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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계의 용사였습니다 11화

Pulse(1)


“경계가 불안정해졌으면 뭐… 환계랑 내계가 연결되기라도 한다는 거야?”
선우의 질문에 기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모르겠어요. 아직 알아낸 건 별로 없어요. 그래도 이전보다는 환계의 존재가 이곳 내계에 많이 넘어온다는 거랑 환계에 있을 때처럼 저희들이 환력을 자급자족으로 회복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초월자 씨께서 말해줬어요.”
“너 우현이 무지하게 싫어하네.”
선우는 비꼬듯이 말하는 기원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고, 기원은 하하 웃으며 말한다.
“예전부터 그 사람 별로 안 좋아했잖아요. 용사들 중에서 제일 싫어했어요. 형보다 싫어했는걸요.”
“좋은 앤데.”
선우의 말에 기원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그래서 더 싫어요.”
기원은 우현을 싫어한다.


“형, 아파요…….”
기원은 쓰라린 표정을 짓는다. 선우는 눈밑을 긁적이며 말한다.
“아… 미안, 힘 조절이 잘 안 되네.”
“따가운데…….”
“어, 피 난다. 미안.”
선우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기원은 몸을 돌리며 말한다.
“제가 먼저 해드릴까요?”
“어… 그게 좋겠다.”
선우는 뒤돌아섰고, 기원은 때타월을 손에 끼우고 선우의 등을 민다. 그러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역시 안 나오네요.”
“이번에도 그런가.”
선우는 무덤덤하게 몸에 물을 칠한다. 기원은 하하 웃으며 말한다.
“저희 형은 나오는데 말이에요.”
“이거 때문에 나는 그 녀석이랑 목욕탕을 못 가겠어.”
“저희 형은 그거 때문이 아니더라도 형이랑 목욕탕 가고 싶지 않아 할 거예요.”
“나도 가기 싫어.”
선우는 퉁명스럽게 대답했고, 기원은 손을 씻으며 말한다.
“다음번에는 나오지 않을까요?”
기원의 등에 난 상처는 이미 사라졌다. 선우는 주먹을 쥐며 말한다.
“그래, 다음번에는 나올 수도 있겠지.”
그리고 언제나 그 다음번에는 때가 나오지 않았다.


선우와 기원은 옷을 입고 있다. 기원은 옷을 입다가 말한다.
“형, 만약에 다시 환계로 넘어가게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네 머리통부터 부술 건데.”
선우는 즉각 대답했고 기원은 너스레를 떨듯 말한다.
“저 이제 착하잖아요.”
“헤어질 때 둘러대기 귀찮아서 기억 조작하는 녀석이 착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에이∼ 귀찮아서라뇨. 서로 편하게 헤어지기 위해서 그러는 건데요, 뭘.”
기원은 잔잔한 웃음을 지었고, 선우는 재킷을 걸치며 말한다.
“좋겠다, 그래.”
“형도 사귀려면 사귈 수 있잖아요.”
기원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고, 선우는 허허 웃으며 말한다.
“300년 간 나의 처녀를 지키기로 마음먹었거든.”
“순결이겠죠.”
“무튼 간에 말이야.”
“형, 그럼 우림 누나랑도 아무 일 없었던 거예요?”
“난 순결하다니까.”
“우와… 몇 년을 같이 있었는데…….”
기원은 신기하다는 듯이 그를 보며 조끼를 입는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바나나 우유와 빨대를 그에게 내밀며 말한다.
“좀 미지근해졌어도 상관없죠?”
“응.”
“전 완전히 차가운 건 별로거든요.”
푹. 쪼오오옥.
선우는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아서 마신다. 맛있다.
“형, 이제 뭐 할 거예요?”
“집 가서 자든가, 컴퓨터 하던가 해야지.”
“한가하면 저랑 영화라도 보러 갈래요?”
“너랑?”
“예.”
기원의 즉답에 선우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끔찍한 소리하지 마. 남자끼리 영화라니.”
“뭐가 문젠데요?”
기원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선우는 혀를 차며 말한다.
“그리고 기훈이라면 몰라도 너랑 둘이서 가는 건 안 돼. 내 순결이 위험하거든.”
“안 노리거든요. 형의 순결.”
“증명할 수 있냐?”
선우의 말에 기원은 고개를 숙였다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키면서 그를 보고 말한다.
“했잖아요.”
“…아무튼 싫어. 남자 두 명이서 어떻게 영화를 보러 가냐?”
“그럼 저희 형까지 해서 세 명이면 돼요?”
“걔 전화는 받아?”
“글쎄요.”
기원은 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기훈에게 전화를 한다. 역시 안 받는다. 기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안 받아요.”
“우현이 불러. 안 바쁘면 오겠지.”
“그 인간 오늘은 바쁘다고 했어요.”
“그럼 못 가는 거지, 뭐.”
선우는 정말 아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기원은 폰을 계속 바라보며 말한다.
“선이나 누나들은 어때요?”
“돼지는 팝콘 처먹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안 되고, 우림이나 아린이는 둘 중 하나만 부르면 나중에 들켰을 때 시끄럽고, 둘 다 부르면 그냥 싸워서 시끄러우니까 안 돼.”
선우의 말에 기원은 쿡쿡 웃으며 폰을 호주머니에 넣고 말한다.
“어째 사람 모으기가 참 힘드네요.”
“다들 개성적이니까 말이야.”
기원은 신발을 신으며 말한다.
“그럼 그냥 형네 집 가서 형 컴퓨터로 영화 볼까요?”
인도어 파 선우는 그건 환영이라는 듯이 바로 답한다.
“그거까지는 참아줄 수 있어.”
“먹을 거도 사 가요.”
“응.”
둘은 닭강정을 사서 영화를 보며 먹다가 갑자기 난입한 선이에게 닭강정을 모두 빼앗겼다고 한다.

