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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시간이 흘렀다. 이곳에 틀어박힌 지도 꽤 되었다.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시간은 매우 더디게 흘러갔다. 고된 일을 하면서 느꼈던 시간의 흐름보다도 더 늦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도 한동안은 좋았다.
별 이상하고 무서운 일을 며칠 사이 수없이 겪었더니 정신적으로도, 또 육체적으로 조금 쉬고 싶었다. 거기다 생각할 것도 정말 많았다.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것도 어느 정도다.
‘안 해!’
풀 수 없는 문제를 계속 풀려고 하니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파왔다. 기약 없이 이러고 있으려니 점점 몸과 마음이 답답해진다.
‘최소한 한 달은 있어야 하는데…….’
이곳이 저들의 공격을 받지 않는 곳이라 가정하면 최소 한 달은 있어야 한다. 어쩌면 두 달, 많게는 여섯 달을 이곳에 가만히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섯 달을 버틴다? 정말 말도 안 된다.
리치가 되고, 소설 속에 들어왔음에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정신. 답 없는 문제의 답을 찾다가 망가지지나 않으면 그게 성공한 거다.
선우는 한참을 더 누워 있다가 일어섰다. 가만히 누워 있던 한을 풀려는 듯 공간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런 선우의 눈에 다시금 다이아몬드 해골이 들어온다.
‘만질까? 아니야.’
저 다이아몬드 해골을 만지면 그전에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무엘은 만지고 깨어난 즉시 엄청나게 강해졌으니까.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지금처럼 미칠 것 같지는 않을 것이다. 마법을 쓰고 마법을 익히다 보면 해답 없는 문제를 풀며 정신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게 되겠지.
그러나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악인이 되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다. 살기위해 악인이 될 생각은 했지만, 그건 상황이 그래서 아닌가?
괜히 내부를 샅샅이 살폈다. 아무것도 없는 벽도 한동안 바라봤다.
탐정이 돋보기를 들고 증거를 수색하듯 내부를 하나도 빠짐없이 살펴보던 선우의 눈에 몇 군데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응?’
첫 번째는 색이 혼자 다른 벽돌이었다.
두 번째는 한쪽에 널브러져 있는 지팡이같이 생긴 나무였다.
마지막 세 번째는 다른 것들과 달리 유난히 깨끗한 수정 구슬이었다.
선우는 셋 중에 먼저 벽돌을 살펴봤다.
‘확실히…….’
저 벽돌만 유독 색이 달랐다. 다른 건 전부 회색인데 저것만 유독 붉은색이다.
원래는 다 붉은색 벽돌인데 저것만 먼지가 쌓이지 않아 붉은색으로 보이는 건가 싶어 주위 회색 벽돌을 만져봤다.
쌓인 먼지들을 검게 변한 손톱으로 힘차게 긁어봤다.
지이익.
“그냥 회색이네.”
확인 결과 나머지는 본래부터 회색이 맞았다. 먼지를 완전히 긁어내 속살을 확인해도 회색이 나왔다.
선우는 붉은색 벽돌에 손을 가져가다가 멈칫했다.
‘만져도 될까?’
이곳은 리치 킹의 무덤이다. 이곳에 있는 것들 중 범상치 않은 물건은 단 한 개도 없다. 게다가 저 벽돌은 책에 나와 있지 않다. 책에 나와 있는 이곳의 물건은 오직 리치 킹의 다이아몬드 두개골, 저것뿐이다.
선우는 만질까 말까를 한참을 고민했다. 고민 끝에 한 가지를 선택했다.
‘음… 작가가 중요하다 생각지 않았으니까 적지 않았을 거야.’
선우는 벽돌을 만져보기로 결심했다. 작가의 소설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별것 아니기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사실 별것이어서 쓰지 않았던 거라 해도 상관없다. 편집하다 실수로 누락된 거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냥 저 벽돌을 무진장 만져보고 싶었으니까. 뭐라도 해야 정신을 온전히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선우는 붉은색 벽돌에 손을 가져가 슬며시 눌렀다.

