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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계의 용사였습니다 13화

Oh my friend(1)


“넌……?”
기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치다. 바이언의 얼굴이 꿈틀거린다.
“후, 후후, 기억 못할 수도 있지. 나는 철인 바이언. 철인 중 하나로…….”
“철인 군단의 졸병인가.”
기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그가 예전에 무수히 상대했던 졸개들 중 한 명이다. 이젠 이런 녀석도 제대로 쓰러뜨리기 힘든 건가.
바이언은 호통하듯 소리친다.
“하! 졸병이라니! 난 철인 군단 십장 바이언. 그 옛날 대악마 루즈 님의 아래에서 활약했던 다섯 군단에 속해 있던 간부다!”
“십장이 간부라니, 웃기지도 않잖아.”
기훈은 한숨을 쉰다. 저런 녀석에게 날아가다니. 뇌제 체면이 말이 아니다.
“후후, 그것보다 뇌제여, 6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 옛날 멀리서나마 봤을 때도 선명히 느껴지던 그 강인한 번개의 환력이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군.”
바이언은 비릿한 표정을 지었고, 기훈은 이를 악물며 바이언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바이언의 몸을 붙잡고 밀어내려 한다. 하지만 바이언의 몸은 꿈쩍도 않는다. 바이언은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하하! 전설의 용사도 이제 별거 아니군. 이게 힘을 다 준 건가? 환계의 산들바람도 이것보단 강할 것 같군.”
“…저 구멍은 환계랑 이어진 거냐?”
“당연하지. 후후, 너희 용사들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너를 죽이고 너의 몸은 그분의 위업의 달성을 위한 포석으로 사용해 주마!”
바이언은 그렇게 말하며 팔을 든다. 기훈은 이를 빠득 갈며 온몸에 힘을 준다. 하지만 이미 환수들을 처리하느라 많이 지친 상태에다가 상대는 몇 톤에 가까운 무게를 가진 환인이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바이언은 들어 올렸던 손을 강하게 내리찍었고, 기훈은 눈을 꼭 감으며 온몸에 힘을 준다.
“파트너, 위험한 것 같네?”
“……!”
파지지지직!
“으윽?!”
그 순간, 기훈의 온몸에서 스파크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바이언은 당황한 듯 손을 휘둘렀지만 기훈은 손을 들어 간단하게 바이언의 손목을 잡는다. 바이언은 기겁했고, 기훈은 고개를 든다. 그의 머리카락 색이 변하고 있다. 진한 푸른빛이다.
“이, 이 환력은?!”
바이언은 당황할 때 기훈은 바이언의 손을 천천히 내리며 말한다.
“힘을 잃었다고?”
“말도 안 돼… 폴 님께선 분명히… 용사들은 힘을 잃었다고…….”
바이언이 덜덜 떤다. 기훈은 바이언의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래, 잃었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기훈의 몸에서 환력이 솟구쳐 하늘로 올라간다. 기훈은 바이언을 밀며 소리친다.
“뇌격(雷擊)!”
쿠릉. 쿠르르릉. 콰직!
한 가닥의 가느다란 번개의 줄기가 바이언을 관통한다. 바이언은 우뚝 멈춘다. 정수리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바이언은 천천히 입자가 되어 사라진다.
기훈은 양손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주먹을 쥐고 눈을 감았다가 뜬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돌린다.
“오랜만이야.”
그의 옆에 얼굴의 반쯤이 푸른 비늘로 덮인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용왕 청경. 환인이자 환수이며, 기훈의 유일한 동조자다.
청경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기훈은 그를 보았다가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며 살짝 떤다. 기훈은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정말… 오랜만이야.”
드디어 다시 만났다.

***


“…….”
“형.”
선이에게 닭강정을 빼앗기고 낙심하고 있던 선우와 기원. 둘은 아련한 표정으로 영화를 보던 중 갑자기 경직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동시에 어딘가를 바라본다. 기원은 선우를 불렀고, 선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청경……?”
“맞…죠?”
“이건 청경 맞는데……?”
기원과 선우는 서로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린다.
“오빠! 이거 더 사와! 맛있… 어, 미안. 좋은 분위기였는데 방해했네.”
선이는 당차게 들어와서 빈 상자를 내밀었다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기원과 선우를 보며 멈칫한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나가려고 한다. 선우는 그녀를 보며 말한다.
“야, 넌 아무렇지도 않냐?”
“뭐가?”
