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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계의 용사였습니다 12화
Pulse(2)
선우와 기원이 목욕탕에 있을 때, 기훈은 기차를 타고 있었다. 그는 서울로 가고 있었다.
‘광화문에 왜 환력이 많이 생성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나마 가까운 게 여기니까…….’
기훈은 멍한 얼굴로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 그냥 잡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기훈은 서울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광화문 광장으로 간다. 생각보다 요금이 얼마 안 나온다. 모범택시를 탈 걸 그랬다.
기훈은 광화문 광장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확실히 환력이 느껴지긴 한다. 그런데 애매하다. 환수가 내뿜는 기운이라기보다는 환계 자체에 존재하는 환력이라는 느낌이다. 그다지 특색이 없다.
기훈은 걷는다. 위치에 따라 환력의 분포가 다르다. 어느 한 지점에 구멍이 있어서 그 구멍을 통해 환력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저기요! 화단으로 들어가시면 안 돼요!”
누군가가 기훈을 막는다. 하지만 기훈은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 앞으로 나간다. 그는 이미 화단 안에 들어가 있었다.
“저기요! 화단… 어?”
파지지지직!
그때, 기훈의 앞에 스파크와 함께 거대한 구멍이 생겨난다. 기훈은 멈춘다. 피부가 찌릿찌릿하다. 기분이 오싹오싹하다. 이 느낌, 오랜만이다.
파바바바바박!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듯 수많은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끼, 끼야아아아악!”
“뭐야!”
날개가 달린 물고기, 다리가 달린 꽃, 얼굴이 달린 거울, 불도마뱀, 얼음 깃털의 새, 바람 갈기의 사자. 환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특이한 생명체들이 쏟아져 나온다. 환수들은 주변으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혼란에 빠진다. 환수들은 기본적으로 얌전하다. 어둠 속성이나 서로 상반되는 속성, 혹은 성격이 특별히 나쁘지 않는 이상 누구도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이 느낌, 오랜만이다. 느껴본 적 있다. 기훈의 눈이 날카롭게 변한다.
파지지지직.
기훈의 양손에서 스파크가 튄다. 기훈은 몸을 돌린다. 그 순간 스파크가 온몸으로 퍼진다.
파바바바박!
기훈의 몸이 일순간 여럿으로 분열되듯 흩어졌다가 다시 구멍 앞에 선다. 기훈은 숨을 헐떡이고 있다. 어느새 그의 근처에 있던 환수들은 모두 사라졌다.
이 느낌은 분명히 변질된 환수들에게서 느껴지던 감각이다. 루즈와 싸울 때 적들에게서 느껴지던 것과 같은 느낌이다.
‘겨우 이 정도로……!’
기훈은 쓰라린 표정을 짓는다. 원래는 구멍에서 나온 환수들 전부를 없애려고 했는데 그의 근처에 있는 환수들만 없앨 수 있었다. 이걸로 환력이 거의 다 떨어졌다. 더 멀리 있는 환수들을 공격하기엔 환력이 부족하다. 구멍에서 나오는 환력을 흡수해 보지만 구멍에서 나오는 미약한 환력으로는 그의 기술을 사용할 정도의 환력을 충당하기 힘들다.
기훈은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든다. 환수들이 주변으로 퍼지고 있다. 사납게 변하고 변질된 환수들은 인간들을 공격하려고 한다. 기훈은 입술을 깨물며 환수를 향해 달려간다.
환력이 거의 없는 지금의 그는 속성이 뚜렷한 환수를 공격할 수 없다. 그나마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익어(翼魚)나 워킹 플라워(Walking Flower), 면경(面鏡)정도. 그거라도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런데 저런 녀석들이라도 이길 수 있을까?’
달려가던 기훈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멈춰 버린다.
물론 그는 신체 능력이 용사들 중에서 거의 최고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남자다. 하지만 그것도 환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환력을 머금지 않은 몸은 피를 머금지 않은 근육과 같다.