***


존 하엘과 지원자들은 전열을 정비하고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신관들이 무리의 중심에 서고 성기사들이 그들을 빙 두르는 형태로 선 다음 앞으로 전진 했다.
그들은 한 발, 한 발 정말 신중히 걸었다. 어떤 함정이 있을지 알 수 없고, 어떤 마물이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존 하엘은 무리의 선두에 있었다. 이 무리를 이끄는 지휘자로써 각종 수신호와 말로 무리를 이끌었다.
10분 정도 안으로 들어간 존 하엘과 무리는 갑자기 멈춰 섰다.
‘저건?’
존 하엘과 무리가 멈춘 곳 앞에는 사악한 악마를 닮은 석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존 하엘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그것에 다가갔다.
‘암흑 마나?’
그 악마 석상 안에서 다량의 암흑 마나가 느껴졌다. 암흑 마나를 잔뜩 머금고 있는 석상, 결코 범상치 않았다.
존 하엘은 그것을 감지하고 신관을 불렀다.
“신관님.”
세 명의 신관 중 가장 연장자인 아리엘 신관이 앞으로 나섰다. 15뒤처리 팀 활동으로 호흡을 맞춰서인지 존 하엘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곧장 신성력을 써 악마 석상을 스캔한다.
아리엘 신관은 석상 안에 가득 쌓여 있는 암흑 마나를 확인하곤 크게 놀랐다. 그러나 어느새 안정을 되찾는다.
아리엘 신관은 곧 스캔을 마쳤다. 악마 석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존 하엘은 그런 아리엘 신관을 본다.
“어떤 것 같습니까?”
“석상 안에는 존 하엘 성기사님이 보유한 신성력과 비등한 규모의 암흑 마나가 존재해요. 이상 없이 가동 되었다면 저희에게 큰 위협이 되었을 게 분명해요.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가동이 되지 않고 있어요. 아마도 암흑 마나를 소비하는 핵이 현재 휴면 상태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쉽게 말하면 잠들어 있는 상태란 말이죠.”
“잠들어 있는 상태요? 그럼 위험한 것 아닌가요?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다는 말이잖습니까?”
존 하엘은 무리를 이끄는 대장이었다. 본래 무리를 이끄는 대장은 신중해야 하기 때문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법이다.
존 하엘은 말과 함께 검에 신성력을 끌어 모았다. 암흑 마나를 잔뜩 머금고 있는 석상을 부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리엘 신관은 그런 존 하엘을 급히 말렸다.
“부수면 안 돼요.”
존 하엘은 의아한 얼굴로 아리엘 신관을 봤다. 왜 말리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예?”
“공격하는 순간 휴면 상태에 있던 핵이 깨어날 거예요. 깨어난 석상은 당연히 저희를 공격할 거고요.”
“놈이 깨어나더라도 부수며 전진하는 게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긁어 부스럼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어요. 이놈이 깨어나면서 다른 놈들도 모두 깨어날 수도 있고요.”
“…….”
“휴면 상태에서 깨어날 거였다면 입구가 열리는 순간 깨어났을 거예요. 그게 문지기, 이놈들의 사명이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저를 믿고 공격하지 마세요.”
존 하엘은 굉장히 찝찝했지만 결국 검에서 신성력을 거둬들였다. 아리엘 신관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기다 대고 매몰차게 거절할 순 없어서였다.
“음, 알겠습니다.”
존 하엘은 악마 석상을 보며 입맛을 짧게 다신 다음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그럼, 다시 가죠.”
존 하엘이 이끄는 무리는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들의 눈앞에 많은 악마 석상이 나타났다. 걸핏하면 나타나는 악마 석상을 보자 존 하엘은 쓰게 웃었다.
‘저걸 제거하면서 왔으면 반도 못 부쉈겠군.’
이후에도 무리는 수많은 석상을 그냥 지나쳤다. 하나둘 그냥 지나치고 보니 나머지는 의래 그래했다는 듯 그냥 지나쳐 걷게 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악마 석상을 지나쳐 가던 그때, 상황이 변했다.
푸시시―
뭔가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악마 석상들 전부의 눈이 빨갛게 변했다.
갑작스런 소리에 존 하엘은 순간 당황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석상을 당장 부숴!!”

