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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아침이 되었다. 봄이 점점 다가와서인지 어제보다 일찍 해가 떴다.
선우는 침대가 아닌 바닥에 누워 있었다. 보일러가 꺼져 있어 방안 가득 냉기가 흐르는데도 알몸인 채였다.
그런 선우의 집에 빛이 들어왔다. 그 빛은 부피를 키워 집 안을 밝게 만든 다음 선우의 머리맡을 향해 점점 다가간다.
오전 8시쯤 되자 선우의 눈꺼풀 위로 빛이 쏘아졌다. 선우는 그 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으흠…….”
선우는 빛을 피해 몸을 돌렸다. 조금 더 쾌적한 환경에서 자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빛은 이런 선우를 끝까지 따라갔다. 낮에 햇빛을 피하는 일은 유명 아이돌이 파파라치를 피하는 일만큼 무척 어려운 일이다.
선우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음…….”
선우는 멍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의식이 돌아오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선우는 그러다 깜짝 놀랐다. 왠지 모르게 시야가 어색했다.
“여긴?”
우려와 달리 이곳은 선우, 그의 집이다.
“아, 내 집이구나.”
선우는 일어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엥?”
양반다리로 앉자 살색의 흉물이 시선에 들어왔다. 옷을 입고 있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흉물이 오늘따라 유난히 크고 거세게 시선에 잡혔다.
그것이 바로 보인다는 말은 속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말은 곧 알몸이라는 뜻이다.
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알몸으로 있었음을 깨달았다. 허둥지둥 옷을 찾았다.
“뭐야? 어디 갔어?”
어제 입고 있던 옷들은 보이지 않았다. 잠결에 벗었다면 분명 주위에 있어야 하는데 까맣게 탄 재 같은 것만 바닥에 잔뜩 보일 뿐이다.
벗어둔 옷을 찾기 위해 시선을 좌우로 움직였다. 전 방위를 빠짐없이 살펴봤다.
그런 선우의 시선 끝에 뭔가 작은 것이 들어왔다.
‘뭐지?’
그 뭔가는 시선을 따라서 같이 움직였다. 좌로 시선을 돌리면 그것 또한 좌로 움직였고, 우로 시선을 돌리면 그것 또한 우로 움직였다.
그것은 아이콘처럼 생긴 ‘OFF’라는 영어 단어였다.
‘OFF?’
선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옷을 입겠다는 생각은 잠시 잊고 허공에 있는 ‘OFF’를 눌러봤다.
‘응?’
‘OFF’라는 단어를 누르자 ‘ON’이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영어 단어가 ‘ON’으로 바뀐 순간, 선우의 오른쪽 손목이 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금색 밴드를 두른 듯 빛이 나더니 시계 같은 형상이 만들어졌다. 금색 시계의 중심 부분에서 곧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선우의 앞에 뭔가를 잔뜩 띄웠다. SF영화 속 홀로그램 같다. 선우는 크게 놀랐지만 일단 그것을 봤다.
[판타지 – 0 100]
[무 협 – 0 100]
[게 임 – 0 100]
[퓨 전 – 0 100]
[역 사 – 0 100]
[로맨스 – 0 100]
[일 반 – 0 100]
빛이 홀로그램처럼 띄운 것은 뜻을 알 수 없는 다수의 문자였다. 얼핏 수학 문제처럼 생긴 것도 같고, 암호문같이 생긴 것도 같다.
단어 개개인의 뜻은 확실히 알겠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건 또 뭐야?”
선우는 한참을 고민하다 그것에 시선을 거뒀다. 일단 급한 것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알몸으로 계속 있을 수 없어 일단 장롱을 열고 팬티부터 찾았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꽉 끼는 검은색 팬티를 입고 침대로 갔다.
선우는 그 침대에 걸터앉았다. 앞의 저것과 손목을 번갈아 본다.
‘이건 뭐지.’
저것의 의미도 크게 궁금했지만, 손목이 왜 이러는지도 궁금했다. 두 가지를 동시에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기절하기 전의 기억이었다. 현실 같지 않았던.
“아, 그러고 보니 나 기절했구나.”
선우는 붉은색 병의 내용물을 마시고 얼마 후 쓰러졌다. 엄청난 고통을 느끼다 그만 필름이 끊겨버렸다.
기억이 떠오른 순간 저것의 정체도 파악되었다. 저것은 시계 형태로 있었던 환상족의 보물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선우는 갑자기 일어섰다. 곧장 화장실로 뛰어갔다.
