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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선우는 침대에 주저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깨자마자 심신이 크게 놀라서 그런지 전신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선우는 약 30분 만에 침대에서 일어섰다. 움직일 힘이 돌아오자 배에선 꼬르륵 꼬르륵 밥 달라는 소리가 진동을 했다.
선우는 배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천천히 주방으로 갔다.
‘라면밖에 없지?’
선우의 집 주방엔 라면 말곤 먹을 게 없었다. 쌀도 있기는 하지만, 밥하려면 한참을 준비해야 했다.
선우는 찬장 선반을 열고 그곳에서 라면을 꺼냈다. 물을 받고 라면을 끓이기 위해 허름한 양은 냄비를 잡았다.
“응?”
냄비에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양은 냄비라 먼지 쌓인 게 매우 선명히 보인다. 그런데 좀 많이 쌓였다. 이삼일 지난 것 치곤 좀 많이 지나치다.
선우는 이상함을 느꼈지만 무시했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어떤 생각이든 하고 싶었다.
냄비를 물에 닦고 라면을 끓였다. 그리고 잠시 후 오동통하게 익은 라면을 입에 넣었다.
“오!!”
라면은 굉장히 맛이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호텔 요리 부럽지 않았다.
매우 허기진 상태에서 먹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혀에 맛이 느껴진다는 측면, 그게 정말 컸다.
‘맛을 느낄 수 있다니…….’
리치로 있을 때의 선우는 맛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리치로 있을 당시 먹은 것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먹은 눈과 흙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맛에 대한 소중함을 알 수 있었다.
선우는 라면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국물 한 방울, 면발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모두 먹었다.
식사를 마친 선우는 침대에 앉고 한쪽을 노려봤다.
“확인해야겠지…….”
빛이 들어온 순간부터 시야 한쪽에 반짝이는 뭔가가 보였다. 원래 있던 ‘OFF’라는 단어 대신 ‘Book Dream’이라고 쓰인 단어였다.
북 드림은 ‘보상 No.2’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눌러 봐야만 한다. 하지만 여태 누르지 않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사실 많이 무서웠다.
‘이번엔 제발…….’
선우는 망설임 끝에 그것을 눌렀다. 언젠가는 눌러야 할 테니까.
꾸욱.
‘Book Dream’ 글자를 누른 순간, 기절하기 전 끔찍한 기억을 안겨다 준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북 드림 시스템을 정식 사용을 정말 축하드립니다. 저는 북 드림 시스템 도우미, 라라입니다. 본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듣길 원하십니까?]
목소리는 어투와 달리 굉장히 친절했다. 마치 RPG 게임 속 도우미 같았다.
선우는 대답을 위해 시야에서 ‘Yes’와 ‘No’를 찾았다.
‘어디 있지?’
선우가 한참을 말을 하지 않자 목소리, 아니 라라가 다시 말했다.
[말로 대답하시면 됩니다.]
“말하라고?”
반사적으로 되물었지만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시스템이 질문에 대답할 정도로 똑똑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라라는 선우의 물음에 대답했다.
[예.]
선우는 깜짝 놀랐다. 보물과 대화가 가능한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 대화가 가능한 거야?”
[네, 그렇습니다.]
“…그럼 질문해도 돼?”
[물론 됩니다. 그러나 그 전에 본 시스템에 대해 설명을 먼저 듣는 걸 추천합니다.]
“그래? 그럼 해봐. 그 설명이라는 거.”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라라가 추천해 준대로 설명을 먼저 듣기로 했다.
라라는 곧장 이 시스템에 대해 설명했다.