거기에 그는 현역으로 싸우지 않은지 벌써 6년이 다 되어간다. 6년은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없긴 하지만 짧은 시간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시간이다. 몸이 제대로 움직여 줄지 의문이다.
번개를 일으킬 수도 없고, 번개처럼 움직일 수도 없다. 상처 부위를 번개로 바꾸었다가 원래대로 되돌려 상처를 낫게 할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기훈은 멈춰선 채로 고개를 숙인다. 무기력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 괴로운 것이었나.
위이이이잉!
“거기 학생! 이쪽으로 빨리 와!”
경찰들이 몰려온다. 기훈은 그들을 본다. 총을 들고 있다. 저걸로 환수들이 대미지를 입을까?
“서, 선배, 저거 쏴도 되는 거 맞아요?”
“몰라. 일단 민간인 맞으면 X되니까 저 애부터 일단 끌고 와!”
슝!
“저 여기에 있어요. 쏴도 될 거예요.”
“……?!”
그때, 기훈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옆에 나타난다. 이동만이라면 할 수 있을 정도의 환력은 남아 있다. 그것도 많지는 않지만 말이다.
경찰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서로 눈치를 본다. 선배로 보이는 사람이 후배에게 말한다.
“일단 주변 시민들 대피시키고 바리게이트 만들어. 지원 올 때까지 일단 대치만 한다.”
“예!”
“잠깐만요, 대치만 한다고요?”
기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선배 경찰은 그를 보며 말한다.
“시민들 다 대피시키는 게 우선이야. 잘못 쐈다가 사람 맞으면 골치 아파져.”
“저 녀석들 내버려두면 사람들 더 다칠 거라고요!”
기훈은 환수를 가리키며 소리쳤고, 선배 경찰은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래도 시민의 대피가 우선이다. 우리들이 쏘는 총에 사람들이 죽게 할 수는 없어.”
“…그렇다면.”
기훈의 눈동자에 의지가 깃든다. 선배 경찰이 그를 잡기 전에 그는 사라진다. 사라졌던 그는 가장 가까이 있던 환수의 위에 나타난다.
빡!
“끼에엑!”
나는 발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다. 발뒤꿈치가 익어의 머리에 꽂힌다. 익어의 머리는 굉장히 단단하지만 환력의 보호가 없는 내 육체로도 타격을 입힐 수 있을 정도의 강도밖에 되지 않는 듯하다.
나는 직감했다. 하급 환수에 불과한 이들이라면 아무 능력 없는 지금의 나라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첫 익어 한 마리를 바닥에 으깨 부순다. 환수는 죽으면 입자가 되어 사라진다. 익어도 입자가 되어 사라진다. 나는 고개를 돌린다. 이제 한 마리다. 아직 수십 마리도 넘게 남아 있다. 환력은 이제 정말로 다 떨어졌다. 움직이는데 쓸 환력도 없다. 남은 것은 두 다리와 두 팔뿐이다.
이런 거, 싫지 않다.
슬슬 환수들이 나를 의식하는 것 같다. 슬금슬금 흩어지던 환수들이 나를 향해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흩어지면 상대하기 더욱 힘들 뿐이다. 이 정도 숫자를 쉽게 상대할 수는 없지만… 뭐, 어쩔 수 있나.
나는 나를 향해 갑자기 날아오는 익어 한 마리의 날개를 붙잡고 바닥으로 패대기친다. 그리고 짓밟는다.
콰직!
익어의 머리가 터지며 입자가 되어 사라진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다. 된다. 상대할 수 있다. 그 옛날 어렸을 적에는 익어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여섯 명 모두가 목숨을 걸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 혼자서 환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한 마리를 쉽게 죽일 수 있다. 옛날과는 다르다.
