄지 모른다. 하지만 왠지 밝히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런 평범한 관계를 예전부터 바라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세류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 애초에 원하는 것이 없다고 하니까. 디노는 고민했다. 세류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을까.
그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힘을 사용하는 것 외에 사람들이 그에게 요청했던 것. 그리고 만족했던 것. 자신이 그나마 세류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자신 쪽에서 제안해 본 적은 없었지만, 디노는 나름대로 그를 기쁘게 해 줄 자신이 있었다. 그는 결심을 다지고 입을 열었다.
“세류 씨.”
벤치 옆의 쓰레기통에 찌그러뜨린 음료 캔을 던진 세류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디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떠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왜인지 모르게 미적대는 디노를 위해 마지못해 남아 있는 듯했다.
디노는 살짝 침을 삼켰다. 별로 긴장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손에 땀이 찼다. 디노는 의도적으로 긴장을 숨긴 채 여상한 말투로 세류에게 제안했다.
“세류 씨는 저랑 할 생각 없나요?”
느닷없는 제안에 캔을 던지고 위로 올라가 있던 세류의 팔이 멈췄다.
‘응? 뭐라고??’
세류는 아직 디노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깜박였다.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거지. 디노가 세류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더니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밤에 저랑 섹스…….”
세류는 그 단어의 뒷말을 더 듣지 않았다. 혈압이 확 올랐다. 가지고 있는 배경을 보아하니 4차원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세류는 그를 다시 살펴보았다. 황당한 제안을 듣고 보니 그가 좀 다르게 보였다.
‘순둥이인 줄 알았더니…….’
잠시 착각했다. 연구소 출신이니, 대능력자니 하는 배경들에 속았다. 그러면 그렇지. 밤마다 다른 사람을 집에 데려오는 이유가 있었다. 순해 보이는 얼굴로 사람 가리지 않고 유혹하는 유형인가. 더 질이 나쁘잖아. 세류가 인상을 쓰고 딱 잘라 말했다.
“안 합니다.”
세류는 디노가 다시 유혹해 오거나, 말을 돌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디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것을 본 세류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에게는 그 1차원적인 사고관이 눈에 보였다. 마치 지가 딸기우유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마구 권하다가 누가 싫다고 하니까 ‘딸기우유 맛있는데 왜 안 먹지?’ 하며 이해를 못하는 어린애 같은 사고방식이다.
“애초에 아무나랑 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거.”
남자가 다시 황당한 말을 덧붙이기 전에 세류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쪽이 그런 취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아니거든요. 첫 독립이니 뭐니 하는 거 보니 아직 세상을 잘 모르시나 본데, 아무한테나 그런 말 하면 성희롱으로 뺨 맞습니다.”
디노가 세류를 올려다본 채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직 세류의 말이 머리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것 같았다. 얼핏 보면 순진해 보이는 그 얼굴에 세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것도 노림수네. 노림수야.
세류를 빠르게 이 이상한 공간을 벗어나기로 했다.
“그럼 밤에 조심해 주시는 거로 알고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붙잡으려는 듯이 입을 여는 디노를 뒤로하고 세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뒤 저벅저벅 걸어가 버렸다. 공원 입구에 잠깐 서서 아까 들었던 이상한 제안을 상기하고 몸을 부르르 떨고는, 그대로 마트까지 뛰는 듯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너무 기가 차서 입에서 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뭘 해??? 나 참 기가 차서.”
어떻게 하면 밤에 조용히 해 달라 했더니 그럼 자기랑 하자는 말이 나오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할수록 답이 없어지는 기분에 세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쨌든 자기는 할 말을 다 했다. 그쪽이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조금은 조심해 주겠지.
아연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던 디노의 얼굴이 다시 생각났다. 세류는 상처받은 듯 입매를 굳히고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그를 보고 말았다.
거절한 것은 좋았지만 뒤의 말은 덧붙이지 말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건데 아무리 황당하다고 해도 ‘그런 건 원래 아무나랑 하는 게 아니다’라는 둥 그의 방식을 부정하면서 비난조로 쏘아붙이다니. 자신도 아직 어른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 어때. 통상적으로 생각하면 그건 성희롱이라고.’
