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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태양신의 침묵’은 신성 마법 중에 수위에 속하는 주문이었다. 태양신의 신관들 중에서도 선택된 소수만이 이 주문을 쓸 수가 있었다.
그것이 펼쳐지면 주위의 마물들은 일시적으로 행동을 멈춘다. 마물들이 움직이는 근원이 바로 암흑 마나인데, 이 암흑 마나를 정순한 신성력이 일순간 중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존 하엘은 그 말을 듣고 반색하며 소리쳤다. 희망이 보였다.
“그럼 태양신의 침묵으로 놈들을 멈춰 세운 다음 이곳을 탈출하도록 하죠!”
존 하엘은 석상의 행동을 일시적으로 멈춘 다음 곧바로 탈출할 생각을 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존 하엘의 계획을 들은 아리엘 신관은 와락 인상 썼다.
“안으로 더 들어가는 게 아닌가요?”
아리엘 신관은 존 하엘의 말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신인 태양신을 모시는 신관이라는 자부심이 머리 안에 가득했던 데다가 순교할 각오를 하고 이곳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존 하엘은 이런 아리엘 신관의 마음을 짐작하고 버럭 소리쳤다.
“상황이 이런데 안으로 어떻게 들어갑니까?!”
그런데도 요지부동이다. 아리엘 신관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자 존 하엘은 다시 소리쳤다.
“대신관님의 말씀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대신관 아초이는 결계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에게 한 가지를 절실히 당부했다.
― 절대 목숨을 헛되이 하지 마라.
그것이 그가 당부한 사항이었다.
결계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 대부분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인데다 종교인들답게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존 하엘의 말을 듣을 아리엘 신관은 그제야 대신관의 말을 상기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후… 알겠어요.”
존 하엘은 속으로 안도하며 계획을 전했다.
“그럼, 30초 후에 전력으로 써주십시오.”
“예.”
성기사들은 계획을 들었기에 각자 맡은 구역을 필사적으로 방어하며 신성력을 끌어 모았다.
신성 주문 ‘태양의 침묵’이 터지면 곧바로 주위 석상들에게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아리엘 신관은 약속한 대로 약 30초 후, 준비한 주문을 사용했다.
“태양의 침묵!!!”
아리엘 신관의 손에서 금색으로 물이든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12명의 대신관에 버금가는 신성력을 지닌 신관이 전력으로 신성력을 내뿜자 주위 석상들이 하나둘 행동을 멈춘다.
끼익.
존 하엘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때밖에 기회가 없었다.
“태양의 심판!”
존 하엘은 준비한 기술을 사용했다. 신성력이 가득 실린 검을 전방의 석상들에게 휘둘렀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나머지 성기사들도 하나둘 기술을 사용한다. 다량의 신성력이 성기사들의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태양의 검!”
“태양의 심판!”
사방으로 반날 모양의 신성력과 갈고리 모양의 신성력이 날아갔다. 그들의 신성기술을 전통으로 얻어맞은 놈들 중 일부는 작동을 영원히 멈췄고, 또 빗맞은 일부는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자욱하게 먼지가 솟아올랐다. 동굴 일부가 무너졌고, 곳곳에서 2차, 3차 폭발 소리가 들려왔다.
꽈광! 꽝!
존 하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추행진!”
추행진은 앞은 좁고 뒤가 넓은 삼각형 모양의 진형이었다. 주로 포위망을 돌파할 때 사용한다.
지금 상황에선 돌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한 번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그대로 전멸이다.
존 하엘이 추행진이라 외친 순간 무리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존 하엘은 중심에서 무리를 지휘했다.
“절대 멈추지 마라! 태양의 심판!”
무리는 열심히 뛰었다. 앞을 막는 석상들을 베고 또 벴다.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탈출을 위해 입구로 거슬러 올라갔다.
앞을 막는 석상들을 밀치고 부수며 뛰다 보니 어느새 갔던 길의 반을 왔다.
