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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희원은 늘 우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곤 했다. 어느 때곤 지쳐 있을 때면 나타나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고, 제 마음을 보듬어 주는 이였다. 우가 빙그레 미소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어둡던 세상이 환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천하절색이라 불려도 결코 과언이 아닌 듯하였다.
“궐 안이 가마로 인해 난리라 들었습니다.”
희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또한 모를 리 없었다. 황제의 작은 꽃, 송 귀비는 이미 나라 안팎에서 그 소문이 요란하였다. 실상 그가 철없고 어리며 예쁘장한 이라는 것을 알면 아마 다들 실망할 터였다. 원래 소문이란 번질수록 커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 미모가 대단하여 황제의 눈에 들어 공녀 신분으로 귀비 자리에 올랐으며, 황자만 낳는다면 황후 자리도 귀비의 차지가 될 것이라는 말도 무성하였다.
“예, 다들 폐하만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화가 날 겁니다.”
“마마께서는 어떠십니까?”
우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희원은 멈추어 서서 우를 잡지 않은 손으로 그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그 다정스러운 손길에 우의 눈이 커다래졌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다 큰 여인을 이리 어린아이 대하듯 하십니까?”
“고운 여인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안타까워 그럽니다.”
희원은 다시 우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우는 오라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안타까운 사람이지.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건만 제 동생에게 빼앗기지 않았느냐? 지금의 황제폐하 역시 대단하시지만 나는 그이가 황제가 되면 어땠을까 가끔 상상해 보곤 한다. 꼭 저같이 따뜻한 나라를 만들고 싶어 동분서주했겠지.’
‘다정함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까요?’
‘우야. 그는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다. 선한 것과 어리석은 것을 혼동하지 말거라. 모든 것을 받아 주기만 하는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 그릇이 거기까지인 게야. 그이는 다정하고, 지혜로운 이다. 애정을 가지고 썩은 것은 도려내고, 잘 자라도록 돌봐 줄 수 있는 이란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구나.’

남자치곤 긴 속눈썹에 눈 밑으로 그늘이 져 있었다. 한량 같은 행동거지를 하건만 분명 알고 있었다. 그것이 모두를 위한 것임을 말이다. 그가 이리 행동해야만 나라가 평안할 터였다.
“마마?”
“아. 아닙니다. 잠시 옛 생각이 나서……. 왕야, 저는 황후이질 않습니까? 여인의 투기는 접어 두고 폐하를 위해야지요. 여러 비빈들에게 모범이 되어야지요.”
어느새 교태전에 도착하였고, 우가 인사를 건네기 위해 희원을 마주 보았다. 우는 고개를 들어 희원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만 가 보세요, 왕야.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제가 이리 왕야를 붙잡았다 노하실까 걱정됩니다.”
희원이 무릎을 굽혀 우와 마주 보았다. 그가 살포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마, 괜찮습니다.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조금은 내려놓아도 그 누구도 마마께 뭐라 할 이 없습니다. 그저 조금 풀어 두세요. 이리 지내시면 금방 지치실 겁니다.”
희원의 그 말에 우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하루가 외줄 타기 같은 우에게 그 누구도 이리 말해 주지 않았다. 부모, 오라비 모두가 그이에게 잘해야 한다고만 할 뿐이었다. 어린 딸이, 어린 누이가 혹여 실수라도 하여 귀한 아이에게 사달이 날까 두려운 가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뿐이었다.
우는 모두가 바라보는 이 자리가 고달팠다. 조금의 실수라도 할까 무섭고, 두려워 온종일 긴장에 휩싸인 채 하루를 보내고 쓰러져 지쳐 잠이 들었고, 그나마도 푹 잠들지 못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희원은 다정스레 듣고 싶은 말을 해 주고, 우의 마음을 가장 잘 살펴 주는 이였다. 그래서 우는 그이가 오면 자꾸 울음이 터질 거 같았다. 어렸을 적엔 속상한 일이 있으면 그 얼굴만 보아도 울었더랬다. 받아 주는 이가 있으니 자꾸 약한 마음이 들 수밖에.
“왕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더 늦으면 폐하의 진노를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그 모습이 아쉬웠다. 마치 큰 오라비 같은 이였다. 우는 입궐한 후 오라비뿐만이 아니라 아비, 어미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었다. 자주 볼 수 없는 어린 딸이 걱정스러워 안절부절못하는 그네들에게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투정하여도 그 말이 번질까 무섭고, 수많은 눈과 귀가 두려워 입을 꼭 닫았었다.
그런 저를 찾아와 사탕 하나를 쥐여 주며 말을 걸던 이가 희원이었다. 어설픈 농담이 왜 그리 반가웠던지, 그래도 면이 낯익은 이어서 그랬던 건지 그 사탕을 입에 넣고 펑펑 울었더랬다. 그 이후 그는 우를 가끔 찾아왔다. 그리고 우는 그를 기다리곤 하였다. 궐 안의 생활이 어떤지 잘 알고 있는 그가 편해서였다.
“박 상궁.”
“예, 마마.”
“얼마 전 들어온 좋은 국화차가 있지 않던가? 폐하의 집무실 밖에서 기다렸다가 왕야께 전해 드리고 오거라.”
박 상궁이 우의 명에 읍하고 자리를 떴다. 우는 잠자리에 누울 채비를 하였다. 궁녀들이 서투른 솜씨로 잠자리를 돌보고, 그의 머리를 빗겼다. 우의 잠자리는 항시 박 상궁이 홀로 준비하였기에 그들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실수라도 하여 우의 화라도 돋울까 싶어 말이다.
“괜찮다. 머리카락 몇 뽑아도, 그릇을 깨뜨려도 벌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거라.”
우가 살짝 웃으며 궁녀들을 안심시켰다. 그도 저랬던 것이다. 궁에 들어와 상궁들에게 교육을 받을 때도, 황족들을 만났을 때도 말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품을 떠나 모든 것이 엄격한 법도 아래 놓여 있는 황궁에서 우 역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제야 궁녀들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 * *

