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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선우는 한참 만에 의식이 돌아왔다.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주위 사물이 또렷이 인식될 정도로 의식이 돌아왔지만 바로 눈을 뜨지는 않았다. 선우는 한동안 눈을 감고 그대로 있었다.
선우는 지금 누워 있는 이곳이 여전히 소설 속일 까 두려웠다. 기절하기 전의 상황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빠져있을까 봐 눈을 뜰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용기를 냈다. 부디 눈을 뜨면 자신의 보금자리인 전셋집이기를 속으로 수없이 빌었다.
‘어둡다…….’
안타깝게도 이곳은 집이 아니었다. 작지 않은 창문이 있고, 햇빛이 정면으로 들어오는 선우의 집이 밤이라고 해서 이렇게 어두컴컴할 리 없다.
그러면 여기는 또 어디일까? 쓰러진 곳은 분명 탁 트인 곳이었는데…….
이곳에 대해 유추하고 있던 선우가 돌연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에이, 설마. 아닐 거야.’
소설 ‘악마의 악마’에는 여러 장소가 등장한다. 작가의 상상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앙큼한지 각종 기상천외한 장소가 배경으로 등장하곤 한다.
그중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는 장소가 한 곳이 있었다. 주인공이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고 또 질척질척한 사랑을 얻는 장소, 어둡고 습하며 음울한 장소.
선우는 이곳이 감옥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놈들이 감옥 까지 자신을 끌고 온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은 감옥 이 아니었다.
탁!
“어?”
선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불이 켜졌다. 형광등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방 안을 밝혀주듯이 벽 양쪽 상단에 동그란 불 여러 개가 순차적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다행히도 아래로 내려가는 길만 존재하는 단방향 통로였다. 그것을 확인한 선우는 일어서서 급히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내가 있던 위치가 변했다면… 변했을 지도 몰라.’
선우는 이곳이 기절했을 당시의 장소가 아닌 것에 리치의 몸으로부터 벗어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야 구석에 있던 숫자도 ‘47’과 ‘01’이라는 글자로 바뀌어 혹시 소설이 바뀐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소설 ‘악마의 악마’에 들어왔기에 리치가 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소설에 들어갈 경우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밥 안 먹고 살아도 되고 추위, 더위 걱정 안 해도 되는 리치로서의 삶, 분명 나쁘진 않았다. 리치로 평생을 살라고 해도 웃으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리치로서의 삶보단 사람이 더 나았다. 힘들게 살고 유한한 삶을 살아도 리치로써의 삶보단 인간으로써의 삶이 훨씬 좋았다.
선우는 주위를 살폈다. 거울 대용으로 쓸 만한 것을 찾았다.
‘응?’
동굴 벽이 매우 반질반질했다. 쇠를 억지로 깎아놓은 듯했다. 거울 대용으로 잠깐 쓰기 딱 적당한 것 같다.
선우는 자신의 얼굴을 벽에 가져갔다. 벽은 선우의 얼굴을 단 한 점의 여과 없이 모두 비춰 주었다.
‘제기랄!’
벽은 사람의 얼굴 대신 리치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코 대신 깊은 어둠을 비추고 있다.
바뀐 것은 없었다. 결국 헛물이었다.
선우는 아직도 자신이 리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를 통해 이곳이 아직도 소설 속이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매우 실망한 한편 세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 번째 의문은 뚫렸던 배가 언제 수복 되었는가, 두 번째 의문은 여기는 어디일까, 마지막 세 번째 의문은 새롭게 생긴 글자와 바뀐 글자의 의미였다.
선우는 그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단서를 찾으려 했다.
‘도대체 뭐야?’
하지만 이곳에 대해 짐작할 만한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대해 전혀 짐작이 안 되니 그 다음 의문도, 또 그 다음다음 의문도, 어떤 의문도 전혀 해결이 되질 않는다.
쓰러졌던 곳을 생각하면 이곳이 마법사의 던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이곳은 마법사의 던전은 아닌 것 같다.
‘…마법사의 던전은 매우 화려했지?’
소설 속 마법사의 던전은 휘황찬란했다. 실제로 본 것이 아니고 소설로 읽은 것이지만, 쓰여 있는 표현들 자체가 클럽이나 나이트 저리가라였다.