입구에 가까워져서 그런지 앞을 막던 석상들도 꽤 많이 줄어 있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희망이 보였다.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이들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스윽―
지면 아래에서 검은색 생기를 잃은 손이 불쑥 올라왔다. 갑자기 나타난 수십, 수백 개의 손은 도망치는 성기사들과 신관들의 발목을 무차별적으로 붙잡았다.
“아래!”
성기사들은 가진 신체 능력과 무력으로 어찌어찌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포착이 늦어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으면 그것들을 과감히 검으로 베어냈다.
스윽
하지만 신관들은 그게 되지 않았다.
“꺅!!”
발목을 붙잡힌 신관들은 더 뛸 수 없었다. 더 뛰기는커녕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그 순간, 지면 아래에서 뭔가가 또 나타난다.
불쑥.
손의 주인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입은 찢어지고 눈은 파였으며 살은 완전히 썩어 있는 좀비 형태의 괴물들이다.
“크아악!”
놈들은 쓰러진 신관들의 온몸을 마구 물어뜯었다. 신관들의 팔다리 등과 전신을 뾰족하고 강인한 이빨로 씹어 먹었다.
“아악!”
성기사들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신관들을 구하려 했다.
“아리엘 신관님!!”
성기사들은 급히 검을 휘둘렀다. 신관의 몸과 다리를 붙잡고 있는 괴물의 손을 베어내고, 신관의 온몸을 물어뜯고 있는 괴물의 머리를 발로 차 부쉈다.
성기사들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괴물의 썩은 뇌수와 썩은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괴물의 잘린 팔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지면에 내동댕이쳐졌다.
삽시간에 주위는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피비린내도 짙게 맡아진다.
그런데도 신관들의 입에서 여전히 처절한 비명성이 세어 나왔다. 통로가 그들의 비명으로 가득 채워진다.
“아아악!!”
“살려줘!”
그러나 그 비명도 얼마가지 못했다. 목이 뜯기고 또 심장을 잃고서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성기사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세 명의 신관 모두는 처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컥.”
신관들이 모두 죽자 성기사들의 사기는 급속도로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애써 뚫었던 악마 석상들의 포위망이 다시 쳐졌다.
존 하엘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어느새 자신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석상들을 본다.
‘하… 살기 어려울 것 같군.’
확실히 살기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존 하엘은 절망한 낯빛으로 검을 휘둘렀다.
깡!
그들은 분투했으나, 한 명씩 쓰러졌다. 결국 전멸하고 말았다.
***
붉은색 구 안에서 나타난 형상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공포와 두려움, 원망 섞인 표정을 하고 선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걸 발견한 선우는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엉덩이와 허벅지로 바닥의 먼지를 마구 쓸며 구슬로부터 필사적으로 멀어졌다.
덜덜덜.
선우는 무서웠다. 구슬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왠지 모르게 사람의 영혼 같았다.
영혼이 갑자기 왜 저 안에 들어온 것일까? 도대체 왜?
선우는 무섭고 두려운 한편 궁금해졌다. 귀신에 대한 공포를 예전에 한 번 몇 시간 동안 절실히 경험해서 그런지 어느 시점이 지난 순간에는 궁금증 공포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커진 궁금증은 서서히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들었고, 잃어버린 이성을 다시 찾게 만들었다.
이성을 겨우 되찾은 선우는 피식 웃었다.
‘지는 리치이면서.’
리치 주제에 귀신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원혼만 딸랑 있는 게 귀신이고 원혼에 죽은 사체가 입혀져 있는 게 죽되 산 자인 언데드이지 않은가?
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귀신과 비슷한 존재임을 자각했다. 안 먹어도 되고 추위, 더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리치로서의 삶을 애써 거부한 이유를 그제야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귀신에 대한 공포가 싹 사그라들었다. 더 이상 귀신이 두렵지도, 또 무섭지도 않았다.
