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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으읍…….”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느낌만으로 날짜를 계산하면 한 10일 쯤은 물을 못 먹은 것 같다.
실제로 10일 동안 물을 먹지 못하면 사람은 죽는다. 3일만 물을 먹지 못해도 탈진하고 쓰러지는 게 바로 사람이다.
느낌이 그렇다는 게다. 느낌이.
선우는 가뭄처럼 쫙 갈라진 목을 부여잡고 힘겹게 일어섰다. 억새같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고 주위를 봤다.
주위는 몹시 어두컴컴했다. 빛이 아예 없어 사물이 구별되지 않는다.
‘여긴 뭐야?’
뭐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이곳에 대해 전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 책과 이곳이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선우는 이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눈으론 이곳을 확인할 수 없으니 손으로 만져보며 이곳을 확인했다.
만져봐야 아무런 느낌도 없는 허공 대신 바닥부터 천천히 더듬었다.
‘응?’
바닥에서 이상한 것이 만져졌다. 굳이 비유하자만 사람의 피부를 만지는 것 같다가도 고기의 살점을 만지는 것 같았고, 고기의 살점을 만지는 것 같다가도 마치 내장을 만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연속해서 들었다.
선우는 물컹물컹한 그 느낌이 몹시 소름끼쳤다. 왠지 만지면 안 될 걸 수없이 만진 기분이었다.
선우는 기분 나쁜 나머지 손을 급히 회수했다.
‘냄새가 없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짝 손의 냄새를 맡아봤다. 여태 만진 것들이 혹시 상상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손에선 전혀 냄새가 나지 않았다. 여태 만진 것이 끔찍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역시 착각이었다.
‘다행이다.’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컹물컹한 그것들을 밟고 오롯이 섰다. 그러고는 손을 좌우로 연신 허우적거렸다. 조금씩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거 헤매고 있는 것 아니야?’
한참을 걸었다. 정확히 얼마나 걸었는지 시계가 없어 알 수가 없다. 체감 상 3시간쯤은 지난 것 같다. 실제로 3시간쯤 지났을 수도 있고, 턱없이 적게 지났을 수도 있다.
바닥의 느낌은 한참 전부터 바뀌었다. 50cm 정도의 턱을 오르고 조금 더 걷고 나니 물컹물컹한 느낌 대신 흙바닥 같은 느낌이 발끝에서 확연히 느껴졌다.
‘이 정도로 걸었으면 빛이 보일 때도 됐지 않나? 언제까지 이 어두컴컴한 곳에 가둬둘 거지?’
선우는 내심 포기하고 싶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목이 몹시 마르고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었지만, 쉬지 않고 걸었다.
그렇게 계속 걷고 또 걸었는데…….
“제기랄!!”
막다른 길이 나왔다.
앞과 좌우는 벽으로 막혀 있었다. 혹시나 부술 수 있을까 해서 만져봤는데 절대 얇은 벽이 아니었다.
이제 남은 길은 다시 돌아가는 길밖에 없는 것 같다. 그 꺼림칙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화도 나고 짜증도 났다. 보물은 도대체 어떤 의도로 이곳에 보낸 것일까?
선우는 순간 지쳐버렸다.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꺼지니 다리의 힘도 삽시간에 풀려버렸다.
자리에 주저앉아 신세 한탄하려던 그때, 벽이 보였다.
‘갈색?’
벽은 흑색으로 보이지 않고 갈색으로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벽의 색깔이 구분되었다.
벽의 색이 구별된다는 말은 어디선가 빛이 들어오고 있다는 말이다. 빛이 없이 색이 구분될 리 없으니까.
선우는 머리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것도 모자라 천장도 보고, 바닥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결국 찾아냈다.
선우는 앉아 있던 곳 후방 상단에서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빛이다!!”
선우는 자리에 일어서 빛을 향해 다가갔다.
“헉. 헉. 헉.”
빛을 쫓다보니 경사진 구간이 나왔다. 50도 경사까진 오를 만했지만, 70도 이상의 급격사가 되자 오르는 게 정말 쉽지 않다. 하지만 선우는 끝까지 올랐다. 1분도 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선우는 동굴 밖으로 손을 먼저 내밀고 얼굴을 내밀었다.