[본 시스템은 ‘북 드림’입니다. 본 시스템은 환상족의 대현자 나그나록스 님이 약 2,500년 전에 후세를 위해 만들었습니다. 본 시스템의 목표는 사용자의 정신과 F형 인자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 시스템은 2,500년이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100%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본 시스템을 100% 이용하기 위해서는 대현자 나그나룩스 와 같은 F형 인자를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여태 본 시스템을 사용하고자 한 모든 사용자들은 F형 인자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사용자님께선 다행이도 대현자 나그나룩스님과 같은 특이 인자인 F형 인자를 보유하고 계십니다. 본 시스템으로 나그나룩스님처럼 정신뿐 아니라 육체와 F형 인자 또한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전반적인 성장 방법입니다. F형 인자를 성장시키기 위해선 상상력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상상력을 키우기 데는 책이 제일 좋습니다. 책을 많이 읽고 다양하게 읽는 것이 상상력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사용자님은 환상족이 아닌 휴먼족입니다. 환상족에 맞는 카테고리가 아닌 휴먼족에 맞는 카테고리로 분화하였습니다. 판타지, 무협, 게임, 퓨전, 역사, 로맨스, 일반. 이 7개 카테고리로 세분화된 책을 정해진 수만큼 읽고 그 소설 속에 직접 다녀오십시오. 상상으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7일간 경험을 하시어 F형 인자뿐 아니라 정신을 성장시키십시오. 성장한 F형 인자, 그리고 정신에 맞는 육체 성장 방법은 본 시스템이 시의적절하게 제시해 드릴 겁니다. 본 시스템이 인도하는 길을 잘만 따라와 주신다면 대현자 나그나룩스님처럼 되실 수 있습니다.]
북 드림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들었다. 장문에 가까운 설명 덕분에 책을 읽게 만든 이유, 소설 속 세상에 간 이유 등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납득 가지 않는 게 꽤 되었다. 대화가 가능한데다 얼마든지 물어보라고 했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선우가 입을 열자 라라는 곧장 대답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사용자님.]
“왜 처음부터 이 사실을 설명해 주지 않은 거야? 이상한 암호 같은 걸 보여줄 게 아니라 네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으면 좋았잖아?”
이 사실을 몰랐기에 생고생했다. 뚫어져라 암호 같았던 그것을 해독했고, 어떤 설명도 없었기에 무방비상태로 끌려갔다. 끌려간 곳에서는 정말 죽을 뻔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진짜 죽었다.
이미 한 번 갔다 오고 나서야 이런 설명을 해주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일부러 엿을 먹이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테니 의도를 꼭 들어야할 것 같았다.
선우의 질문에 라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본 시스템을 얻으셨을 당시 사용자님의 상상력은 매우 빈곤한 상태셨습니다. 얼마나 책이라는 것을 안 읽고 각박하게 사셨는지, 빈곤하기 그지없는 상상력 때문에 F형 인자의 씨앗도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이 시스템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일정 수준 이상으로 F형 인자가 성장 돼 있어야만 합니다. 더불어 일정 이상의 정신력과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용자님 같은 경우 그 최저치도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사용자님의 F형 인자 성장 속도로는 10년이 지나도 이 시스템을 사용하실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어졌습니다. 그래서 테스트 버전을 실행한 겁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 정신력과 상상력, 그리고 F형 인자가 네 기준치 도달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테스트 버전을 실행한 거다? 그게 테스트 버전이라 불친절했던 거고?”
[그렇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거짓말 아니지?”
[본 시스템은 사용자님께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용자님도 내심 느끼셨을 것 아닙니까. 100권의 판타지 소설을 읽고 소설 속 세상을 경험함으로서 상상력과 정신이 꽤 많이 성장했다는 걸.]
라라의 말대로 선우의 상상력은 일취월장했다. 100권의 판타지 소설을 읽고 소설 속 세상에 들어가 종일 생각하다 보니 큰 폭으로 정신과 상상력이 성장했다.
보물을 얻기 전 같았으면 돌을 보고 그냥 돌이구나 했을 터였다. 돌이 움직이면 어떨까? 돌이 뭐를 닮았네?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을 테다. 움직이는 돌의 모습 또한 전혀 연상되지 않았을 것이다. 선우의 상상력은 그만큼 빈곤했으니까.
선우는 납득했다. 머리는 확실히 납득됐고, 저 선택이 이해됐다. 하지만 마음은 선뜻 납득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분했다. 그래서 선우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마음을 겨우겨우 진정시켰다.
“후… 후…….”
선우는 붉어진 얼굴로 다음 것을 물었다.
“인정! 인정해! 네 말대로 상상력 크게 늘었어. 정말 뒤질라게 고맙다, 뒤질라게…….”
[별말씀을요.]
“이! 이!! 후… 그럼 다음 질문을 할게. 해도 되지?”