세류는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입가를 씰룩였다. 어쨌든 디노라는 옆집 남자가 이제부터 조심해 주기만 하면 이 기묘한 이웃과 자신이 이제 얽힐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없어야 한다. 세류는 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공원 벤치에 덩그러니 남겨진 디노는 멀어지는 세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그는 무릎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안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거절당해 버렸다. 확률이 희박하지만, 연구소 사람과 세류는 다르니까,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거절당하고 나니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느낌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디노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세류가 황당하다는 듯이 외쳤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무나랑 하는 거 아니잖아요.’
디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걸까.
그는 어두워진 눈동자로 과거를 바라보았다. 몽실몽실 검은 연기와 함께 지워지다 만 기억이 재생되었다.
최종적인 대능력자 검사가 끝난 뒤에, 자신과 같이 생활했던 아이들이 연구소에서 퇴출당하고 디노 혼자만 남게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주위의 시선이 어딘가 탐욕스러운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은.
디노의 힘을 당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물리적으로 그를 속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들은 디노를 감정적으로 속박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를 써 오곤 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건네는 좋은 물건에서부터, 다정한 말, 스킨십까지. 그 형태는 다양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품어서는 안 될 음험한 욕망을 품은 자도 있었다.
‘좋은 게 좋은 거잖아.’
거칠게 들리는 목소리가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 상대가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폭주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그 기억은 연구진들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기억이 났다.
천장은 회백색이었다. 백열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랐지만 디노는 본능적인 거부감에 벗어나려 했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디노의 팔을 잡아 누르며 말했다. 남자는 아마 그때,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던 것 같다.
‘디노. 거부할 필요가 없다면, 받아들여. 모두 결국엔 널 사랑해 주고 싶은 것뿐이야. 거절하겠다는 생각은 품지 않는 게 좋아. 튼튼한 너와 달리 보통 사람들은 말이다…….’
그가 디노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쉽게 상처받고, 쉽게 죽어 버리거든.’
디노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 말이 주박처럼 디노의 손발을 묶었다. 디노는 그를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힘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도.
하지만 그때의 디노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하는 행위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강하게 거부한 결과, 자신도 모르게 몸에서 릴리트 구현을 위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디노의 눈에 공기 중의 릴리트가 눈의 결정 모양으로 서서히 모이는 것이 보였다.
‘안 돼……!’
경악한 디노는 그것을 멈추려 했다. 하지만 그가 외치기도 전에 철 가시로 구현화한 릴리트가 ‘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흰 연구실의 벽에 붉은 액체로 범벅이 되어 버린 무언가가 철퍽, 하고 벽에 붙었다가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렸다.
디노는 그것을 크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짓이었다. 그 장면만이 뇌리에 새겨지듯이 박혔다. 홉뜬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시설의 벽이 부서지는 등 소란이 일어나자 바로 밖에서 흰 가운을 입은 연구진들이 달려 들어왔고, 그들 중 한 사람이 쓰러진 디노를 부축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정신을 잃었다.
‘보통 사람은 쉽게 상처받고, 쉽게 죽어 버려.’
디노는 펼쳐진 손을 쥐었다 폈다. 그는 예전부터 수천 번 되뇌어 왔던 문장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디노가 거부한 결과 누군가가 목숨을 잃었다.
흰 가운의 남자는 자신을 사랑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자신은 그를 상처 입히고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 일을 마음속 깊이 담아 두었다.
그 뒤로 그는 연구소와의 약속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 내라면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게 되었다. 이젠 누군가를 거부하는 게, 무서웠다.
자신의 힘에 끌려 다가오는 자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속마음이 어찌 되었든 자기 나름대로는 사랑을 주고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 이웃은 그게 아니라고 한다. 아무나하고 하는 게 아니라고.
디노는 자신의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보통 사람들은 쉽게 상처를 받는다고 했다. 그러면 자신은 어떨까. 누군가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도, 거절당한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상처, 받은 걸까.’