“눈……?”
시리도록 흰 눈이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 추위가 사무치게 느껴지는 그런 눈이다.
선우는 그 눈을 보고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굴을 벗어났다. 힘겹게 눈을 밟고 섰다.
‘괜찮은데?’
눈은 생각보다 차지 않았다. 밖의 날씨도 우려했던 것만큼 춥지 않았다. 그냥 서늘하다고 느낄 정도다. 서늘하다 느끼는 것도 앞에 쌓인 눈 때문이지, 기온 때문은 아니었다.
선우는 동굴에서 나온 직후 탈출의 기쁨을 만끽했다.
“탈출이다!”
그러다 어떤 생각이 났는지 쪼그려 앉았다.
“물! 물!!”
눈이 녹으면 물이 된다. 물은 갈증을 해결해줄 고마운 존재다.
선우는 타는 듯한 갈증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하얗고 깨끗한 눈을 모았다.
‘어?’
그러다 문득 이상한 것이 만져졌다. 눈과는 다른 느낌이 손끝에서 들었다.
눈 안쪽에 뭔가 단단하고 매끈한 게 있었다. 촉감이 그리 말하고 있다.
선우는 눈을 옆으로 밀었다. 갈색 흙바닥이 보일 때까지 파 들어갔다.
“이건… 검?”
그것의 정체는 검이었다. 은회색의 광택이 아직도 남아 있는 1m 길이의 검.
선우는 그 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눈앞까지 들어올렸다.
“레이피어네.”
검은 중세 서양에서 많이 쓰던 레이피어였다. 찌르기에 특화된 중세 기사들의 검이었다.
선우는 이 검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눈 쌓인 곳 아래서 발견한 것이 중세 시대의 검, 레이피어라니. 이 무슨 판타지스러움인가.
선우는 짧게 고민하곤 할 일을 마저 했다.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눈을 입에 넣었다.
하지만…….
‘갈증이 해소되질 않아.’
눈을 먹고 또 먹었음에도 도무지 갈증이 해소되질 않았다. 눈이 녹으면 물인데 왜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마치 치유될 수 없는 병을 앓는 기분이었다. 평생 갈증에 시달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다 선우는 필연처럼 레이피어의 겉면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뭐… 뭐야?”
선우는 당황한 얼굴로 레이피어를 다시 봤다. 레이피어의 겉면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선우는 순간 말을 잃었다. 풍이라도 걸린 사람마냥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
선우는 결코 잘생긴 편이 아니었다. TV에 나올 정도로 잘생겼다면 연예인을 했지, 막일을 하고 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딱 한 부분만은 연예인 못지않게 잘생긴 곳이 있었는데, 누군가 선우의 외모에 칭찬을 할 때면 늘 칭찬 받는 곳 중 하나였다.
그곳은 바로 백만 불짜리 코.
그런데 그 코가… 없다. 그 잘생기고 오뚝한 코는 사라져 없고 대신 짙은 어둠이 위치하고 있다.
자세히 보니 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피부색도 회색이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코처럼 짙은 어둠이 서려 있었고, 입술도 짙은 검은색이었다. 마치 판타지 소설 속의 리치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리치?
‘잠깐만!!’
선우는 자신의 바뀐 얼굴을 보고 당황하다가 어떤 생각이 들었다.
‘설마?’
소설 ‘악마의 악마’ 주인공은 죽었다가 리치로 부활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리치로 부활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빠져 나온다.
주인공은 설원을 보고 집에 돌아갈 방법을 고민했다. 그때까지도 본인이 사람인 줄 알았던 탓이다. 그러다 성전을 치르기 위해 이곳 설원에 온 성기사들을 보게 되었다.
주인공은 그들을 구원자로 생각했다. 평판이 좋은 태양신교의 성기사들이기에 집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게 도와줄 것이라 생각했다.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은 주인공은 리치 주제에 그들에게 달려갔다. 목청껏 살려달라고 외쳤다.