온몸의 감각이 활성화된다. 할 수 있다는 의지가 가슴을 채운 순간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죽음을 각오했던 조금 전의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나에게로 날아오는 환수들이 그저 우습게 보인다. 나는 수많은 역경을 이겨낸 용사다. 이 정도 위험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익어들을 나는 몸을 숙여 피하고 나를 향해 살그머니 다가오는 워킹 플라워들을 향해 발차기를 한다. 한 방에 여러 마리가 나가떨어진다. 입자화되지는 않는다. 이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
그때 나에게 불길이 쏟아진다. 불도마뱀인가. 나는 굴러서 불길을 피한다. 아슬아슬했다. 맞았으면 상당히 아팠겠지. 피한 곳에는 면경이 있다. 면경의 입이 열리며 빛이 모인다. 나는 그대로 면경의 얼굴에 박치기를 먹인다. 면경이 깨지며 입자화된다. 면경의 몸은 꽤나 강도가 약하다.
점점 몸이 가속된다. 다가오는 환수들을 한 마리, 한 마리 확실하게 처리하고 있다. 불도마뱀이나 얼음 깃털의 새, 바람 갈기의 사자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먹을 휘두른다. 발차기를 한다. 익어나 워킹 플라워, 면경 정도는 잡을 수 있으니 그것들을 휘둘러 불도마뱀이나 얼음 깃털의 새, 바람 갈기의 사자도 공격한다.
팔꿈치로 찍는다. 무릎으로 찍는다. 발로 짓밟는다. 손등으로 쳐낸다. 갖가지 동작들이 이어지며 적들을 물리쳐간다.
두근. 두근.
좀 더 빠르게.
두근. 두근.
좀 더 강하게.
두근. 두근.
그 화려했던 시절처럼 멋지게.
“저… 저게 대체 무슨…….”
“우와…….”
“영화라도 찍는 거야?!”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이 더 강하게 뛴다. 몸이 멈추지 않는다. 그 시절, 그때의 감각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다. 마치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간 것 같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숨이 가빠진다. 땀이 흐른다. 근육이 꿈틀거린다.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지금, 심장이 강하게 뛰고 있다.
“하아… 하아… 하아…….”
기훈은 숨을 헐떡이고 있다. 심장이 터질 듯이 강하게 뛰고 있다. 근육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너무 격하게 움직였나.
환수들은 전부 처리했다. 손이 부어 있다. 온몸이 욱신거린다. 그럴 만도 하지.
기훈은 가만히 서서 계속 숨을 고르고 있다.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쾌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한 달성감과 만족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거다. 이것이 그가 살아남은 이유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살아온 그가 짊어진 업보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야 할 그의 숙명이다.
그는 지키기 위해 살아남았다.
가만히 서 있는 기훈에게 사람들이 다가온다. 궁금할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 왜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과 싸웠는지, 괴물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라면 알 것 같다.
숨을 고르던 기훈은 순간 움찔했다가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소리친다.
“가까이 오지 마!”
“……?”
쿵!
그때, 구멍에서 또다시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기훈은 그것을 향해 몸을 날린다. 기훈의 몸이 구멍에서 새롭게 나온 것의 몸에 닿는다. 기훈은 그것을 밀어서 다시 구멍 속으로 넣으려고 한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기훈은 입술을 깨문다.
텁
“……!”
휭! 쿵!
그때 기훈이 붙잡은 존재가 기훈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올린다. 기훈은 반항을 하려고 했지만 그전에 그의 몸은 뒤로 날아간다.
“…윽.”
바닥에 처박힌 기훈은 비틀거리며 일어섰고, 구멍에서 나온 환계의 존재는 비웃으며 말한다.
“큭큭큭, 이게 누구야,용사님 아니신가?”
기훈은 고개를 들어 그가 안고 있는 환인을 본다. 강철로 이루어진 몸체, 평범한 인간과는 크기부터 달리하는 존재. 기훈도 평범한 사람보다는 굉장히 큰 편이지만 그런 기훈보다 머리 두 개 정도는 큰 덩치.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철인 바이언. 강철의 힘을 다루는 금속계 환인이다.