디노는 잠시 그렇게 심장에 손을 대고 있었다. 하지만 심장박동이 평소보다 살짝 빨라졌을 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자신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튼튼한 모양이다.
디노는 왠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공원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조금 빨라진 이 심장박동이 평소처럼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있을 예정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디노는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제니’라는 이름이 화면에 표시되어 있었다. 제니는 자신과 함께 어릴 적부터 연구소에 있었던 친구로, 대능력자가 아니라는 검사 결과가 나온 뒤 연구소를 나간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아이슬링거의 대능력자 검사는 몇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제니퍼, 즉 제니는 마지막까지 남은 여섯 명 중 하나였다.
그는 과거를 떠올렸다.
숙소의 이층 침대 위에서 제니가 머리를 내밀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어딘가 신나 보였다.
“디노, 만약에 최종 검사에서 내가 대능력자라고 밝혀지면 어떨 것 같냐?”
“글쎄.”
“그럼 모두가 놀라겠지. 젠하이거 박사님은 아마 뛸 듯이 기뻐하지 않을까. 죽기 전에 대 능력자를 만났다고. 연구소는 이미 내 집과도 다름없는 곳이야. 나는 말이지. 버려진 날 키워 주고 소중하게 대해 준 연구소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어.”
제니가 씩 웃어 보였고, 디노는 옅게 웃으며 ‘멋지네.’라고 대답해 주었다.
제니는 연구소를 사랑했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기억이 있는 제니에게 있어서 연구소 식구들은 그의 새로운 가족이었다. 하지만 디노의 눈에 비치는 연구소 사람들은 제니가 보는 것과 조금 달랐다. 그들은 오직 차트 결과와 능력 수치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이었다. 제니와 같은 아이들은 그들에게 있어 단순한 자료일 뿐이었다.
게다가 디노는 이미 몇 년 전 2차 검사 결과 후에 옆방의 레비가 연구소에서 퇴출당하는 풍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레비는 그의 전담 연구진인 젠하이거 박사의 흰 연구복에 매달려 울었다. 그는 가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가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그는 퇴출당했다. 고작 열두 살이었음에도 대 능력자가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지자마자 연구소에서 내쳐진 것이다.
제니가 고민하듯이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뇌파 검사와 뇌 구조 검사 결과에서는 대능력자와 90% 일치한다고 했는데 말이지. 대능력자는 데스크에 앉지 않아도 릴리트를 볼 수 있나 봐. 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대 능력자라고 해도 각성 전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했어.”
디노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는 방 안에 가득 차 있는 릴리트를 볼 수 있었지만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연구소가 그를 키워 주었지만 그가 더 소중하게 느끼는 것은 연구진이 아니라 같이 성장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릴리트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니가 ‘그렇지? 내가 각성만 하면 말이야…….’라며 다시 신나는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곱슬거리는 주황색 머리는 마치 불타는 태양 같았다. 디노는 제니를 올려다보며 그 미소가 지워지지 않기를 바랐다. 가능하다면 최종 검사에서 자신보다는 그가 대 능력자로 밝혀지기를, 그렇게 바랐다.
하지만 검사 결과는 잔인하게 제니를 배신했다. 최종 검사 결과, 인류가 그렇게 기다려 왔던 대능력자는 디노인 것으로 밝혀졌다. 젠하이거 박사는 디노를 꼭 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했다. 모든 연구원이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휘파람을 부르거나 감격에 겨워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디노는 그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젠하이거 박사가 디노를 놓아주었다. 디노는 해방되자마자 고개를 돌려 젠하이거 박사의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을, 그중에 제니를 바라보았다. 제니는 잠깐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디노와 시선이 마주치자 마주 보며 웃어 주었다.
“디노, 축하해. 이야, 내 친구가 대능력자라니. 쩔어 주는데?”
제니가 디노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디노는 제니가 많이 상처받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주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사이에 서 있던 젠하이거 박사가 제니의 손을 내치며 그를 뒤로 밀었다. 갑자기 거부당한 제니가 이해할 수 없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박사님……?”
디노가 다급하게 제니를 불렀다.