당연한 말이지만, 성기사들은 주인공을 구원해 주지 않았다. 도리어 죽이기 위해 공격했다. 그들은 빛과 선, 태양신을 받드는 성기사들이지 어둠과 악, 암흑신을 섬기는 성기사들이 아닌 탓이다.
선우는 지금 상황이 ‘악마의 악마’라는 소설과 닮았음을 느꼈다. 동굴, 갈증, 리치의 얼굴. 딱 ‘악마의 악마’라는 소설 속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직 확신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결정적인 게 필요했다.
선우는 머리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소설 속 주인공과 영원한 악연이 될 이들이 주위에 있나 확인했다.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다수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모여 있는 사람은 태양이 수놓아진, 하나의 통일된 복장을 입고 있었다. 선우는 소설을 읽었기에 저들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태양신교.
선우는 저들을 보고 이곳이 소설 ‘악마의 악마’ 속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시야 가장자리 끝에 글자가 나타난다.
‘OFF’라는 단어처럼 시야 끝에 늘 따라다녔다. ‘07’이라는 글자와 ‘010’이라는 글자였다.
선우는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하는 대신 도망쳤다. 그는 사람이 아닌 리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
갈색머리에 잘생긴 얼굴을 가진 존 하엘은 이번 성전에 참여한 1천 명의 태양신교의 성기사 중 한 명이다.
그는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짧다는 이유로 무력이 월등히 강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떠밀려 15뒤처리 팀의 팀장이 되었다.
존 하엘은 자신처럼 떠밀려 팀원이 된 이들을 이끌고 설원을 거닐고 있었다.
주력 병력이 한바탕 크게 휩쓸고 간 설원을 거니는 것, 따분하고 지루하기만 할 뿐이다.
존 하엘은 이쯤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주력과의 거리도 하루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아리엘 신관님.”
아리엘은 에메랄드빛 머릿결을 휘날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녀는 이 팀에 합류한 신관들 중 가장 선임이었다.
“예, 존 하엘 성기사님.”
“이쯤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휴식이라, 나쁘지 않은 선택이네요. 더 이상 본대에 접근하면 뒤처리 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음, 그렇게 하도록 하죠.”
아리엘 신관의 동의가 있자 존 하엘과 15뒤처리 팀은 노숙 준비를 했다. 눈 위에 캠프를 차릴 수 없는 노릇이기에 캠프를 차릴 만한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 한 성기사가 뭔가를 발견했다. 그는 곧바로 팀장인 존 하엘을 힘껏 불렀다.
“팀장님! 여깁니다, 여기!!”
그 성기사는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존 하엘은 그 성기사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왜, 무슨 일이야?”
그는 한곳을 가리켰다.
“여길 보십시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동굴이 있었다. 비스듬히 아래로 쭉 뻗어 있는 동굴이었다.
존 하엘은 동굴을 본 순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사기가 장난이 아니군. 원망, 두려움, 공포 등 마이너스적 감정들이 동굴에 가득해.”
동굴 입구에선 막대한 양의 사기와 음기가 흘러나왔다. 동굴 안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아무무는 존 하엘과 동굴을 번갈아보다 당연한 물음을 그에게 했다.
“정화해야겠죠?”
“당연히 정화해야지. 이대로 두면 이곳에서 어떤 마물이 깨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 아, 잠깐만!”
“왜 그러십니까?”
존 하엘은 그러다 뭔가를 발견했다. 발견한 뭔가를 조금 더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그는 쪼그려 앉았다. 그는 동굴 입구 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손가락을 가져간다.
“이건……?”
그가 발견한 것은 흔적이었다. 동굴 입구로부터 찍혀 있는 누군가의 흔적. 존 하엘은 다시 일어섰다.
“그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군. 아무무 성기사!”
“예, 팀장님.”
“나와 나머지 팀원들은 이곳에서 막 벗어난 마물을 쫓도록 하겠네. 자네는 남아서 통신 구슬로 지원을 요청하게. 이곳을 정화하기 위해선 최소 3개 뒤처리 팀 전력이 필요하다고 전해.”