“외계인처럼 변한 건 아니겠지?”
선우는 현재의 몸 상태가 매우 궁금했다. 붉은색 병의 내용물을 먹은 직후 끔찍한 고통을 느꼈던 걸 생각해 볼 때, 외계인이 준 사례는 호의로 준 선물이라기 보단 악의로 준 함정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선우는 곧장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자세히 살펴봤다.
“이상… 없지?”
다행히도 손목 외에는 이상이 없었다. 묘하게 시선이 높아진 것처럼 느껴지고 피부가 상당히 좋아진 것만 빼면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선우는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후…….”
화장실에 돌아온 선우는 다시 침대에 앉았다. 여전히 ‘ON’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짓 하지 않고 오직 그것만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었다. 무슨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암호를 판독하는 기분이었다.
선우는 그것에서 곧 시선을 뗐다. ‘ON’처럼 시선 양쪽 가장자리에 또 걸리는 게 없는지 확인했다.
“없네?”
눈을 굴려 확인해 본 결과 ‘ON’ 말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ON’ 말고도 또 있었으면 했는데, 정말 불친절한 보물이 아닐 수 없다.
선우는 한참을 보다가 포기하고는 ‘ON’을 다시 눌렀다.
띡.
‘ON’를 누른 순간, 암호 같은 것들이 시야에서 싹 사라졌다. 단어 또한 ‘OFF’로 바뀌었다.
선우는 곧장 손목을 봤다. 손목이 이상 없는지 확인했다.
“괜찮네.”
우려와 달리 손목 또한 이상 없었다. ‘OFF’가 된 순간, 환상족 보물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손목이 너무 깨끗하다 보니 도리어 불안했다.
환상족의 보물이라는 게 사실 일회용은 아니었을까? 일회용이면 큰일 나는데…….
괜히 걱정되어 다시 켜봤다. 떫어 당장은 못 먹는 감도 언젠가는 먹을 수 있으니까.
“아, 다행이다. 되네.”
다행히 아까처럼 되었다. 아까처럼 이상 없이 된다는 것이 기쁜 한편, 바뀐 것 없는 것이 짜증났다.
선우는 몇 번을 더 반복해서 해봤다. 금세 흥미를 잃고 침대에 누웠다.
“에라이.”
선우는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외계인에 대해 생각했고, 그때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수없이 생각했지만 답은 없었다. 다 죽어가는 외계인과 한 대화는 몇 마디 되지 않았다. 그 몇 마디 말조차 보물의 힌트가 아니었다. 보물을 미끼로 한 부탁이었다.
선우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천장을 보고 누웠다. 형광등 불빛을 멀뚱멀뚱 보다가 책을 펴 들었다.
선우가 편 책은 도서관에서 빌린 3권의 책 중 하나였다. 3권의 책 모두 내일까지 반납해야만 한다.
선우는 그 소설들을 읽었다. 점점 빠져들었다.
“벌써 저녁이야?”
책에 빠져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늘 먹는 세 끼 중 한 끼에 불과하기에 밥과 김치, 마른 반찬으로 저녁을 대충 때웠다.
식후 간단하게 씻은 선우는 침대에 누웠다. 내일부터 다시 인력 사무소를 나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1주일 가까이 돈벌이 없이 쉬었으면 많이 쉬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처지에 더 이상의 휴식은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만 자야 한다. 지금 자야 새벽에 이상 없이 깰 수 있다. 그런데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잠은커녕 의식만 더욱 또렷해졌다.
선우는 잠을 자기 위해 하염없이 양을 새보기도 하고, 멍하니 누워서 아무 생각도 안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잠이 들지 않았다.
“아씨, 안 자!”
선우는 뒤척이다가 결국 자는 걸 포기했다. 억지로 자려 하니 더 잠이 안 오는 것 같았다.
와락 침대에서 일어난 선우는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여전히 시야 끝에 있는 ‘OFF’ 버튼을 눌러봤다.
“뭐… 암호 해독만큼 잠 오는 건 없겠지.”
이것처럼 지루하고 졸린 것 또 없을 것이다. 보물이라는 과실이 없었다면 잠 안 오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절대 해석할 생각 따윈 하지 않았을 게다.
선우는 아까처럼 ‘OFF’를 눌렀다.
“어?”
암호문이 뭔가 이상했다.
