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5화
“마마, 밤이 깊었사옵니다. 어서 자리에 드시지요.”
박 상궁이 우를 향해 고했다. 오늘따라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제 주인이 안쓰러워 박 상궁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연 것이다. 황제께선 그 모자란 송 귀비가 어디가 그리 어여쁘다고 귀하디귀한 황후마마를 이리 박대하시는지, 박 상궁은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 총애가 시작되자마자 궁 안 위계질서가 엉망이 되었으며, 황후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차 한 잔 내오게. 오늘은 쉬이 잠이 오지 않을 거 같구나.”
우가 한숨을 쉬었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처소는 이미 서늘하였다. 그는 오갈 데 없는 제 마음이 안타깝고 불쌍하였다. 아홉 살에 입궐하였고, 열네 살 황태자비가 되어 그를 처음 만났다. 그를 만난 지는 벌써 십 년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만을 보며 소리 죽여 그를 위해 살았다. 허나 점점 지쳤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그 마음이 서럽고 아팠다. 제 온 마음을 주었으나 그는 단 한 번도 저를 돌아보지 않았다.
알고는 있었다. 그가 돌아보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온몸으로 뿜어 대는 그 냉담함과 적대감을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다만 그 옆자리가 자신의 자리라는 것에 위안하며 지내 왔다. 허나 아니었다. 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울뿐인 황후 자리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 옆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있었다. 제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가 질끈 눈을 감았다. 우는 그렇게 소리 내어 울지도, 분노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속으로 삼키고 있었다.
* * *
“마마, 박 상궁입니다. 기침하셨는지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저를 부를 시간이 한참 지났건만, 우의 처소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박 상궁은 대답 없는 우의 침소에 허락 없이 발을 들였다.
“마마! 마마!”
간밤 찬바람에 기어코 탈이 난 건지 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고 있었다. 박 상궁은 궁녀를 불러 태후전에 황후의 건강이 좋지 않아 문안드리지 못함을 알리고, 태의를 불러오라 명하였다.
젖은 물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 내며 박 상궁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요새 더욱이 기분이 좋지 않으셨으나 이리 병까지 나실 줄은 몰랐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이 된 듯하여 더욱 안타까웠다.
“어떠하오? 우리 마마 어디가 편찮으신 거요?”
태의가 걱정하지 말라며 그저 침을 놓고 몇 가지 처방전을 지어 주었다. 며칠 안정을 취하시면 괜찮을 것이니 그저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면 된다 하였다.
박 상궁이 그 말에 입을 삐죽였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시오? 우리 마마께선 워낙 올바르신 분이라 할 일은 절대 미루지 않으시오! 다른 처소 마마들이야 그저 주는 거 받고 먹고 자면 될 일이지만 이분은 황후마마 아니오?! 내 속만 문드러지지. 그러지 말고 태의 어르신! 부탁 좀 드립시다.”
“무엇을 말이오?”
불안한 기색의 태의가 속삭이듯 물었다. 귓속말로 박 상궁이 소곤거리자 태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의가 떠나고 박 상궁은 우의 곁에서 젖은 물수건으로 계속해서 땀을 닦아 내었다. 우가 궐로 들어왔을 때부터 모시기 시작하여 벌써 세월이 유수같이 흘렀다. 소녀가 여인이 되기까지의 그 시간이 얼마나 모질었던가. 궐 안 여인의 삶이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주인으로 모셔서인가 유독 우가 안타까워 박 상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도 고운데, 이렇게도 절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이리 사시나 싶어 자꾸만 안타까웠다. 그 미색으로 천하를 손에 쥘 만도 하건만 어찌하여 이리 올곧게만 사시나.
“박 상궁님! 혜비전에서 문안 인사 드리러 왔답니다. 어찌할까요?”
문밖에서 조용히 전하는 소리에 박 상궁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 왜 그 혜비인지.
“오셨습니까, 혜비마마.”
“내 황후마마께 인사드리러 왔네. 고하시게.”
박 상궁이 곤란한 얼굴로 혜비에게 허리를 굽혔다.
“황후마마께옵서 옥체가 편치 않으십니다. 다음에 다시 오시지요.”
혜비의 얼굴에 노여움이 서렸다. 인상을 찌푸리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냉담한 눈빛에 박 상궁이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혔다. 혜비는 타고나기를 마치 아랫사람을 부리도록 태어난 이 같았다. 우와는 다른 의미로 속을 알기 어려웠고, 그 속엔 자비도 없었다. 그렇다 하여 제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는 않으니 슬슬 저도 모르게 계속 눈치를 보는 것이다. 혜비에게는 제 사람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저 모두가 똑같았다.
