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9화
선우는 한 시간 가까이 뛰고 걷길 반복했다. 리치가 된 걸 자각한 순간부터 눈 위를 계속 걸어도 춥거나 떨리지 않았다.
선우는 두 시간쯤 더 뛰고 걷다 뒤를 돌아봤다. 혹시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없지?”
육안으로 확인했을 때 따라오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간혹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지만 노루, 토끼 같은 설원에 사는 야생동물일 뿐 사람이 아니었다.
선우는 그제야 여유를 찾았다. 밀어두었던 생각들을 하나둘 꺼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선우는 이곳에 와서 리치가 되기 전, 100권의 판타지 소설을 읽었다. 판타지소설을 읽을 때마다 숫자가 1씩 오르는 것을 보고 맹목적으로 읽기 시작했고, 그게 총 100권이었다.
보물은 그 100권의 판타지 소설 중 한 가지를 무작위로 선택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그 선택한 소설의 주인공으로 선우를 만들었다.
선우는 보물이 왜 자신을 소설 속 주인공으로 만들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상황이 정말 환상족의 보물로부터 나온 것인지도 의심도 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순 있는 걸까?
선우는 수없이 고민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직도 얼떨떨했고, 리치로서의 삶은 그저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게다가 시야 한쪽에 나타난 07과 010의 의미는 도무지 모르겠다. 첫 번째 암호문보다도 더 단서가 없었다.
그러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살 경우를 생각해 봤다. 어쩌면 영원히 답을 찾지 못하고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에게 복수할 자신은 없는데…….’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살고자 하면 맹목적으로 악마를 증오해야 한다. 악마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인간성쯤은 웃으며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소설 주인공의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것이었다.
복수의 길.
그 복수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어쩜 탄탄대로의 삶이 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읽은 탓에 주인공의 적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고, 또 다가올 난관이 어떤 것인지도 미리 알고 있는 상태니까.
더욱이 기연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다. 보다 일찍 기연을 얻고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선우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인공처럼 살 자신이 없었다.
‘그 인간들에게 복수하는 일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선우는 다른 걸 다 떠나서 악마에게 복수하고픈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인생을 힘들게 한 이들은 악마 같은 인간들이지 악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을 힘들게 만든 3인에게 복수하는 일이라면 인간성의 상실쯤은 웃으며 할 자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피해 또한 그 3인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 수만 있다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넘길 자신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아닌 악마에게 복수하고픈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인간성을 상실해가며 애꿎은 악마들을 뭐 하러 탄압하는가?
선우는 악마에게 복수하는 삶 대신 다른 삶에 대해 생각했다. 소설 줄거리와 전혀 동떨어진 삶.
‘줄거리처럼 살지 않으려면 리치라서 혼자 살아야 하는데…….’
사실 혼자서 못 살 것도 없다. 고아로 10년 가까이를 살면서 인생 혼자 사는 거라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게다가 리치가 된 탓에 애써 먹을 것을 구할 필요도 없었다. 추위도 느끼지 않고 더위도 느끼지 않으니 집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선우는 소설 속 주인공의 삶 대신 다른 삶이 살고 싶어졌다. 이왕이면 주인공의 기연은 빠짐없이 얻어 윤택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 방도를 생각할 때쯤,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한 남자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저기 있다!!”
선우는 그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
약 열 명 정도의 무리가 맹렬히 뛰어오고 있었다. 선우가 있는 곳으로, 선우를 목표로 하여.
그들은 태양신교의 옷을 입고 있다. 날카로운 검을 들고 탄탄한 갑옷도 입고 있다.
선우는 그들을 발견한 순간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들에게 잡히면 끔찍한 고통을 느끼다 죽음을 맞이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선우는 정말 필사적으로 달렸다. 리치라는 종족 특성을 이용해 말 그대로 한숨도 쉬지 않았다. 그러나 곧 잡힐 것 같다. 놈들과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뭐가 저리 빨라…….’
무거운 갑주를 입은 이들은 굉장히 빨랐다. 100m 세계 기록 보유자가 100M 트랙에서 최고의 스피드로 달리는 것보다도 훨씬 더 빨라보였다.
