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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계의 용사였습니다 20화

속마음(1)


안쪽에 있는 안락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신비한 분위기의 여인. 여러 장의 천을 두른 묶은 머리에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여인이다.
반투명한 흰색 천을 가장 안쪽에, 그 다음으로 붉은색 천을, 그 다음으로 검은색 천을 두르고 푸른색 천 띠로 다른 천들을 고정하고 있다. 뺨은 약간 붉지만 표정이 없기에 차갑게 느껴진다. 중국 고대 삼황 중 하나인 여와다.
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오랜만입니다, 선우. 여전히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계시군요.”
“그거 기훈이 있을 때는 말하지 맙시다, 좀.”
“알겠습니다.”
선우는 혀를 차고는 슥 옆을 본다. 선이가 투덜대며 그의 옆에 앉고 있다. 아직 안 온 사람은 우현과 건수, 그리고 기원과 행방불명되었다는 기훈인가. 우림은 눈을 감으며 말한다.
“우현이는 건수 오빠랑 있어. 무슨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마 건수 오빠가 바빠서 여기에 못 올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기원이는 오고 있어. 이제 1층이야.”
그녀의 눈에는 모든 것이 보인다. 몇 번이나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사기적인 능력이다. 선우는 탁자에 몸을 기울이며 말한다.
“중요한 이야기는 우현이까지 오고 이야기하고,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다음 주 수학여행 가는 사람?”
“서아 여고는 다음 주에 수학여행이야.”
“당연히 아니겠지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오사카니?”
“매년 같은 곳에 가면 이제 슬슬 안 물어도 괜찮지 않아?”
우림은 빙그레 웃었고, 선우는 ‘부르주아 놈들에게는 죽창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하며 선이를 본다.
“그럼 너도 같이 오는 거냐?”
“난 수련회 가는데.”
“다행이네.”
“오사카로.”
“…….”
선우는 눈을 파르르 떤다. 안 그래도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수학여행이든, 수련회든, 어디로 가든 간에 우림과 같이 가서 껄끄러운데 이번엔 선이와 기원이까지 보게 됐다. 선우는 흘끔 아린을 보았고, 아린은 방긋 웃으며 말한다.
“난 그때 해외여행 갔다 올 거야.”
“…….”
“오. 사. 카. 로.”
“…….”
“작년이랑 재작년에는 어떤 못생긴 여자의 방해 공작으로 실패했는데, 올해는 성공했거든. 호호.”
올해는 아린까지 보는 건가. 암담하다. 우림은 비아냥거리듯이 말한다.
“수학여행까지 따라오다니, 끔찍하기 그지없네.”
“응? 뭐라고? 학교 이사장인 아빠한테 떼써서 올해만 고3 수학여행 가게 만든 정신병자 말이라서 안 들리는데?”
“…….”
호호 웃으며 말하는 아린의 말에 우림의 광대가 움찔거린다. 어떻게 알았지. 사실이라서 반박도 못하겠다.
선이는 선우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오빠, 저 언니들은 도대체 무슨 콩깍지가 껴서 오빠 같은 사람한테 이 정도로 맹목적인 사랑을 보내는 걸까?”
“너희 어머니 만수무강.”
“내 어머니면 오빠 어머니기도 하거든?”
“그러니까 만수무강하시라고.”
“…….”
분명 욕이 아닌데 미묘하게 기분 나쁘다. 선이는 입술을 비쭉였고, 기원이 문을 열며 들어온다.
“뭔 사단인데요? 아, 여와 님, 안녕하세요.”
기원의 인사에 여와는 무심히 답한다.
“안녕하세요, 죄악의 화신.”
“…….”
‘오자마자 극딜 넣네, 끔찍한 년.’
기원은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으며 선우의 옆에 앉는다. 그리고 여와를 흘끔 보고 우림을 흘끔 본 다음 선우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저희 형이 또 뭐 했어요?”
“은거하셨대.”
“가지가지 하네요. 이참에 그냥 뒤지지.”
“형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
“이제 슬슬 제가 죄악의 화신일 때 죽이지 않은 것이 후회될 지경이거든요.”
기원은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때, 베란다 쪽에서 갑자기 나타난 고래의 입이 열리며 우현이 나온다. 우현은 쓰린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건수 형은 바빠서 못 온대.”
“그럴 수도 있지.”
선우는 납득할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여와는 무심한 어조로 말한다.
“내계의 위기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당장 눈앞의 일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 위기보다는 중요한 법이잖습니까.”
선우는 어깨를 으쓱였고, 여와는 그들을 슥 둘러보며 말한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말이 있으니 그것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 환계의 몇몇 구역이 내계로 전이되고 있습니다. 악마 ‘폴’이 일으키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잡아 죽여요.”
선우는 간단하게 답한다. 여와는 선우를 보며 말한다.
“그게 쉬우면 제가 여기에 왔겠습니까?”
“몇 천 년간 현역인 여와 님을 비롯한 환계의 신들이 퇴역 용사 및 퇴역 악당인 저희들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은 단합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단합이 됩니다. 그 차이만으로도 여러분들의 힘은 저희보다 뛰어납니다.”
“놀랍게도 저희는 환계와 단합이 안 될 것 같은데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말을 조금 이상하게 해버렸네. 선우는 여와를 똑바로 보며 말한다.
“저희 이제 용사 짓 안 할 건데요.”
“…….”
“루즈 머리 깨줬으면 됐지, 또 뭘 바라는 건데요? 또 목숨 걸고 싸우라고요?”
선우의 단호한 말에 여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말한다.
“여러분들 모두가 그렇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여와 님, 저도 싸우고 싶지 않긴 해요. 루즈랑 싸울 때 많이 힘들었고 무서웠으니까요.”
