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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황제는 책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를 바라보지도,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녀가 마치 없는 사람인 양 계속해서 제 할 일만을 할 뿐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황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변함없이 저를 외면하는 그를 우가 다시 한 번 간절히 불렀다.
“폐하…….”
황제가 고개를 들고 우를 바라보았다. 수려하게 잘생긴 외모였지만 그 눈만은 매서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어떤 종류의 따뜻함도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에 우가 다시 한 번 낙심했다.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마음을 확인할 때마다 우는 더 깊게 추락했다.
“말해 보시오. 법도도 지키지 않고 감히 황제의 처소에 함부로 발을 들인 이유가 무엇인지.”
그 변함없는 차디찬 말에 우가 미소 지었다. 다시 한 번 느낀 좌절감과 변치 않을 상대에 대한 실망으로 인한 자조적인 미소였다.
그리고 황제는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저 여인이 제 위에 있는 거 같은 느낌이었다. 그 아비가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이 자리를 마치 저 여인이 준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옹졸한 제 마음이 드러나 눈앞의 여인에게 화풀이를 할 때면 저 자신이 한심해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나 다시 여인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그 악순환이 십여 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어찌 앉으라는 말씀도 아니 하십니까?”
“앉으시오.”
차를 내오라는 말도 없었다. 하다못해 어느 귀족 가문에서도 내자를 이리 대하지 않았다. 그만큼 황제는 우를 꺼렸다. 그 거절의 반응에 무뎌질 때도 되었건만 우는 아직도 상처받고 있는 저 자신이 한심스러워 다시 한 번 쓰게 웃었다.
“송 귀비에게 가마를 타지 말라 할 생각입니다.”
쾅, 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화가 난 황제의 모습에도 우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여러 비빈들의 불만이 상당합니다. 그것은 송 귀비에게도 좋지 않으니 허해 주셨으면 합니다.”
“감히 짐이 내린 것에 불만을 가진다고? 고작 가마가 무엇이라고! 내 말을 뒤집으란 말이냐.”
으르렁거리듯이 위협적으로 내뱉는 말에도 우는 침착히 답했다. 그 꽃 같은 목소리는 이러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다.
“고작 가마가 아니라 폐하의 총애이지요. 폐하의 총애 하나만을 바라는 여인들이옵니다. 송 귀비에게도 좋지 않고, 궁 안의 모두가 가마를 타는 것 역시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듣고 싶지 않다.”
황제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으나 우의 앞에서는 언제나 감정적이 되었다. 우는 언제나 그를 분노하게 하였다.
“송 귀비가 여리고 선한 이임을 잘 아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이에 대해 여러 비빈들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뒷배 하나 없는 이에게 힘든 일이 될 겁니다.”
우의 차분한 설명에 황제는 점점 더 기분이 상했다. 고작 가마가 무엇이라고 이리들 요란인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가마는 뒷배 하나 없는 송 귀비에게 제 총애가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를 위해 내린 것이다. 그이의 뒤에 내가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내린 거란 말이다.”
그 말에 우가 침묵했다. 황제, 희윤은 그런 우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가 이리 성을 내고, 호통을 치건만 눈앞의 침착한 우를 보니 마치 제가 진 거 같아 자꾸만 열이 치솟았다. 항상 그랬다. 올곧은 그 눈과 차분한 어투가 제 화를 돋우었다. 한 나라의 황제인 제가 마치 지기 싫어하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 보기 싫었다.
“폐하, 이미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타국의 공주도 아닌, 아니 수백 명의 공녀들 중 가장 낮은 지위로 입궁한 이입니다. 그저 궁녀로 머무를 이였습니다. 공녀 출신인 여인이 귀비 자리에 오른 것만 하여도 그 총애가 대단하다는 것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만 하여도 족합니다. 넘친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 하지 않습니까.”
“황후께서 나를 가르치려는 게요?”
우가 쓰게 미소 지었다. 자신을 적대하는 희윤의 모습에 우는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손이 바르르 떨려 왔다. 떨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이에게 독이 될 겁니다. 모든 눈이 송 귀비를 향할 것이고, 작은 실수에도 비난이 넘쳐 날 겁니다. 또 그이가 영민하신 폐하의 눈과 귀를 막으려 한다고도 할 겁니다. 그 어리고 순진한 이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어 주진 마세요.”
우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희윤이 신음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의 말이 옳았다. 귀할수록 조심해야 하는 법인데.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차리고 물러났다.
우가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왔을 때였다.
“황후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키가 큰 사내가 인사를 건네 왔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활짝 웃는 입매가 소년 같아 보이는 이였다. 단정하고 검소한 옷차림이었지만 누가 보아도 귀한 핏줄임을 알 수 있을 만큼 고운 사내였다.
“왕야,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를 뵈러 오셨습니까?”
우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친왕과 우는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내 온 사이였다. 아친왕과 우의 오라비가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가 궐 밖으로 나오게 된 이후로 아친왕과 우의 오라비는 가장 가까운 친우가 되었다. 물론, 정치적인 관계로는 서로를 멀리할 수 있는 혹은 원수라 볼 수 있는 사이였건만 아친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짐을 벗게 해 준 이라며 감사 인사를 했었다.
아친왕, 희원은 우의 인사에 다시 해사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궐 안 가장 고운 이를 뵈었을진대 어찌 그냥 돌아서겠습니까. 잠시나마 곁을 내어 주시지요.”
마치 한량처럼 가벼운 몸놀림과 능청스러운 표정에 우가 웃음 지었다. 그러고는 희원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왕야, 폐하와의 약조는 어찌하시려고요?”
우의 말에 희원이 마마만 믿고 있다며 능청스레 앓는 척을 하였다. 황제와의 만남에서 제가 거부당한 것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편안해 보이는 우였다. 희원과는 사가에서 얼굴만 마주치던 사이였다. 오히려 우가 입궐하자 그 오라비의 청으로 오누이 사이를 오가느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희원은 자연스레 우의 처소로 향했다. 한참을 조용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걸었으나 두 사람 모두 편안하며 자연스러웠다. 그만큼 서로가 익숙한 탓이었다.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자주 보아 좋을 일 없는 사이였기에 친우의 청으로 궐을 자주 드나들면서도 항상 처소 밖, 모든 이가 쉬이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며 최대한 말이 나오지 않게 행동하였다. 이는 황제가 아친왕을 신뢰하였기에 무탈하게 넘어가 주는 일들이었다.
희원은 우를 바라보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히 걷는 모습이 그이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주는 거 같아 왠지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 어렸던 아이가 이리 자라 한 나라의 황후가 되었다는 게 놀랍기도, 서글프기도 하였다. 그는 궐 안이 얼마나 시리고 무서운 곳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고, 궐을 벗어난 것을 항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황후 노릇은 할 만하십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노력할 뿐이지요.”
희원의 질문에 우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잘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