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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두 명의 사내가 있다. 평범하지만, 다부진 체구의 한 사내는 회색 지게를 짊어진 채 옆의 봉을 붙잡고 앉아 있고, 배가 볼록 나온 또 다른 한 사내는 그 지게 위에 벽돌을 옮기기 여념이 없었다.
두 사내가 있는 곳은 흙먼지가 뿌옇게 끼이고 많은 중장비가 오고 가는 건설 현장이었다. 10층 빌딩을 짓는 대형 건설 현장.
40대 후반의 현장 소장 오현무는 잠시 쉬면서 말했다.
“그렇게 입고도 안 추워?”
봄이 거의 왔지만 아직 많이 쌀쌀했다. 거리엔 여전히 두꺼운 오리털 잠바를 입은 이들이 눈에 뛴다.
그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지게를 멘 사내는 얇은 티셔츠 차림이었다. 춥지도 않은 모양이다.
사내는 그 물음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땀을 계속 흘려서 그런가? 추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 춥지 않다니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괜찮아?”
“또 뭐가요?”
“체력 괜찮으냐고. 너 종일 벽돌 들고 오르락내리락했잖아.”
오현무 소장의 말처럼 사내는 종일 벽돌을 등에 메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벽돌 수십 개를 등에 메고 계단을 오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노가다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도 금방 낙오되기 일쑤인 일, 그게 바로 벽돌 나르기다.
그런 일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음에도 사내는 웃었다. 정말 괜찮은 모양이다.
“괜찮아요. 아직 할 만해요.”
사내의 웃는 낯을 본 오현무 소장은 놀랍다는 얼굴을 했다.
“괜찮아? 정말로?”
“예.”
“확실히 선우 군, 쉬고 나오더니 사람이 바뀌었어.”
“예?”
“자네는 물론 성실하긴 했지만 여러모로 약한 편이었잖나. 오후 3시만 되도 뻗기 일보직전이었고. 그 창백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시키기 부담스러워 뭘 시킬 수도 없었지. 그래서 일부러 작고 덜 힘든 것만 시켰던 거고.”
“아, 그게 그렇게 표가 났어요?”
“표? 그게 안 났을 턱이 있어? 그 시간쯤 되면 영혼 빠진 얼굴로 서 있었는데? 자네가 조금이라도 불성실하게 일했으면 당장이라도 그만두라 말했을 거야. 막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
선우는 3주 전부터 인력 사무소에 다시 출근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하는 고된 생활을 다시 반복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날 이후 체력이 대단히 좋아졌다. 이전에는 집에 돌아가면 아무것도 못하고 뻗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하루 12시간을 일하고도 체력이 남았다.
선우는 이게 다 외계인이 준 보물의 영향일 거라 생각했다. 1주일 겨우 쉬었다고 체력이 이렇게 좋아질 리 만무하니까.
“그런데 아까 뭐 하고 있었어?”
“아까요?”
“점심 먹고 쉴 때 말이야.”
“아, 그때요? 책 읽었어요.”
“책? 무슨 책?”
“판타지 소설이요.”
그날 확인한 결과, 추측이 맞아 떨어졌다.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 판타지 옆 숫자가 1 올랐고, 무협 소설을 읽으면 무협 옆 숫자가 1 올랐다. 그러나 추측이 완전히 빗나간 것도 있다.
바로 만화책 읽기.
만화책은 아무리 읽어도 숫자가 오르지 않았다. 무협, 판타지 등 장르를 달리해 봐도 소용없었다. 더불어 영화와 애니메이션 또한 숫자가 오르지 않았다. 오직 소설을 완독해야만 1이 올랐고, 늘 새로운 책을 읽어야만 했다.
선우는 그날 이후 오전엔 인력 사무소에 나가 일을 하고 저녁엔 소설책을 읽었다. 체력이 월등히 좋아지고 키가 조금 큰 것을 보면 그가 준 사례는 선우에게 아주 좋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판타지 소설을 읽는다는 선우의 말에 오현무 소장은 피식 웃었다.
“판타지 소설? 마법사 나오고 뭐 그러는 거?”
“예.”