선이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우림은 훗 웃으며 말한다.
“나도 마찬가지야. 옆에 있는 끔찍한 여자랑 싸울 때도 매일이 피가 말리는 느낌이었어. 그런 걸 또 겪는 건 사양이야.”
“어머, 끔찍하다니, 말이 너무 심하네.”
아린의 얼굴은 끔찍하다는 말이 그다지 기분 나쁜 것 같지 않은 느낌이다. 오히려 약간 자랑스러운 느낌이랄까. 여와는 기원을 본다. 기원은 언제나 짓는 그 멋진 웃음을 입에 머금으며 말한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창부.”
퍽!
“얘가, 말을 좀 가려서 해야지. 네가 아직도 죄악의 화신이야?”
그리고 선이에게 맞는다. 명치를 맞은 기원은 숨이 안 쉬어진다는 듯이 얼굴을 확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고, 선우는 혀를 쯧쯧 찬다. 여와는 무표정한 얼굴로 우현을 본다. 우현은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전… 뭐… 도와달라고 하시면 도와드리긴 하겠지만… 얘들을 설득시키라는 말은 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싸우든지 말든지 그건 얘들 자유니까요.”
“…….”
여와는 입을 꾹 다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여와의 형상이 사라진다.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선우는 한숨을 쉰다.
“선이야, 저 아줌마 어디 갔냐.”
“환계로 돌아간 것 같은데, 일단 환력은 꽤 많이 주고 갔네. 이제 텔레포트 맘껏 할 수 있겠다.”
선이는 기쁜 표정을 지었고, 우림은 혀를 차며 말한다.
“아직도 우리가 그때의 애새끼였던 때처럼 아무 조건 없이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네. 정신이 나간 여자야.”
“우리 여와 님,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요.”
“카일, 바알, 너희도 설마 우리가 너희 부탁을 그냥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우림의 말에 반응하듯 카일루스와 바알이 나타난다. 둘은 동시에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딱히 부탁할 생각도 없었어. 우린 사실 그냥 내려온 거니까.”
“폴은 우리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아서 사실 딱히 상관없어. 루즈가 부활하면 뭐… 조금 곤란하긴 하겠지.”
“루즈 부활하고 불러. 그때는 도와줄 테니까.”
“진심으로?”
“루즈까지는 막기로 했으니까.”
선우는 기원이 살아 있나 확인한다. 기원의 눈에는 눈물이 약간 맺혀 있다.
“그런데 기훈이는 어떻게 하지?”
“내버려 둬. 알아서 죽겠지.”
“다음 주에 수학여행인데 추억 남기려면 와야 하지 않겠어? 아, 우현아, 너희 수학여행은 어디로 가?”
“고3이 수학여행을 간다고?”
우림의 말에 우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고,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러게 말이야.”
“어차피 실업계잖아. 한 3박 4일 학교 째. 넌 내가 데리고 가줄게. 건수 오빠한테도 연락해. 마지막으로 추억 하나 남겨야지.”
‘이 정도면 무식할 정도라니까.’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가 따로 없다고 생각하며 선우는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는다. 우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나 다음 주엔 안 돼. 대회 있어.”
“대회 하나 더 열어줄게.”
“엿.”
“…….”
우현은 가운데 손가락을 든다. 우림은 입을 다물었고, 우현은 여와가 앉아 있던 안락의자에 앉으며 말한다.
“거기서 우승하면 세계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거라서 포기 못해. 우승은 몰라도 입상은 꼭 하고 싶어.”
“환계 무슨 단체는?”
“그때는 쉬기로 했어. 어차피 계약은 3년간이고, 3년 지나면 완전히 그만둘 거야. 3년 하면 군대도 빼준다니까 개꿀이지, 뭐.”
“미쳤네, 그래도 난 안 함.”
“누가 하라고 했냐.”
우현은 의자에 파묻히듯이 푹 앉으며 양손을 모은다. 그리고 눈을 감고 한숨을 쉬며 말한다.
“이거 생각보다 피곤해. 학교 가서 과자 만들다가 거기 가서 연구 도와주고, 질문 답해주고, 무슨 환력 찾기 하면 머리가 아파서 짜증이 날 정도야. 이제 5일찬데 5개월은 일한 느낌이야.”
“흠, 저런, 고생이 많구먼.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하하.”
“…….”
선우의 말에 우현은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가 천천히 눈을 뜨며 말한다.
“기훈이는 어디로 갔을까?”
“죽었겠지.”
“그러지 말고 좀.”
우현은 고개를 들어 선우를 보았고, 선우는 입술을 비쭉였다가 우림을 보며 말한다.
“기훈이 방 다시 확인해 봐.”
“내가 잘못 봤을 거라는 거야?”
“옷장 안에 결계 있나 다시 확인해 봐. 아니면 침대 밑이라든가. 용족의 결계일 테니까 왜곡이 아니라 조화일 거야. 좀 더 세심하게 봐.”
“……?”
우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헛’ 하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찾았어. 잠깐만.”
우림의 눈가가 약간 부드러워진다. 우림은 풉 하고 웃으며 말한다.
“폭포 물 맞으면서 가부좌 틀고 있는데? 용의 영역에 있는 폭포랑 비슷한 폭포야. 수행이야?”
“빤하지. 뭘 걱정들 하고 그러냐. 무식한 놈이 할 게 수련밖에 더 있어?”
선우는 혀를 차며 말했고, 선이는 폰을 꺼내며 말한다.
“난 걱정 안 했는데. 여와 님이 걱정하드라.”
“넌 걱정 좀 해줘라. 애가 기훈이한테 너무하다니까.”
“아, 나 그 오빠 싫다니까.”
선이는 톡을 하며 불평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관심도 없는 사람 이야기 자꾸 꺼내봐야 기분만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