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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내가 듣는다 3화
제 1장. 옆집 남자 (3)


다음 날, 세류는 아침에 배송된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상자를 품에 꼬옥 안고 데스크에 앉아 있었다. 이것이 얼마만큼의 위력을 발휘해 줄 것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세류는 아침의 냉정한 정신으로 어제 자신이 변태이다 못해 상변태 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깊게 후회하고 있었다. 보통의 평범한 이웃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해 버렸다. 멋대로 신음을 들려주는 것도 나쁘지만, 그걸 듣고 흥분하는 건 더 나쁘지 않은가! 아무리 자신이 목소리 패치라고 해도 이건 심각한 사태였다.
세류는 뽁뽁이를 거칠게 뜯고 포장 비닐을 빠르게 갈기갈기 찢어 뒤로 던져 버린 뒤 헤드셋을 썼다. 검은색의 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을 쓰자 먹먹한 느낌이 귀를 감쌌다. 세류는 그 상태로 가볍게 손뼉을 쳐 보았다.
“오.”
손뼉 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세류는 헤드셋을 끼고 집 안을 이리저리 다니며 오디오도 켜 보고, TV 채널도 돌려 보면서 즐거운 무음의 시간을 보냈다.
“이거라면 이제 안심이야.”
음량 20의 록음악도 들리지 않을 정도라니. 이것만 있으면 예전처럼 평화로운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헤드셋을 꼈기에 몸을 움직이지 않고 정자세로만 자야 하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지만 그 정도면 감수할 만한 불편이었다.
헤드셋을 벗은 세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옆집의 신음에 고통받는 일도, 자신이 변태가 될 일도 없을 것이다.
물론 옆집 남자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옆집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정당한 이웃으로서 인사를 건네며 들을 것이다. 자신은 평범하고 상식적인 이웃이다. 절대 목소리를 훔쳐 들으며 흥분하는 변태가 아니다.
시계를 본 세류는 두 시간 후에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오전 9시. 11시부터 시작하면 밤까지 작업 가상공간을 순조롭게 완성할 수 있다. 작업 가상공간 구축은 쉽게 말하면 일러스트 작업 프로그램에서 레이어를 미리 여러 개 만들어 두는 것과 비슷했다.
일단 냉장고에 먹을 게 떨어졌으니까 마트나 다녀와야지.
세류는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청바지에 흰색 후드티를 입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그는 후드 티 주머니에 지갑을 찔러 넣고 엘리베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옆집 남자잖아.’
세류는 너무 놀라서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하루 사이에 옆집 남자는 마주치는 것도 민망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그를 봐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세류는 패닉에 빠져 빠르게 생각했다.
‘변태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내가 듣고 싶어서 들은 건 아닌데, 아니. 듣고 싶어 하긴 했는데 내가 일부러 들은 건 아닌데. 그러니까. 어쨌든 변태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때 인기척을 느꼈는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세류가 입을 떡 벌렸다. 바로 뒤를 돌아 도망치려는 것을 남자의 목소리가 잡았다.
“또 보네요.”
세류가 반쯤 뒤를 돌다 만 어정쩡한 자세로 대답했다.
“아, 네. 그러게요.”
그때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직도 도망가야 할지 망설이는 세류에게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려가시는 거 아니에요?”
지금 도망가 버린다면 어제 자신이 했던 변태 짓을 자백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빠르게 체념한 세류는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이웃으로서 한동안 계속 봐야 할 텐데 수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는 싫었다.
먼저 옆집 남자가 1층을 눌렀다. 남자가 왼쪽에 서 있었기에, 세류는 엘리베이터의 제일 오른쪽 벽에 딱 붙어 섰다. 될 수 있으면 지금 저 남자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뭔가 민망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긴장한 세류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질겅질겅 씹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3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것뿐인데 그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해방이었다. 세류는 남자보다 먼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저기…….”
그때 남자가 뒤에서 세류를 불렀다.
왜. 뭐. 왜 또.
세류가 마지못해 뒤를 돌아보았다. 옆집 남자가 살짝 곤란한 표정을 하고 얼굴을 긁적였다. 시선을 땅에 두던 옆집 남자가 살짝 눈을 들어 세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밤에…….”
밤이라는 키워드를 듣자 세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세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남자를 관찰했다. 순한 얼굴에 그려진 곤란함. 밤이라는 키워드.