“뭐야? 공부한 게 아니었어? 난 또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알았지. 시간 날 때마다 책을 읽기에 말이야.”
“하하하.”
“아! 맞다. 할 말 있었는데 여태 까먹고 있었네. 내일… 아, 내일은 쉬는 날이구나. 내일 빼고 모레부터 여기로 곧장 출근하는 게 어때?”
“예? 여기로요?”
“이곳 일 마무리까지 앞으로 3달 정도 더 걸려. 이곳 일 끝나면 곧장 다음 일이 예정되어 있고. 못해도 10개월은 일이 끊기지 않을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10개월 동안 남 좋은 일시키지 말고 그냥 여기로 오란 말이야. 거기다 시간당 2,000원씩 더 쳐줄게. 인력 사무소에 소개비 안 내도 되니 시간당 3,000원 더 버는 거야. 어때? 꽤 황송한 제안이지?”
오현무 소장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선우로서는 거절 할 이유 없는 좋은 제안이었다. 선우는 씨익 웃었다.
“예, 눈물이 날 정도로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오현무 소장의 제안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덕분에 모레부터는 2시간 늦게 출근해도 될 것 같다. 약 10개월간은 일 없을까 봐 불 앞에서 마음 졸일 필요도 없게 되었다.
선우는 집에 돌아온 즉시 씻고 밥을 먹었다. 역시 일하고 먹는 밥이 가장 꿀맛이다.
“역시 밥은 일하고 먹어야 해.”
선우는 식후 상을 치웠다. 어느 순간, 버릇이 된 책 읽기를 했다. 선우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소설이었다. 근래 계속 읽고 있던 판타지 소설.
‘얼마 안 남았어.’
선우는 약 3주라는 기간 동안 판타지 소설만 읽었다. 먼저 판타지소설로 100권 찍고 변화를 관찰해 볼 생각이었다.
평일은 4권, 쉬는 날은 8권을 넘게 읽었다. 점심시간 같은 쉬는 시간에도 틈틈이 책을 읽었다. 그 탓에 자는 시간, 휴식 시간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예전이라면 절대 소화 못했을 스케줄이다. 그런데 버틸 만했다.
‘체력이 높아지지 않았다면 책은 10권도 못 읽었을 거야.’
이제 목표한 100권까지 남은 권수는 고작 5권이다. 내일은 쉬는 날이라 현장에는 나가지 않으니 밤새 읽으면 100권을 다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선우는 열심히 책을 읽었다. 그리고 약 8시간 후, 선우의 머릿속 책장에 100권의 책이 가득 채워졌다.
“됐다!!”
100권의 판타지 소설을 모두 읽은 선우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 정신이 피로해 조금 쉬어야 했지만 쉬는 것보다는 호기심 충족이 먼저였다.
선우는 정자세로 앉아 시야 가장자리에 있는 ‘OFF’를 빠르게 눌렀다.
꾹.
시야 한쪽의 ‘OFF’를 손으로 누르자 예의 그러했듯 손목이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홀로그램처럼 그것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판타지 – 100 100] [선택]
[무 협 – 1 100]
[게 임 – 0 100]
[퓨 전 – 0 100]
[역 사 – 0 100]
[로맨스 – 0 100]
[일 반 – 0 100]
“오……!”
판타지 읽은 권수가 100권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판타지 옆에 선택이라는 아이콘이 추가되었다. 아이콘은 노랗게 주위가 물들어 있었다. 눌러 달라 속삭이는 것 같다.
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그것을 눌렀다. 누르는 순간까지도 가슴이 두근두근 떨려온다.
‘클릭!’
선택을 누른 순간 이전의 글귀는 사라지고 새로운 페이지로 넘어갔다.
‘응?’
새 페이지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매우 간단한 물음만이 존재했다.
선우는 어떤 걸 선택할지 몰라 고민했다.
‘선택과 무작위라…….’
선택이라는 말은 뭔가를 선택하는 것 같다. 게임에서 종족이나 캐릭터를 선택하듯.
무작위는 뭔가를 그것들 중에 무작위로 골라진다는 말일 터다. 게임의 복불복상자 같은.