***


어제 이야기다.
‘답답하다.’
수업은 지루하다. 다른 사람과는 대화를 하는 게 쉽지 않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은 그에게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지 않는다. 영화, 만화, 게임, 드라마. 모두 그저 그렇다. 자극을 원한다? 그런 의미는 아니다. 그냥… 뭔가가 답답하다.
그는 특별한 삶을 살았다. 수많은 사람들을 지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켜졌다. 전쟁 속에 살았고, 전쟁 속에서 죽어갔다. 하지만 전쟁에는 끝이 있고, 그는 살아서 전쟁을 끝내고 돌아왔다.
돌아온 이곳은 너무 평화롭다.
기훈은 주먹을 쥔다.
파지지직.
새하얀 스파크가 생성된다. 이것만으로도 수십 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죽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으득.
기훈은 이를 간다. 초라한 힘만이 그에게 남아 있다. 그래, 힘은 의미가 없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비참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는 이렇게 되기 위해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연구해 보곤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인간이 환력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로선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거든. 환력이란 것 자체가 환수와 환인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힘인데, 그걸 인간이 쓴다는 것 자체가… 솔직히 우린 이해할 수 없어.”
“그러니까 이게 무슨 개념이냐 하면… 아, 진짜…….”
‘이런 건 기원이가 잘하는데.’
기훈은 답답한 표정을 짓는다. 말을 잘 못하겠다. 추상적인 개념은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수가 없다. 애초에 그는 무언가를 설명하는 게 전문이 아니다. 그냥 앞에 나서서 싸우는 게 전문이다. 환계 대책 연구소장 주환은 볼펜 뒤쪽으로 머리를 긁으며 말한다.
“일단 네 힘의 구조가 환계로 들어가면서 부여된 너만의 ‘힘’을 환계의 존재의 환력을 빌려 발동시킨다, 이거지?”
“비슷해요.”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 왜 너에게 힘이 부여된 거야? 그 힘을 부여한 건 누구고?”
“그러니까 내 힘은 껍데기 같은 거고, 내 힘을 가지고 있던 원래 환계의 존재는 루즈에 의해 죽었고, 나는 그러니까 그 껍질을 입은 거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어…….”
기훈은 여전히 답답한 표정이다. 말하고는 싶은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환은 한숨을 쉬고 무언가를 메모하며 말한다.
“그러니까 그 힘은 죽은 환계의 존재에게서 받은 힘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닌데? 좀 똑바로 말해 봐! 말 못해? 국어 안 배웠어? 한국말 몰라? 내가 영어로 말하고 있어? 왜 말을 제대로 못하는데!”
결국 주환은 폭발한 듯 소리를 친다. 기훈은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를 뿌득 갈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기훈은 폰을 꺼내서 기원에게 전화를 건다. 기원은 금방 전화를 받는다.
― 왜, 형?
“야, 지금 내 힘 누구한테 설명해야 하는데, 네가 대신 설명해 줘.”
― 형, 형이랑 내 힘은 구조가 달라서 내가 아는 거랑 형이 아는 거랑은 좀 달라.
“그럼 어떻게 해?”
― 선우 형이라면 잘 말해 주지 않을까?
“선우?”
― 아니면 건수 형한테 전화해 봐. 바쁘지 않으면 잘 설명해 줄 거야.
“…알았어.”
뚝.