선우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단서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길은 오직 내려가는 방향밖에 없기에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얼마를 더 걷자 통로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을 유추할 만한 단서가 하나둘 튀어나왔다.
‘저건 뭐지?’
악마 석상이 나타났다. 뿔이 달리고 검은 박쥐 날개를 가진 사악한 외모의 다양한 악마들이 조각상으로 나타났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악마 조각상이 나타나는 빈도도 높아졌다. 간혹 기사들과 성직자도 보이지만 대부분 악마 혹은 악당에게 당하는 역할이었다.
선우는 이곳이 선한 이가 만든 공간은 결코 아닐 거라 확신했다. 소설에서 선한 역할을 하는 이들은 악마를 극도로 싫어하고 혐오했으니까.
선 역할의 등장인물과 관련된 장소는 가상의 리스트에서 모두 뺐다. 악마 혹은 악과 관련된 이들과 얽힌 통로를 중점적으로 생각했다.
장소를 점점 줄이고 있는 그때, 결정적인 단서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선우의 눈앞에 문이 나타났다. 그 문에는 한 남자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는 은색의 갑주와 은색의 투구를 쓰고 있었고, 피 묻은 검을 들고 있었다. 그는 선우의 얼굴처럼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몸 주위에선 엄청난 한기가 느껴진다.
선우는 저 그림을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소설 속에 삽입된 그림을 통해 이미 한 번 봤다.
저 그림의 주인공은 소설 속 세상을 피와 고통으로 물들인 매우 전설적인 존재, 죽은 자들의 왕인 리치 킹 아서스였다.
“그렇다면…….”
선우는 저 초상화를 본 순간 이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리치 킹 아서스의 초상화는 소설 속에서 오직 한 군데에서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곳의 정체를 깨달은 선우는 순간 말을 잃었다. 얼떨떨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어처구니없었다.
‘…….’
리치 킹 아서스의 초상화가 걸린 이곳은 리치 킹 아서스의 무덤이었다. 리치 킹 아서스가 영원한 안식을 가진 곳.
‘아… 하필…….’
리치 킹 아서스의 무덤에는 유물이 존재한다. 리치 킹 아서스의 유물인 아서스의 다이아몬드 두개골을 얻은 이는 단 기간에 대륙 최강의 존재가 되지만 그 반대급부로 악에 물든다.
‘사무엘이 여기서 악마가 됐지…….’
소설의 중요 악역 사무엘은 원래 성직자였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악으로 물든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서 리치 킹의 유물을 얻고 악마보다 더한 악마가 된다.
선우는 악역이 기연을 얻는 장소에 주인공 역할로 추정되는 자신이 들어왔다는 게 마냥 웃겼다.
주인공이 아닌 이가 주인공인 척하면 이런 일도 생길 수 있구나 하고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단 한 발자국도 더 안쪽으로 가지 않았다.
선한 이들의 영웅인 마법사 아틸라스의 유물 위치를 알고 있는데 굳이 악마 중의 악마인 리치 킹의 유물을 얻을 이유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선우는 멈춰서 한동안 있다가 어떤 생각이 들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약 30분 후, 선우는 처음 있던 곳에 되돌아왔다.

‘이곳은 리치 킹의 무덤이 확실해. 몸이 회복된 건 아마도 리치 킹의 무덤이 보유하고 있던 다량의 암흑 마나 때문일 거야. 마물에게 암흑 마나는 힐링 포션 같은 역할을 하니까. 이곳이 정말 리치 킹의 무덤이라면 입구 쪽에 결계를 해제하는 스위치가 있어.’
소설 속 사무엘은 성전에 참여한 신관 중 한 명이었다. 악마들과의 대대적인 전투에서 패한 후 도망치다가 선우처럼 봉우리 안에 우연히 들어오게 되었다.
봉우리 안에 들어온 사무엘은 순간 기절했다. 다량의 암흑 마나가 그를 덮쳤기 때문이다.
사무엘도 선우처럼 기절하고 깨어나 보니 동굴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선우와 달리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신관이었다. 선우처럼 현혹되지 않고 이곳이 다량의 암흑 마나 속임을 금방 간파해 냈다.
성직자였던 사무엘은 신성력을 써서 결계를 해지할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그의 신성력으로는 결계를 해제할 수 없었다. 그가 대단한 천재라 할지라도 리치 킹 아서스에 비하면 뱁새와 황새 차이였다. 그래서 사무엘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해제가 아닌 탈출구를 찾는 것.
