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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선우는 공원 중심부에 다가갔다. 그가 중심부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소리는 더 선명해진다.
꽈광!
지금 들려오는 소리는 확실히 폭발 소리다. 틀림없이 뭔가가 터지면서 나는 소리다.
지금 들리는 이 폭발 소리가 진짜 폭탄이 터지면서 나는 소리인지, 녹음된 소리가 대형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인지는 아직 구별이 안 된다. 조금 더 다가가 눈으로 직접 봐야만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선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다가갔다. 가끔 터지는 총천연색의 섬광과 땅의 울렁임도 애써 무시했다.
반쯤 얼어버린 잡초와 흙, 앙상한 나무들을 수없이 뒤로하자 공원 중앙이 보였다.
“…….”
공원 중앙은 난장판이었다. 곳곳에 크레이터가 깊게 파여 있고, 불의 꽃도 피어 있었다. 공원 중심임을 가르쳐 주던 파란색 표지판도 산산이 조각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공원의 갈색 벤치 역시 의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채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
선우는 고개를 움직여 공원을 전체적으로 봤다. 상황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되기에 영화 촬영을 하나 싶어 영상 장비를 찾으려고 한 것이었다.
‘없어?’
하지만 카메라나 영화 장비, 스피커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도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 움푹 파인 공원 바닥 한가운데에서 한 사람과 한 생물을 발견했다.
“응?”
한 생물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피죽이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원래의 모습이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한 사람은 붉은색 피를 온몸에 가득 묻히고 있었다. 부상을 당했거나 부상당한 것처럼 연출하고 있는 것 같다.
선우는 둘 중 먼저 사람으로 보이는 이에게 다가갔다. 몰래 카메라라고 생각되었지만 그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이봐요, 괜찮아요?”
바닥에 널브러진 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시리도록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금발 머리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박 잘생겼다. 잔뜩 그을린 얼굴을 하고도 연예인 뺨치게 생겼다.
‘어?’
그런 백인 사내의 오른팔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내의 오른팔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른쪽 어깨에선 붉은색 액체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사내의 상처와 피는 결코 특수 효과가 아니었다. 아무리 특수효과라도 팔이 날아간 부분을 이리 리얼하게 표현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선우는 그런데도 손을 뻗어 액체를 손에 묻혔다. 그 손을 가져와 액체의 냄새를 맡아봤다.
“웁!”
액체는 역시 피였다. 코에서 맡아지는 냄새는 확실히 피비린내다. 정말 영화 촬영이 아닌 걸까? 이게 무슨…….
선우가 혼란에 빠져들던 그때, 사내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는 다량의 출혈로 인해 파리해진 안색으로 선우를 보았다.
“지구인입니까?”
선우는 혼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그 소리를 듣고 그제야 헤어 나왔다.
“의식이 있었군요? 지금 당장 119 부를게요.”
선우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119 버튼을 누른 다음 곧장 통화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런 선우의 손을 누군가가 급히 잡아챈다.
착!
선우는 당황한 얼굴로 그 누군가를 봤다. 그 누군가는 놀랍게도 앞의 사내였다.
“늦, 늦었습니다.”
“그, 래도요!!”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간다고 해도 지구인들은 절 구하지 못할 겁니다.”
사내는 계속해서 지구인 이라는 표현을 썼다. 자신은 마치 지구인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선우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내는 지금 과다출혈로 정신이 매우 혼미한 상태였으니까.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과다출혈로 제정신이 아닌 사내의 말만 듣고 ‘예,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선우는 사내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버튼을 눌렀다.
띡―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누르자 곧장 신호음이 갔다. 두 번의 신호음이 다 가기기도 전에 119구조대가 전화를 받았다.
“119구조대입니다.”
선우는 그에게 이곳의 상황을 말하고자 입을 열었다.
“네, 여기…….”
그 순간, 사내의 손이 선우의 휴대폰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와지끈.
휴대폰이 그대로 부서져 버렸다. 한 무더기의 모래가 그의 손아귀에서 흘러나왔다.