“지금… 청경의 기운이 안 느껴져?”
“청경? 용왕? 기훈 오빠 파트너 기운이 왜? 설마 느껴져?”
선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기원은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말한다.
“왜 내계에 청경이 온 걸까요? 아니, 어떻게 왔을까요?”
“기훈이 이 새끼, 또 뭔 짓을 저지른 거야?”
“뭔데, 뭔데, 똑바로 말을 좀 해봐.”
선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고, 선우는 웃옷을 걸치며 말한다.
“일단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어.”
“그럴 필요 없어.”
“……!”
그때, 기훈의 목소리가 들린다. 셋은 고개를 돌려 침대를 본다. 기훈이 침대에 앉아 있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이다. 선우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선이가 들고 있는 빈 박스를 뺏어서 접은 다음 기훈의 머리를 내리치며 말한다.
“신발, 벗어, 병신아.”
팍! 팍! 팍!
“악! 미안! 벗을게!”
기훈은 황급히 신발을 벗은 다음 헛기침을 하며 손을 옆으로 살짝 내민다. 그의 손바닥 위에 작은 용이 앉아 있다. 용은 고개를 까딱이며 말한다.
“반갑군, 용사들이여, 오랜만이다. 죄악의 화신도 오랜만이군.”
“그 이름으론 안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기원은 너털웃음을 지었고, 용왕 청경은 기훈의 어깨에 앉으며 말한다.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미안하게 됐다. 환계의 존재가 내계에 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지금은 긴급사태라서 어쩔 수가 없다.”
“긴급사태라면…….”
“그래.”
청경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진중한 어조로 말한다.
“다시 환계에 위기가 찾아왔다. 그것도 이번엔 내계에 큰 영향을 미칠 위기가. 너희들의 힘이 필요하다. 용사들이여.”
“그래? 그럼 다른 사람 찾아.”
선우는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의 대답에 기훈은 사납게 소리친다.
“선우, 너!”
“뇌제님? 오랜만에 힘 되찾으니까 머리에 물 좀 차십니까? 그럼 그 물은 좀 빼는 게 어떠합디까?”
선우는 혀를 차며 말한다. 기훈은 스파크를 조금씩 튀기며 말한다.
“환계와 내계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하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서야 할 거 아니야!”
“우리가 나설 이유는 하나도 없어. 아니, 우리가 나서면 안 돼.”
선우는 고개를 저었고, 기훈은 그를 노려보며 말한다.
“어째서?”
“너, 환계에 아직 어렸던 우리가 끌려간 이유가 뭔지 몰라?”
“선택받았으니까!”
“그래, 그 선택받은 이유가 뭔지 몰라?”
선우의 물음에 기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한다.
“선택받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들, 왜 선택받은 거야?”
갑자기 의아하다는 듯이 선이가 묻는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들이 선택받은 이유. 그저 그들은 용사니까 선택받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기원은 선우의 눈치를 본다. 과연 선우는 말할 것인가? 그 이유를?
선우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그 이유는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어야 환계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야. 신체 능력 같은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올림픽 선수 같은 사람들이 소환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힘도 없고 그저 멍청한 애들에 불과한 우리들이 소환된 이유는 환계의 힘을 받아들이기에 최적의 신체를 가졌기 때문이었어. 그것 때문이었다고.”
과거형이다. 청경은 말한다.
“알고 있었군. 네아가 말해준 건가?”
“뭐, 그런 셈이지.”
“…이유는 그렇다 치고, 그게 무슨 문젠데?”
기훈은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러자 선이가 그제야 납득을 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는 환계의 힘을 받아들이기에 최적의 신체가 아니라는 거야?”
선이의 말에 기훈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선우는 무덤덤한 얼굴로 말한다.
“그래, 너희들이 힘을 잃은 것도 다 그것 때문이야. 점점 너희들의 몸이 환계의 힘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몸이 되는 거야. 그래서 원래 있던 환력도 점점 없어지는 거지.”
“그, 그래도 난 지금 청경에게 힘을 받고 있고…….”
기훈은 청경을 본다. 청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선우는 혀를 차며 말한다.
“동조해 봐.”
“동조?”
“그래, 동조.”
“동조를 하면 이 집이 무너질 텐데.”
그 말에 선우는 왼쪽 눈을 자줏빛으로 물들이며 말한다.
“멍청한 소리하지 말고.”
“…그래, 뭐, 동조 파동 정도는 막을 수 있겠지.”
