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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명가 1권(11화)
第三章 원우진공(5)


한 가지를 간과했다.
천고의 자질을 지닌 제자라 생각했는데, 녀석의 성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어찌 저리도 감정이 메마르고 냉혹하단 말인가.
마치 모용지를 다시 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진아의 비정한 성정은 무공의 성취가 올라갈 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다. 걱정이 아닐 수가 없다.
혹, 내가 복수심에 불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무이건천심공을 모두 익힌 진아의 본성이 마침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비록 메마르고 비정한 성격을 지녔지만 어린 나이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녀석은 무공을 모두 익힐 때까지 자신을 감춰 왔던 것이다.
녀석은 내 마지막 심득이 담긴 원우진공을 얻기 위해 사부인 나에게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아직 녀석의 성취가 나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넘어설 것이다.
모용세가에 복수를 하기 위해 키운 제자인데, 지금은 나뿐 아니라 강호무림 전체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다.
녀석이 세상으로 나가면 막을 사람이 없다.
겨우 이곳에 녀석을 가둬 두고 있지만 오래 버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생명의 불씨가 꺼져 가는 나의 몸으로 녀석을 얼마나 더 막아설 수 있을지 의문이다.
녀석을 죽이려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 나의 계획을 눈치챈 녀석에게 더 이상의 허점을 발견할 수가 없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녀석과 대치한 지 이미 열흘이 넘었다.
이젠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왔다.
녀석의 성취가 이미 나를 넘어섰으니 더 이상 막아설 힘이 없다.
녀석이 완전히 이성을 잃기 전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아! 나의 생명의 불씨가 조금만 더 남았더라면…….
사람을 찾아야 한다.
녀석을 막을 방법은 원우진공밖에 없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녀석을 막을 후인을 찾아야 한다.

괴롭다. 사옥진이란 악의 화신을 내손으로 키워내고야 말았다. 저승에서 어찌 사부님을 뵌단 말인가…….

책의 내용은 그걸로 끝이었다.
책을 모두 읽었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이 남았다.
사부라는 사람과 사옥진이 이후 어떻게 됐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을 빠져나갔을까? 제자를 막아냈을까?”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책을 본 듯한 기분에 쉽사리 책을 덮지 못했다. 게다가 책의 반 권 분량이 공백으로 남아 있어 더욱 그랬다. 그렇게 아쉬움에 책을 덮지 못하고 있던 진명의 눈이 반짝거렸다.
공백으로 남아 있던 종이의 재질이 앞쪽과 다름을 깨달은 것이다.
좀 더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책을 들고 서고 밖으로 나왔다. 기록이 없는 부분의 종이를 펼쳐 허공에 떠 있는 연못 빛에 비춰봤다.
앞쪽에 비해 기록되지 않은 종이가 너무 얇았다.
어찌나 얇았는지 종이를 잡고 있는 손가락이 뒤쪽에서 훤히 비칠 정도였다. 이런 종이에 먹물을 묻혔다간 마르기도 전에 찢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왜 이렇게 얇은 종이로 책을 만들었을까?”
종이를 들고 고민하던 진명은 종이 뒤쪽의 손가락에 하얀 점이 찍혀 있는 걸 발견했다.
“손에 왠 하얀 점이……?”
먼지가 묻었나 싶어 자신의 손가락을 확인했지만 하얀 점 따윈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손가락을 종이 뒤쪽에 대고 살펴보니 손가락 곳곳에 하얀 점이 선명히 보였다.
하얀 점은 진명의 손이 아니라 종이에 찍혀 있었던 것이다.
종이에 찍힌 점들은 그 크기가 모두 같았지만 간격이 일정치 않았다. 그 모양이 마치 글을 적어 놓은 듯한 모양새라 자세히 들여다봤지만 하얀 점일 뿐 글은 아니었다.
한참을 더 들여다봤지만 얇은 종이에 하얀 점을 찍어 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원우진공이 아닐까 기대했는데… 아니었군.”
책 지은이가 원우진공을 후인에게 남기려 했던 터라, 혹시 이 하얀 점들이 그 원우진공의 구결을 몰래 남긴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렇게 책을 잡고 씨름을 하다 보니 허기가 졌다. 생각해 보니 의원을 나선 이후 지금까지 벽곡단 하나밖에 먹은 게 없었다.
벽곡단은 입에 맞지 않았던 터라 건량을 먹기 위해 등짐을 찾았다.
등짐을 열고 건량을 찾던 진명의 손에 서일평의 등짐에서 훔쳤던 서책이 잡혔다.
“원우진서……!”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회상록에 나와 있던 원우진공과 이름이 비슷했다.
우연히 비슷한 이름을 지녔을 뿐, 잡서임을 확인했던 터라 무시하고 건량을 찾으려는데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적명석!”
회상록을 읽을 때 적명석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름을 본 게 바로 이 원우진서였다.
당시 책 내용이 너무 허무맹랑해 잡서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서둘러 원우진서를 들춰 봤다.
당시엔 대충 훑어봤을 뿐이지만 이번엔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자세히 읽었다.
살짝 흥분된 표정으로 원우진서를 읽어 가던 진명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가더니 끝내 실망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자신이 원하는 무공의 구결은 없고, 과연 존재할지 의문이 드는 물건이나 지역 등이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진명의 손이 한순간 멈칫거렸다.
원우진서 중간에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잔뜩 적혀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분명 글자 하나씩을 떼어놓고 보면 제대로 된 글인데, 이어서 읽어 보면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다.
“어째 한 글자만 떼어 놓고 보면 말이 되는데 이어 보면 말이 되지 않는 걸까?”
중얼거리던 진명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어서 보면 말이 안 되고 한 글자씩 보면 말이 된다고?”
손가락으로 어법에 맞지 않는 글들을 가려봤다.
“횡(橫)… 간(看)…….”
어렵게 손가락으로 글을 맞춰 보던 진명의 머릿속에 좀 전 살폈던 흰점이 찍혀 있는 종이가 생각났다.
“여기에 흰점을 대보면……?”
회상록의 지은이와 원우진서의 지은이가 동일인이고, 그가 사옥진을 피해 원우진공을 후인에게 전하려 노력했음을 상기해 보니, 흰점의 쓰임새가 혹 이것이 아닐지 의심됐다.
회상록을 펼쳐 흰점을 원우진서 위에 붙여보았다.
“횡간성령측성봉(橫看成교側成峰).”
과연 알아볼 수 없던 말이 뜻이 통하는 글로 변했다.
진명은 서둘러 그 아래로 이어진 글을 마저 맞춰 보았다.