덕분에 1㎞ 이상 벌어져 있던 거리가 어느새 500m 내외로 줄어버렸다. 그 500m도 곧 400m가 되고 300m가 될 듯했다.
선우는 곧 잡힐 것 같았다. 어떻게든 저들을 따돌릴 방법이 필요했다. 그런 선우의 눈에 한 봉우리가 들어온다.
‘저긴!’
소설 ‘악마의 악마’ 주인공은 도피 도중 한 봉우리를 발견한다. 다른 봉우리에 비해 유독 높게 솟아 있는 그 봉우리는 꼭대기가 검게 물들고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게 특징이었다.
주인공은 그 봉우리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이들을 모두 따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마법사의 유산을 얻고 본격적인 악마 사냥을 시작한다.
선우는 대마법사의 유산도 유산이지만 저들을 따돌릴 수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지금은 저들을 따돌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방향을 바꿔 그곳으로 뛰어갔다.
오르막이라 그런 건지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좁혀진 거리가 더욱 빠르게 좁혀졌다.
300m… 200m… 100m…….
엎어지면 코 닿을 듯 50m의 지근거리가 된 순간 은색 갑옷을 입은 남자가 검은 휘두른다.
“태양의 검!”
남자가 뭐라 소리치자 남자의 검에서 금빛 구처럼 생긴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금빛 광채는 총알에 버금가는 속도로 선우를 향해 날아갔다. 그것은 정확히 선우의 등을 노리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당한다.
선우는 뒤를 힐끔 보다가 그것을 발견했다. 책을 읽은 탓에 금빛 광채가 어떤 기술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저 기술은 리치 같은 암흑 마물에겐 극약이나 다름없다. 빛은 원래 어둠에 상극이다.
선우는 급히 몸을 틀었다. 그러고는 여태 들고 있던 레이피어를 힘껏 휘둘렀다.
깡!
금빛 광채는 아슬아슬하게 선우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레이피어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날아간다. 손아귀도 찢어졌다. 옆구리에 깊지 않은 상처가 났다.
선우는 순간 고통을 느꼈다. 리치라 고통을 느끼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읍…….”
선우는 아프지만, 참아냈다. 이 정도는 아직 참을 만했다. 게다가 아프다고 주저앉으면 여기서 끝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는 노릇이다.
선우는 그걸 맞고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남자는 다시 소리쳤다.
“태양의 심판!”
남자가 다른 신성 기술을 쓰자 남자의 검에서 다섯 줄기의 금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금색 빛은 따로 원을 그리더니 맹렬히 선우에게 날아갔다.
꽈과광!
폭발음과 함께 눈이 비상했다. 사방으로 비상한 눈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그 속에 선우가 있었다. 배가 뻥 뚫린 채로 무릎 꿇고 있는 선우.
‘읍…….’
선우는 엄청난 고통에 그만 의식을 잃었다. 어느새 밟고 있는 검은색 흙 위에 철푸덕 쓰러진 채, 신성력의 불꽃에 몸을 맡겼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피융∼
선우를 불태우던 신성력의 불꽃은 어떤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꺼져버렸다. 선우의 몸에 깊게 난 상처도 어떤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회복되고 아물어 갔다. 선우를 쫓던 이들은 뭔가에 막힌 듯 걸음을 멈췄다.
“뭐야, 이건!”
선우의 주위가 확연히 바뀌기 시작했다. 마치 다른 곳처럼 변한다.
***
존 하엘을 위시한 15뒤처리 팀은 곧장 동굴에서 나온 마물을 쫓았다. 이들 중 가장 강하고 추적에 일가견이 있는 존 하엘이 무리의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무력 순으로 따라왔다.
존 하엘은 마물의 보폭을 통해 마물의 외형을 짐작했다.
“2족 보행, 키는 175cm 정도.”
마물은 2족 보행을 하는 놈이다. 보폭을 보니 175∼180cm 정도의 키를 가지고 있다.
존 하엘은 나란히 걷고 있던 아리엘 신관을 봤다.
“마물이 서쪽으로 가고 있는데, 서쪽에 뭐가 있습니까?”