휘리릭.
그 모래는 바람에 쓸려 날아간다. 이게 무슨…….
선우는 눈을 크게 뜨고 사내를 봤다. 영화도 아닌 현실에서 한 손으로 휴대폰을 가루로 만든다는 게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아서였다.
흙빛으로 변한 선우의 안색과는 반대로 사내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다. 죽음의 늪에 한 발자국 더 전진한 것 같다.
“신고하지… 말라니까요.”
선우는 역으로 원망하는 사내에게 화를 낼 수도, 또 물을 수도 없었다. 사내의 얼굴을 보자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화가 슬며시 가라앉았다.
곧 죽을 것 같은 사람한테 화를 낼 정도로 선우는 야박하지 않았다. 궁금증을 풀고자 질문할 정도로 호기심 넘치지도 않았다.
선우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 덕분에 5분도 채… 못 살게 되었습니다.”
“…….”
“후, 원망은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절… 살리려 한 것이니까요.”
“…….”
“대신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십시오.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사내는 미안한 마음을 이용해 이상한 부탁을 할 것 같았다. 이른 새벽의 공원 중앙, 이상한 상황에서 만난 다 죽어가는 엄청난 완력의 남자. 그런 그가 어떤 부탁을 해올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선우는 고민 끝에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들어보고 허무맹랑한 부탁을 한다 싶으면 안 들어주면 그만이었다.
“부탁이 뭡니까?”
사내는 갑자기 처음 들어보는 언어로 혼잣말을 시작했다.
“!#… !@$… !@#… $…. @#”
사내는 힘겹게 혼잣말을 끝냈다. 그 순간 사내의 옆 허공에 1m 정도의 구멍이 나타났다.
‘어?!!!’
구멍은 헛것이 아니었다. 눈을 비벼 봐도, 여러 번 깜빡거려 봐도 그대로 있었다.
사내는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선우를 무시하고 다시 혼잣말을 했다.
“!@#… !@#… $!#…….”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에서 3가지 물건이 갑자기 튀어 나왔다.
하나는 파란색의 액체가 들어 있는 병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붉은색의 액체가 들어 있는 병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금색의 어떤 물건이었다. 생긴 게 딱 결혼 예물용으로 교환하는 값비싼 명품 시계 같다.
사내는 아까보다 더 죽어가는 얼굴과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선우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제가 죽으면… 파란색 액체를 저와… 저기 있는 저놈에게 나누어 뿌려주십시오. 그 부탁만 들어주신다면… 나머지 두 개를 사…례로 드리겠습니다.”
“…….”
“하나는 멸망한… 환상족의 보물입니다. 환상족… 마…지막 생존자로부터… 받은 거지요. 또 다른 하나는… 그… 환상족의… 피입니다. 그 피를… 마시면… 환상족의 보물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
“사…례를 미리 드렸으니 꼭… 제 유언을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제 말대로… 하지 않으면… 당신도… 위험…해질 수도 있습…….”
사내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이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선우는 급히 사내의 코와 가슴에 손을 가져가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죽었다.’
사내는 숨을 쉬지 않았다. 손끝에선 한 점의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우는 그가 죽었음을 알았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주위의 모습,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한때 있었던 이상한 구멍, 피범벅이 된 그와 가루가 되어 바람에 쓸려 다니는 휴대폰. 그것들을 연달아 보게 되니 그의 죽음이 그리 놀랍지 않았던 것이다.
선우는 얼떨떨한 정신으로 일단 112에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상하기 이를 데 없지만 어쨌든 사람이 공원에서 죽었으니까.
선우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아차 했다.
‘아, 가루가 됐지.’
휴대폰은 그가 가루를 냈다. 정신없는 나머지 조금 전까지 휴대폰이 가루가 됐다는 걸 생각해 놓고도 잊어버렸다.
휴대폰이 없으니 당장 신고할 순 없다. 그렇다면 신고는 나중에 해야 할 것 같다.
선우는 그가 남긴 3가지 물건을 봤다.