[얼마든지 하십시오.]
“보상은 왜 둘 중 하나를 고르라 한 거야? 네 말대로 되려면 이번 보상으로 무조건 북 드림 정식 버전을 얻어야만 했잖아. 내가 보상 No.2가 아닌 보상 No.1을 선택하면 어쩌려고?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게 하려면 보상이 한 개만 나오게 했어야 하는 것 아니야?”
[다 사용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를 위해서?”
[사용자님을 관찰한 결과 사용자님은 상상력을 키울 시간적 여유가 너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매일 일을 하다 보니 상상력 상승을 위한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 때문에 보상 두 개를 만든 겁니다. 스킬을 얻어 그 스킬로 돈을 벌라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신다면 자연스럽게 다시 책을 읽으실 것 아닙니까.]
“아니, 그러다 안 읽으면 어쩌려고? 보상 No.1만 받고 끝내면?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끌려갈 걸 알고 누가 책을 읽겠어?”
[솔직히 사용자님이 F형 인자를 성장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셔도 저는 그다지 상관없습니다. 본 시스템을 영원히 사용하지 않으셔도 저는 별말 하지 않았을 겁니다. 본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으면 제 손해가 아니라 사용자님의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라라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너무 맞아 얄미워 때려주고 싶을 정도다.
선우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한 번은 저 얄미운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다.
“알았어. 그럼 다음 질문을 할게. 아까 네가 설명하길, 소설 속 세상에 들어가면 그 소설 속 세상에서 7일 동안 있는 거라고 했어. 맞지?”
[예, 그렇게 설명 드렸습니다.]
“나도 소설 속 세상에 분명 들어갔어. 악마의 악마라는 빌어먹을 소설에 들어가게 되었지. 그런데… 왜 난 2, 3일 정도밖에 있지 않았던 거야? 1주일이라며? 혹시 테스트 버전이라서인가?”
선우는 이미 한 번 소설 속 세상에 들어갔다 왔다. 그곳에서 주인공인 리치로 살았다.
선우는 자신이 경험했던 일이 약 7일간 벌어진 일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적게는 이틀, 많게는 사일 정도의 일이라 생각했다.
선우의 이번 물음에도 라라는 곧장 대답했다.
[사용자님은 분명 7일간 그곳에서 있으셨습니다.]
“웃기는 소리 마. 분명 체감 상 이틀에서 삼 일이었어.”
[본 시스템은 사용자님에게 결코 웃기는 소리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
[혼자서는 영원히 이해를 못하실 것 같으니 설명 드리겠습니다.]
“…….”
[사용자님이 소설 속 세계로 들어가셨을 당시, 우측에 07이라는 아이콘이 있으셨을 겁니다. 기억하십니까?]
“07? 어, 있었어. 그게 뭐? 아, 설마…….”
[이해되십니까?]
‘07’에서 ‘7’의 의미는 ‘7일’이었다. ‘07’은 즉 ‘총 7일 중에 0일 지났다’는 뜻인 것이다.
선우는 이걸 전혀 생각지 못했다. 처음엔 의심했지만 기절하고 깨어나 보니 ‘4’가 되어 있어 의심을 완전히 지웠다. 게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14’가 올랐지 않는가? 14? 잠깐!
‘07’ 숫자의 의미를 알게 되니 자연스레 010의 의미도 궁금해졌다. 아주 잠깐 정신 건강을 위해 물어보지 말까 하다가 물었다.
“이해했어. 이해했으니까 곧장 다음 질문을 할게. 07 아래에 010 있었어. 이것도 알지?”
[예,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 010의 의미가 뭐야?”
[아실 것 같습니다만…….]
‘010’의 의미도 처음엔 짐작하지 못했다.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을 때에도, 리치 킹의 다이아몬드 해골이 있는 공간에 들어갈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빨간 벽돌을 누르고 유리구슬 안 14명의 영혼을 본 순간, 짐작이 갔다. 이 짐작이 맞지 않길 속으로 바랐을 정도다.
누군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방금 전까지 유지했던 평정심을 결코 유지할 수 없었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뜬구름 잡는 소리 말고 말해 봐! 뭔데?!”
[꼭 알고 싶으십니까? 모르는 척하는 것도 한 방법인데요?]