마물은 서쪽으로 무작정 가고 있었다. 방향을 틀 생각을 하지 않고 올곧게 가고 있었다. 본능적인 행동인지 이성적인 행동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리엘 신관은 존 하엘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했다.
“서쪽엔… 악마의 숲이 있어요.”
이곳 설원 서쪽에는 악마의 숲이 있었다. 악마의 숲은 마물들의 고향이자 마물들의 낙원 같은 곳이다.
마물이 악마의 숲에 들어서게 되면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하다. 마물의 숲에는 신에게 직접 봉인당한 악마들이 다수 살고 있다. 그들은 불사의 존재다. 악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때.
우르릉.
날씨가 급변했다.
“어?”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찌푸려졌다.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천둥을 동반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휘휙―
바람도 몹시 거세졌다. 눈보라와 함께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존 하엘은 날씨가 갑자기 급변하자 초조한 얼굴로 신관들을 봤다.
‘이러다 놓치겠는데…….’
체력이 약한 신관들 때문에 이동이 느렸다. 그에 반해 놈의 흔적은 쏟아지는 눈과 눈보라 때문에 급속도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놓칠 것 같았다. 마물의 숲에 들어간 마물… 직감이지만 후에 큰 화근이 될 게 분명하다.
존 하엘은 안 되겠다 싶어 아리엘 신관을 보고 말했다.
“아리엘 신관님.”
아리엘 신관은 존 하엘이 할 말을 예상했는지 곧바로 답했다.
“먼저 가세요. 따라갈게요.”
아리엘 신관이 허락하자 존 하엘은 먼저 갈 특공대를 따로 꾸렸다. 신관들만 이 거친 설원을 거닐게 할 순 없기에 팀 내 성기사들을 둘로 나눴다.
존 하엘을 위시한 특공대는 모두 일곱 명이었다. 일곱 명 모두를 발 빠른 성기사들로 구성했다.
“가자.”
성기사들은 빠르게 달렸다. 신성력을 다리에 주입한 채로 1시간을 그렇게 달렸다. 저 멀리 1㎞ 밖에 놈이 보였다.
‘리치?’
놈은 어둠의 기운을 물씬 풍기는 리치였다. 마법을 쓰지 않고 걸어가는 걸 보니 아직 이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존 하엘은 곧바로 소리쳤다.
“저기 있다!!”
존 하엘이 소리치자 1㎞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는지 놈은 뒤를 돌아봤다. 성기사들을 발견한 놈은 갑자기 필사적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보통의 리치와는 행동양식이 많이 달랐다.
“어?”
마법을 쓰지 않는 리치는 자아가 없는 리치다. 자아가 없는 리치는 이성이 아닌 본능으로 행동한다. 그런데 놈은 자아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지금까지의 리치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존 하엘은 괜히 소리쳤다고 생각했다. 괜히 놈에게 경각심만 심어준 것 같았다. 동시에 꼭 죽여야겠다고 다짐했다. 변종은 변종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법이다.
존 하엘은 더 열심히 놈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500m까지 근접한 순간, 놈이 돌연 방향을 바꿨다.
‘응?’
놈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봉우리 쪽으로 달렸다. 놈이 향하는 봉우리는 눈으로 덮여 흰색인 다른 봉우리와는 달리 흑색이었다. 거기다 마기와 함께 사기가 잔득 흘러나왔다. 일반적인 봉우리가 아니었다.
존 하엘은 마물이 저 봉우리에 오르기 전에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필사적으로 달려 50m 이내로 접근한 존 하엘은 곧바로 신성 기술을 사용했다.
“태양의 검!”
검으로 신성력을 뿜어냈다. 신성력은 예리한 검이 되어 놈에게 빠르게 날아간다. 그러나 놈은 그것을 피했다.
존 하엘은 실망하는 대신 재차 신성 기술을 사용했다. 이번엔 전신의 힘을 모두 끌어 모았다.
“태양의 심판!!!”
존 하엘의 검에서 강맹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막대한 신성력으로 다섯 개의 원을 만든 다음 놈 주위를 초토화시켰다.