그러나 추측이 틀릴 수도 있다. 이름만 선택일 수도, 이름만 무작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선우는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답이 나올 수 없는 양자택일의 문제였다. 더 고민해 봐야 시간낭비다.
선우는 결국 선택했다.
“한국인은 랜덤이지!”
선우는 이상한 이유를 들어 무작위를 선택했다. 무작위 버튼을 꾹 누른 순간, 양자택일의 선택지는 사라지고 뭔가가 잔득 나타나기 시작한다.
뽕! 뿅! 뿅! 뿅!
하나씩 나타나 눈앞을 채우기 시작한 것들, 그것들은 전부 책이었다.
“책??”
나타난 책들은 모두 선우가 3주간 읽은 판타지 소설들이다. 총 100권의 책이 눈앞에 나타났다.
선우는 읽었던 책이 나타나자 반가운 한편 의아했다. 뭐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타난 판타지 소설들은 곧 5열 횡대로 줄을 맞춰 섰다. 갑자기 마구 뒤섞이기 시작했다.
휙∼ 휙∼ 휙∼
화투패가 녹색 담요 위에서 마구 섞이듯 책들이 섞였다. 책 섞는 솜씨가 타짜 저리가라다. 그러다 돌연 동작이 멈춘다. 5열 횡대로 다시 소설들이 나열되었다.
‘뭐야? 왜 지워져?’
보물은 어떤 설명도 없이 나열된 100권의 책 중 99권의 책을 지워버렸다. 단 한 권의 책만 덜렁 남겨놓았다. 남겨진 책의 이름은 ‘악마의 악마’였다.
선우는 남은 그 소설의 제목을 보고는 소설의 내용을 짧은 시간 동안 상기했다.
“저거… 어두운 내용이었지?”
‘악마의 악마’는 읽은 100권의 판타지 소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이다. 어째서 인상 깊었냐면 소설이 굉장히 잔인하기 때문이었다.
소설 ‘악마의 악마’는 초반부터 주인공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나 혼자의 이기적이고 윤택한 삶과 타인과 함께하는 고된 삶, 그 선택의 답을 통해 악마로써 적합 유무를 판별했다.
소설 ‘악마의 악마’ 주인공은 그 선택에 순간 타인과 함께 하는 삶을 택했다. 그 선택으로 인해 배를 곪고 죽기 일보직전까지 가지만 결코 후회 따윈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다수의 악마로부터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악마가 될 수 없다는 낙인이 이마에 찍혀졌다.
폐기 처분 판정을 받은 주인공은 사지 육신이 잘린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리치로 부활하지.’
허무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 주인공은 리치가 되어 다시 나타난다. 악마에 대한 지독한 복수심, 그리고 성전(聖戰)이라는 중대 사건이 겹치면서 그는 리치라는 마물로 다시 부활한 거다.
부활한 주인공은 빠르게 힘을 얻고 강해졌다. 강해지기 전에도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지만, 그는 그 모든 걸 이겨냈다.
강해진 주인공은 악마를 사냥했다.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는 악마,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악마, 세상을 망가트리는 악마. 그들을 잔인하고 악독하게 사냥하는 악마의 악마가 된다.
그러나 주인공은 끝내 악마를 멸종시키지 못했다. 악마를 멸종시키기 위해 손을 잡았던 인간들에게 차디찬 배신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의 소설이, 그것도 가장 고단하다고 생각했던 내용의 ‘2권’이 덜컥 남게 되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앞으로 뭐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랬다.
앞에 남아 있는 책이 먼치킨 소설이었다면 이 정도로 불안하진 않았을 게다. 전설의 소설 ‘투명 드래곤’을 보고 어떤 누가 불안해하겠나? 허무맹랑해하거나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다고 생각하지.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눈앞에 숫자가 나타났다. 처음에 ‘5’가 나타나더니 곧 ‘4’가 나타났고, 그 숫자는 다시 ‘3’으로 변했다.
카운트다운을 하던 숫자가 ‘0’이 된 순간, 선우는 빛으로 물들었다. 세상이 흔들리고 천장이 도는 듯한 느낌이 든다.
“흡……!”
선우는 그렇게 자신의 집에서 모습을 감췄다.