“제니.”
제니는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으로 젠하이거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부모님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제니는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바라보는 젠하이거의 얼굴에선 평소의 따뜻함과 인자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젠하이거 박사가 옆의 경호원들에게 손짓했다.
“바로 숙소로 데려가게.”
경호원들은 바로 행동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들 역시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로 아이들과 안면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아이들은 연구소의 기대대로 자신이 대능력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런데 결과가 나오자마자 이렇게 딱 잘라 버리다니. 경호원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능력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외부요인은 즉각적으로 배제해야 하네.”
젠하이거 박사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사명감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러자 경호원들이 마지못해 움직였다. 다른 아이들은 순순히 숙소 쪽으로 움직였지만, 제니는 끌려가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젠하이거 박사를 쳐다보았다. 젠하이거 박사는 한 손으로 디노의 어깨를 끌어안듯이 잡았다.
제니는 입술을 깨물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하이거를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했을 때, 디노는 몸을 움찔하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제니의 상처받은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제 1장. 옆집 남자 (4)
그건 싫었다. 자신에게 클레임을 걸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 주고 마실 것도 사 준 이였다. 연구소에서 보았던 책 속의 사람들처럼 그와 가끔 정다운 인사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
밤에 소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디노가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세류는 자신 몫의 이온음료를 다 마시고 이제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디노가 다급하게 말했다.
“세류 씨, 혹시 그 외에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없나요?”
“에, 네?”
자리에서 일어난 세류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디노를 내려다보았다. 큰 검은 눈동자는 어딘가 절박하게 보였다. 갑자기 원하는 걸 말하라고 해도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밤에 조용히 해 주는 것뿐이려나. 세류가 담담하게 말했다.
“글세요…… 그냥 밤에 조용히 해 주시면 좋겠네요. 6개월 동안은 집중해서 작업해야 해서, 방해받으면 곤란하거든요.”
“그건 물론이에요.”
디노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뭔가 부족하다. 이상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가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주로 이렇게 주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류는 기존에 존재했던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는 듯이 말한다. 그것은 어쩐지 디노와 전혀 관계를 쌓을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실제로 세류는 디노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아닌, 연구소에 소속된 사람 중에 디노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면, 다들 밝은 얼굴로 필요한 것을 말하곤 했는데. 세류의 반응은 뭔가 달랐다.
뭔가 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외에라도, 원하는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왜요?”
세류가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는 디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디노 때문에 피해를 받긴 했지만 이제 주의한다고 하니 자신들의 문제는 해결된 것과 다름없었다. 더 대화를 지속할 의미가 없었다.
“그게, 죄송해서…….”
“제가 디노 씨에게 원하는 거라…… 딱히 떠오르지 않네요. 그냥 밤에 조용히만 해 주시면 됩니다.”
세류가 딱 잘라 말했다. 디노는 그제야 세류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깨달았다. 연구소 사람들과 달리, 세류는 자신의 능력을 모른다. 디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르기에 원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거다.
그런 반응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디노는 뭔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세류에게 지금이라도 자신이 대능력자라는 것을 밝힌다면 그도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 줄지 모른다. 하지만 왠지 밝히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런 평범한 관계를 예전부터 바라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세류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 애초에 원하는 것이 없다고 하니까. 디노는 고민했다. 세류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을까.
그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힘을 사용하는 것 외에 사람들이 그에게 요청했던 것. 그리고 만족했던 것. 자신이 그나마 세류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자신 쪽에서 제안해 본 적은 없었지만, 디노는 나름대로 그를 기쁘게 해 줄 자신이 있었다. 그는 결심을 다지고 입을 열었다.
“세류 씨.”
벤치 옆의 쓰레기통에 찌그러뜨린 음료 캔을 던진 세류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디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떠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왜인지 모르게 미적대는 디노를 위해 마지못해 남아 있는 듯했다.
디노는 살짝 침을 삼켰다. 별로 긴장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손에 땀이 찼다. 디노는 의도적으로 긴장을 숨긴 채 여상한 말투로 세류에게 제안했다.
“세류 씨는 저랑 할 생각 없나요?”