“폐하, 아친왕 들었사옵니다.”
“들라 하라.”
우와 헤어진 희원은 급히 황제를 찾았다. 황제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비록 배다른 형제이기는 하나 희원은 황제의 자리에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친왕!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황제는 급하게 궁녀를 불러 술상을 봐 오라 하였다. 황제 역시 숨 막히는 궐 안에서 친우라고 부를 이가 몇 없는 상황이었고, 희원은 그중 그를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다. 비록 한때 황위를 놓고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으나 희원이 욕심이 없었기에 쉽게 일단락되었다. 그 후 오히려 제가 먼저 탈이 될 만한 일은 하지 않으려 노력하니 황제의 입장에선 이보다 더 좋은 형제가 없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오는 길에 황후마마를 뵈어 처소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아, 황후를 보셨습니까.”
희원의 말에 황제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제가 우에게 어찌하였는지 떠올렸기 때문이다. 희원과 우가 친 오누이처럼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더욱 그랬다. 그러나 희원은 그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예, 언제 뵈어도 고우신 분입니다. 그나저나 이리 늦은 시간까지 집무를 보고 계신 겁니까? 환관을 불러 문초를 해야겠습니다. 폐하를 이리 모시다니 말입니다.”
“환관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날마다 올라오는 상소가 문제입니다. 조금이라도 눈을 돌리면 산처럼 쌓일까 두려울 정도입니다.”
황제가 앓는 소리를 하였다. 황제는 오로지 그의 배다른 형제에게만 약한 소리를 해 대었다. 그 어미나 송 귀비 앞에서 할 수 없는 말들은 제 배다른 형제에게만 털어놓곤 했었다. 털어놓을 이가 그뿐이니 하루가 멀다 하고 입궐을 명하였다.
형제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가벼운 말장난을 섞어 가며 시간을 보내었다. 해야 할 일들은 조금 미루고 기꺼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황제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아친왕도 이제 여인을 맞아 가정을 이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이 아우도 자주 보러 오시겠지요.”
황제가 희원에게 은근히 물었다. 이미 한참 혼기를 지난 나이였다. 본디 황족들은 십오륙 세가 되면 혼인을 하였으나, 그 당시에는 한참 황태자 자리를 놓고 파벌 싸움이 있었던지라 혼기를 놓쳤다. 성인이 되고 난 후로는 유랑을 하며 지내니 이제껏 혼자였던 것이다.
“아직 보지 못한 곳이 많아서 말입니다.”
희원이 설핏 웃었다. 그리고 그는 우를 생각했다. 곱디고운 우, 그 차분함 속에 감추고 있는 열렬한 마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황제를 보았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이였다. 희원은 후회했다. 제가 황태자였다면, 열심히 싸웠더라면, 그래서 황제가 되었다면 그 옆에 우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원하지도 않던 자리였건만 우를 생각하면 자꾸만 못난 미련이 밀려왔다.