[판타지 – 3 100]
[무 협 – 0 100]
[게 임 – 0 100]
[퓨 전 – 0 100]
[역 사 – 0 100]
[로맨스 – 0 100]
[일 반 – 0 100]
판타지 옆 숫자가 바뀌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판타지 옆 숫자는 ‘0’이었는데 지금은 ‘3’ 이 되어 있었다.
다른 건 ‘0’ 그대로인데 왜 판타지만 숫자가 오른 것일까? 오늘 선우가 한 일이라곤 먹고 자고 책 읽은 것밖에는 없었는데…….
‘그 외에 더한 게 뭐가 있지? 씻고, 책 읽고… 아, 잠깐만! 설마?’
선우는 어떤 생각이 들어 곧장 방 안 한구석으로 갔다. 그가 향한 곳에는 그제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이 있었다. 선우는 그 책 중 한 권을 집었다.
“이 소설들, 판타지 소설이잖아!”
도서관에서 빌린 세 권의 책 모두 판타지 소설이었다. 제목 옆에 떡하니 ‘판타지 장편 소설’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판타지 소설 세 권을 읽었더니 판타지 옆 숫자가 3이 되었다. 그 말은 곧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 저 숫자가 오른다는 거다.
한 가지 의문이 풀리니 자연스레 다음 것도 풀렸다. 황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꼴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선우는 저 일곱 개의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감이 왔다.
‘그럼 판타지, 무협, 게임. 이게 다 장르를 뜻하는 말인가?’
판타지는 분명 판타지 소설이다. 그렇다면 무협은 무협 소설이고 게임은 게임 소설이지 않을까?
선우는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잠도 안 오는 마당이니 지금 당장 확인해 보기로 했다.
“책, 책이 필요해.”
선우는 자리에 일어서 책을 찾았다. 이미 숫자가 오른 판타지 소설 말고 또 다른 책이 있나 집을 뒤졌다.
“역시.”
그러나 있을 리가 없다.
선우는 책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먹고 살기도 어려워 죽겠는데 책은 무슨 책인가?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찾아봐도 책이 없었다. 그나마 딱 하나 있는 책이라고는 광고가 덕지덕지 붙은 전화번호부뿐이었다.
‘전화번호부는 일반에도 안 들어가겠지?’
솔직히 전화번호부는 일반에도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크게 보면 어찌어찌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왠지 시간 낭비일 확률이 높아 보인다.
선우는 결국 옷을 입고 집에서 나가 거리 한복판에 섰다.
“도서관은 닫았을 테고…….”
지금 시각은 오후 9시, 도서관은 이미 닫았을 시간이었다. 그 말은 곧 책을 구하려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다.
선우는 주위를 둘러보다 한 간판을 발견했다. 가게 이름이 참 정겹기 그지없다.
[까치책방]
선우는 그 까치책방 안에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까치책방 안에는 40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굉장히 피곤해 보인다.
선우는 주인아주머니의 인사를 받으며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들어온 목적은 스스로가 내세운 가설의 증명이기에 곧장 소설들 앞에 섰다.
‘어디 보자…….’
일단 판타지 소설을 한 권 집었다. 그다음 무협 소설을 한 권 집었다.
‘이 책이 인기 많아 보이네.’
두 권의 소설 모두 뒤의 권이 없는 것들로 골랐다. 뒤의 권이 없다는 말은 누가 빌려갔다는 말이니까.
이왕 볼 거라면 재미있는 소설을 보고 싶었다. 뒷 권을 빌려 갈 정도면 앞 권이 나름 재미있었다는 말이지 않은가.
선우는 결제를 위해 움직이다가 한 곳을 보고는 멈칫했다.
[만화책]
책방에는 소설 말고 만화책도 있었다. 만화책도 생각해 보면 소설과 장르가 비슷하다.
‘원X스… 그건 판타지지?’
소설에 장르가 나뉘어 있듯 만화도 장르가 나뉘어 있다. 무협 소설이 있듯, 무협 만화도 있다. 그렇다면 만화도 저 숫자들을 올릴 수 있는 한 방법이지 않을까? 만화로 올릴 수 있으면 오히려 쉬울 것 같은데…….
선우는 확인을 위해 만화책도 한 권 빌렸다. 계산대에 책을 내려놓았다.
“2,100원입니다.”
다 합쳐서 전부 2,100원이다. 피 같은 돈이 이렇게 날아갔지만, 괜찮았다. 궁금증 해소가 먼저다.
선우는 그길로 집에 돌아가 책을 폈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했다.