기훈은 그렇게 말하며 청경을 잡는다. 청경은 기훈을 보며 말한다.
“갑자기 이렇게 할 수 있겠나?”
“물론이지. 몇 년간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기훈은 눈을 감는다. 그리고 양손을 모은다.
―동조―
파지직! 파지지직!
양손에 푸른빛 스파크가 튄다. 스파크는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진다. 푸른 번개로 인해 기훈의 몸이 보이지 않게 된다. 스파크는 주변으로도 튀었지만 무언가에 막혀 주변에 피해를 주지 못한다.
잠시 후, 스파크가 사라지고 기훈의 모습이 드러난다. 환한 푸른빛 머리카락. 오른쪽 머리에는 용의 뿔이 돋아나 있다. 오른쪽 눈 근처에는 비늘이 덮여 있다. 그의 오른손도 비늘로 덮여 있다. 기훈이 눈을 뜬다. 눈은 푸른빛을 띠고 있다.
기훈은 자신의 양손을 살핀다. 그리고 입술을 깨문다. 선우는 퉁명스럽게 말한다.
“알겠냐? 얼마나 불안정해졌는지.”
“…….”
기훈이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한다. 선우는 혀를 차고, 선이와 기원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기훈의 상체가 드러난다. 기훈은 상체를 이리저리 살핀다. 그리고 선우를 향해 소리친다.
“거울은!”
“쯧쯧.”
선우가 손을 뻗는다. 그의 손에 전신 거울이 잡혀 있다. 선우는 전신 거울로 기훈을 비춰준다.
기훈은 전신 거울로 비춰진 자신을 바라본다. 오른쪽 손목의 조금 위까지만 비늘이 덮여 있다. 몸에는 비늘이 전혀 덮여져 있지 않다. 기훈은 뒤돌아서서 등을 비춰본다. 아무것도 없다.
기훈의 얼굴엔 충격이 깃든다. 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10퍼센트? 그 정도는 되냐?”
“…청경, 어째서야? 어째서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기훈은 허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파지지직!
순간 스파크가 튀면서 기훈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기훈의 어깨엔 청경이 앉아 있다. 청경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쩔 수 없다. 선우의 말대로다. 지금의 네 몸은 더 이상 내 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아니다. 이 이상의 동조는 네 몸을 해칠 뿐이다.”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야?”
“아마 비슷할 거라고 본다.”
청경의 말에 선이는 조금 서운한 표정을 지었고, 선우는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은퇴야. 우리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또 다른 때를 타지 않은 선택받은 사람이 나타나고, 그 사람들이 환수와 환인에게 힘을 받아 세계를 지켜야 하는 거야. 우리가 할 일은 없다고.”
“넌…….”
청경은 선우를 보았고, 선우는 그를 쏘아본다. 청경은 입을 다물었고, 선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뇌제라는 이름도, 청경도, 신기들도 이제 포기해. 놓을 때가 됐어.”
“…네아가 눈앞에 나타나도 그런 말을 할 거냐?”
“네아는 이미 죽었는데 무슨 헛소리야?”
“…….”
선우의 답에 기훈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선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나도 심한 말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여기까지 해. 다른 애들 꼬드겨서 용사 짓거리 할 생각도 하지 마. 이제 정말로 포기할 때가 됐어.”
“넌… 안 아까워?”
기훈은 조금 붉어진 눈으로 선우에게 한마디 했고, 선우는 문을 열고 손짓을 하며 말한다.
“아까울 게 뭐가 있어?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닌데.”
“…….”
“옷은 입고 가라. 쪽팔리니까.”
“이, 입을 거야.”
기훈이 그대로 문으로 나가려고 하자 선우가 그를 제지한다. 기훈은 당황하며 침대에 벗어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 선우는 기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은 다음 기원을 보며 말한다.
“넌 안 가냐?”
“저 오늘 자고 가면 안 돼요?”
“왜?”
“형이 괴롭힐 것 같아서요.”
“…마음대로 해.”
선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오빠, 기훈 오빠 자살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저 녀석은 자살을 할 위인은 아니야. 짊어진 게 얼마나 많은데.”
선우는 혀를 쯧쯧 찬 다음 선이를 보며 말한다.
“그나저나 너도 조만간 그분 얼굴 보겠네?”
“여와 님?”
“엉.”
선우의 말에 선이는 목을 긁는다. 그렇겠네. 다들 넘어온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