“예.”
“으읍…….”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느낌만으로 날짜를 계산하면 한 10일 쯤은 물을 못 먹은 것 같다.
실제로 10일 동안 물을 먹지 못하면 사람은 죽는다. 3일만 물을 먹지 못해도 탈진하고 쓰러지는 게 바로 사람이다.
느낌이 그렇다는 게다. 느낌이.
선우는 가뭄처럼 쫙 갈라진 목을 부여잡고 힘겹게 일어섰다. 억새같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고 주위를 봤다.
주위는 몹시 어두컴컴했다. 빛이 아예 없어 사물이 구별되지 않는다.
‘여긴 뭐야?’
뭐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이곳에 대해 전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 책과 이곳이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선우는 이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눈으론 이곳을 확인할 수 없으니 손으로 만져보며 이곳을 확인했다.
만져봐야 아무런 느낌도 없는 허공 대신 바닥부터 천천히 더듬었다.
‘응?’
바닥에서 이상한 것이 만져졌다. 굳이 비유하자만 사람의 피부를 만지는 것 같다가도 고기의 살점을 만지는 것 같았고, 고기의 살점을 만지는 것 같다가도 마치 내장을 만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연속해서 들었다.
선우는 물컹물컹한 그 느낌이 몹시 소름끼쳤다. 왠지 만지면 안 될 걸 수없이 만진 기분이었다.
선우는 기분 나쁜 나머지 손을 급히 회수했다.
‘냄새가 없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짝 손의 냄새를 맡아봤다. 여태 만진 것들이 혹시 상상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손에선 전혀 냄새가 나지 않았다. 여태 만진 것이 끔찍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역시 착각이었다.
‘다행이다.’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컹물컹한 그것들을 밟고 오롯이 섰다. 그러고는 손을 좌우로 연신 허우적거렸다. 조금씩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거 헤매고 있는 것 아니야?’
한참을 걸었다. 정확히 얼마나 걸었는지 시계가 없어 알 수가 없다. 체감 상 3시간쯤은 지난 것 같다. 실제로 3시간쯤 지났을 수도 있고, 턱없이 적게 지났을 수도 있다.
바닥의 느낌은 한참 전부터 바뀌었다. 50cm 정도의 턱을 오르고 조금 더 걷고 나니 물컹물컹한 느낌 대신 흙바닥 같은 느낌이 발끝에서 확연히 느껴졌다.
‘이 정도로 걸었으면 빛이 보일 때도 됐지 않나? 언제까지 이 어두컴컴한 곳에 가둬둘 거지?’
선우는 내심 포기하고 싶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목이 몹시 마르고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었지만, 쉬지 않고 걸었다.
그렇게 계속 걷고 또 걸었는데…….
“제기랄!!”
막다른 길이 나왔다.
앞과 좌우는 벽으로 막혀 있었다. 혹시나 부술 수 있을까 해서 만져봤는데 절대 얇은 벽이 아니었다.
이제 남은 길은 다시 돌아가는 길밖에 없는 것 같다. 그 꺼림칙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화도 나고 짜증도 났다. 보물은 도대체 어떤 의도로 이곳에 보낸 것일까?
선우는 순간 지쳐버렸다.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꺼지니 다리의 힘도 삽시간에 풀려버렸다.
자리에 주저앉아 신세 한탄하려던 그때, 벽이 보였다.
‘갈색?’
벽은 흑색으로 보이지 않고 갈색으로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벽의 색깔이 구분되었다.
벽의 색이 구별된다는 말은 어디선가 빛이 들어오고 있다는 말이다. 빛이 없이 색이 구분될 리 없으니까.
선우는 머리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것도 모자라 천장도 보고, 바닥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결국 찾아냈다.
선우는 앉아 있던 곳 후방 상단에서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빛이다!!”
선우는 자리에 일어서 빛을 향해 다가갔다.
“헉. 헉. 헉.”
빛을 쫓다보니 경사진 구간이 나왔다. 50도 경사까진 오를 만했지만, 70도 이상의 급격사가 되자 오르는 게 정말 쉽지 않다. 하지만 선우는 끝까지 올랐다. 1분도 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선우는 동굴 밖으로 손을 먼저 내밀고 얼굴을 내밀었다.