선우는 순간 라라의 말에 흔들렸다. 모른 척했던 그때처럼 이번에도 역시 모른 척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번엔 그 때와 달리 누군가가 권하고 있지 않은가? 비록 실체는 없고 말뿐인 누군가지만.
하지만 선우는 무수히 흔들렸음에도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결코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상황이 상황이라 모른 척했어. 모른 척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전부 알고 싶어. 모른 척하고 외면하고 싶지 않아.”
[돌아왔기 때문입니까?]
“어, 맞아. 돌아왔기 때문이야. 왜? 그럼 안 돼?”
[안 될 이유는 없습니다. 본 시스템은 사용자의 선택까지 왈가왈부하지 않으니까요. 그럼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선우는 침을 삼켰다.
꿀꺽.
[그것은 예상하신대로 당신이 죽인 적의 숫자와 당신이 죽여야 할 적의 숫자였습니다.]
‘010’의 ‘10’은 죽여야 할 사람의 수였다. ‘14’는 선우가 죽인 사람의 총 수였다.
선우는 할 말이 없었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선우가 불쌍했던지 라라가 말했다.
[위안 삼을 만한 말을 하나 해드립니까?]
“위안?”
[이 말을 들으신다면 죄책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라라가 해줄 말이 무엇일까? 어떤 말이기에 죄책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걸까?
사실 짐작은 간다. 소설 속 세상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더라면 영원히 짐작할 수 없었겠지만 현실로 돌아오고 북 드림에 대해 설명을 들은 지금은 짐작하지 못하는 게 병신이다.
아마도 실제 사람을 죽인 게 아닌 걸 거다. 게임 속 캐릭터와 같은 위치의 소설 속 캐릭터를 미필적 고의에 의해 죽이게 된 걸 거다.
그걸 내심 짐작했음에도 마음이 결코 편해지지 않았다. 한껏 굳어진 표정 또한 다시 풀리지 않았다.
현실에서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와 똑같이 외면했을 테니까.
그렇게 절망의 늪에 허우적거리던 중 의외의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나쁜가? 내가 이렇게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선우는 침대에 주저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깨자마자 심신이 크게 놀라서 그런지 전신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선우는 약 30분 만에 침대에서 일어섰다. 움직일 힘이 돌아오자 배에선 꼬르륵 꼬르륵 밥 달라는 소리가 진동을 했다.
선우는 배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천천히 주방으로 갔다.
‘라면밖에 없지?’
선우의 집 주방엔 라면 말곤 먹을 게 없었다. 쌀도 있기는 하지만, 밥하려면 한참을 준비해야 했다.
선우는 찬장 선반을 열고 그곳에서 라면을 꺼냈다. 물을 받고 라면을 끓이기 위해 허름한 양은 냄비를 잡았다.
“응?”
냄비에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양은 냄비라 먼지 쌓인 게 매우 선명히 보인다. 그런데 좀 많이 쌓였다. 이삼일 지난 것 치곤 좀 많이 지나치다.
선우는 이상함을 느꼈지만 무시했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어떤 생각이든 하고 싶었다.
냄비를 물에 닦고 라면을 끓였다. 그리고 잠시 후 오동통하게 익은 라면을 입에 넣었다.
“오!!”
라면은 굉장히 맛이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호텔 요리 부럽지 않았다.
매우 허기진 상태에서 먹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혀에 맛이 느껴진다는 측면, 그게 정말 컸다.
‘맛을 느낄 수 있다니…….’
리치로 있을 때의 선우는 맛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리치로 있을 당시 먹은 것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먹은 눈과 흙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맛에 대한 소중함을 알 수 있었다.
선우는 라면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국물 한 방울, 면발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모두 먹었다.
식사를 마친 선우는 침대에 앉고 한쪽을 노려봤다.
“확인해야겠지…….”
빛이 들어온 순간부터 시야 한쪽에 반짝이는 뭔가가 보였다. 원래 있던 ‘OFF’라는 단어 대신 ‘Book Dream’이라고 쓰인 단어였다.
북 드림은 ‘보상 No.2’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눌러 봐야만 한다. 하지만 여태 누르지 않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사실 많이 무서웠다.