꽈광광!
존 하엘은 놈이 자신의 공격에 정통으로 맞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공격에 적중당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존 하엘은 속도를 줄이고 놈에게 다가갔다. 최후의 일격은 느긋하게 날릴 생각이었다.
그때.
쿵!
뭔가가 그를 가로막았다.
“뭐, 뭐야?”
존 하엘의 발걸음을 막은 것은 투명한 유리벽이다. 처음에는 안이 보일 정도로 투병했는데, 점점 검게 변한다.
존 하엘은 벽을 손으로 만지다가 눈짓했다.
끄덕.
눈짓을 알아들은 다른 성기사들이 벽에 접근했다. 그들의 발걸음도 벽이 막아서는지 확인했다.
쿵.
“막혔습니다!”
어느새 전체가 시커멓게 변한 벽은 그들 모두의 출입을 막았다. 그 마물을 제외한 그 누구의 발걸음도 허용하지 않았다.
존 하엘은 검을 써 벽을 부수고자 했다. 마기와 상극인 신성력을 끌려 올렸다.
“태양의 심판!”
존 하엘은 다시 신성 기술을 사용했다. 전력으로 벽을 내리쳤다.
꽝! 꽈광!
‘실패인가?’
그러나 벽은 부서지지 않았다. 금 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존 하엘은 또 눈짓했다. 그의 눈짓에 따라 따라온 성기사 전원이 신성 기술을 사용한다.
“태양의 심판!”
“태양의 검!”
꽈과광! 꽝! 꽈광!
하지만 그들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의 공격을 받고도 벽은 멀쩡했다.
존 하엘과 성기사들은 한동안 대기했다. 15뒤처리 팀의 신관들이 오길 기다렸다.
얼마 후 아리엘 신관과 나머지 인원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아리엘 신관님!”
“잠깐만요.”
아리엘 신관은 홀린 듯 벽에 다가갔다. 검은색 벽을 보고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아리엘은 저 벽의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이건… 리치 킹의 결계?”
그것은… 전설의 리치 킹, 그가 만든 결계였다.
선우는 한 시간 가까이 뛰고 걷길 반복했다. 리치가 된 걸 자각한 순간부터 눈 위를 계속 걸어도 춥거나 떨리지 않았다.
선우는 두 시간쯤 더 뛰고 걷다 뒤를 돌아봤다. 혹시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없지?”
육안으로 확인했을 때 따라오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간혹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지만 노루, 토끼 같은 설원에 사는 야생동물일 뿐 사람이 아니었다.
선우는 그제야 여유를 찾았다. 밀어두었던 생각들을 하나둘 꺼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선우는 이곳에 와서 리치가 되기 전, 100권의 판타지 소설을 읽었다. 판타지소설을 읽을 때마다 숫자가 1씩 오르는 것을 보고 맹목적으로 읽기 시작했고, 그게 총 100권이었다.
보물은 그 100권의 판타지 소설 중 한 가지를 무작위로 선택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그 선택한 소설의 주인공으로 선우를 만들었다.
선우는 보물이 왜 자신을 소설 속 주인공으로 만들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상황이 정말 환상족의 보물로부터 나온 것인지도 의심도 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순 있는 걸까?
선우는 수없이 고민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직도 얼떨떨했고, 리치로서의 삶은 그저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게다가 시야 한쪽에 나타난 07과 010의 의미는 도무지 모르겠다. 첫 번째 암호문보다도 더 단서가 없었다.
그러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살 경우를 생각해 봤다. 어쩌면 영원히 답을 찾지 못하고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에게 복수할 자신은 없는데…….’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살고자 하면 맹목적으로 악마를 증오해야 한다. 악마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인간성쯤은 웃으며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소설 주인공의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것이었다.
복수의 길.
그 복수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어쩜 탄탄대로의 삶이 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읽은 탓에 주인공의 적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고, 또 다가올 난관이 어떤 것인지도 미리 알고 있는 상태니까.
더욱이 기연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다. 보다 일찍 기연을 얻고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선우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인공처럼 살 자신이 없었다.