“눈……?”
시리도록 흰 눈이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 추위가 사무치게 느껴지는 그런 눈이다.
선우는 그 눈을 보고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굴을 벗어났다. 힘겹게 눈을 밟고 섰다.
‘괜찮은데?’
눈은 생각보다 차지 않았다. 밖의 날씨도 우려했던 것만큼 춥지 않았다. 그냥 서늘하다고 느낄 정도다. 서늘하다 느끼는 것도 앞에 쌓인 눈 때문이지, 기온 때문은 아니었다.
선우는 동굴에서 나온 직후 탈출의 기쁨을 만끽했다.
“탈출이다!”
그러다 어떤 생각이 났는지 쪼그려 앉았다.
“물! 물!!”
눈이 녹으면 물이 된다. 물은 갈증을 해결해줄 고마운 존재다.
선우는 타는 듯한 갈증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하얗고 깨끗한 눈을 모았다.
‘어?’
그러다 문득 이상한 것이 만져졌다. 눈과는 다른 느낌이 손끝에서 들었다.
눈 안쪽에 뭔가 단단하고 매끈한 게 있었다. 촉감이 그리 말하고 있다.
선우는 눈을 옆으로 밀었다. 갈색 흙바닥이 보일 때까지 파 들어갔다.
“이건… 검?”
그것의 정체는 검이었다. 은회색의 광택이 아직도 남아 있는 1m 길이의 검.
선우는 그 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눈앞까지 들어올렸다.
“레이피어네.”
검은 중세 서양에서 많이 쓰던 레이피어였다. 찌르기에 특화된 중세 기사들의 검이었다.
선우는 이 검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눈 쌓인 곳 아래서 발견한 것이 중세 시대의 검, 레이피어라니. 이 무슨 판타지스러움인가.
선우는 짧게 고민하곤 할 일을 마저 했다.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눈을 입에 넣었다.
하지만…….
‘갈증이 해소되질 않아.’
눈을 먹고 또 먹었음에도 도무지 갈증이 해소되질 않았다. 눈이 녹으면 물인데 왜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마치 치유될 수 없는 병을 앓는 기분이었다. 평생 갈증에 시달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다 선우는 필연처럼 레이피어의 겉면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뭐… 뭐야?”
선우는 당황한 얼굴로 레이피어를 다시 봤다. 레이피어의 겉면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선우는 순간 말을 잃었다. 풍이라도 걸린 사람마냥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
선우는 결코 잘생긴 편이 아니었다. TV에 나올 정도로 잘생겼다면 연예인을 했지, 막일을 하고 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딱 한 부분만은 연예인 못지않게 잘생긴 곳이 있었는데, 누군가 선우의 외모에 칭찬을 할 때면 늘 칭찬 받는 곳 중 하나였다.
그곳은 바로 백만 불짜리 코.
그런데 그 코가… 없다. 그 잘생기고 오뚝한 코는 사라져 없고 대신 짙은 어둠이 위치하고 있다.
자세히 보니 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피부색도 회색이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코처럼 짙은 어둠이 서려 있었고, 입술도 짙은 검은색이었다. 마치 판타지 소설 속의 리치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리치?
‘잠깐만!!’
선우는 자신의 바뀐 얼굴을 보고 당황하다가 어떤 생각이 들었다.
‘설마?’
소설 ‘악마의 악마’ 주인공은 죽었다가 리치로 부활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리치로 부활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빠져 나온다.
주인공은 설원을 보고 집에 돌아갈 방법을 고민했다. 그때까지도 본인이 사람인 줄 알았던 탓이다. 그러다 성전을 치르기 위해 이곳 설원에 온 성기사들을 보게 되었다.
주인공은 그들을 구원자로 생각했다. 평판이 좋은 태양신교의 성기사들이기에 집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게 도와줄 것이라 생각했다.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은 주인공은 리치 주제에 그들에게 달려갔다. 목청껏 살려달라고 외쳤다.