마이너스적 감정을 완전히 떨쳐낸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둥지둥 필사적으로 멀어질 때와는 다르게 자신감 있는 발걸음으로 붉은색 구슬 앞에 다가갔다.
‘어디 보자…….’
선우는 구슬 바로 앞까지 머리를 가져가 구슬 안을 다시 자세히 살펴봤다.
‘영혼이 맞는 것 같은데……?’
구슬 안에 있는 것은 영혼이었다. 소설 속 세계관이 과학 문명 세계가 아닌 판타지 세계이니 홀로그램일 리는 없었다. 거기다 이곳은 리치 킹의 무덤이다. 죽은 자들의 왕인 리치 킹의 무덤.
이곳에 수정구슬이 있고, 그 수정 구슬 안에 저런 게 있다면 백이면 백, 영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리치 킹이라는 존재가 할 짓 없어서 이상한 장난감을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결정적으로 모양 자체가 영혼을 떠올리게 한다. 가끔씩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람의 형상은 저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영혼이라 말하고 있다.
선우는 저게 영혼이 맞다고 확신했다. 그러자 의문이 생겨났다.
‘갑자기 구슬 안으로 영혼이 왜 들어온 거지? 뭣 때문에?’
영혼들이 어디서 왔는지, 영혼이 왜 이 구슬로 들어오는지 궁금했다. 그러다 우연히 시야 가장자리를 보게 되었다.
본래 67, 010, 01이던 글자들 중 하나가 안에서 봤던 영혼의 수만큼 바뀌고 있었다. 그러자 순간 어떤 가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선우가 이곳에 도망친 이유는 태양신교 인원들 때문이었다. 그 인원들이 다짜고짜 죽이려 하자 도망쳤고, 방심하다 일을 그르쳐 또다시 도망친 끝에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 과정 중에 기억나는 건 결계 밖에 아직도 태양신교 인원들이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이곳 결계 안으로 태양신교 인원들이 들어왔다면? 만약 저 붉은 벽돌이 태양신교 인원들을 해하는 함정의 스위치였다면, 만약 이 구슬 안에 들어 있는 영혼이 이런 과정 중 죽은 태양신교 인원들의 영혼이라면, 계속 올라가고 있는 숫자의 의미가 살해된 인원들의 수라면… 선우는 살인자가 된다. 미필적 고의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
선우는 전율을 느꼈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생각한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넷이라는 인원이 자신 때문에 죽은 것 같았다.
선우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선우는 살인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람 중에 살인자가 되고픈 사람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자신이 세운 가설을 애써 외면했다. 또 다른 가설을 억지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때, 구슬이 변하기 시작했다. 외면할 거리가 미치도록 필요했는데 마침 잘되었다.
선우는 재빨리 구슬의 변화를 지켜봤다.
‘어?’
구슬 속 영혼이 전부 분해되었다. 갑자기 아주 작게 입자화 되더니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곤 모든 입자가 한 덩어리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작은 점처럼 압축되었다가 부피를 키워 구슬을 가득 채워갔다. 그 순간 이곳 어딘가에서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뭔가가 지면과 부딪히며 나는 소리다.
선우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응?’
소리의 주인공은 지팡이처럼 생긴 나무였다. 빨간 벽돌, 앞의 구슬과 함께 의심했던.
나무는 덜거덕거리다 빠르게 날아오더니 갑자기 떠오르기 시작한 구슬과 합체했다.
구슬과 나무가 합쳐지면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색으로 물든 빛, 아니 어둠이 주위를 삼킨다.
공간은 삽시간에 빛을 잃었다. 이윽고 짙은 어둠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얼마 후, 어둠이 서서히 걷혔다. 그리고 걷힌 어둠을 뚫고 서서히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그것은 지팡이였다.
리치 킹의 무덤에 있는 것이니 리치 킹의 지팡이겠지.
선우는 이렇게 소설 속 히든 피스를 우연히 발견했다.
