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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계의 용사였습니다 9화

해프닝(3)


“우리가 여기까지 와야 해?”
“그놈의 커피 맛이 뭔지… 너무 민감한 거 아니야?”
“아, 그래서 내가 사준다고 했잖아! 내가 다 사준다고! 난 내가 먹고 싶은 거 아니면 안 먹어!”
우림이 소리를 버럭 지른다. 선우와 아린은 입술을 비쭉 내밀며 말을 멈춘다. 반대로 선이는 호호 웃으며 말한다.
“그래도 우림 언니가 사주는 음식은 정말 맛있잖아요. 오빠도 저번에 먹었던 스테이크 맛있었다면서 다시 먹고 싶었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선우는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었고, 선이는 퉁명스럽게 말한다.
“했어.”
‘그래……?’
‘그래……?’
우림은 눈을 반짝인다. 반대로 아린의 눈동자는 어두워진다. 똑같은 생각을 하지만 느낌이 다르다.
선이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넷은 우림이 아는 일식집으로 향했다. 메뉴는 말했다시피 규카츠. 당연한 말이지만 맛있었다. 가격표가 없는 집이었다. 나중에 계산할 때 계산표를 슬쩍 보았는데 0이 좀 많이 있던 것 같아서 왠지 식은땀이 흘렀다. 이 여자와 같이 있으면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금수저는 다르다.
카페는 역시 카페 밀라. 우림이 카페 밀라에 가야 한다고 억지를 부려서 결국 버스로 20분 거리인 이곳까지 왔다. 뭐, 규카츠가 맛있었으니까 참는다.
우림과 아린은 드립 커피, 선이는 화이트 초코 모카, 선우는 모카치노에 휘핑크림 올려서.
선우는 우림과 아린을 보며 끔찍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런 석탄 물 같은 거 어떻게 먹는 거냐?”
“맛있어, 생각보다.”
“칼로리도 적고.”
“칼로리를 왜 걱정해?”
선우는 쯧쯧 혀를 찼고, 선이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말한다.
“그쪽 살 안 찐다고 우리한테까지 헛소리하지 마시지 그래.”
선우는 커피를 쪽쪽 마시며 ‘어쩌라고’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선이는 소리를 지를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심호흡을 한 다음 커피를 마신다. 달다. 맛있다.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걸로 참자. 우림은 잠시 무표정한 얼굴을 하다가 말한다.
“선우 너, 요즘 성적은 어때?”
“그걸 왜 물어보는데?”
선우가 쏘아붙이자 우림은 잔소리하듯 말한다.
“너도 고3이야. 이제 곧 기말이고. 수시는 포기했을 거 아니야? 수능이라도 잘 쳐야지. 건수 오빠 같은 천성대는 무리라도 가시대나 시리대는 가야할 거 아니야?”
“난 학교 졸업하면 막노동하러 갈 건데. 대학이 뭐가 중요해?”
“오빠, 막노동할 거야?”
선이는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선우는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문제 있냐?”
“아니, 언니들 중 한 명 골라서 기둥서방으로 살 거 아니었어?”
“헛소리는 넣어 둬라.”
선우는 선이의 이마를 탁 쳤고, 선이는 이마를 매만지며 말한다.
“아, 그런데 오빠, 기원이 옆에 있던 여자 누군지 알아?”
“난들 알겠냐.”
선우는 한숨을 쉬었고, 우림과 아린은 몸을 그들에게 기울이며 말한다.
“걔들 언제부터 사귀고 있는 건지 알아?”
“나 걔 얼굴 본 적 있어. 개건고 학생이야.”
“다른 학교 애 얼굴을 네가 어떻게 아는데?”
“발이 넓으니까.”
선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다.
“기원이, 저번 주에는 다른 여자랑 데이트했는데. 우림이 너희 학교 다혜였나.”
“진짜?”
“어? 잠깐만. 한 달 전에 거리에서 봤을 때는 다른 사람이었는데?”
“걔 능력 사용한 거 아니야?”
아린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헤어질 때는 사용해도 만날 때는 안 써.”
우림은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걔가 그렇게 잘생겼나?”
“잘생기긴 했죠.”
선이는 즉각 대답한다. 다른 건 몰라도 겉모습은 확실히 만인의 연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잘생겼다. 아린은 쿡 웃으며 말한다.
“난 걔 죄악의 화신일 때부터 봐서 그다지 감흥이…….”
“풉, 죄악의 화신이라니. 다시 들어도 깨네요.”
선이는 웃음을 터뜨렸고, 선우도 픽 웃으면서 말한다.
“걔 죄악의 화신으로 처음 등장했을 때 기훈이 표정 기억나?”
“푸흐흐흡! 아, 떠올리게 하지 마. 그때는 그래도 심각했던 상황이었다고!”
우림은 웃음을 터뜨렸다가 입을 막았고, 선이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복장 좋았지∼ 중2의 정석이라고 해야 하나…….”