‘이번엔 제발…….’
선우는 망설임 끝에 그것을 눌렀다. 언젠가는 눌러야 할 테니까.
꾸욱.
‘Book Dream’ 글자를 누른 순간, 기절하기 전 끔찍한 기억을 안겨다 준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북 드림 시스템을 정식 사용을 정말 축하드립니다. 저는 북 드림 시스템 도우미, 라라입니다. 본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듣길 원하십니까?]
목소리는 어투와 달리 굉장히 친절했다. 마치 RPG 게임 속 도우미 같았다.
선우는 대답을 위해 시야에서 ‘Yes’와 ‘No’를 찾았다.
‘어디 있지?’
선우가 한참을 말을 하지 않자 목소리, 아니 라라가 다시 말했다.
[말로 대답하시면 됩니다.]
“말하라고?”
반사적으로 되물었지만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시스템이 질문에 대답할 정도로 똑똑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라라는 선우의 물음에 대답했다.
[예.]
선우는 깜짝 놀랐다. 보물과 대화가 가능한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 대화가 가능한 거야?”
[네, 그렇습니다.]
“…그럼 질문해도 돼?”
[물론 됩니다. 그러나 그 전에 본 시스템에 대해 설명을 먼저 듣는 걸 추천합니다.]
“그래? 그럼 해봐. 그 설명이라는 거.”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라라가 추천해 준대로 설명을 먼저 듣기로 했다.
라라는 곧장 이 시스템에 대해 설명했다.
[본 시스템은 ‘북 드림’입니다. 본 시스템은 환상족의 대현자 나그나록스 님이 약 2,500년 전에 후세를 위해 만들었습니다. 본 시스템의 목표는 사용자의 정신과 F형 인자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 시스템은 2,500년이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100%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본 시스템을 100% 이용하기 위해서는 대현자 나그나룩스 와 같은 F형 인자를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여태 본 시스템을 사용하고자 한 모든 사용자들은 F형 인자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사용자님께선 다행이도 대현자 나그나룩스님과 같은 특이 인자인 F형 인자를 보유하고 계십니다. 본 시스템으로 나그나룩스님처럼 정신뿐 아니라 육체와 F형 인자 또한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전반적인 성장 방법입니다. F형 인자를 성장시키기 위해선 상상력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상상력을 키우기 데는 책이 제일 좋습니다. 책을 많이 읽고 다양하게 읽는 것이 상상력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사용자님은 환상족이 아닌 휴먼족입니다. 환상족에 맞는 카테고리가 아닌 휴먼족에 맞는 카테고리로 분화하였습니다. 판타지, 무협, 게임, 퓨전, 역사, 로맨스, 일반. 이 7개 카테고리로 세분화된 책을 정해진 수만큼 읽고 그 소설 속에 직접 다녀오십시오. 상상으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7일간 경험을 하시어 F형 인자뿐 아니라 정신을 성장시키십시오. 성장한 F형 인자, 그리고 정신에 맞는 육체 성장 방법은 본 시스템이 시의적절하게 제시해 드릴 겁니다. 본 시스템이 인도하는 길을 잘만 따라와 주신다면 대현자 나그나룩스님처럼 되실 수 있습니다.]
북 드림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들었다. 장문에 가까운 설명 덕분에 책을 읽게 만든 이유, 소설 속 세상에 간 이유 등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납득 가지 않는 게 꽤 되었다. 대화가 가능한데다 얼마든지 물어보라고 했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선우가 입을 열자 라라는 곧장 대답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사용자님.]
“왜 처음부터 이 사실을 설명해 주지 않은 거야? 이상한 암호 같은 걸 보여줄 게 아니라 네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으면 좋았잖아?”
이 사실을 몰랐기에 생고생했다. 뚫어져라 암호 같았던 그것을 해독했고, 어떤 설명도 없었기에 무방비상태로 끌려갔다. 끌려간 곳에서는 정말 죽을 뻔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진짜 죽었다.
이미 한 번 갔다 오고 나서야 이런 설명을 해주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일부러 엿을 먹이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테니 의도를 꼭 들어야할 것 같았다.