느닷없는 제안에 캔을 던지고 위로 올라가 있던 세류의 팔이 멈췄다.
‘응? 뭐라고??’
세류는 아직 디노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깜박였다.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거지. 디노가 세류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더니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밤에 저랑 섹스…….”
세류는 그 단어의 뒷말을 더 듣지 않았다. 혈압이 확 올랐다. 가지고 있는 배경을 보아하니 4차원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세류는 그를 다시 살펴보았다. 황당한 제안을 듣고 보니 그가 좀 다르게 보였다.
‘순둥이인 줄 알았더니…….’
잠시 착각했다. 연구소 출신이니, 대능력자니 하는 배경들에 속았다. 그러면 그렇지. 밤마다 다른 사람을 집에 데려오는 이유가 있었다. 순해 보이는 얼굴로 사람 가리지 않고 유혹하는 유형인가. 더 질이 나쁘잖아. 세류가 인상을 쓰고 딱 잘라 말했다.
“안 합니다.”
세류는 디노가 다시 유혹해 오거나, 말을 돌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디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것을 본 세류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에게는 그 1차원적인 사고관이 눈에 보였다. 마치 지가 딸기우유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마구 권하다가 누가 싫다고 하니까 ‘딸기우유 맛있는데 왜 안 먹지?’ 하며 이해를 못하는 어린애 같은 사고방식이다.
“애초에 아무나랑 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거.”
남자가 다시 황당한 말을 덧붙이기 전에 세류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쪽이 그런 취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아니거든요. 첫 독립이니 뭐니 하는 거 보니 아직 세상을 잘 모르시나 본데, 아무한테나 그런 말 하면 성희롱으로 뺨 맞습니다.”
디노가 세류를 올려다본 채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직 세류의 말이 머리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것 같았다. 얼핏 보면 순진해 보이는 그 얼굴에 세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것도 노림수네. 노림수야.
세류를 빠르게 이 이상한 공간을 벗어나기로 했다.
“그럼 밤에 조심해 주시는 거로 알고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붙잡으려는 듯이 입을 여는 디노를 뒤로하고 세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뒤 저벅저벅 걸어가 버렸다. 공원 입구에 잠깐 서서 아까 들었던 이상한 제안을 상기하고 몸을 부르르 떨고는, 그대로 마트까지 뛰는 듯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너무 기가 차서 입에서 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뭘 해??? 나 참 기가 차서.”
어떻게 하면 밤에 조용히 해 달라 했더니 그럼 자기랑 하자는 말이 나오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할수록 답이 없어지는 기분에 세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쨌든 자기는 할 말을 다 했다. 그쪽이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조금은 조심해 주겠지.
아연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던 디노의 얼굴이 다시 생각났다. 세류는 상처받은 듯 입매를 굳히고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그를 보고 말았다.
거절한 것은 좋았지만 뒤의 말은 덧붙이지 말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건데 아무리 황당하다고 해도 ‘그런 건 원래 아무나랑 하는 게 아니다’라는 둥 그의 방식을 부정하면서 비난조로 쏘아붙이다니. 자신도 아직 어른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 어때. 통상적으로 생각하면 그건 성희롱이라고.’
세류는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입가를 씰룩였다. 어쨌든 디노라는 옆집 남자가 이제부터 조심해 주기만 하면 이 기묘한 이웃과 자신이 이제 얽힐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없어야 한다. 세류는 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공원 벤치에 덩그러니 남겨진 디노는 멀어지는 세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그는 무릎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안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거절당해 버렸다. 확률이 희박하지만, 연구소 사람과 세류는 다르니까,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거절당하고 나니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느낌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 디노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세류가 황당하다는 듯이 외쳤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무나랑 하는 거 아니잖아요.’
디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걸까.
그는 어두워진 눈동자로 과거를 바라보았다. 몽실몽실 검은 연기와 함께 지워지다 만 기억이 재생되었다.
최종적인 대능력자 검사가 끝난 뒤에, 자신과 같이 생활했던 아이들이 연구소에서 퇴출당하고 디노 혼자만 남게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주위의 시선이 어딘가 탐욕스러운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은.