***


빨간 벽돌을 누른 순간 벽돌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빨강색 소형 전구에 전기가 들어 있던 것마냥 벽돌 안쪽에서 불이 들어왔다. 동시에 유난히 깨끗했던 그 구가 빨갛게 빛이 났다. 구와 벽돌은 어떤 시스템에 의해 연결되어 있던 모양이었다.
선우는 깜짝 놀라 벽돌에서 떨어졌다. 폭탄을 잘못 건드린 건 아닌가 싶어 조마조마 하는 마음으로 사건의 추이를 지켜봤다. 하지만 이후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놀라 움츠려 들었던 게 괜히 민망해질 정도였다.
“에게, 이게 끝?”
선우는 1시간 정도를 서서 변화를 관찰하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정도의 시간 동안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니 더 이상의 변화는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저앉고 5분이 지났을 때,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 뭔가 음습한 기운이 볼을 스치고 지나간 게다.
선우는 그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뛰듯이 일어나 다시 구를 봤다.
“응?”
붉은색 구 안은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깨끗이 비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가 조금씩 차고 있었다.
뭔가는 연기 같기도 하고, 홀로그램 같기도 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놈인 냥 이리저리 구 안을 돌아다녔다.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얼굴을 구에 최대한 붙였던 선우는 얼핏 그것의 완전한 형상은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흡……!”
선우는 귀신 본 얼굴을 했다. 아니, 귀신을 봤다.

***


존 하엘은 곧장 들고 있던 검을 횡으로 움직였다. 옆의 악마 석상의 목을 급히 베어냈다.
꽝!
붉게 물든 석상의 눈은 머리와 몸이 둘로 분리됨과 동시에 색을 잃었다. 더 이상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존 하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근처 다른 석상의 목도 쳤다.
꽝!
다른 석상들이 또 다른 어떤 반응을 보이기 전에 하나라도 더 석상을 부숴야 한다.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무리는 모두 존 하엘과 같은 작업을 했다. 10명의 성기사들은 검으로. 3명의 신관들은 신성 주문으로 악마 석상을 부수고 망가트렸다.
그러던 중 한 사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석상이 움직입니다!”
소리친 사내는 10명의 성기사 중 한 명이었다. 이곳 결계 안에 들어온 성기사들 중 4번째로 강한 무위를 가지고 있었다. 사내는 소리침과 동시에 석상의 목을 베어갔다.
깡!!
하지만 움직이기 시작한 석상은 사내의 공격을 너무나 손쉽게 막아냈다. 움직이기 전의 석상과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의 석상은 방어력부터 월등히 차이가 났다.
“케케케!”
그 석상을 최초로 하여 파괴되지 않은 모든 석상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신관과 성기사들의 입에선 당혹스런 목소리가 연거푸 세어 나온다.
“흡!”
“헉!”
그들이 당혹스러움을 표현할 세도 없이 석상들은 무리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발톱으로 공격하고, 몸으로 밀친다.
꽝!
“컥!”
존 하엘은 석상의 공격을 검을 들어 겨우 막아냈다. 정면으로 몸통 박치기를 해오는 석상을 검면으로 멀리 쳐냈다.
딱!
존 하엘은 잠시의 틈을 이용해 소리쳤다.
“밀집 대형으로!”
존 하엘은 무리를 원형의 밀집 대형으로 만들어 각개격파당하는 것을 우선 방비했다. 무력이 강한 성기사들이 바깥쪽에 서고, 무력이 약한 신관들은 안쪽에 서게 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전투를 유도했다.
다행히 문제없이 밀집 대형이 완성되었다. 이제야 겨우 숨 돌릴 틈이 생겼다.
존 하엘은 석상들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며 안쪽 신관들에게 소리쳤다.
“이대론 답이 없습니다. 뭔가 대책이 필요합니다!!”
존 하엘의 말대로 당장은 막아내고 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답이 없었다. 무지막지한 악마 석상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늘어만 갔다.
체력 다하고 신성력을 더 이상 쓸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전멸이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존 하엘의 말에 아리엘 신관이 소리쳤다.
“전력으로 ‘태양신의 침묵’을 쓰면! 저 석상들을 잠시지만 멈출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