‘태양신의 침묵’은 신성 마법 중에 수위에 속하는 주문이었다. 태양신의 신관들 중에서도 선택된 소수만이 이 주문을 쓸 수가 있었다.
그것이 펼쳐지면 주위의 마물들은 일시적으로 행동을 멈춘다. 마물들이 움직이는 근원이 바로 암흑 마나인데, 이 암흑 마나를 정순한 신성력이 일순간 중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존 하엘은 그 말을 듣고 반색하며 소리쳤다. 희망이 보였다.
“그럼 태양신의 침묵으로 놈들을 멈춰 세운 다음 이곳을 탈출하도록 하죠!”
존 하엘은 석상의 행동을 일시적으로 멈춘 다음 곧바로 탈출할 생각을 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존 하엘의 계획을 들은 아리엘 신관은 와락 인상 썼다.
“안으로 더 들어가는 게 아닌가요?”
아리엘 신관은 존 하엘의 말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신인 태양신을 모시는 신관이라는 자부심이 머리 안에 가득했던 데다가 순교할 각오를 하고 이곳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존 하엘은 이런 아리엘 신관의 마음을 짐작하고 버럭 소리쳤다.
“상황이 이런데 안으로 어떻게 들어갑니까?!”
그런데도 요지부동이다. 아리엘 신관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자 존 하엘은 다시 소리쳤다.
“대신관님의 말씀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대신관 아초이는 결계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에게 한 가지를 절실히 당부했다.
― 절대 목숨을 헛되이 하지 마라.
그것이 그가 당부한 사항이었다.
결계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 대부분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인데다 종교인들답게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존 하엘의 말을 듣을 아리엘 신관은 그제야 대신관의 말을 상기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후… 알겠어요.”
존 하엘은 속으로 안도하며 계획을 전했다.
“그럼, 30초 후에 전력으로 써주십시오.”
“예.”
성기사들은 계획을 들었기에 각자 맡은 구역을 필사적으로 방어하며 신성력을 끌어 모았다.
신성 주문 ‘태양의 침묵’이 터지면 곧바로 주위 석상들에게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아리엘 신관은 약속한 대로 약 30초 후, 준비한 주문을 사용했다.
“태양의 침묵!!!”
아리엘 신관의 손에서 금색으로 물이든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12명의 대신관에 버금가는 신성력을 지닌 신관이 전력으로 신성력을 내뿜자 주위 석상들이 하나둘 행동을 멈춘다.
끼익.
존 하엘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때밖에 기회가 없었다.
“태양의 심판!”
존 하엘은 준비한 기술을 사용했다. 신성력이 가득 실린 검을 전방의 석상들에게 휘둘렀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나머지 성기사들도 하나둘 기술을 사용한다. 다량의 신성력이 성기사들의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태양의 검!”
“태양의 심판!”
사방으로 반날 모양의 신성력과 갈고리 모양의 신성력이 날아갔다. 그들의 신성기술을 전통으로 얻어맞은 놈들 중 일부는 작동을 영원히 멈췄고, 또 빗맞은 일부는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자욱하게 먼지가 솟아올랐다. 동굴 일부가 무너졌고, 곳곳에서 2차, 3차 폭발 소리가 들려왔다.
꽈광! 꽝!
존 하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추행진!”
추행진은 앞은 좁고 뒤가 넓은 삼각형 모양의 진형이었다. 주로 포위망을 돌파할 때 사용한다.
지금 상황에선 돌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한 번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그대로 전멸이다.
존 하엘이 추행진이라 외친 순간 무리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존 하엘은 중심에서 무리를 지휘했다.
“절대 멈추지 마라! 태양의 심판!”
무리는 열심히 뛰었다. 앞을 막는 석상들을 베고 또 벴다.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탈출을 위해 입구로 거슬러 올라갔다.
앞을 막는 석상들을 밀치고 부수며 뛰다 보니 어느새 갔던 길의 반을 왔다.