‘그 인간들에게 복수하는 일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선우는 다른 걸 다 떠나서 악마에게 복수하고픈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인생을 힘들게 한 이들은 악마 같은 인간들이지 악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을 힘들게 만든 3인에게 복수하는 일이라면 인간성의 상실쯤은 웃으며 할 자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피해 또한 그 3인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 수만 있다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넘길 자신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아닌 악마에게 복수하고픈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인간성을 상실해가며 애꿎은 악마들을 뭐 하러 탄압하는가?
선우는 악마에게 복수하는 삶 대신 다른 삶에 대해 생각했다. 소설 줄거리와 전혀 동떨어진 삶.
‘줄거리처럼 살지 않으려면 리치라서 혼자 살아야 하는데…….’
사실 혼자서 못 살 것도 없다. 고아로 10년 가까이를 살면서 인생 혼자 사는 거라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게다가 리치가 된 탓에 애써 먹을 것을 구할 필요도 없었다. 추위도 느끼지 않고 더위도 느끼지 않으니 집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선우는 소설 속 주인공의 삶 대신 다른 삶이 살고 싶어졌다. 이왕이면 주인공의 기연은 빠짐없이 얻어 윤택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 방도를 생각할 때쯤,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한 남자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저기 있다!!”
선우는 그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
약 열 명 정도의 무리가 맹렬히 뛰어오고 있었다. 선우가 있는 곳으로, 선우를 목표로 하여.
그들은 태양신교의 옷을 입고 있다. 날카로운 검을 들고 탄탄한 갑옷도 입고 있다.
선우는 그들을 발견한 순간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들에게 잡히면 끔찍한 고통을 느끼다 죽음을 맞이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선우는 정말 필사적으로 달렸다. 리치라는 종족 특성을 이용해 말 그대로 한숨도 쉬지 않았다. 그러나 곧 잡힐 것 같다. 놈들과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뭐가 저리 빨라…….’
무거운 갑주를 입은 이들은 굉장히 빨랐다. 100m 세계 기록 보유자가 100M 트랙에서 최고의 스피드로 달리는 것보다도 훨씬 더 빨라보였다.
덕분에 1㎞ 이상 벌어져 있던 거리가 어느새 500m 내외로 줄어버렸다. 그 500m도 곧 400m가 되고 300m가 될 듯했다.
선우는 곧 잡힐 것 같았다. 어떻게든 저들을 따돌릴 방법이 필요했다. 그런 선우의 눈에 한 봉우리가 들어온다.
‘저긴!’
소설 ‘악마의 악마’ 주인공은 도피 도중 한 봉우리를 발견한다. 다른 봉우리에 비해 유독 높게 솟아 있는 그 봉우리는 꼭대기가 검게 물들고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게 특징이었다.
주인공은 그 봉우리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이들을 모두 따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마법사의 유산을 얻고 본격적인 악마 사냥을 시작한다.
선우는 대마법사의 유산도 유산이지만 저들을 따돌릴 수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지금은 저들을 따돌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방향을 바꿔 그곳으로 뛰어갔다.
오르막이라 그런 건지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좁혀진 거리가 더욱 빠르게 좁혀졌다.
300m… 200m… 100m…….
엎어지면 코 닿을 듯 50m의 지근거리가 된 순간 은색 갑옷을 입은 남자가 검은 휘두른다.
“태양의 검!”
남자가 뭐라 소리치자 남자의 검에서 금빛 구처럼 생긴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금빛 광채는 총알에 버금가는 속도로 선우를 향해 날아갔다. 그것은 정확히 선우의 등을 노리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당한다.
선우는 뒤를 힐끔 보다가 그것을 발견했다. 책을 읽은 탓에 금빛 광채가 어떤 기술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저 기술은 리치 같은 암흑 마물에겐 극약이나 다름없다. 빛은 원래 어둠에 상극이다.
선우는 급히 몸을 틀었다. 그러고는 여태 들고 있던 레이피어를 힘껏 휘둘렀다.
깡!
금빛 광채는 아슬아슬하게 선우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레이피어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날아간다. 손아귀도 찢어졌다. 옆구리에 깊지 않은 상처가 났다.