설마…… 어제 내가 듣고 있었다는 걸 눈치챈 건가.
들었다는 사실 자체는 괜찮았다. 둘째 날에 세류는 이미 벽을 쳐서 남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듣고 흥분했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은 곤란했다.
세류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웃음에 익숙하지 않은 입가가 씰룩였다.
“밤에…… 왜요?”
세류는 대답을 기다리며 뚫어질 듯이 옆집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세류가 빤히 쳐다보자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렸지만 결국 남자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옆집 남자가 슬쩍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세류를 쳐다보았다. 어딘가 긴장이 어린 눈빛을 보니 어제 했던 일을 알고 추궁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맞아. 알 리가 없지.’
세류는 그제야 자신의 피해망상을 깨달았다. 아무리 소리가 오간다고 해도 그들 사이에는 벽이 있었다. 방에 감시 카메라라도 달아 놓지 않은 이상 그때 세류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듣고 있었다는 걸 알 리는 없었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일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반대로 여유가 생겼다. 어제의 사고만 제외하면, 어쨌든 피해를 받고 있는 쪽은 자신이었다. 앞으로 같은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지금같이 대화할 시간이 주어졌을 때 문제를 해결해 두어야 했다.
세류는 이제야 갈등을 풀 시간이 왔다고 생각하며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뭔가 말을 막 꺼낼 것 같았던 남자가 세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돌리며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역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대답에 세류는 고구마 백 개를 처먹은 심정이 되었다. 아니, 말을 하라니까?! 말을 해야 이쪽도 입은 피해를 설명하든지 말든지 하지. 세류 크리스토퍼는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 회피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
어색한 말투로 인사한 옆집 남자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세류를 지나쳐 가려 했다. 그 순간 세류가 손을 뻗어 남자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세게 잡은 것도 아니었는데, 남자는 세류가 팔을 잡은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옆집 남자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세류를 내려다보았다. 세류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아, 잠깐만. 그냥 가려 하지 말고.”
세류는 소싯적에 막 나가던 때처럼 불량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우리 이웃끼리 얘기 좀 하십시다, 옆집 양반.”



저항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옆집 남자는 근처 공원까지 순순히 이끌려 왔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며 세류가 물었다.
“시간은 괜찮아요?”
쫄래쫄래 그의 옆으로 다가온 옆집 남자가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 들르면 되는 일이라서요. 그리고 이웃과의 가벼운 접촉은 허락을 받은 사항이라서.”
세류는 자판기 버튼을 꾹 눌렀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 거지. 뭔가 의심스러웠지만 지금 중요하게 다뤄야 할 사안은 따로 있었다. 손짓으로 남자를 벤치에 앉힌 세류가 자판기에서 뽑은 이온음료를 내밀었다.
“마셔요.”
“잘 마실게요.”
남자가 잔잔하게 웃으며 음료를 받아 들었다. 언제나 예의만은 바른 사람이라고 세류는 생각했다. 아까 뭔가 질문하려 했던 걸 봐서 자신에게 피해를 줬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저번처럼 목소리에 홀려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갈 우려가 있었다.
세류는 캔 뚜껑을 따는 남자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일단 통성명이나 하죠. 난 세류 크리스토퍼입니다.”
“저는…… 디노입니다.”
디노라니. 그게 풀 네임인가? 세류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디노가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고아라서 성은 없습니다. 이 이름도 신세 지고 있는 연구소 분에게 받았습니다.”
연구소? 연구소 사람인가. 디노를 보는 세류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요즘은 시공간 술사들이 막대한 부를 창출해 내는 시대다. 시공간 술사의 자질을 검사하고 교육, 관리하는 연구소들은 기업과 국가에 영향을 끼칠 힘을 가지고 있었다. 소속되어 있는 시공간 술사들의 랭크와 수에 따라서 그 힘의 정도도 달라진다. 그래서 가끔 연구소 사이에 파벌 싸움도 일어나곤 했다.
어릴 때부터 연구소에서 자랐다면 디노에게 독특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도 이해가 갔다. 세류가 가볍게 물었다.
“연구소라면…… 혹시 연구원인가요?”
“아, 아뇨. 연구원은 아닙니다.”
디노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러곤 단순히 신세지고 있는 사람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어딘가 수상쩍었지만 일단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디노가 안심한 듯이 미소를 보였다.