Pulse(2)
선우와 기원이 목욕탕에 있을 때, 기훈은 기차를 타고 있었다. 그는 서울로 가고 있었다.
‘광화문에 왜 환력이 많이 생성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나마 가까운 게 여기니까…….’
기훈은 멍한 얼굴로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 그냥 잡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기훈은 서울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광화문 광장으로 간다. 생각보다 요금이 얼마 안 나온다. 모범택시를 탈 걸 그랬다.
기훈은 광화문 광장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확실히 환력이 느껴지긴 한다. 그런데 애매하다. 환수가 내뿜는 기운이라기보다는 환계 자체에 존재하는 환력이라는 느낌이다. 그다지 특색이 없다.
기훈은 걷는다. 위치에 따라 환력의 분포가 다르다. 어느 한 지점에 구멍이 있어서 그 구멍을 통해 환력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저기요! 화단으로 들어가시면 안 돼요!”
누군가가 기훈을 막는다. 하지만 기훈은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 앞으로 나간다. 그는 이미 화단 안에 들어가 있었다.
“저기요! 화단… 어?”
파지지지직!
그때, 기훈의 앞에 스파크와 함께 거대한 구멍이 생겨난다. 기훈은 멈춘다. 피부가 찌릿찌릿하다. 기분이 오싹오싹하다. 이 느낌, 오랜만이다.
파바바바바박!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듯 수많은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끼, 끼야아아아악!”
“뭐야!”
날개가 달린 물고기, 다리가 달린 꽃, 얼굴이 달린 거울, 불도마뱀, 얼음 깃털의 새, 바람 갈기의 사자. 환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특이한 생명체들이 쏟아져 나온다. 환수들은 주변으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혼란에 빠진다. 환수들은 기본적으로 얌전하다. 어둠 속성이나 서로 상반되는 속성, 혹은 성격이 특별히 나쁘지 않는 이상 누구도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이 느낌, 오랜만이다. 느껴본 적 있다. 기훈의 눈이 날카롭게 변한다.
파지지지직.
기훈의 양손에서 스파크가 튄다. 기훈은 몸을 돌린다. 그 순간 스파크가 온몸으로 퍼진다.
파바바바박!
기훈의 몸이 일순간 여럿으로 분열되듯 흩어졌다가 다시 구멍 앞에 선다. 기훈은 숨을 헐떡이고 있다. 어느새 그의 근처에 있던 환수들은 모두 사라졌다.
이 느낌은 분명히 변질된 환수들에게서 느껴지던 감각이다. 루즈와 싸울 때 적들에게서 느껴지던 것과 같은 느낌이다.
‘겨우 이 정도로……!’
기훈은 쓰라린 표정을 짓는다. 원래는 구멍에서 나온 환수들 전부를 없애려고 했는데 그의 근처에 있는 환수들만 없앨 수 있었다. 이걸로 환력이 거의 다 떨어졌다. 더 멀리 있는 환수들을 공격하기엔 환력이 부족하다. 구멍에서 나오는 환력을 흡수해 보지만 구멍에서 나오는 미약한 환력으로는 그의 기술을 사용할 정도의 환력을 충당하기 힘들다.
기훈은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든다. 환수들이 주변으로 퍼지고 있다. 사납게 변하고 변질된 환수들은 인간들을 공격하려고 한다. 기훈은 입술을 깨물며 환수를 향해 달려간다.
환력이 거의 없는 지금의 그는 속성이 뚜렷한 환수를 공격할 수 없다. 그나마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익어(翼魚)나 워킹 플라워(Walking Flower), 면경(面鏡)정도. 그거라도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런데 저런 녀석들이라도 이길 수 있을까?’
달려가던 기훈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멈춰 버린다.
물론 그는 신체 능력이 용사들 중에서 거의 최고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남자다. 하지만 그것도 환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환력을 머금지 않은 몸은 피를 머금지 않은 근육과 같다.