선우의 질문에 라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본 시스템을 얻으셨을 당시 사용자님의 상상력은 매우 빈곤한 상태셨습니다. 얼마나 책이라는 것을 안 읽고 각박하게 사셨는지, 빈곤하기 그지없는 상상력 때문에 F형 인자의 씨앗도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이 시스템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일정 수준 이상으로 F형 인자가 성장 돼 있어야만 합니다. 더불어 일정 이상의 정신력과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용자님 같은 경우 그 최저치도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사용자님의 F형 인자 성장 속도로는 10년이 지나도 이 시스템을 사용하실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어졌습니다. 그래서 테스트 버전을 실행한 겁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 정신력과 상상력, 그리고 F형 인자가 네 기준치 도달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테스트 버전을 실행한 거다? 그게 테스트 버전이라 불친절했던 거고?”
[그렇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거짓말 아니지?”
[본 시스템은 사용자님께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용자님도 내심 느끼셨을 것 아닙니까. 100권의 판타지 소설을 읽고 소설 속 세상을 경험함으로서 상상력과 정신이 꽤 많이 성장했다는 걸.]
라라의 말대로 선우의 상상력은 일취월장했다. 100권의 판타지 소설을 읽고 소설 속 세상에 들어가 종일 생각하다 보니 큰 폭으로 정신과 상상력이 성장했다.
보물을 얻기 전 같았으면 돌을 보고 그냥 돌이구나 했을 터였다. 돌이 움직이면 어떨까? 돌이 뭐를 닮았네?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을 테다. 움직이는 돌의 모습 또한 전혀 연상되지 않았을 것이다. 선우의 상상력은 그만큼 빈곤했으니까.
선우는 납득했다. 머리는 확실히 납득됐고, 저 선택이 이해됐다. 하지만 마음은 선뜻 납득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분했다. 그래서 선우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마음을 겨우겨우 진정시켰다.
“후… 후…….”
선우는 붉어진 얼굴로 다음 것을 물었다.
“인정! 인정해! 네 말대로 상상력 크게 늘었어. 정말 뒤질라게 고맙다, 뒤질라게…….”
[별말씀을요.]
“이! 이!! 후… 그럼 다음 질문을 할게. 해도 되지?”
[얼마든지 하십시오.]
“보상은 왜 둘 중 하나를 고르라 한 거야? 네 말대로 되려면 이번 보상으로 무조건 북 드림 정식 버전을 얻어야만 했잖아. 내가 보상 No.2가 아닌 보상 No.1을 선택하면 어쩌려고?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게 하려면 보상이 한 개만 나오게 했어야 하는 것 아니야?”
[다 사용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를 위해서?”
[사용자님을 관찰한 결과 사용자님은 상상력을 키울 시간적 여유가 너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매일 일을 하다 보니 상상력 상승을 위한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 때문에 보상 두 개를 만든 겁니다. 스킬을 얻어 그 스킬로 돈을 벌라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신다면 자연스럽게 다시 책을 읽으실 것 아닙니까.]
“아니, 그러다 안 읽으면 어쩌려고? 보상 No.1만 받고 끝내면?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끌려갈 걸 알고 누가 책을 읽겠어?”
[솔직히 사용자님이 F형 인자를 성장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셔도 저는 그다지 상관없습니다. 본 시스템을 영원히 사용하지 않으셔도 저는 별말 하지 않았을 겁니다. 본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으면 제 손해가 아니라 사용자님의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라라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너무 맞아 얄미워 때려주고 싶을 정도다.
선우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한 번은 저 얄미운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다.
“알았어. 그럼 다음 질문을 할게. 아까 네가 설명하길, 소설 속 세상에 들어가면 그 소설 속 세상에서 7일 동안 있는 거라고 했어. 맞지?”
[예, 그렇게 설명 드렸습니다.]
“나도 소설 속 세상에 분명 들어갔어. 악마의 악마라는 빌어먹을 소설에 들어가게 되었지. 그런데… 왜 난 2, 3일 정도밖에 있지 않았던 거야? 1주일이라며? 혹시 테스트 버전이라서인가?”
선우는 이미 한 번 소설 속 세상에 들어갔다 왔다. 그곳에서 주인공인 리치로 살았다.
선우는 자신이 경험했던 일이 약 7일간 벌어진 일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적게는 이틀, 많게는 사일 정도의 일이라 생각했다.