‘일단… 유언대로 해주자.’
선우는 신고에 앞서 유언대로 해주기로 했다. 그가 남긴 유언대로 해준 다음 신고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세 가지 물품 중 파란색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와인의 코르크 마개 같은 그 뚜껑을 조심스럽게 따고 열었다.
딱∼
유리병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청량하고 향긋한 향이다.
선우는 그 향을 맡았음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바닥에 쏟아 붓기에는 많이 아까웠지만. 병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반쯤 그에게 부었다.
졸졸졸.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
사내의 몸에 파란색 액체가 닿자 사내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지우개로 도화지에 그려진 사내를 쓱쓱 지우는 것처럼 사내의 존재 자체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렇게 사내는 약 10초 후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바닥에 그가 흘린 피들도 어느새 사라졌다.
선우는 급히 자신의 손을 봤다. 자신의 손에 묻어 있던 핏자국도 완전히 사라졌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
어떻게 된 일인지 선우의 손에 묻었던 핏자국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사내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 같았다.
선우는 자신의 손에 들린 병을 멍하니 바라봤다. 허무맹랑한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것보다도 더 허무맹랑한 이 상황을 납득되지 않았다.
“뭐, 뭐지?”
선우는 한동안 병을 보다 상기된 표정으로 괴생물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괴생물체에게 나머지 반을 뿌렸다.
졸졸졸.
이것도 완전히 사라지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환상보다 더 환상 같은 걸 보고나니 머릿속에서 뭔가를 생각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괴생물체에 액체가 닿는 순간, 괴생물체 역사 빠르게 사라져갔다.
‘……!!’
괴생물체도 그렇게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놈이 흘린 단 한 방울의 핏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황당한 건, 병이 완전히 비워진 순간 망가질 대로 망가진 주위가 원상복구 되기 시작했다는 거다.
대형 쓰레기가 되었던 벤치가 본 모습을 되찾았다. 산산 조각 났던 파란색 표지판도 어느새 본 모습을 되찾았다. 곳곳에 있었던 크레이터도, 부러지고 타버린 나무들도, 어느새 본 모습을 완전히 되찾았다.
선우는 순간 꿈을 꾸었나 싶었다. 손에 들고 있는 유리병이 없었다면 꿈을 꾸었다 생각했을 것이다.
선우는 뒤늦게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귀신 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가야 해.’
선우는 공포에 질려 공원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려 현장을 벗어나려던 선우는 순간 멈칫했다.
선우의 시선에 끝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두 가지 물품이 들어왔다. 귀신? 허상?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그가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준 물품들이다.
선우는 아주 잠깐의 갈등 끝에 그것들을 집었다. 없이 살다 보니 무서운 와중에도 그것들을 챙겨가고 싶었다.
선우는 그것들과 함께 도망치듯 집으로 뛰었다.
선우가 도망친 공원, 그 공원에 얼마 후 검은색 두건을 눌러 쓴 수상한 두 인영이 불현듯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둘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는 영화 ET의 주인공인 ET와 매우 흡사했고, 팔과 다리 또한 사람과 크게 차이가 났다. 문어나 오징어가 걸어 다닌다면 저들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전체적인 느낌은 피륙이 된, 하지만 지금은 사라진 그 사체와 닮아 있었다.
그 둘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공원을 살폈다. 수사라도 하는지 공원 이곳저곳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
“!#!!#!$”
“!@##$%^”
둘은 한국말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이상한 언어로 대화를 나눴다. 선우에게 보답한 사내가 했던 혼잣말과도 또 달랐다.
둘은 한참을 그들만의 언어로 대화하더니 어느 순간 뿅! 하고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사라진 순간, 그들의 있던 공원 중앙에 두 명의 사내가 다가온다. 두 사내는 이곳 공원을 이용하기 위해 온 평범한 시민들이다.
“내기에서 지는 사람이 점심 사는 거다?”
“콜!”
둘은 공원을 이용했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아 이곳에 조금 전까지 누가 있었는지, 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선우는 공원 중심부에 다가갔다. 그가 중심부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소리는 더 선명해진다.