두 명의 사내가 있다. 평범하지만, 다부진 체구의 한 사내는 회색 지게를 짊어진 채 옆의 봉을 붙잡고 앉아 있고, 배가 볼록 나온 또 다른 한 사내는 그 지게 위에 벽돌을 옮기기 여념이 없었다.
두 사내가 있는 곳은 흙먼지가 뿌옇게 끼이고 많은 중장비가 오고 가는 건설 현장이었다. 10층 빌딩을 짓는 대형 건설 현장.
40대 후반의 현장 소장 오현무는 잠시 쉬면서 말했다.
“그렇게 입고도 안 추워?”
봄이 거의 왔지만 아직 많이 쌀쌀했다. 거리엔 여전히 두꺼운 오리털 잠바를 입은 이들이 눈에 뛴다.
그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지게를 멘 사내는 얇은 티셔츠 차림이었다. 춥지도 않은 모양이다.
사내는 그 물음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땀을 계속 흘려서 그런가? 추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 춥지 않다니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괜찮아?”
“또 뭐가요?”
“체력 괜찮으냐고. 너 종일 벽돌 들고 오르락내리락했잖아.”
오현무 소장의 말처럼 사내는 종일 벽돌을 등에 메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벽돌 수십 개를 등에 메고 계단을 오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노가다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도 금방 낙오되기 일쑤인 일, 그게 바로 벽돌 나르기다.
그런 일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음에도 사내는 웃었다. 정말 괜찮은 모양이다.
“괜찮아요. 아직 할 만해요.”
사내의 웃는 낯을 본 오현무 소장은 놀랍다는 얼굴을 했다.
“괜찮아? 정말로?”
“예.”
“확실히 선우 군, 쉬고 나오더니 사람이 바뀌었어.”
“예?”
“자네는 물론 성실하긴 했지만 여러모로 약한 편이었잖나. 오후 3시만 되도 뻗기 일보직전이었고. 그 창백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시키기 부담스러워 뭘 시킬 수도 없었지. 그래서 일부러 작고 덜 힘든 것만 시켰던 거고.”
“아, 그게 그렇게 표가 났어요?”
“표? 그게 안 났을 턱이 있어? 그 시간쯤 되면 영혼 빠진 얼굴로 서 있었는데? 자네가 조금이라도 불성실하게 일했으면 당장이라도 그만두라 말했을 거야. 막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
선우는 3주 전부터 인력 사무소에 다시 출근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하는 고된 생활을 다시 반복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날 이후 체력이 대단히 좋아졌다. 이전에는 집에 돌아가면 아무것도 못하고 뻗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하루 12시간을 일하고도 체력이 남았다.
선우는 이게 다 외계인이 준 보물의 영향일 거라 생각했다. 1주일 겨우 쉬었다고 체력이 이렇게 좋아질 리 만무하니까.
“그런데 아까 뭐 하고 있었어?”
“아까요?”
“점심 먹고 쉴 때 말이야.”
“아, 그때요? 책 읽었어요.”
“책? 무슨 책?”
“판타지 소설이요.”
그날 확인한 결과, 추측이 맞아 떨어졌다.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 판타지 옆 숫자가 1 올랐고, 무협 소설을 읽으면 무협 옆 숫자가 1 올랐다. 그러나 추측이 완전히 빗나간 것도 있다.
바로 만화책 읽기.
만화책은 아무리 읽어도 숫자가 오르지 않았다. 무협, 판타지 등 장르를 달리해 봐도 소용없었다. 더불어 영화와 애니메이션 또한 숫자가 오르지 않았다. 오직 소설을 완독해야만 1이 올랐고, 늘 새로운 책을 읽어야만 했다.
선우는 그날 이후 오전엔 인력 사무소에 나가 일을 하고 저녁엔 소설책을 읽었다. 체력이 월등히 좋아지고 키가 조금 큰 것을 보면 그가 준 사례는 선우에게 아주 좋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판타지 소설을 읽는다는 선우의 말에 오현무 소장은 피식 웃었다.
“판타지 소설? 마법사 나오고 뭐 그러는 거?”
“예.”