“형제가 쌍으로 대단했지. 한쪽은 뇌제라며 새하얗고 펄럭이면서 상체 다 드러내는 옷 입고 설치고, 한쪽은 죄악의 화신이라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옷으로 무장하고. 완전 중2 브라더스 아니었냐?”
선우는 쿡쿡 웃으면서 커피를 젓는다. 크림이 조금씩 녹고 있다. 커피 위에 크림이 둥둥 떠다니는 게 뭔가 기분 나쁘다. 선우는 후륵 커피와 크림을 마셔버린다.
“그래도 형은 꽤 노력하고 있어요. 아직도 그때의 옷을 입을 수 있게 몸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푸웁!”
선우는 커피를 뿜는다. 아슬아슬하게 왼쪽 눈이 자줏빛으로 물들며 손이 튀어나와 커피가 다른 사람의 얼굴에 묻지 않게 막았다. 선우는 기침을 하고, 기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왜요?”
“너 왜 여기에 있어? 여자 친구는?”
선우의 질문에 기원은 방긋 웃으며 말한다.
“돌려보냈는데요.”
“또 능력 썼냐?”
선우는 휴지로 입술을 닦는다. 기원은 하하 웃으며 답한다.
“글쎄요.”
“기분 나쁜 건 그대로네, 죄악의 화신.”
아린은 쿡쿡 웃었고 기원은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한다.
“그쪽 만하겠습니까, 충왕님.”
기원의 목소리가 약간 떨린다. 역시 동요하고 있었다. 아린은 픽 웃었고, 기원은 선이와 아린 사이에 앉으며 말한다.
“전부 다 오글거리는 이름들 가지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요? ‘충왕’이라든가.”
아린은 어깨를 으쓱인다.
“그건 괜찮잖아. 간단하고.”
확실히 충왕은 그냥 그저 그런 느낌이다. 죄악의 화신에 비하자면 말이다. 아린의 가벼운 대꾸에 기원은 타깃을 변경하여 우림을 본다.
“히로인(Heroine)이라든가.”
우림은 얼굴을 살짝 붉힌다.
“…왜, 뭐, 뭐가 문젠데.”
기원은 이번엔 선이를 본다.
“여신이라든가.”
선이는 커피를 우물거리며 마신 다음 기원의 명치에 주먹을 꽂는다.
쿵!
“윽!”
“네가 함부로 입에 담을 이름이 아니란다.”
“…….”
기원은 침묵했고, 선우는 끌끌 웃으며 말한다.
“다들 한심했네.”
“…….”
“…….”
“…….”
모두들 선우를 지그시 바라본다. 대표로 기원이 말한다.
“그러고 보니 형은 왜 별명이 없어요?”
“난 그 어릴 때 이미 알고 있었거든. 너희처럼 별명을 만들면 미래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을.”
어릴 때 꽤나 현명했던 선우다. 우림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저거 하나만큼은 인정해야겠네.”
“그런데 너 왜 왔냐? 여자랑 데이트 잘하다가 왜 능력까지 써서 돌려보내고 온 건데?”
선우는 컵을 비운다. 그리고 기원을 본다. 기원은 입맛을 쩝 다시고 말한다.
“형, 지금 데이터 꺼놨죠?”
“아마도.”
선우는 폰을 꺼내서 데이터를 켠다. 남자들 톡방에 뭔가 대화가 많이 올라와 있다.

우현 : 너희들 지금 어디야?
기원 : 밖인데요.
우현 : 기훈이랑 선우 어디에 있는지 알아?
기원 : 선우 형은 봤어요. 우림 누나랑 아린 누나랑 선이랑 같이 있었어요.
우현 : 아 이것들, 톡을 안 보네.
우현 : 걔들 어디로 갔어?
기원 : 음… 우림 누나 있었으니까 밀레 가지 않았을까요?
우현 : 그럼 나도 밀레로 갈 테니까 너도 밀레에 가 있어. 기훈이도 부르고.
기원 : 왜요?
우현 : 타자 치기엔 너무 기니까 만나서 말해줄게.
기원 : 예, 형.

기원은 답장이 굉장히 빠르다. 선우는 감탄하듯이 말한다.
“넌 쓸데없이 답장이 빠르네.”
“답장 빨리 안 해주면 여자들이 싫어해요.”
기원은 훈훈한 미소를 지었고, 선우는 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말한다.
“그래서 기훈이는?”
“형은 여자들이 싫어해요.”
“걘 폰을 왜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니까.”
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기훈은 자주 전화를 받지 않는다. 톡도 안 보고, 문자도 안 본다. 왜 폰을 들고 다니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때, 카페의 문이 열리며 우현이 들어온다. 옆에는 늘씬한 커리어 우먼이 있다. 갈색 머리카락이다. 화장이 화려하긴 하지만 확실히 예쁘다. 선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여자 친구 자랑하려고 부른 거였어?”
“이쪽은 환계 대책 본부의 환수처리부 부장인 인지 씨라고 해.”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선우가 인지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고 있을 때, 인지가 방긋 웃으며 말한다.
“반가워요. 인지라고 해요. 저희 본부장님이 무례하게 행동했다고 들었어요.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그쪽이 사과할 필요가 없어요. 사과할 거라면 본인이 직접 와야죠.”