꽈광!
지금 들려오는 소리는 확실히 폭발 소리다. 틀림없이 뭔가가 터지면서 나는 소리다.
지금 들리는 이 폭발 소리가 진짜 폭탄이 터지면서 나는 소리인지, 녹음된 소리가 대형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인지는 아직 구별이 안 된다. 조금 더 다가가 눈으로 직접 봐야만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선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다가갔다. 가끔 터지는 총천연색의 섬광과 땅의 울렁임도 애써 무시했다.
반쯤 얼어버린 잡초와 흙, 앙상한 나무들을 수없이 뒤로하자 공원 중앙이 보였다.
“…….”
공원 중앙은 난장판이었다. 곳곳에 크레이터가 깊게 파여 있고, 불의 꽃도 피어 있었다. 공원 중심임을 가르쳐 주던 파란색 표지판도 산산이 조각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공원의 갈색 벤치 역시 의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채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
선우는 고개를 움직여 공원을 전체적으로 봤다. 상황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되기에 영화 촬영을 하나 싶어 영상 장비를 찾으려고 한 것이었다.
‘없어?’
하지만 카메라나 영화 장비, 스피커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도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 움푹 파인 공원 바닥 한가운데에서 한 사람과 한 생물을 발견했다.
“응?”
한 생물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피죽이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원래의 모습이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한 사람은 붉은색 피를 온몸에 가득 묻히고 있었다. 부상을 당했거나 부상당한 것처럼 연출하고 있는 것 같다.
선우는 둘 중 먼저 사람으로 보이는 이에게 다가갔다. 몰래 카메라라고 생각되었지만 그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이봐요, 괜찮아요?”
바닥에 널브러진 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시리도록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금발 머리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박 잘생겼다. 잔뜩 그을린 얼굴을 하고도 연예인 뺨치게 생겼다.
‘어?’
그런 백인 사내의 오른팔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내의 오른팔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른쪽 어깨에선 붉은색 액체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사내의 상처와 피는 결코 특수 효과가 아니었다. 아무리 특수효과라도 팔이 날아간 부분을 이리 리얼하게 표현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선우는 그런데도 손을 뻗어 액체를 손에 묻혔다. 그 손을 가져와 액체의 냄새를 맡아봤다.
“웁!”
액체는 역시 피였다. 코에서 맡아지는 냄새는 확실히 피비린내다. 정말 영화 촬영이 아닌 걸까? 이게 무슨…….
선우가 혼란에 빠져들던 그때, 사내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는 다량의 출혈로 인해 파리해진 안색으로 선우를 보았다.
“지구인입니까?”
선우는 혼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그 소리를 듣고 그제야 헤어 나왔다.
“의식이 있었군요? 지금 당장 119 부를게요.”
선우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119 버튼을 누른 다음 곧장 통화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런 선우의 손을 누군가가 급히 잡아챈다.
착!
선우는 당황한 얼굴로 그 누군가를 봤다. 그 누군가는 놀랍게도 앞의 사내였다.
“늦, 늦었습니다.”
“그, 래도요!!”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간다고 해도 지구인들은 절 구하지 못할 겁니다.”
사내는 계속해서 지구인 이라는 표현을 썼다. 자신은 마치 지구인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선우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내는 지금 과다출혈로 정신이 매우 혼미한 상태였으니까.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과다출혈로 제정신이 아닌 사내의 말만 듣고 ‘예,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선우는 사내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버튼을 눌렀다.
띡―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누르자 곧장 신호음이 갔다. 두 번의 신호음이 다 가기기도 전에 119구조대가 전화를 받았다.
“119구조대입니다.”
선우는 그에게 이곳의 상황을 말하고자 입을 열었다.
“네, 여기…….”
그 순간, 사내의 손이 선우의 휴대폰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와지끈.
휴대폰이 그대로 부서져 버렸다. 한 무더기의 모래가 그의 손아귀에서 흘러나왔다.