횡간성령측성봉(橫看成교側成峰)
원근고저각부동(遠近高低各不同)
불식여산진면목(不識廬山眞面目)
지연신재차산중(只緣身在此山中)

가로 보면 고개요, 옆으로 보면 산봉우리다.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제각기 다르구나.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함은
단지 이 몸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지.

북송(北宋)을 대표하는 시인인 소동파(蘇東坡)의 제서림벽(題西林壁)이란 시로, 진명도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시였다.
한데 이곳에서 읽어 보니, 마치 원우진서의 주인이 제자의 진면목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를 한탄하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의미심장한 첫 장을 뒤로하고 다음 장을 넘겨 흰점에 맞춰 보았다. 그런데 이번 글은 앞장과 달리 문장이 완성되지 않았다.
왜일까 생각하던 진명은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급한 마음에 두 번째 장에도 같은 종이를 붙였는데, 두 번째 장엔 회상록의 두 번째 종이를 붙여야 했던 것이다.
왜 회상록의 반절이 여백으로 남아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방법을 알고 나니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과연 기대대로 원우진서는 원우진공이 분명했다.
그뿐 아니라 원우진공은 무척이나 쉬운 문장으로 구결을 풀이해 놓아, 진명처럼 학문이 깊지 않은 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적혀 있었다.

원우진공은 단전이 파괴된 채 무공을 익혀야 했던 내 몸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해 무이건천심공을 바탕으로 만든 무공이다.
원우진공을 익히기 위해선 필히 무이건천심공이 삼성에 이르러야 한다.
무이건천심공을 설명하기에 앞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선사께선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있어 혹여라도 그들의 손에 자신의 심공이 들어가는 걸 원치 않으셨다.
그러하니 그대의 성이 모용이거나, 이전에 다른 심법을 배운 적이 있다면 이 책을 덮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무이건천심공은 타 심법을 익힌 사람이 욕심을 부릴시 형벌과도 같은 주화입마로 인도할 것이다.
모용 성이 아니고, 타 심법도 배운 적도 없다면 그대는 그야말로 천하에 적수가 없는 천고의 심법을 지금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아래로 무이건천심공의 백서른여섯 자의 구결과 그 특징에 대해 설명되어 있었다.