선우는 순간 고통을 느꼈다. 리치라 고통을 느끼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읍…….”
선우는 아프지만, 참아냈다. 이 정도는 아직 참을 만했다. 게다가 아프다고 주저앉으면 여기서 끝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는 노릇이다.
선우는 그걸 맞고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남자는 다시 소리쳤다.
“태양의 심판!”
남자가 다른 신성 기술을 쓰자 남자의 검에서 다섯 줄기의 금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금색 빛은 따로 원을 그리더니 맹렬히 선우에게 날아갔다.
꽈과광!
폭발음과 함께 눈이 비상했다. 사방으로 비상한 눈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그 속에 선우가 있었다. 배가 뻥 뚫린 채로 무릎 꿇고 있는 선우.
‘읍…….’
선우는 엄청난 고통에 그만 의식을 잃었다. 어느새 밟고 있는 검은색 흙 위에 철푸덕 쓰러진 채, 신성력의 불꽃에 몸을 맡겼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피융∼
선우를 불태우던 신성력의 불꽃은 어떤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꺼져버렸다. 선우의 몸에 깊게 난 상처도 어떤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회복되고 아물어 갔다. 선우를 쫓던 이들은 뭔가에 막힌 듯 걸음을 멈췄다.
“뭐야, 이건!”
선우의 주위가 확연히 바뀌기 시작했다. 마치 다른 곳처럼 변한다.
존 하엘을 위시한 15뒤처리 팀은 곧장 동굴에서 나온 마물을 쫓았다. 이들 중 가장 강하고 추적에 일가견이 있는 존 하엘이 무리의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무력 순으로 따라왔다.
존 하엘은 마물의 보폭을 통해 마물의 외형을 짐작했다.
“2족 보행, 키는 175cm 정도.”
마물은 2족 보행을 하는 놈이다. 보폭을 보니 175∼180cm 정도의 키를 가지고 있다.
존 하엘은 나란히 걷고 있던 아리엘 신관을 봤다.
“마물이 서쪽으로 가고 있는데, 서쪽에 뭐가 있습니까?”
마물은 서쪽으로 무작정 가고 있었다. 방향을 틀 생각을 하지 않고 올곧게 가고 있었다. 본능적인 행동인지 이성적인 행동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리엘 신관은 존 하엘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했다.
“서쪽엔… 악마의 숲이 있어요.”
이곳 설원 서쪽에는 악마의 숲이 있었다. 악마의 숲은 마물들의 고향이자 마물들의 낙원 같은 곳이다.
마물이 악마의 숲에 들어서게 되면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하다. 마물의 숲에는 신에게 직접 봉인당한 악마들이 다수 살고 있다. 그들은 불사의 존재다. 악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때.
우르릉.
날씨가 급변했다.
“어?”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찌푸려졌다.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천둥을 동반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휘휙―
바람도 몹시 거세졌다. 눈보라와 함께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존 하엘은 날씨가 갑자기 급변하자 초조한 얼굴로 신관들을 봤다.
‘이러다 놓치겠는데…….’
체력이 약한 신관들 때문에 이동이 느렸다. 그에 반해 놈의 흔적은 쏟아지는 눈과 눈보라 때문에 급속도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놓칠 것 같았다. 마물의 숲에 들어간 마물… 직감이지만 후에 큰 화근이 될 게 분명하다.
존 하엘은 안 되겠다 싶어 아리엘 신관을 보고 말했다.
“아리엘 신관님.”
아리엘 신관은 존 하엘이 할 말을 예상했는지 곧바로 답했다.
“먼저 가세요. 따라갈게요.”
아리엘 신관이 허락하자 존 하엘은 먼저 갈 특공대를 따로 꾸렸다. 신관들만 이 거친 설원을 거닐게 할 순 없기에 팀 내 성기사들을 둘로 나눴다.
존 하엘을 위시한 특공대는 모두 일곱 명이었다. 일곱 명 모두를 발 빠른 성기사들로 구성했다.
“가자.”
성기사들은 빠르게 달렸다. 신성력을 다리에 주입한 채로 1시간을 그렇게 달렸다. 저 멀리 1㎞ 밖에 놈이 보였다.