우림은 싸늘하게 말한다. 기원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맞아요. 누나처럼 예쁜 사람이 사과를 하고 다닐 필요가 있어요?”
“또 병 도졌네, 쯧쯧.”
선이는 옆에서 혀를 차고 있고, 선우는 인지를 지그시 바라본다. 인지는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그를 보며 생긋 웃는다. 선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인구의 누나?”
“……?”
“호호, 들켰네. 일부러 화장 진하게 하고 왔는데.”
인지는 너털웃음을 지었고, 우현은 인지를 흘끔 본다. 인지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고, 기원은 일어서서 옆에 있는 의자를 가져오며 말한다.
“우선 앉아서 이야기하죠.”
“길게 얘기할 건 없는데.”
인지는 의자에 앉는다. 우현과 기원도 앉자 인지는 팔짱을 끼며 말한다.
“우현이가 우리 부에 들어오기로 했어. 돌격 팀에 넣기로 했지.”
“학교는?”
“학업 병행 가능이야. 어차피 우리나라에는 환수가 안 나와서 이름만 있는 부이기도 하고, 사실 할 일도 없어.”
인지는 다리를 꼬며 호호 웃는다. 시선이 우현에게 꽂힌다. 우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이게 최선이었어. 한 명 정도는 여기에 속하는 게 나아.”
“왜? 그냥 내가 거기 없애면 되는 거 아니야?”
아린은 손가락을 까딱인다. 손가락 끝에 작은 개미가 있다. 아린은 피식 웃는다. 개미가 사라진다. 우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적이야. 해외에 파견되어서 벌어오는 돈도 천문학적이야. 이곳이 사라지면 우리나라는 꽤 큰 타격을 입을 거야.”
“그게 뭔 상관인데?”
“그래, 돈도 문제지. 그런데…….”
그때, 인지가 끼어든다. 인지는 아린을 보며 말한다.
“우리들 다 죽일 수 있어?”
“어머, 총알 개미 무리한테 물리면 아마 죽고 싶을 걸?”
“후후, 사람을 죽이는 걸 너무 쉽게 말하네. 사람을 죽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이제 곧 성인이 되는 고등학생이 특별한 힘을 가졌으니 그런 착각을 하는 것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 우습긴 하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인지의 얼굴에 조소가 어린다. 그러자 아린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현을 본다. 우현은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린은 고개를 돌려 선우를 본다. 선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한다.
아린은 고개를 돌려 우림을 본다. 우림은 폰을 보고 있다.
아린은 고개를 돌려 선이를 본다. 선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다.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참고 있는 중이다.
아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지를 본다.
“뭐래니, 이 언니?”
“후후, 허세 부리고 싶은 마음도 이해해. 특별한 힘을 가진다는 건 설레는…….”
파스스.
그때, 발목에 불쾌한 느낌이 느껴진다. 인지는 고개를 숙인다. 발목을 타고 수많은 벌레들이 기어오르고 있다. 바퀴벌레, 개미, 송장벌레, 그리마, 빈대 등 수많은 벌레들이 다리를 타고 온몸으로 기어오른다.
“끼아… 읍!”
아린은 인지의 입을 막는다. 그러고는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말한다.
“우리 언니… 우리들에 대해 너∼무 모르는구나? 본부장님 목 졸린 건 못 들으셨나 봐?”
“으읍… 으으읍…….”
어느새 인지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벌레들이 다리를 타고 몸으로 계속 올라오고 있다. 벌레들이 꿈틀대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미쳐버릴 것처럼 괴로워하는 인지를 보며 아린은 속삭이듯이 말한다.
“난 대악마 루즈의 왼팔이었어. 충왕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모든 벌레들을 다룰 수 있어. 옆에 있는 이 용사님들은 나라는 존재 때문에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고, 먹을 것도 항상 조심해서 먹었어. 까딱하다 기생충이 들어 있는 음식을 먹으면 그대로 끝이거든. 내가 죽인 환수와 환인은 셀 수도 없어. 난 손가락 하나만 까딱이면 수천만의 목숨을 한순간에 거둘 수 있는, 그야말로 사신이었어. 그런 나한테 사람 죽이는 게 뭐… 어떻다고?”
아린은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일순간 벌레들이 사라진다. 인지는 숨을 헐떡였고, 아린은 그녀의 뺨을 쓰다듬어 준 다음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평범한 인간들 따위를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언니.”
“그만해. 혀 깨물라.”
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아린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생글생글 웃었고, 우현은 아린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가 인지의 팔을 잡으며 일어선다.
“데려다 주고 올게.”
“아, 저도 같이 갈게요.”
기원은 그렇게 말하며 인지의 다른 쪽 팔을 잡아준다. 인지는 이끌리듯 밖으로 나갔고,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선이는 킥킥 웃으며 말한다.
“이럴 때는 참 마음에 드네요, 아린 언니.”
“고마워.”
아린은 가볍게 인사한다. 지독했던 과거보다는 훨씬 낫지만 여전히 무서운 그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