디노의 힘을 당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물리적으로 그를 속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들은 디노를 감정적으로 속박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를 써 오곤 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건네는 좋은 물건에서부터, 다정한 말, 스킨십까지. 그 형태는 다양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품어서는 안 될 음험한 욕망을 품은 자도 있었다.
‘좋은 게 좋은 거잖아.’
거칠게 들리는 목소리가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 상대가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폭주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그 기억은 연구진들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기억이 났다.
천장은 회백색이었다. 백열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랐지만 디노는 본능적인 거부감에 벗어나려 했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디노의 팔을 잡아 누르며 말했다. 남자는 아마 그때,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던 것 같다.
‘디노. 거부할 필요가 없다면, 받아들여. 모두 결국엔 널 사랑해 주고 싶은 것뿐이야. 거절하겠다는 생각은 품지 않는 게 좋아. 튼튼한 너와 달리 보통 사람들은 말이다…….’
그가 디노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쉽게 상처받고, 쉽게 죽어 버리거든.’
디노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 말이 주박처럼 디노의 손발을 묶었다. 디노는 그를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힘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도.
하지만 그때의 디노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하는 행위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강하게 거부한 결과, 자신도 모르게 몸에서 릴리트 구현을 위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디노의 눈에 공기 중의 릴리트가 눈의 결정 모양으로 서서히 모이는 것이 보였다.
‘안 돼……!’
경악한 디노는 그것을 멈추려 했다. 하지만 그가 외치기도 전에 철 가시로 구현화한 릴리트가 ‘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흰 연구실의 벽에 붉은 액체로 범벅이 되어 버린 무언가가 철퍽, 하고 벽에 붙었다가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렸다.
디노는 그것을 크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짓이었다. 그 장면만이 뇌리에 새겨지듯이 박혔다. 홉뜬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시설의 벽이 부서지는 등 소란이 일어나자 바로 밖에서 흰 가운을 입은 연구진들이 달려 들어왔고, 그들 중 한 사람이 쓰러진 디노를 부축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정신을 잃었다.
‘보통 사람은 쉽게 상처받고, 쉽게 죽어 버려.’
디노는 펼쳐진 손을 쥐었다 폈다. 그는 예전부터 수천 번 되뇌어 왔던 문장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디노가 거부한 결과 누군가가 목숨을 잃었다.
흰 가운의 남자는 자신을 사랑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자신은 그를 상처 입히고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 일을 마음속 깊이 담아 두었다.
그 뒤로 그는 연구소와의 약속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 내라면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게 되었다. 이젠 누군가를 거부하는 게, 무서웠다.
자신의 힘에 끌려 다가오는 자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속마음이 어찌 되었든 자기 나름대로는 사랑을 주고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 이웃은 그게 아니라고 한다. 아무나하고 하는 게 아니라고.
디노는 자신의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보통 사람들은 쉽게 상처를 받는다고 했다. 그러면 자신은 어떨까. 누군가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도, 거절당한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상처, 받은 걸까.’
디노는 잠시 그렇게 심장에 손을 대고 있었다. 하지만 심장박동이 평소보다 살짝 빨라졌을 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자신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튼튼한 모양이다.
디노는 왠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공원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조금 빨라진 이 심장박동이 평소처럼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있을 예정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디노는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제니’라는 이름이 화면에 표시되어 있었다. 제니는 자신과 함께 어릴 적부터 연구소에 있었던 친구로, 대능력자가 아니라는 검사 결과가 나온 뒤 연구소를 나간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아이슬링거의 대능력자 검사는 몇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제니퍼, 즉 제니는 마지막까지 남은 여섯 명 중 하나였다.
그는 과거를 떠올렸다.
숙소의 이층 침대 위에서 제니가 머리를 내밀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어딘가 신나 보였다.
“디노, 만약에 최종 검사에서 내가 대능력자라고 밝혀지면 어떨 것 같냐?”
“글쎄.”