휘리릭.
그 모래는 바람에 쓸려 날아간다. 이게 무슨…….
선우는 눈을 크게 뜨고 사내를 봤다. 영화도 아닌 현실에서 한 손으로 휴대폰을 가루로 만든다는 게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아서였다.
흙빛으로 변한 선우의 안색과는 반대로 사내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다. 죽음의 늪에 한 발자국 더 전진한 것 같다.
“신고하지… 말라니까요.”
선우는 역으로 원망하는 사내에게 화를 낼 수도, 또 물을 수도 없었다. 사내의 얼굴을 보자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화가 슬며시 가라앉았다.
곧 죽을 것 같은 사람한테 화를 낼 정도로 선우는 야박하지 않았다. 궁금증을 풀고자 질문할 정도로 호기심 넘치지도 않았다.
선우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 덕분에 5분도 채… 못 살게 되었습니다.”
“…….”
“후, 원망은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절… 살리려 한 것이니까요.”
“…….”
“대신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십시오.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사내는 미안한 마음을 이용해 이상한 부탁을 할 것 같았다. 이른 새벽의 공원 중앙, 이상한 상황에서 만난 다 죽어가는 엄청난 완력의 남자. 그런 그가 어떤 부탁을 해올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선우는 고민 끝에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들어보고 허무맹랑한 부탁을 한다 싶으면 안 들어주면 그만이었다.
“부탁이 뭡니까?”
사내는 갑자기 처음 들어보는 언어로 혼잣말을 시작했다.
“!#… !@$… !@#… $…. @#”
사내는 힘겹게 혼잣말을 끝냈다. 그 순간 사내의 옆 허공에 1m 정도의 구멍이 나타났다.
‘어?!!!’
구멍은 헛것이 아니었다. 눈을 비벼 봐도, 여러 번 깜빡거려 봐도 그대로 있었다.
사내는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선우를 무시하고 다시 혼잣말을 했다.
“!@#… !@#… $!#…….”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에서 3가지 물건이 갑자기 튀어 나왔다.
하나는 파란색의 액체가 들어 있는 병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붉은색의 액체가 들어 있는 병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금색의 어떤 물건이었다. 생긴 게 딱 결혼 예물용으로 교환하는 값비싼 명품 시계 같다.
사내는 아까보다 더 죽어가는 얼굴과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선우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제가 죽으면… 파란색 액체를 저와… 저기 있는 저놈에게 나누어 뿌려주십시오. 그 부탁만 들어주신다면… 나머지 두 개를 사…례로 드리겠습니다.”
“…….”
“하나는 멸망한… 환상족의 보물입니다. 환상족… 마…지막 생존자로부터… 받은 거지요. 또 다른 하나는… 그… 환상족의… 피입니다. 그 피를… 마시면… 환상족의 보물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
“사…례를 미리 드렸으니 꼭… 제 유언을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제 말대로… 하지 않으면… 당신도… 위험…해질 수도 있습…….”
사내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이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선우는 급히 사내의 코와 가슴에 손을 가져가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죽었다.’
사내는 숨을 쉬지 않았다. 손끝에선 한 점의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우는 그가 죽었음을 알았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주위의 모습,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한때 있었던 이상한 구멍, 피범벅이 된 그와 가루가 되어 바람에 쓸려 다니는 휴대폰. 그것들을 연달아 보게 되니 그의 죽음이 그리 놀랍지 않았던 것이다.
선우는 얼떨떨한 정신으로 일단 112에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상하기 이를 데 없지만 어쨌든 사람이 공원에서 죽었으니까.
선우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아차 했다.
‘아, 가루가 됐지.’
휴대폰은 그가 가루를 냈다. 정신없는 나머지 조금 전까지 휴대폰이 가루가 됐다는 걸 생각해 놓고도 잊어버렸다.
휴대폰이 없으니 당장 신고할 순 없다. 그렇다면 신고는 나중에 해야 할 것 같다.
선우는 그가 남긴 3가지 물건을 봤다.
‘일단… 유언대로 해주자.’