기훈은 전화를 끊고는 한숨을 쉬었다가 전화번호부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리고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결국 ‘선우’라는 이름을 누른다.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띡.
― 네가 전화를 하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냐?
“시끄럽고, 너, 우리들의 힘의 구조에 대해서 잘 알아?”
― 모르는 건 너뿐일 걸?
“누구한테 설명 좀 해줘야 하는데, 할 수 있냐?”
― 뭐… 일단은.
“얘가 설명해 줄 거예요.”
기훈은 주환에게 폰을 내민다. 주환은 폰을 받는다. 그리고 선우와 대화한다.
“오… 그렇군… 오오… 오… 아… 아! 그렇군!”
주환은 뭔가 감탄하면서 계속 메모한다. 기훈은 입술을 깨문다. 짜증난다.
주환은 메모를 끄적끄적 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고맙군. 다음에 연구소에 오면 내가 밥 한 번 살게.”
― 필요 없어요.
“그거 아쉽네.”
― 기훈이 바꿔주세요.
“여기.”
주환은 기훈에게 폰을 내민다. 기훈은 폰을 받으며 말한다.
“할 말 다했지?”
― 야, 뇌제.
“…….”
― 그렇게 불렸던 건 과거라는 거 알고 있지?
“쓸데없는 소리하면 그냥 끊는다.”
― 적당히 하고 꿈 깨.
삑.
기훈은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폰을 노려보다가 호주머니에 넣는다. 주환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이해하겠어! 그래, 그런 거구나. 믿음의 이식! 환계란 것 자체가 물질계와는 조금 다른 곳이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어. 그래서 껍데기라고 말한 거였구나!”
“그럼 이제 제 힘을 되찾을 수 있는 거죠?”
“그게 그렇게 쉬우면 너도나도 환계의 힘을 썼겠지. 우선 외부에서 환력을 네 몸에 넣는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야. 예전에 너희들은 동조라는 방식으로 환력을 받았다고 했지? 하지만 지금은 동조를 할 수 없잖아. 우선 환력이 생성된 곳은 알려줄 테니까 그곳에서 환력을 어떻게든 흡수하는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끝이에요?”
“응.”
기훈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고, 주환은 메모를 톡톡 치며 말한다.
“어쩔 수 없어. 너에 관한 자료는 이것뿐이잖아. 우리들은 환력을 인간이 쓴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고. 무엇보다 환력을 쓰는 순간부터 인간이 아니라는 거잖아. 너희야 뭐 특별한 경우라고 쳐도 우리들은 그런 건 무섭다고.”
“…….”
기훈의 얼굴이 아주 약간 일그러졌다. 주환은 옆에 둔 서류 뭉치를 기훈에게 내밀며 말한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갑자기 환력이 지속적으로 나타난 장소는 이 정도야. 학교 마치고 한 번 가 보든가. 교통비는 입금해 뒀으니까 택시를 타든, 기차를 타든, 뭘 타든 알아서 하고.”
기훈은 서류를 받은 다음 주환을 바라보며 말한다.
“같이 가서 뭐 봐주는 것도 아니에요?”
“실험용 장비를 멀리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같이 가긴 왜 가?”
“…….”
주환의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한 말에 기훈의 얼굴은 굳었고, 주환은 가볍게 말한다.
“알아서 잘하고, 내가 알 만한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대답해 줄 테니까.”
주환은 메모를 가지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간다. 기훈은 멍하니 서류 뭉치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며 돌아선다.
그는 이런 꼴을 당하기 위해 살아남은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