거기에 그는 현역으로 싸우지 않은지 벌써 6년이 다 되어간다. 6년은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없긴 하지만 짧은 시간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시간이다. 몸이 제대로 움직여 줄지 의문이다.
번개를 일으킬 수도 없고, 번개처럼 움직일 수도 없다. 상처 부위를 번개로 바꾸었다가 원래대로 되돌려 상처를 낫게 할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기훈은 멈춰선 채로 고개를 숙인다. 무기력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 괴로운 것이었나.
위이이이잉!
“거기 학생! 이쪽으로 빨리 와!”
경찰들이 몰려온다. 기훈은 그들을 본다. 총을 들고 있다. 저걸로 환수들이 대미지를 입을까?
“서, 선배, 저거 쏴도 되는 거 맞아요?”
“몰라. 일단 민간인 맞으면 X되니까 저 애부터 일단 끌고 와!”
슝!
“저 여기에 있어요. 쏴도 될 거예요.”
“……?!”
그때, 기훈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옆에 나타난다. 이동만이라면 할 수 있을 정도의 환력은 남아 있다. 그것도 많지는 않지만 말이다.
경찰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서로 눈치를 본다. 선배로 보이는 사람이 후배에게 말한다.
“일단 주변 시민들 대피시키고 바리게이트 만들어. 지원 올 때까지 일단 대치만 한다.”
“예!”
“잠깐만요, 대치만 한다고요?”
기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선배 경찰은 그를 보며 말한다.
“시민들 다 대피시키는 게 우선이야. 잘못 쐈다가 사람 맞으면 골치 아파져.”
“저 녀석들 내버려두면 사람들 더 다칠 거라고요!”
기훈은 환수를 가리키며 소리쳤고, 선배 경찰은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래도 시민의 대피가 우선이다. 우리들이 쏘는 총에 사람들이 죽게 할 수는 없어.”
“…그렇다면.”
기훈의 눈동자에 의지가 깃든다. 선배 경찰이 그를 잡기 전에 그는 사라진다. 사라졌던 그는 가장 가까이 있던 환수의 위에 나타난다.
빡!
“끼에엑!”
나는 발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다. 발뒤꿈치가 익어의 머리에 꽂힌다. 익어의 머리는 굉장히 단단하지만 환력의 보호가 없는 내 육체로도 타격을 입힐 수 있을 정도의 강도밖에 되지 않는 듯하다.
나는 직감했다. 하급 환수에 불과한 이들이라면 아무 능력 없는 지금의 나라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첫 익어 한 마리를 바닥에 으깨 부순다. 환수는 죽으면 입자가 되어 사라진다. 익어도 입자가 되어 사라진다. 나는 고개를 돌린다. 이제 한 마리다. 아직 수십 마리도 넘게 남아 있다. 환력은 이제 정말로 다 떨어졌다. 움직이는데 쓸 환력도 없다. 남은 것은 두 다리와 두 팔뿐이다.
이런 거, 싫지 않다.
슬슬 환수들이 나를 의식하는 것 같다. 슬금슬금 흩어지던 환수들이 나를 향해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흩어지면 상대하기 더욱 힘들 뿐이다. 이 정도 숫자를 쉽게 상대할 수는 없지만… 뭐, 어쩔 수 있나.
나는 나를 향해 갑자기 날아오는 익어 한 마리의 날개를 붙잡고 바닥으로 패대기친다. 그리고 짓밟는다.
콰직!
익어의 머리가 터지며 입자가 되어 사라진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다. 된다. 상대할 수 있다. 그 옛날 어렸을 적에는 익어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여섯 명 모두가 목숨을 걸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 혼자서 환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한 마리를 쉽게 죽일 수 있다. 옛날과는 다르다.