“뭐야? 공부한 게 아니었어? 난 또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알았지. 시간 날 때마다 책을 읽기에 말이야.”
“하하하.”
“아! 맞다. 할 말 있었는데 여태 까먹고 있었네. 내일… 아, 내일은 쉬는 날이구나. 내일 빼고 모레부터 여기로 곧장 출근하는 게 어때?”
“예? 여기로요?”
“이곳 일 마무리까지 앞으로 3달 정도 더 걸려. 이곳 일 끝나면 곧장 다음 일이 예정되어 있고. 못해도 10개월은 일이 끊기지 않을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10개월 동안 남 좋은 일시키지 말고 그냥 여기로 오란 말이야. 거기다 시간당 2,000원씩 더 쳐줄게. 인력 사무소에 소개비 안 내도 되니 시간당 3,000원 더 버는 거야. 어때? 꽤 황송한 제안이지?”
오현무 소장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선우로서는 거절 할 이유 없는 좋은 제안이었다. 선우는 씨익 웃었다.
“예, 눈물이 날 정도로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오현무 소장의 제안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덕분에 모레부터는 2시간 늦게 출근해도 될 것 같다. 약 10개월간은 일 없을까 봐 불 앞에서 마음 졸일 필요도 없게 되었다.
선우는 집에 돌아온 즉시 씻고 밥을 먹었다. 역시 일하고 먹는 밥이 가장 꿀맛이다.
“역시 밥은 일하고 먹어야 해.”
선우는 식후 상을 치웠다. 어느 순간, 버릇이 된 책 읽기를 했다. 선우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소설이었다. 근래 계속 읽고 있던 판타지 소설.
‘얼마 안 남았어.’
선우는 약 3주라는 기간 동안 판타지 소설만 읽었다. 먼저 판타지소설로 100권 찍고 변화를 관찰해 볼 생각이었다.
평일은 4권, 쉬는 날은 8권을 넘게 읽었다. 점심시간 같은 쉬는 시간에도 틈틈이 책을 읽었다. 그 탓에 자는 시간, 휴식 시간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예전이라면 절대 소화 못했을 스케줄이다. 그런데 버틸 만했다.
‘체력이 높아지지 않았다면 책은 10권도 못 읽었을 거야.’
이제 목표한 100권까지 남은 권수는 고작 5권이다. 내일은 쉬는 날이라 현장에는 나가지 않으니 밤새 읽으면 100권을 다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선우는 열심히 책을 읽었다. 그리고 약 8시간 후, 선우의 머릿속 책장에 100권의 책이 가득 채워졌다.
“됐다!!”
100권의 판타지 소설을 모두 읽은 선우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 정신이 피로해 조금 쉬어야 했지만 쉬는 것보다는 호기심 충족이 먼저였다.
선우는 정자세로 앉아 시야 가장자리에 있는 ‘OFF’를 빠르게 눌렀다.
꾹.
시야 한쪽의 ‘OFF’를 손으로 누르자 예의 그러했듯 손목이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홀로그램처럼 그것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판타지 – 100 100] [선택]
[무 협 – 1 100]
[게 임 – 0 100]
[퓨 전 – 0 100]
[역 사 – 0 100]
[로맨스 – 0 100]
[일 반 – 0 100]
“오……!”
판타지 읽은 권수가 100권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판타지 옆에 선택이라는 아이콘이 추가되었다. 아이콘은 노랗게 주위가 물들어 있었다. 눌러 달라 속삭이는 것 같다.
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그것을 눌렀다. 누르는 순간까지도 가슴이 두근두근 떨려온다.
‘클릭!’
선택을 누른 순간 이전의 글귀는 사라지고 새로운 페이지로 넘어갔다.
‘응?’
새 페이지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매우 간단한 물음만이 존재했다.
선우는 어떤 걸 선택할지 몰라 고민했다.
‘선택과 무작위라…….’
선택이라는 말은 뭔가를 선택하는 것 같다. 게임에서 종족이나 캐릭터를 선택하듯.
무작위는 뭔가를 그것들 중에 무작위로 골라진다는 말일 터다. 게임의 복불복상자 같은.