무이건천심공은 내 사부님이신 연사학 선사께서 창안하신 심공으로 강호의 여타 심공과 차별화되는 매우 독특한 효능을 두 가지 지니고 있다.
그 첫째는 무이건천심공이 삼성에 이르면 발동되는데, 별도의 운기행공 없이도 내기가 스스로 혈도를 타고 흘러 기운을 쌓는다는 것이다.
이는, 늦은 나이에 무공에 입문하신 선사께서 보다 빠른 내기를 쌓기 위해 고안하신 방법으로 자전축공(自轉築功)이라 한다.
자전축공에 이르면 수면시에도 절로 내기가 쌓여, 운기행공을 해야지만 단전에 내공을 쌓을 수 있는 여타 다른 심법들에 비해 수 배 빠른 속도로 내기를 축기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또한 무이건천심공 삼성에 이르러야 효능을 볼 수 있는데, 자전축공에 이르러 내기가 스스로 혈도를 타고 운행하게 되면, 혈도는 물론 뼈, 혈관, 근육, 피부 그리고 내부 장기에까지 스며들어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게 된다.
이것 또한 출신이 의원이신 선사께서 무공과 의술을 접목해, 이십 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고안해 내신 방법이다. 가벼운 내상이나 상처 따위는 몇 번의 운기행공 만으로 치료가 가능할 정도로 그 효능이 탁월하다 자부하고 있다.
그 외에도 발출한 기운의 삼 할을 재흡수해 내공의 소모를 최소화시켰고, 타 기운에 반발력이 강해 내력 대결시 상대의 혈도로 타고 들어가 단전에 직접적인 충격을 가한다.
앞서 주의 사항을 주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특징 때문이다. 이 모든 효능이 무이건천심공 삼성에 이르러서야 발동되니, 원우진공을 익히려는 자, 필히 삼성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원우진공도 아닌 그 앞전에 배울 무이건천심공의 설명만으로도 진명은 손이 떨려 왔다.
진명의 나이 올해로 십칠 세이다.
무공을 배우기엔 꽤나 늦은 나이다.
진명이 용진관에서 무공을 배우지 않은 건 아니다.
간단한 권각술과 건강에 좋다는 운기토납법을 익혔다.
하나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배우지 못해 단전엔 한 톨의 내기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 이유로 산적들을 만났을 때,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죽을 뻔했던 것이다.
강호의 명문대파의 자제들은 육칠 세부터 가문의 비전심법을 익혀 진명 나이쯤 되면 후기지수라 불리며 명성을 쌓아 가는데, 자신은 용진관 관주의 호의 아닌 호의로 또래의 친구들이 자신을 앞서 가는 걸 늘 부러워해야만 했다.
한데 무이건천심공의 자전축공으로 인해 그동안 뒤쳐졌던 부분을 보상 받을 길이 열린 것이다.
어렸을 땐 내공심법을 가르치지 않는 관주가 야속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 일이 엄청난 행운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동안 강호행을 하면서도 느꼈지만, 용진관 관주가 자신에게 해 왔던 많은 말들 중 틀린 게 하나도 없었고, 그가 해 준 배려 중 잘못된 게 하나도 없었다.
진명은 용진관 관주가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고수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다음 장엔 원우진공의 구결과 특징이 적혀 있었다.

원우진공은 무이건천심공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운용에서 활용까지 모든 면이 다르다.
원우진공과 무이건천심공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단전의 중요도에 있다.
무이건천심공은 여타의 심법들과 마찬가지로 단전에 내기를 축기해 이를 초식으로 변용 발출하는 형태지만, 원우진공은 단전의 중요도가 이 보다 높지 않다.
수련자의 신체 자체를 하나의 단전으로 사용해 천지간에 퍼져 있는 자연지기(自然之氣)를 여과 없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취도가 높아질수록 무한에 가까운 기운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원우진공을 익히지 않은 지금은 아무리 설명해도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원우진공의 성취가 이성에 이르면 몸 전체가 단전화하며 자연지기를 끌어당기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삼성에 이르러서야 비로써 진정한 원우진공을 익혔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유는 삼성에 이르러야 끌어당긴 자연지기를 외부로 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성 이후 단계는 의지만으로 자연지기를 끌어와 사용할 수 있는 단계인데, 원우진공을 만든 본인조차 경험하지 못한 단계이기에 예측만 할뿐이다.
감히 말하건데, 원우진공 사성을 이루게 되면 천지간에 당해낼 적수가 없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원우진공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끝이었고, 마지막 장엔 자신의 내력과 제자인 사옥진을 막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적혀 있었다.
진명은 책을 덮어 한쪽에 내려놓고 그 앞에서 아홉 번의 절을 했다.
비록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 그의 일생이 어떠했는지 회상록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정식으로 사제지간을 맺진 않았지만, 그가 남긴 무공을 앞으로 익힐 것이기에, 선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는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을 마친 진명은 사옥진의 상태를 확인한 후 서고로 들어가 무이건천심공을 익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