온몸의 감각이 활성화된다. 할 수 있다는 의지가 가슴을 채운 순간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죽음을 각오했던 조금 전의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나에게로 날아오는 환수들이 그저 우습게 보인다. 나는 수많은 역경을 이겨낸 용사다. 이 정도 위험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익어들을 나는 몸을 숙여 피하고 나를 향해 살그머니 다가오는 워킹 플라워들을 향해 발차기를 한다. 한 방에 여러 마리가 나가떨어진다. 입자화되지는 않는다. 이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
그때 나에게 불길이 쏟아진다. 불도마뱀인가. 나는 굴러서 불길을 피한다. 아슬아슬했다. 맞았으면 상당히 아팠겠지. 피한 곳에는 면경이 있다. 면경의 입이 열리며 빛이 모인다. 나는 그대로 면경의 얼굴에 박치기를 먹인다. 면경이 깨지며 입자화된다. 면경의 몸은 꽤나 강도가 약하다.
점점 몸이 가속된다. 다가오는 환수들을 한 마리, 한 마리 확실하게 처리하고 있다. 불도마뱀이나 얼음 깃털의 새, 바람 갈기의 사자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먹을 휘두른다. 발차기를 한다. 익어나 워킹 플라워, 면경 정도는 잡을 수 있으니 그것들을 휘둘러 불도마뱀이나 얼음 깃털의 새, 바람 갈기의 사자도 공격한다.
팔꿈치로 찍는다. 무릎으로 찍는다. 발로 짓밟는다. 손등으로 쳐낸다. 갖가지 동작들이 이어지며 적들을 물리쳐간다.
두근. 두근.
좀 더 빠르게.
두근. 두근.
좀 더 강하게.
두근. 두근.
그 화려했던 시절처럼 멋지게.
“저… 저게 대체 무슨…….”
“우와…….”
“영화라도 찍는 거야?!”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이 더 강하게 뛴다. 몸이 멈추지 않는다. 그 시절, 그때의 감각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다. 마치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간 것 같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숨이 가빠진다. 땀이 흐른다. 근육이 꿈틀거린다.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지금, 심장이 강하게 뛰고 있다.
“하아… 하아… 하아…….”
기훈은 숨을 헐떡이고 있다. 심장이 터질 듯이 강하게 뛰고 있다. 근육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너무 격하게 움직였나.
환수들은 전부 처리했다. 손이 부어 있다. 온몸이 욱신거린다. 그럴 만도 하지.
기훈은 가만히 서서 계속 숨을 고르고 있다.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쾌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한 달성감과 만족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거다. 이것이 그가 살아남은 이유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살아온 그가 짊어진 업보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야 할 그의 숙명이다.
그는 지키기 위해 살아남았다.
가만히 서 있는 기훈에게 사람들이 다가온다. 궁금할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 왜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과 싸웠는지, 괴물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라면 알 것 같다.
숨을 고르던 기훈은 순간 움찔했다가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소리친다.
“가까이 오지 마!”
“……?”
쿵!
그때, 구멍에서 또다시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기훈은 그것을 향해 몸을 날린다. 기훈의 몸이 구멍에서 새롭게 나온 것의 몸에 닿는다. 기훈은 그것을 밀어서 다시 구멍 속으로 넣으려고 한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기훈은 입술을 깨문다.
텁
“……!”
휭! 쿵!
그때 기훈이 붙잡은 존재가 기훈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올린다. 기훈은 반항을 하려고 했지만 그전에 그의 몸은 뒤로 날아간다.
“…윽.”
바닥에 처박힌 기훈은 비틀거리며 일어섰고, 구멍에서 나온 환계의 존재는 비웃으며 말한다.
“큭큭큭, 이게 누구야,용사님 아니신가?”
기훈은 고개를 들어 그가 안고 있는 환인을 본다. 강철로 이루어진 몸체, 평범한 인간과는 크기부터 달리하는 존재. 기훈도 평범한 사람보다는 굉장히 큰 편이지만 그런 기훈보다 머리 두 개 정도는 큰 덩치.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철인 바이언. 강철의 힘을 다루는 금속계 환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