* * *

“귀비마마, 어찌 오늘은 폐하가 오지 않으시는 걸까요?”
볼이 발그스름한 어린 궁녀 아이가 입을 열었다. 곁에 있는 여인이 어린 여아를 보고 활짝 웃어 보였다. 예쁘장한 얼굴에 활짝 미소가 피어나자 마치 보름달이 뜬 것처럼 훤히 빛났다. 그이가 마음씨 고운 송소화, 송 귀비였다. 부리는 이들에게도 너그러우며, 재물 욕심이라곤 없는 마냥 고운 송 귀비였다. 궁궐 밖에서야 임금을 제 치마폭에 넘어뜨린 천출이라고들 하지만 송 귀비를 본 이들은 그 소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궁궐에 든 지도 고작 1년이 넘었을 뿐, 여전히 모든 것이 어렵고 서툴렀다. 동그란 눈에 분홍빛 뺨과 오동통한 입술이 여인보다는 소녀에 가까웠다.
“아친왕께서 오셨다더구나. 오랜만에 형제가 만났으니 그 회포 푸시느라 나를 깜빡하셨나 보다.”
장난스럽게 우는 척을 하며 말하는 송 귀비를 보고 궁녀들이 웃음 지었다. 그네들에게 송 귀비는 비록 상전이지만 가족 같은 이였다.
연노란색의 치마를 입은 채 정원에 쪼그려 앉은 송 귀비는 꽃을 구경했다. 황제가 신경 써 준 덕에 그이의 정원은 온 궐을 통틀어 가장 많은 종류의 꽃이 심어져 있었다. 가을이 되어 쓸쓸한 모습이 되어 버린 우의 정원과 달리 그이의 정원은 마치 계절을 잊은 것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모두가 황제의 애정이었고, 그 넘치는 애정에 송 귀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곱구나, 이연아. 내 몇 송이 꺾어 줄 테니 폐하께 가져다 드리겠느냐? 꽃이 너무 고와 혼자 보기가 아쉬워 보낸다고 전하여라.”
소매를 걷고 직접 꽃을 꺾고 있는 송 귀비를 보고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치맛단이 흙에 엉망이 되고 있건만 다들 그저 어느 꽃이 더 고운지 찾기 바빴다.
귀비의 처소 안, 모두가 가장 고운 꽃을 찾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궁녀들이 기꺼워하고 있는 송 귀비를 흘끔 보았다. 타국에 홀로 떨어져 외로움에 눈물짓던 귀비가 황제의 애정으로 활짝 웃음 짓고 있었다. 주인이 행복해하는 모습에 그들은 더욱더 열심히 정원을 돌아다녔다.
궐 안, 송 귀비는 가장 고운 이는 아니었으나 가장 사랑스러운 이였다.

* * *

“조용히 하라. 귀비는 잠자리에 들었느냐?”
한참을 황제를 기다리던 귀비가 잠이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귀비의 처소에 발걸음 하였다. 그나마도 귀비가 보내온 꽃을 보고 온 것이었다. 아마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아친왕과 함께 밤을 지새웠을 것이 자명했다.
조심스레 침상 옆에 간 황제는 이미 잠든 귀비를 바라보았다. 그에 비해 모든 것이 작고 사랑스러운 이 여인이 너무 좋았다. 제 품 안에 보듬어 안고 모든 것을 안겨 주고 싶은 마음에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귀비 자리에 올렸다. 귀비가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고, 마냥 제가 좋다는 순수함에 또 기뻤다.
황제는 귀비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고, 그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어여쁘고 어여쁘다 하였다. 모든 것은 내가 할 터이니 너는 내가 주는 것을 받기만 하라 하였다. 궐 안 수많은 여인들 중 오로지 송 귀비만이 황제의 연인이자 사랑이었다.
상소를 보다 지친 마음에 늦은 밤 호수를 찾았고, 우연히 울고 있는 궁녀를 만났다. 그것이 송 귀비였다. 저를 궐의 경비인 줄 알고 격 없이 대하는 그이의 순진함이 좋았다. 황제의 처소에 들게 되었다고 펑펑 울며, 저를 데리고 도망가라는 그 모습에 온 마음을 다 빼앗겼다. 황제가 아닌 저를 오롯이 바라봐 주는 것이 좋았다.
“으음, 희윤?”
귀비가 천천히 눈을 뜨며 황제를 불렀다. 그녀는 황제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부름에 황제가 미소를 지으며 송 귀비를 품에 안았다.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이가 제 품 안에 있다는 사실에 황제는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