입구에 가까워져서 그런지 앞을 막던 석상들도 꽤 많이 줄어 있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희망이 보였다.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이들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스윽―
지면 아래에서 검은색 생기를 잃은 손이 불쑥 올라왔다. 갑자기 나타난 수십, 수백 개의 손은 도망치는 성기사들과 신관들의 발목을 무차별적으로 붙잡았다.
“아래!”
성기사들은 가진 신체 능력과 무력으로 어찌어찌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포착이 늦어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으면 그것들을 과감히 검으로 베어냈다.
스윽
하지만 신관들은 그게 되지 않았다.
“꺅!!”
발목을 붙잡힌 신관들은 더 뛸 수 없었다. 더 뛰기는커녕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그 순간, 지면 아래에서 뭔가가 또 나타난다.
불쑥.
손의 주인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입은 찢어지고 눈은 파였으며 살은 완전히 썩어 있는 좀비 형태의 괴물들이다.
“크아악!”
놈들은 쓰러진 신관들의 온몸을 마구 물어뜯었다. 신관들의 팔다리 등과 전신을 뾰족하고 강인한 이빨로 씹어 먹었다.
“아악!”
성기사들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신관들을 구하려 했다.
“아리엘 신관님!!”
성기사들은 급히 검을 휘둘렀다. 신관의 몸과 다리를 붙잡고 있는 괴물의 손을 베어내고, 신관의 온몸을 물어뜯고 있는 괴물의 머리를 발로 차 부쉈다.
성기사들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괴물의 썩은 뇌수와 썩은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괴물의 잘린 팔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지면에 내동댕이쳐졌다.
삽시간에 주위는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피비린내도 짙게 맡아진다.
그런데도 신관들의 입에서 여전히 처절한 비명성이 세어 나왔다. 통로가 그들의 비명으로 가득 채워진다.
“아아악!!”
“살려줘!”
그러나 그 비명도 얼마가지 못했다. 목이 뜯기고 또 심장을 잃고서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성기사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세 명의 신관 모두는 처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컥.”
신관들이 모두 죽자 성기사들의 사기는 급속도로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애써 뚫었던 악마 석상들의 포위망이 다시 쳐졌다.
존 하엘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어느새 자신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석상들을 본다.
‘하… 살기 어려울 것 같군.’
확실히 살기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존 하엘은 절망한 낯빛으로 검을 휘둘렀다.
깡!
그들은 분투했으나, 한 명씩 쓰러졌다. 결국 전멸하고 말았다.
붉은색 구 안에서 나타난 형상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공포와 두려움, 원망 섞인 표정을 하고 선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걸 발견한 선우는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엉덩이와 허벅지로 바닥의 먼지를 마구 쓸며 구슬로부터 필사적으로 멀어졌다.
덜덜덜.
선우는 무서웠다. 구슬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왠지 모르게 사람의 영혼 같았다.
영혼이 갑자기 왜 저 안에 들어온 것일까? 도대체 왜?
선우는 무섭고 두려운 한편 궁금해졌다. 귀신에 대한 공포를 예전에 한 번 몇 시간 동안 절실히 경험해서 그런지 어느 시점이 지난 순간에는 궁금증 공포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커진 궁금증은 서서히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들었고, 잃어버린 이성을 다시 찾게 만들었다.
이성을 겨우 되찾은 선우는 피식 웃었다.
‘지는 리치이면서.’
리치 주제에 귀신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원혼만 딸랑 있는 게 귀신이고 원혼에 죽은 사체가 입혀져 있는 게 죽되 산 자인 언데드이지 않은가?
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귀신과 비슷한 존재임을 자각했다. 안 먹어도 되고 추위, 더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리치로서의 삶을 애써 거부한 이유를 그제야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귀신에 대한 공포가 싹 사그라들었다. 더 이상 귀신이 두렵지도, 또 무섭지도 않았다.