그러나 추측이 틀릴 수도 있다. 이름만 선택일 수도, 이름만 무작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선우는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답이 나올 수 없는 양자택일의 문제였다. 더 고민해 봐야 시간낭비다.
선우는 결국 선택했다.
“한국인은 랜덤이지!”
선우는 이상한 이유를 들어 무작위를 선택했다. 무작위 버튼을 꾹 누른 순간, 양자택일의 선택지는 사라지고 뭔가가 잔득 나타나기 시작한다.
뽕! 뿅! 뿅! 뿅!
하나씩 나타나 눈앞을 채우기 시작한 것들, 그것들은 전부 책이었다.
“책??”
나타난 책들은 모두 선우가 3주간 읽은 판타지 소설들이다. 총 100권의 책이 눈앞에 나타났다.
선우는 읽었던 책이 나타나자 반가운 한편 의아했다. 뭐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타난 판타지 소설들은 곧 5열 횡대로 줄을 맞춰 섰다. 갑자기 마구 뒤섞이기 시작했다.
휙∼ 휙∼ 휙∼
화투패가 녹색 담요 위에서 마구 섞이듯 책들이 섞였다. 책 섞는 솜씨가 타짜 저리가라다. 그러다 돌연 동작이 멈춘다. 5열 횡대로 다시 소설들이 나열되었다.
‘뭐야? 왜 지워져?’
보물은 어떤 설명도 없이 나열된 100권의 책 중 99권의 책을 지워버렸다. 단 한 권의 책만 덜렁 남겨놓았다. 남겨진 책의 이름은 ‘악마의 악마’였다.
선우는 남은 그 소설의 제목을 보고는 소설의 내용을 짧은 시간 동안 상기했다.
“저거… 어두운 내용이었지?”
‘악마의 악마’는 읽은 100권의 판타지 소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이다. 어째서 인상 깊었냐면 소설이 굉장히 잔인하기 때문이었다.
소설 ‘악마의 악마’는 초반부터 주인공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나 혼자의 이기적이고 윤택한 삶과 타인과 함께하는 고된 삶, 그 선택의 답을 통해 악마로써 적합 유무를 판별했다.
소설 ‘악마의 악마’ 주인공은 그 선택에 순간 타인과 함께 하는 삶을 택했다. 그 선택으로 인해 배를 곪고 죽기 일보직전까지 가지만 결코 후회 따윈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다수의 악마로부터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악마가 될 수 없다는 낙인이 이마에 찍혀졌다.
폐기 처분 판정을 받은 주인공은 사지 육신이 잘린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리치로 부활하지.’
허무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 주인공은 리치가 되어 다시 나타난다. 악마에 대한 지독한 복수심, 그리고 성전(聖戰)이라는 중대 사건이 겹치면서 그는 리치라는 마물로 다시 부활한 거다.
부활한 주인공은 빠르게 힘을 얻고 강해졌다. 강해지기 전에도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지만, 그는 그 모든 걸 이겨냈다.
강해진 주인공은 악마를 사냥했다.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는 악마,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악마, 세상을 망가트리는 악마. 그들을 잔인하고 악독하게 사냥하는 악마의 악마가 된다.
그러나 주인공은 끝내 악마를 멸종시키지 못했다. 악마를 멸종시키기 위해 손을 잡았던 인간들에게 차디찬 배신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의 소설이, 그것도 가장 고단하다고 생각했던 내용의 ‘2권’이 덜컥 남게 되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앞으로 뭐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랬다.
앞에 남아 있는 책이 먼치킨 소설이었다면 이 정도로 불안하진 않았을 게다. 전설의 소설 ‘투명 드래곤’을 보고 어떤 누가 불안해하겠나? 허무맹랑해하거나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다고 생각하지.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눈앞에 숫자가 나타났다. 처음에 ‘5’가 나타나더니 곧 ‘4’가 나타났고, 그 숫자는 다시 ‘3’으로 변했다.
카운트다운을 하던 숫자가 ‘0’이 된 순간, 선우는 빛으로 물들었다. 세상이 흔들리고 천장이 도는 듯한 느낌이 든다.
“흡……!”
선우는 그렇게 자신의 집에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