‘리치?’
놈은 어둠의 기운을 물씬 풍기는 리치였다. 마법을 쓰지 않고 걸어가는 걸 보니 아직 이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존 하엘은 곧바로 소리쳤다.
“저기 있다!!”
존 하엘이 소리치자 1㎞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는지 놈은 뒤를 돌아봤다. 성기사들을 발견한 놈은 갑자기 필사적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보통의 리치와는 행동양식이 많이 달랐다.
“어?”
마법을 쓰지 않는 리치는 자아가 없는 리치다. 자아가 없는 리치는 이성이 아닌 본능으로 행동한다. 그런데 놈은 자아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지금까지의 리치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존 하엘은 괜히 소리쳤다고 생각했다. 괜히 놈에게 경각심만 심어준 것 같았다. 동시에 꼭 죽여야겠다고 다짐했다. 변종은 변종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법이다.
존 하엘은 더 열심히 놈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500m까지 근접한 순간, 놈이 돌연 방향을 바꿨다.
‘응?’
놈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봉우리 쪽으로 달렸다. 놈이 향하는 봉우리는 눈으로 덮여 흰색인 다른 봉우리와는 달리 흑색이었다. 거기다 마기와 함께 사기가 잔득 흘러나왔다. 일반적인 봉우리가 아니었다.
존 하엘은 마물이 저 봉우리에 오르기 전에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필사적으로 달려 50m 이내로 접근한 존 하엘은 곧바로 신성 기술을 사용했다.
“태양의 검!”
검으로 신성력을 뿜어냈다. 신성력은 예리한 검이 되어 놈에게 빠르게 날아간다. 그러나 놈은 그것을 피했다.
존 하엘은 실망하는 대신 재차 신성 기술을 사용했다. 이번엔 전신의 힘을 모두 끌어 모았다.
“태양의 심판!!!”
존 하엘의 검에서 강맹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막대한 신성력으로 다섯 개의 원을 만든 다음 놈 주위를 초토화시켰다.
꽈광광!
존 하엘은 놈이 자신의 공격에 정통으로 맞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공격에 적중당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존 하엘은 속도를 줄이고 놈에게 다가갔다. 최후의 일격은 느긋하게 날릴 생각이었다.
그때.
쿵!
뭔가가 그를 가로막았다.
“뭐, 뭐야?”
존 하엘의 발걸음을 막은 것은 투명한 유리벽이다. 처음에는 안이 보일 정도로 투병했는데, 점점 검게 변한다.
존 하엘은 벽을 손으로 만지다가 눈짓했다.
끄덕.
눈짓을 알아들은 다른 성기사들이 벽에 접근했다. 그들의 발걸음도 벽이 막아서는지 확인했다.
쿵.
“막혔습니다!”
어느새 전체가 시커멓게 변한 벽은 그들 모두의 출입을 막았다. 그 마물을 제외한 그 누구의 발걸음도 허용하지 않았다.
존 하엘은 검을 써 벽을 부수고자 했다. 마기와 상극인 신성력을 끌려 올렸다.
“태양의 심판!”
존 하엘은 다시 신성 기술을 사용했다. 전력으로 벽을 내리쳤다.
꽝! 꽈광!
‘실패인가?’
그러나 벽은 부서지지 않았다. 금 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존 하엘은 또 눈짓했다. 그의 눈짓에 따라 따라온 성기사 전원이 신성 기술을 사용한다.
“태양의 심판!”
“태양의 검!”
꽈과광! 꽝! 꽈광!
하지만 그들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의 공격을 받고도 벽은 멀쩡했다.
존 하엘과 성기사들은 한동안 대기했다. 15뒤처리 팀의 신관들이 오길 기다렸다.
얼마 후 아리엘 신관과 나머지 인원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아리엘 신관님!”
“잠깐만요.”
아리엘 신관은 홀린 듯 벽에 다가갔다. 검은색 벽을 보고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아리엘은 저 벽의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이건… 리치 킹의 결계?”
그것은… 전설의 리치 킹, 그가 만든 결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