선우는 신고에 앞서 유언대로 해주기로 했다. 그가 남긴 유언대로 해준 다음 신고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세 가지 물품 중 파란색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와인의 코르크 마개 같은 그 뚜껑을 조심스럽게 따고 열었다.
딱∼
유리병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청량하고 향긋한 향이다.
선우는 그 향을 맡았음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바닥에 쏟아 붓기에는 많이 아까웠지만. 병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반쯤 그에게 부었다.
졸졸졸.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
사내의 몸에 파란색 액체가 닿자 사내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지우개로 도화지에 그려진 사내를 쓱쓱 지우는 것처럼 사내의 존재 자체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렇게 사내는 약 10초 후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바닥에 그가 흘린 피들도 어느새 사라졌다.
선우는 급히 자신의 손을 봤다. 자신의 손에 묻어 있던 핏자국도 완전히 사라졌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
어떻게 된 일인지 선우의 손에 묻었던 핏자국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사내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 같았다.
선우는 자신의 손에 들린 병을 멍하니 바라봤다. 허무맹랑한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것보다도 더 허무맹랑한 이 상황을 납득되지 않았다.
“뭐, 뭐지?”
선우는 한동안 병을 보다 상기된 표정으로 괴생물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괴생물체에게 나머지 반을 뿌렸다.
졸졸졸.
이것도 완전히 사라지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환상보다 더 환상 같은 걸 보고나니 머릿속에서 뭔가를 생각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괴생물체에 액체가 닿는 순간, 괴생물체 역사 빠르게 사라져갔다.
‘……!!’
괴생물체도 그렇게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놈이 흘린 단 한 방울의 핏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황당한 건, 병이 완전히 비워진 순간 망가질 대로 망가진 주위가 원상복구 되기 시작했다는 거다.
대형 쓰레기가 되었던 벤치가 본 모습을 되찾았다. 산산 조각 났던 파란색 표지판도 어느새 본 모습을 되찾았다. 곳곳에 있었던 크레이터도, 부러지고 타버린 나무들도, 어느새 본 모습을 완전히 되찾았다.
선우는 순간 꿈을 꾸었나 싶었다. 손에 들고 있는 유리병이 없었다면 꿈을 꾸었다 생각했을 것이다.
선우는 뒤늦게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귀신 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가야 해.’
선우는 공포에 질려 공원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다. 그렇게 발걸음을 돌려 현장을 벗어나려던 선우는 순간 멈칫했다.
선우의 시선에 끝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두 가지 물품이 들어왔다. 귀신? 허상?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그가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준 물품들이다.
선우는 아주 잠깐의 갈등 끝에 그것들을 집었다. 없이 살다 보니 무서운 와중에도 그것들을 챙겨가고 싶었다.
선우는 그것들과 함께 도망치듯 집으로 뛰었다.
선우가 도망친 공원, 그 공원에 얼마 후 검은색 두건을 눌러 쓴 수상한 두 인영이 불현듯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둘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는 영화 ET의 주인공인 ET와 매우 흡사했고, 팔과 다리 또한 사람과 크게 차이가 났다. 문어나 오징어가 걸어 다닌다면 저들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전체적인 느낌은 피륙이 된, 하지만 지금은 사라진 그 사체와 닮아 있었다.
그 둘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공원을 살폈다. 수사라도 하는지 공원 이곳저곳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
“!#!!#!$”
“!@##$%^”
둘은 한국말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이상한 언어로 대화를 나눴다. 선우에게 보답한 사내가 했던 혼잣말과도 또 달랐다.
둘은 한참을 그들만의 언어로 대화하더니 어느 순간 뿅! 하고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사라진 순간, 그들의 있던 공원 중앙에 두 명의 사내가 다가온다. 두 사내는 이곳 공원을 이용하기 위해 온 평범한 시민들이다.
“내기에서 지는 사람이 점심 사는 거다?”
“콜!”
둘은 공원을 이용했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아 이곳에 조금 전까지 누가 있었는지, 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