마이너스적 감정을 완전히 떨쳐낸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둥지둥 필사적으로 멀어질 때와는 다르게 자신감 있는 발걸음으로 붉은색 구슬 앞에 다가갔다.
‘어디 보자…….’
선우는 구슬 바로 앞까지 머리를 가져가 구슬 안을 다시 자세히 살펴봤다.
‘영혼이 맞는 것 같은데……?’
구슬 안에 있는 것은 영혼이었다. 소설 속 세계관이 과학 문명 세계가 아닌 판타지 세계이니 홀로그램일 리는 없었다. 거기다 이곳은 리치 킹의 무덤이다. 죽은 자들의 왕인 리치 킹의 무덤.
이곳에 수정구슬이 있고, 그 수정 구슬 안에 저런 게 있다면 백이면 백, 영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리치 킹이라는 존재가 할 짓 없어서 이상한 장난감을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결정적으로 모양 자체가 영혼을 떠올리게 한다. 가끔씩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람의 형상은 저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영혼이라 말하고 있다.
선우는 저게 영혼이 맞다고 확신했다. 그러자 의문이 생겨났다.
‘갑자기 구슬 안으로 영혼이 왜 들어온 거지? 뭣 때문에?’
영혼들이 어디서 왔는지, 영혼이 왜 이 구슬로 들어오는지 궁금했다. 그러다 우연히 시야 가장자리를 보게 되었다.
본래 67, 010, 01이던 글자들 중 하나가 안에서 봤던 영혼의 수만큼 바뀌고 있었다. 그러자 순간 어떤 가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선우가 이곳에 도망친 이유는 태양신교 인원들 때문이었다. 그 인원들이 다짜고짜 죽이려 하자 도망쳤고, 방심하다 일을 그르쳐 또다시 도망친 끝에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 과정 중에 기억나는 건 결계 밖에 아직도 태양신교 인원들이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이곳 결계 안으로 태양신교 인원들이 들어왔다면? 만약 저 붉은 벽돌이 태양신교 인원들을 해하는 함정의 스위치였다면, 만약 이 구슬 안에 들어 있는 영혼이 이런 과정 중 죽은 태양신교 인원들의 영혼이라면, 계속 올라가고 있는 숫자의 의미가 살해된 인원들의 수라면… 선우는 살인자가 된다. 미필적 고의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
선우는 전율을 느꼈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생각한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넷이라는 인원이 자신 때문에 죽은 것 같았다.
선우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선우는 살인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람 중에 살인자가 되고픈 사람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자신이 세운 가설을 애써 외면했다. 또 다른 가설을 억지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때, 구슬이 변하기 시작했다. 외면할 거리가 미치도록 필요했는데 마침 잘되었다.
선우는 재빨리 구슬의 변화를 지켜봤다.
‘어?’
구슬 속 영혼이 전부 분해되었다. 갑자기 아주 작게 입자화 되더니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곤 모든 입자가 한 덩어리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작은 점처럼 압축되었다가 부피를 키워 구슬을 가득 채워갔다. 그 순간 이곳 어딘가에서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뭔가가 지면과 부딪히며 나는 소리다.
선우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응?’
소리의 주인공은 지팡이처럼 생긴 나무였다. 빨간 벽돌, 앞의 구슬과 함께 의심했던.
나무는 덜거덕거리다 빠르게 날아오더니 갑자기 떠오르기 시작한 구슬과 합체했다.
구슬과 나무가 합쳐지면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색으로 물든 빛, 아니 어둠이 주위를 삼킨다.
공간은 삽시간에 빛을 잃었다. 이윽고 짙은 어둠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얼마 후, 어둠이 서서히 걷혔다. 그리고 걷힌 어둠을 뚫고 서서히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그것은 지팡이였다.
리치 킹의 무덤에 있는 것이니 리치 킹의 지팡이겠지.
선우는 이렇게 소설 속 히든 피스를 우연히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