선우의 이번 물음에도 라라는 곧장 대답했다.
[사용자님은 분명 7일간 그곳에서 있으셨습니다.]
“웃기는 소리 마. 분명 체감 상 이틀에서 삼 일이었어.”
[본 시스템은 사용자님에게 결코 웃기는 소리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
[혼자서는 영원히 이해를 못하실 것 같으니 설명 드리겠습니다.]
“…….”
[사용자님이 소설 속 세계로 들어가셨을 당시, 우측에 07이라는 아이콘이 있으셨을 겁니다. 기억하십니까?]
“07? 어, 있었어. 그게 뭐? 아, 설마…….”
[이해되십니까?]
‘07’에서 ‘7’의 의미는 ‘7일’이었다. ‘07’은 즉 ‘총 7일 중에 0일 지났다’는 뜻인 것이다.
선우는 이걸 전혀 생각지 못했다. 처음엔 의심했지만 기절하고 깨어나 보니 ‘4’가 되어 있어 의심을 완전히 지웠다. 게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14’가 올랐지 않는가? 14? 잠깐!
‘07’ 숫자의 의미를 알게 되니 자연스레 010의 의미도 궁금해졌다. 아주 잠깐 정신 건강을 위해 물어보지 말까 하다가 물었다.
“이해했어. 이해했으니까 곧장 다음 질문을 할게. 07 아래에 010 있었어. 이것도 알지?”
[예,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 010의 의미가 뭐야?”
[아실 것 같습니다만…….]
‘010’의 의미도 처음엔 짐작하지 못했다.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을 때에도, 리치 킹의 다이아몬드 해골이 있는 공간에 들어갈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빨간 벽돌을 누르고 유리구슬 안 14명의 영혼을 본 순간, 짐작이 갔다. 이 짐작이 맞지 않길 속으로 바랐을 정도다.
누군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방금 전까지 유지했던 평정심을 결코 유지할 수 없었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뜬구름 잡는 소리 말고 말해 봐! 뭔데?!”
[꼭 알고 싶으십니까? 모르는 척하는 것도 한 방법인데요?]
선우는 순간 라라의 말에 흔들렸다. 모른 척했던 그때처럼 이번에도 역시 모른 척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번엔 그 때와 달리 누군가가 권하고 있지 않은가? 비록 실체는 없고 말뿐인 누군가지만.
하지만 선우는 무수히 흔들렸음에도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결코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상황이 상황이라 모른 척했어. 모른 척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전부 알고 싶어. 모른 척하고 외면하고 싶지 않아.”
[돌아왔기 때문입니까?]
“어, 맞아. 돌아왔기 때문이야. 왜? 그럼 안 돼?”
[안 될 이유는 없습니다. 본 시스템은 사용자의 선택까지 왈가왈부하지 않으니까요. 그럼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선우는 침을 삼켰다.
꿀꺽.
[그것은 예상하신대로 당신이 죽인 적의 숫자와 당신이 죽여야 할 적의 숫자였습니다.]
‘010’의 ‘10’은 죽여야 할 사람의 수였다. ‘14’는 선우가 죽인 사람의 총 수였다.
선우는 할 말이 없었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선우가 불쌍했던지 라라가 말했다.
[위안 삼을 만한 말을 하나 해드립니까?]
“위안?”
[이 말을 들으신다면 죄책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라라가 해줄 말이 무엇일까? 어떤 말이기에 죄책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걸까?
사실 짐작은 간다. 소설 속 세상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더라면 영원히 짐작할 수 없었겠지만 현실로 돌아오고 북 드림에 대해 설명을 들은 지금은 짐작하지 못하는 게 병신이다.
아마도 실제 사람을 죽인 게 아닌 걸 거다. 게임 속 캐릭터와 같은 위치의 소설 속 캐릭터를 미필적 고의에 의해 죽이게 된 걸 거다.
그걸 내심 짐작했음에도 마음이 결코 편해지지 않았다. 한껏 굳어진 표정 또한 다시 풀리지 않았다.
현실에서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와 똑같이 외면했을 테니까.
그렇게 절망의 늪에 허우적거리던 중 의외의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나쁜가? 내가 이렇게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