그럼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 거지. 세류가 캔을 들면서 옆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때 디노가 이온음료를 마시기 위해서 팔을 들었다. 살짝 접혀 있던 왼팔의 셔츠 소매가 흘러내리면서 팔에 연푸른색으로 새겨진 마크가 보였다. 뱀이 지팡이를 감고 있는, 헤르메스의 마크와 비슷한 문양이었다.
저건 연구소에서 소속 술사들에게 하는 마킹이다. 연구소에게 있어 술사는 자산이다. 술사가 여러 연구소에 소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부분의 연구소에서는 특수한 물질로 신체에 마킹을 하곤 했다. 세류의 왼쪽 팔 위쪽에도 벤델 연구소의 마크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저 마크는…….’
세류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흔하게 알려진 문양이 아니기에 평범한 사람은 그냥 타투라고 생각하겠지만, 시공간 술사인 세류는 저것이 어디의 마크인지 알고 있었다.
저건 아이슬링거 연구소의 마크다. 그곳은 일반 시공간 술사들이 소속되어 있는 연구소와는 달랐다. 최소 A랭크 이상의 고랭커 연구원들로 구성된 아이슬링거 연구소는 ‘진짜’ 초능력자를 연구하고 있는 곳이었다.
일반 시공간 술사들은 데스크와 디바라는 장치를 사용해야만 릴리트를 조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극히 희박한 확률로 그렇지 않은 술사들도 태어나고는 했는데, 그들은 본능적으로 릴리트를 느끼고 조작할 수 있는 자들이다. 무언가를 세상에 구현하는 것이 본능인 그들은 장비 없이 구현을 할 수 있다.
이른바 대능력자. C급 시공간 술사인 세류가 기계에 의존해서 으쌰으쌰 모래성을 쌓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손도 대지 않고 눈앞에 성을 세워 올릴 수 있는 자들이다.
아이슬링거 연구소는 그들을 연구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연구원이 아니라는 이 남자는 어릴 때부터 연구소에서 자랐다고 한다. 아이슬링거 연구소에서 이 디노라는 남자에게 소속 술사들에게만 하는 마킹을 했다는 건, 이 눈앞의 남자가 세계를 뒤흔들 대능력자일 수 도 있다는 소리가 된다.
‘일이 좀 복잡해지는데.’
세류가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긁적였다. 옆집 남자가 대능력자라는 걸 알아도 너무 멀리 있는 존재라 그런지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본의 아니게 대단한 비밀을 알아 버렸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그때 이어지는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디노가 손을 내저으며 작게 웃었다.
“아. 고아라든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억 속에서 저는 처음부터 고아여서, 이제는 별 느낌도 없으니까요.”
세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살짝 안심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때 세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신경 쓰지 말자. 아이슬링거 연구소 쪽의 사람들은 일반 연구진들과 달리 포악하다고 하니까. 옆집 남자가 대능력자인 걸 내가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어떤 짓을 할지도 모르겠고. 나랑 관계없는 일이니까.’
잠시 아이슬링거 연구소 쪽의 사람을 만나서 신기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갈등을 피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귀찮은 일에 엮이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세류가 지금 신경 써야 할 것은 디노의 정체 같은 것이 아니라 밤의 소음 문제였다.
세류는 디노의 옆에 털썩 앉았다. 이제 이 남자가 이사 오고부터 생겨난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가 왔다.
“그래요.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네.”
세류의 심각한 표정에 디노가 자세를 고쳤다. 그의 바른 경청의 자세를 바라보며 세류는 고민에 빠졌다. 일단 말은 꺼내야 하겠는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밤에는 어떻건 간에 지금 이렇게 얌전히 구는 상대에게 성질대로 소리를 지르면서 패악질을 부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평범하게 그쪽의 신음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다고 하면, 기상천외한 바람둥이인 옆집 남자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었다.
세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침묵이 길어지자 캔을 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보던 디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세류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디노 쪽에서 말을 꺼내 준다면 그보다 더 편한 것이 없었다.
“사실, 저 연구소를 나와서 밖에서는 처음 살아 보는 겁니다. 첫 독립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세류 씨는 제 첫 이웃이에요.”