얼마 후 사무엘은 신성력으로 입구 근처에 스위치가 있는 것을 알아냈다. 그를 통해 나가지는 않았지만.
선우는 사무엘의 일화를 소설로 읽었기에 입구 쪽에 탈출구가 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입구 근처에 있는 돌 등을 움직이고 만지며 사무엘처럼 벽면을 열기 위해 애를 썼다.
“어디 있는 거야?”
그러나 스위치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그대로였다. 선우는 인내를 가지고 찾았다.
“꼭 찾는다, 내가!”
선우에겐 사무엘 같은 신성력은 존재하지 않지만 리치로서의 무한한 체력은 존재했다.
지치지도 않고 먹지 않아도 되었기에 단 1초도 쉬지 않고 찾아 헤맸다.
선우는 약 여섯 시간 만에 스위치를 찾았다. 스위치는 붉은색 매우 평범하게 생긴 돌이었다.
“찾았다!!”
선우는 찾은 붉은색 돌을 지체 않고 움직였다.
드르륵
돌을 움직인 순간 뭔가가 작동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커졌고, 동굴을 가득 채워갔다. 그리고 얼마 후,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들린 직후 한쪽 벽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됐다!!”
벽이 올라가면서 빛이 들어왔다. 억지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빛이 아닌 자연의 빛이 열린 틈을 통해 내부로 들어왔다.
선우는 빛과 함께 들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리치인 탓에 찬기는 느끼지 못했지만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는 건 확연히 느꼈다.
벽이 10cm 정도 열렸을 때, 벽 바깥쪽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저기! 틈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선우는 그 목소리를 듣고 흠칫했다. 그리고 곧 뒤늦게 아차! 하는 얼굴로 변했다.
‘설마……?’
지금 선우에게는 적이 존재한다. 리치가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부터 생기게 된 적.
기절하기 전에 태양신교의 성기사들에게 ‘리치’라는 이유로 쫓김을 당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선우를 죽이려 했다.
선우는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 태양신교와 관련된 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 선우를 맹렬히 쫓아왔으니까.
그때,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원, 전투준비!”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수의 단합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태양신의 영광을!!”
선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밖의 이들은 태양신교의 인원들이다.

***


존 하엘과 15뒤처리 팀은 통신 구슬로 본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리치 킹의 결계를 해제하기 위해선 대신관 급의 신성력이 여럿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본대의 대신관들은 약 나흘 후 봉우리 앞에 도착했다. 리치 킹의 결계가 나타났다는 말에 심각함을 느낀 본대의 대신관들 중 일부가 곧장 자원하여 이렇듯 빨리 온 것이었다.
본대는 태양신교에 오직 12명만 존재하는 대신관이라는 주요 인원을 보호하기 위해 100명의 본대 성기사들도 딸려 보냈다. 15뒤처리 팀의 팀장인 존 하엘만큼 무력이 강한 이들이었다.
점심 식사 후 지원 병력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존 하엘은 지원 병력을 발견한 순간 빠르게 달려 나갔다.
“오셨습니까.”
무리의 선두에는 40대 초반의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그는 신관 복장을 하고 있었고, 메이스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12명의 대신관 중 한 명 아초이다. 80세 노인이지만 가진 신성력으로 인해 40대 초반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대신관 아초이는 존 하엘의 인사에 대꾸하는 대신 검은색 결계 앞으로 곧장 갔다. 그를 따라 무리가 질서 정연하게 이동했다.
존 하엘은 뻘쭘한 표정을 잠시 지었다가 곧 그를 따랐다.
“같이 가시죠.”
대신관 아초이는 리치 킹의 결계 앞에 가서 결계를 살펴봤다.
“확실히 리치 킹의 결계로군.”
대신관 아초이는 리치 킹의 결계를 바로 알아봤다. 그는 예전에 리치 킹이 만든 결계를 해제해 본 경험이 있었다.
대신관 아초이는 결계를 두드려 봤다. 수박 고르듯 똑똑 두드려 보기도 하고, 아이 쓰다듬듯 결계를 쓰다듬어 보기도 한다.
한참을 만지던 대신관 아초이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의 이마에서 신성력으로 가려져 있던 주름들이 다수 나타난다.
“이건… 해제하기 어려울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