아침이 되었다. 봄이 점점 다가와서인지 어제보다 일찍 해가 떴다.
선우는 침대가 아닌 바닥에 누워 있었다. 보일러가 꺼져 있어 방안 가득 냉기가 흐르는데도 알몸인 채였다.
그런 선우의 집에 빛이 들어왔다. 그 빛은 부피를 키워 집 안을 밝게 만든 다음 선우의 머리맡을 향해 점점 다가간다.
오전 8시쯤 되자 선우의 눈꺼풀 위로 빛이 쏘아졌다. 선우는 그 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으흠…….”
선우는 빛을 피해 몸을 돌렸다. 조금 더 쾌적한 환경에서 자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빛은 이런 선우를 끝까지 따라갔다. 낮에 햇빛을 피하는 일은 유명 아이돌이 파파라치를 피하는 일만큼 무척 어려운 일이다.
선우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음…….”
선우는 멍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의식이 돌아오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선우는 그러다 깜짝 놀랐다. 왠지 모르게 시야가 어색했다.
“여긴?”
우려와 달리 이곳은 선우, 그의 집이다.
“아, 내 집이구나.”
선우는 일어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엥?”
양반다리로 앉자 살색의 흉물이 시선에 들어왔다. 옷을 입고 있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흉물이 오늘따라 유난히 크고 거세게 시선에 잡혔다.
그것이 바로 보인다는 말은 속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말은 곧 알몸이라는 뜻이다.
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알몸으로 있었음을 깨달았다. 허둥지둥 옷을 찾았다.
“뭐야? 어디 갔어?”
어제 입고 있던 옷들은 보이지 않았다. 잠결에 벗었다면 분명 주위에 있어야 하는데 까맣게 탄 재 같은 것만 바닥에 잔뜩 보일 뿐이다.
벗어둔 옷을 찾기 위해 시선을 좌우로 움직였다. 전 방위를 빠짐없이 살펴봤다.
그런 선우의 시선 끝에 뭔가 작은 것이 들어왔다.
‘뭐지?’
그 뭔가는 시선을 따라서 같이 움직였다. 좌로 시선을 돌리면 그것 또한 좌로 움직였고, 우로 시선을 돌리면 그것 또한 우로 움직였다.
그것은 아이콘처럼 생긴 ‘OFF’라는 영어 단어였다.
‘OFF?’
선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옷을 입겠다는 생각은 잠시 잊고 허공에 있는 ‘OFF’를 눌러봤다.
‘응?’
‘OFF’라는 단어를 누르자 ‘ON’이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영어 단어가 ‘ON’으로 바뀐 순간, 선우의 오른쪽 손목이 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금색 밴드를 두른 듯 빛이 나더니 시계 같은 형상이 만들어졌다. 금색 시계의 중심 부분에서 곧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선우의 앞에 뭔가를 잔뜩 띄웠다. SF영화 속 홀로그램 같다. 선우는 크게 놀랐지만 일단 그것을 봤다.
[판타지 – 0 100]
[무 협 – 0 100]
[게 임 – 0 100]
[퓨 전 – 0 100]
[역 사 – 0 100]
[로맨스 – 0 100]
[일 반 – 0 100]
빛이 홀로그램처럼 띄운 것은 뜻을 알 수 없는 다수의 문자였다. 얼핏 수학 문제처럼 생긴 것도 같고, 암호문같이 생긴 것도 같다.
단어 개개인의 뜻은 확실히 알겠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건 또 뭐야?”
선우는 한참을 고민하다 그것에 시선을 거뒀다. 일단 급한 것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알몸으로 계속 있을 수 없어 일단 장롱을 열고 팬티부터 찾았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꽉 끼는 검은색 팬티를 입고 침대로 갔다.
선우는 그 침대에 걸터앉았다. 앞의 저것과 손목을 번갈아 본다.
‘이건 뭐지.’
저것의 의미도 크게 궁금했지만, 손목이 왜 이러는지도 궁금했다. 두 가지를 동시에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기절하기 전의 기억이었다. 현실 같지 않았던.
“아, 그러고 보니 나 기절했구나.”
선우는 붉은색 병의 내용물을 마시고 얼마 후 쓰러졌다. 엄청난 고통을 느끼다 그만 필름이 끊겨버렸다.
기억이 떠오른 순간 저것의 정체도 파악되었다. 저것은 시계 형태로 있었던 환상족의 보물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선우는 갑자기 일어섰다. 곧장 화장실로 뛰어갔다.