당연한 말이지만, 성기사들은 주인공을 구원해 주지 않았다. 도리어 죽이기 위해 공격했다. 그들은 빛과 선, 태양신을 받드는 성기사들이지 어둠과 악, 암흑신을 섬기는 성기사들이 아닌 탓이다.
선우는 지금 상황이 ‘악마의 악마’라는 소설과 닮았음을 느꼈다. 동굴, 갈증, 리치의 얼굴. 딱 ‘악마의 악마’라는 소설 속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직 확신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결정적인 게 필요했다.
선우는 머리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소설 속 주인공과 영원한 악연이 될 이들이 주위에 있나 확인했다.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다수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모여 있는 사람은 태양이 수놓아진, 하나의 통일된 복장을 입고 있었다. 선우는 소설을 읽었기에 저들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태양신교.
선우는 저들을 보고 이곳이 소설 ‘악마의 악마’ 속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시야 가장자리 끝에 글자가 나타난다.
‘OFF’라는 단어처럼 시야 끝에 늘 따라다녔다. ‘07’이라는 글자와 ‘010’이라는 글자였다.
선우는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하는 대신 도망쳤다. 그는 사람이 아닌 리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갈색머리에 잘생긴 얼굴을 가진 존 하엘은 이번 성전에 참여한 1천 명의 태양신교의 성기사 중 한 명이다.
그는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짧다는 이유로 무력이 월등히 강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떠밀려 15뒤처리 팀의 팀장이 되었다.
존 하엘은 자신처럼 떠밀려 팀원이 된 이들을 이끌고 설원을 거닐고 있었다.
주력 병력이 한바탕 크게 휩쓸고 간 설원을 거니는 것, 따분하고 지루하기만 할 뿐이다.
존 하엘은 이쯤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주력과의 거리도 하루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아리엘 신관님.”
아리엘은 에메랄드빛 머릿결을 휘날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녀는 이 팀에 합류한 신관들 중 가장 선임이었다.
“예, 존 하엘 성기사님.”
“이쯤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휴식이라, 나쁘지 않은 선택이네요. 더 이상 본대에 접근하면 뒤처리 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음, 그렇게 하도록 하죠.”
아리엘 신관의 동의가 있자 존 하엘과 15뒤처리 팀은 노숙 준비를 했다. 눈 위에 캠프를 차릴 수 없는 노릇이기에 캠프를 차릴 만한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 한 성기사가 뭔가를 발견했다. 그는 곧바로 팀장인 존 하엘을 힘껏 불렀다.
“팀장님! 여깁니다, 여기!!”
그 성기사는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존 하엘은 그 성기사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왜, 무슨 일이야?”
그는 한곳을 가리켰다.
“여길 보십시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동굴이 있었다. 비스듬히 아래로 쭉 뻗어 있는 동굴이었다.
존 하엘은 동굴을 본 순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사기가 장난이 아니군. 원망, 두려움, 공포 등 마이너스적 감정들이 동굴에 가득해.”
동굴 입구에선 막대한 양의 사기와 음기가 흘러나왔다. 동굴 안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아무무는 존 하엘과 동굴을 번갈아보다 당연한 물음을 그에게 했다.
“정화해야겠죠?”
“당연히 정화해야지. 이대로 두면 이곳에서 어떤 마물이 깨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 아, 잠깐만!”
“왜 그러십니까?”
존 하엘은 그러다 뭔가를 발견했다. 발견한 뭔가를 조금 더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그는 쪼그려 앉았다. 그는 동굴 입구 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손가락을 가져간다.
“이건……?”
그가 발견한 것은 흔적이었다. 동굴 입구로부터 찍혀 있는 누군가의 흔적. 존 하엘은 다시 일어섰다.
“그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군. 아무무 성기사!”
“예, 팀장님.”
“나와 나머지 팀원들은 이곳에서 막 벗어난 마물을 쫓도록 하겠네. 자네는 남아서 통신 구슬로 지원을 요청하게. 이곳을 정화하기 위해선 최소 3개 뒤처리 팀 전력이 필요하다고 전해.”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