예상치 못했던 대사에 세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디노가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세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이웃으로서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디노가 ‘이렇게 말을 걸어 주신 것도…….’라면서 혼자 감격에 겨워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세류는 물론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첫 독립이라. 하긴 아이슬링거에서 대능력자씩이나 되는 인간을 그냥 놔둘 리가 없지. 마크를 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반신반의했었던 가설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세류는 미간을 짚었다.
이건 마치 그거였다. 첫 심부름을 나온 애가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지폐를 주니까 나에게 거스름돈으로 동전을 줬어, 신기해!’라고 말하며 즐거워하는 느낌이다. 하긴 계속 연구소에서만 살았다면 일상생활에 대한 지식 정도만 가지고 있을 게 뻔하다.
‘그래. 고아라서 계속 연구소에서만 살았던 건가. 그래서 이번이 첫 독립이시라고.’
세류는 그에게 잠시 짠한 감정을 느꼈지만 곧 무언가를 깨닫고 더러운 눈매를 했다.
‘그럼 밤의 소음 문제는 뭔데.’
연구소에서 계속 살았다며. 그럼 밤에 계속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누구야?? 설마 연구소에서도 그랬던 건가? 그래서 대능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쫓겨난 거야?
그때 디노가 말하는 내용이 귀에 들어왔다.
“거의 우기듯이 나온 독립이지만,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쫓겨난 건 아닌 모양이군. 세류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 상식이 없는 이웃에게 세간의 상식이란 녀석을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우회적인 방법으로 돌려 말하기에는 상대가 나쁘다.
“음……. 그러니까, 디노 씨.”
“네. 말씀하세요.”
디노가 ‘새로운 이웃이 나에게 말을 걸려고 하고 있어!’ 같은 눈으로 세류를 바라보았다. 세류는 미간을 짚었다. 대형견 같은 건 외견만이라고 생각했더니, 세상을 몰라서 아직 순진한 면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세류는 결심을 다지고 디노의 빛나는 시선을 마주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밤에, 시끄러워요.”
“네……?”
지금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디노의 얼굴이 쨍, 하고 굳었다. 세류는 그의 표정이 변하건 말건 못 박듯이 다시 말했다.
“다 들린다고.”
그동안 느꼈던 짜증이 심하게 배어 있는 세류의 얼굴에 디노가 몸을 움찔했다. 세류는 잠재워 두었던 자신의 성질이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번 말을 꺼내고 나니까 이제 거침이 없었다. 기세를 탄 세류가 따지듯이 말했다.
“하도 시끄러워서, 내가 사흘 동안 잠을 못 잤습니다, 잠을. 디노 씨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집에서 일하거든요. 근데 잠을 설치면 일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안 되죠. 안 된단 말입니다. 혼자 밖에 나와 사는 것이 처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사 오자마자 이렇게 소음 문제를 일으키면 곤란해요.”
“…….”
디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처음부터 이렇게 이웃과 갈등을 빚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자기 딴에는 새 이웃이 사교적으로 말을 걸어 온 줄 안 모양이었다. 할 말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너무 따지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세상 물정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옆집 남자보다는 자신이 어른이니까. 세류는 잠시 따지는 것을 멈추고 타이르듯이 말했다.
“물론, 집 구조상의 문제도 있죠. 밤마다 그러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이웃으로서 서로 배려해야 하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미안합니다.”
세류의 말이 끝나자마자 디노가 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렇게……. 방음이 안 될 줄은 몰랐어요. 세류 씨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아서.”
미안함이 배어 있는 좋은 목소리에 세류는 치밀었던 화가 슬며시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몰랐다는데 어쩌겠는가. 앞으로 조심하면 될 일이다. 세류는 가슴에 차 있었던 짜증을 털어 버리듯이 후, 하고 숨을 뱉으며 말했다.
“알면 됐어요.”
디노는 퉁명스러운 세류의 대꾸에 풀이 죽었다. 어제 옆집과 이어진 벽에서 쿵, 소리가 들려서 혹시 들리나 싶었지만 그렇게 폐를 끼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디노는 차마 세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뭐…… 그래요. 그러면 저도 좀 살겠네요.”
세류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디노는 그 틈을 타 세류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아직 얼굴에 화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납득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행이다.’
디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이걸로는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디노는 손을 꼼지락댔다. 둘 사이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래도 처음 생긴 이웃인데 이렇게 어색한 사이로 끝내게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