“외계인처럼 변한 건 아니겠지?”
선우는 현재의 몸 상태가 매우 궁금했다. 붉은색 병의 내용물을 먹은 직후 끔찍한 고통을 느꼈던 걸 생각해 볼 때, 외계인이 준 사례는 호의로 준 선물이라기 보단 악의로 준 함정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선우는 곧장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자세히 살펴봤다.
“이상… 없지?”
다행히도 손목 외에는 이상이 없었다. 묘하게 시선이 높아진 것처럼 느껴지고 피부가 상당히 좋아진 것만 빼면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선우는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후…….”
화장실에 돌아온 선우는 다시 침대에 앉았다. 여전히 ‘ON’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짓 하지 않고 오직 그것만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었다. 무슨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암호를 판독하는 기분이었다.
선우는 그것에서 곧 시선을 뗐다. ‘ON’처럼 시선 양쪽 가장자리에 또 걸리는 게 없는지 확인했다.
“없네?”
눈을 굴려 확인해 본 결과 ‘ON’ 말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ON’ 말고도 또 있었으면 했는데, 정말 불친절한 보물이 아닐 수 없다.
선우는 한참을 보다가 포기하고는 ‘ON’을 다시 눌렀다.
띡.
‘ON’를 누른 순간, 암호 같은 것들이 시야에서 싹 사라졌다. 단어 또한 ‘OFF’로 바뀌었다.
선우는 곧장 손목을 봤다. 손목이 이상 없는지 확인했다.
“괜찮네.”
우려와 달리 손목 또한 이상 없었다. ‘OFF’가 된 순간, 환상족 보물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손목이 너무 깨끗하다 보니 도리어 불안했다.
환상족의 보물이라는 게 사실 일회용은 아니었을까? 일회용이면 큰일 나는데…….
괜히 걱정되어 다시 켜봤다. 떫어 당장은 못 먹는 감도 언젠가는 먹을 수 있으니까.
“아, 다행이다. 되네.”
다행히 아까처럼 되었다. 아까처럼 이상 없이 된다는 것이 기쁜 한편, 바뀐 것 없는 것이 짜증났다.
선우는 몇 번을 더 반복해서 해봤다. 금세 흥미를 잃고 침대에 누웠다.
“에라이.”
선우는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외계인에 대해 생각했고, 그때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수없이 생각했지만 답은 없었다. 다 죽어가는 외계인과 한 대화는 몇 마디 되지 않았다. 그 몇 마디 말조차 보물의 힌트가 아니었다. 보물을 미끼로 한 부탁이었다.
선우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천장을 보고 누웠다. 형광등 불빛을 멀뚱멀뚱 보다가 책을 펴 들었다.
선우가 편 책은 도서관에서 빌린 3권의 책 중 하나였다. 3권의 책 모두 내일까지 반납해야만 한다.
선우는 그 소설들을 읽었다. 점점 빠져들었다.
“벌써 저녁이야?”
책에 빠져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늘 먹는 세 끼 중 한 끼에 불과하기에 밥과 김치, 마른 반찬으로 저녁을 대충 때웠다.
식후 간단하게 씻은 선우는 침대에 누웠다. 내일부터 다시 인력 사무소를 나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1주일 가까이 돈벌이 없이 쉬었으면 많이 쉬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처지에 더 이상의 휴식은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만 자야 한다. 지금 자야 새벽에 이상 없이 깰 수 있다. 그런데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잠은커녕 의식만 더욱 또렷해졌다.
선우는 잠을 자기 위해 하염없이 양을 새보기도 하고, 멍하니 누워서 아무 생각도 안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잠이 들지 않았다.
“아씨, 안 자!”
선우는 뒤척이다가 결국 자는 걸 포기했다. 억지로 자려 하니 더 잠이 안 오는 것 같았다.
와락 침대에서 일어난 선우는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여전히 시야 끝에 있는 ‘OFF’ 버튼을 눌러봤다.
“뭐… 암호 해독만큼 잠 오는 건 없겠지.”
이것처럼 지루하고 졸린 것 또 없을 것이다. 보물이라는 과실이 없었다면 잠 안 오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절대 해석할 생각 따윈 하지 않았을 게다.
선우는 아까처럼 ‘OFF’를 눌렀다.
“어?”
암호문이 뭔가 이상했다.