“그럼 모두가 놀라겠지. 젠하이거 박사님은 아마 뛸 듯이 기뻐하지 않을까. 죽기 전에 대 능력자를 만났다고. 연구소는 이미 내 집과도 다름없는 곳이야. 나는 말이지. 버려진 날 키워 주고 소중하게 대해 준 연구소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어.”
제니가 씩 웃어 보였고, 디노는 옅게 웃으며 ‘멋지네.’라고 대답해 주었다.
제니는 연구소를 사랑했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기억이 있는 제니에게 있어서 연구소 식구들은 그의 새로운 가족이었다. 하지만 디노의 눈에 비치는 연구소 사람들은 제니가 보는 것과 조금 달랐다. 그들은 오직 차트 결과와 능력 수치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이었다. 제니와 같은 아이들은 그들에게 있어 단순한 자료일 뿐이었다.
게다가 디노는 이미 몇 년 전 2차 검사 결과 후에 옆방의 레비가 연구소에서 퇴출당하는 풍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레비는 그의 전담 연구진인 젠하이거 박사의 흰 연구복에 매달려 울었다. 그는 가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가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그는 퇴출당했다. 고작 열두 살이었음에도 대 능력자가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지자마자 연구소에서 내쳐진 것이다.
제니가 고민하듯이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뇌파 검사와 뇌 구조 검사 결과에서는 대능력자와 90% 일치한다고 했는데 말이지. 대능력자는 데스크에 앉지 않아도 릴리트를 볼 수 있나 봐. 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대 능력자라고 해도 각성 전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했어.”
디노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는 방 안에 가득 차 있는 릴리트를 볼 수 있었지만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연구소가 그를 키워 주었지만 그가 더 소중하게 느끼는 것은 연구진이 아니라 같이 성장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릴리트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니가 ‘그렇지? 내가 각성만 하면 말이야…….’라며 다시 신나는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곱슬거리는 주황색 머리는 마치 불타는 태양 같았다. 디노는 제니를 올려다보며 그 미소가 지워지지 않기를 바랐다. 가능하다면 최종 검사에서 자신보다는 그가 대 능력자로 밝혀지기를, 그렇게 바랐다.
하지만 검사 결과는 잔인하게 제니를 배신했다. 최종 검사 결과, 인류가 그렇게 기다려 왔던 대능력자는 디노인 것으로 밝혀졌다. 젠하이거 박사는 디노를 꼭 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했다. 모든 연구원이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휘파람을 부르거나 감격에 겨워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디노는 그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젠하이거 박사가 디노를 놓아주었다. 디노는 해방되자마자 고개를 돌려 젠하이거 박사의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을, 그중에 제니를 바라보았다. 제니는 잠깐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디노와 시선이 마주치자 마주 보며 웃어 주었다.
“디노, 축하해. 이야, 내 친구가 대능력자라니. 쩔어 주는데?”
제니가 디노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디노는 제니가 많이 상처받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주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사이에 서 있던 젠하이거 박사가 제니의 손을 내치며 그를 뒤로 밀었다. 갑자기 거부당한 제니가 이해할 수 없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박사님……?”
디노가 다급하게 제니를 불렀다.
“제니.”
제니는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으로 젠하이거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부모님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제니는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바라보는 젠하이거의 얼굴에선 평소의 따뜻함과 인자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젠하이거 박사가 옆의 경호원들에게 손짓했다.
“바로 숙소로 데려가게.”
경호원들은 바로 행동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들 역시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로 아이들과 안면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아이들은 연구소의 기대대로 자신이 대능력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런데 결과가 나오자마자 이렇게 딱 잘라 버리다니. 경호원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능력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외부요인은 즉각적으로 배제해야 하네.”
젠하이거 박사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사명감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러자 경호원들이 마지못해 움직였다. 다른 아이들은 순순히 숙소 쪽으로 움직였지만, 제니는 끌려가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젠하이거 박사를 쳐다보았다. 젠하이거 박사는 한 손으로 디노의 어깨를 끌어안듯이 잡았다.
제니는 입술을 깨물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하이거를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했을 때, 디노는 몸을 움찔하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제니의 상처받은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