[판타지 – 3 100]
[무 협 – 0 100]
[게 임 – 0 100]
[퓨 전 – 0 100]
[역 사 – 0 100]
[로맨스 – 0 100]
[일 반 – 0 100]
판타지 옆 숫자가 바뀌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판타지 옆 숫자는 ‘0’이었는데 지금은 ‘3’ 이 되어 있었다.
다른 건 ‘0’ 그대로인데 왜 판타지만 숫자가 오른 것일까? 오늘 선우가 한 일이라곤 먹고 자고 책 읽은 것밖에는 없었는데…….
‘그 외에 더한 게 뭐가 있지? 씻고, 책 읽고… 아, 잠깐만! 설마?’
선우는 어떤 생각이 들어 곧장 방 안 한구석으로 갔다. 그가 향한 곳에는 그제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이 있었다. 선우는 그 책 중 한 권을 집었다.
“이 소설들, 판타지 소설이잖아!”
도서관에서 빌린 세 권의 책 모두 판타지 소설이었다. 제목 옆에 떡하니 ‘판타지 장편 소설’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판타지 소설 세 권을 읽었더니 판타지 옆 숫자가 3이 되었다. 그 말은 곧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 저 숫자가 오른다는 거다.
한 가지 의문이 풀리니 자연스레 다음 것도 풀렸다. 황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꼴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선우는 저 일곱 개의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감이 왔다.
‘그럼 판타지, 무협, 게임. 이게 다 장르를 뜻하는 말인가?’
판타지는 분명 판타지 소설이다. 그렇다면 무협은 무협 소설이고 게임은 게임 소설이지 않을까?
선우는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잠도 안 오는 마당이니 지금 당장 확인해 보기로 했다.
“책, 책이 필요해.”
선우는 자리에 일어서 책을 찾았다. 이미 숫자가 오른 판타지 소설 말고 또 다른 책이 있나 집을 뒤졌다.
“역시.”
그러나 있을 리가 없다.
선우는 책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먹고 살기도 어려워 죽겠는데 책은 무슨 책인가?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찾아봐도 책이 없었다. 그나마 딱 하나 있는 책이라고는 광고가 덕지덕지 붙은 전화번호부뿐이었다.
‘전화번호부는 일반에도 안 들어가겠지?’
솔직히 전화번호부는 일반에도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크게 보면 어찌어찌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왠지 시간 낭비일 확률이 높아 보인다.
선우는 결국 옷을 입고 집에서 나가 거리 한복판에 섰다.
“도서관은 닫았을 테고…….”
지금 시각은 오후 9시, 도서관은 이미 닫았을 시간이었다. 그 말은 곧 책을 구하려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다.
선우는 주위를 둘러보다 한 간판을 발견했다. 가게 이름이 참 정겹기 그지없다.
[까치책방]
선우는 그 까치책방 안에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까치책방 안에는 40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굉장히 피곤해 보인다.
선우는 주인아주머니의 인사를 받으며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들어온 목적은 스스로가 내세운 가설의 증명이기에 곧장 소설들 앞에 섰다.
‘어디 보자…….’
일단 판타지 소설을 한 권 집었다. 그다음 무협 소설을 한 권 집었다.
‘이 책이 인기 많아 보이네.’
두 권의 소설 모두 뒤의 권이 없는 것들로 골랐다. 뒤의 권이 없다는 말은 누가 빌려갔다는 말이니까.
이왕 볼 거라면 재미있는 소설을 보고 싶었다. 뒷 권을 빌려 갈 정도면 앞 권이 나름 재미있었다는 말이지 않은가.
선우는 결제를 위해 움직이다가 한 곳을 보고는 멈칫했다.
[만화책]
책방에는 소설 말고 만화책도 있었다. 만화책도 생각해 보면 소설과 장르가 비슷하다.
‘원X스… 그건 판타지지?’
소설에 장르가 나뉘어 있듯 만화도 장르가 나뉘어 있다. 무협 소설이 있듯, 무협 만화도 있다. 그렇다면 만화도 저 숫자들을 올릴 수 있는 한 방법이지 않을까? 만화로 올릴 수 있으면 오히려 쉬울 것 같은데…….
선우는 확인을 위해 만화책도 한 권 빌렸다. 계산대에 책을 내려놓았다.
“2,100원입니다.”
다 합쳐서 전부 2,100원이다. 피 같은 돈이 이렇게 날아갔지만, 괜찮았다. 궁금증 해소가 먼저다.
선우는 그길로 집에 돌아가 책을 폈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