“고해 주시게. 내 인사를 거절하는 것이 박 상궁이 되어야겠는가?”
처음과 같이 변함없는 그 말투에 박 상궁이 기다리라며 어쩔 수 없이 돌아섰다. 아픈 이를 깨우고 싶지 않았으나 제 능력이 미천한 것을 어찌하랴.
“마마, 혜비마마께서 인사 여쭌다 하십니다.”
결국 잠들었던 우가 깨어났다. 박 상궁은 나가서 혜비에게 인사는 받겠으나 몸이 여의치 않아 조금 오래 기다리셔야 한다 전하였다. 말을 전한 박 상궁은 우의 몸치장을 도왔다. 땀으로 인해 젖은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기고, 의복을 입는 것을 도왔다. 가볍게 차려입으셔도 되련만 굳이 모든 것을 어긋나지 않도록 준비하는 우의 모습에 왠지 모를 대견함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일었다.
자리에 앉은 우를 보니 안색이 좋지 않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고와 보여 박 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다 하여 본디 그 미색이 어디 가겠는가.
“박 상궁, 혜비를 모시고, 다과상도 서둘러 준비하여 내오게.”
“예, 마마.”
“황후마마께 인사 여쭙니다.”
혜비가 우에게 절을 올렸다. 귀한 비단옷에 같은 색의 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자수는 자세히 보아야 진가를 발휘했다. 혜비는 그가 입은 옷처럼 얼핏 보아선 알 수 없는 이였다.
“양해해 주게. 몸이 좋지 않아 오래 기다리게 했네.”
혜비가 우의 안색을 살폈다. 박 상궁의 말처럼 진실로 몸이 좋지 않은지 그 안색이 창백하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앉은 자세나 행동이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소첩이 괜히 왔나 봅니다. 어찌 이리 안색이 좋지 않으신가요? 보약이라도 지어 올리라 명하겠습니다.”
“되었네. 내 그 마음만 기꺼이 받겠소.”
궁녀가 가져온 다과상을 본 혜비는 슬쩍 미소 지었다. 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 철두철미함에 감탄하였다가 항상 저들을 살펴보고 있구나 싶어 뜨끔하기도 하였다.
“소첩 마마의 명대로 가마를 물렸다 고하러 왔습니다. 의원이 이제 괜찮다 하여 오늘도 제 발로 걸어왔답니다.”
“내 혜비에게 이른 것은 다친 다리가 걱정되어서였지, 다른 연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오.”
혜비는 알고 있다고 답하였다. 실제로는 걱정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물론 알고 있었으나, 황후에게 그리 말할 수는 없었다. 본인이 황후 자리에 있다 하여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저라면 송 귀비를 불러 호되게 꾸짖었을 테지만 말이다. 황제가 무에 대수인가. 제 아비가 재상이고, 오라비가 대장군이라면 아무리 황제라 하여도 함부로 할 수 없을 터였다.
어리석은 사람. 혜비는 생각했다. 그깟 마음이 무엇이라고 모든 것을 손에 쥐고도 쓸 줄 모르는가. 그가 보기에 우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궐 안에서 우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이는 혜비, 본인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문안드리지 못했지요, 소첩이 미욱하여 다리를 핑계로 게을렀습니다.”
혜비는 꾸준히 우의 처소를 찾는 유일한 후궁이었다. 황후가 된 후 모든 비빈들이 초반에는 우를 꾸준히 찾았으나, 우가 사사로이 인사받는 것은 되었다, 공식적으로 말한 이후 점차 그 수가 줄어들더니 결국엔 혜비만이 남아 있었다.
“마마, 혹시 기억하십니까?”
“무엇을 말이오?”
“처음 입궐하였을 때 말입니다.”
첫 입궐, 그때가 언제였던가. 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소녀라 칭할 수도 없을 만큼 어렸던 때였다. 부모와 헤어지는 게 무섭고 낯설고 커다란 궐이 두려워 덜덜 떨었더랬다. 어린 여아들이 한곳에 모여 제 유모에게 매달려 눈물지었고, 어떤 아이는 어미를 찾았더랬다.
혜비는 그때 우와 함께 입궐했던 수많은 여아 중 하나였다. 많은 이들이 건강상의 이유, 혹은 결격사유로 퇴궐하였고 그중 남은 이들에 우와 혜비가 있었다.
기억에 잠긴 우를 바라보며, 혜비 역시 그때를 떠올렸다. 열 살이 되기도 전의 이야기였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알 수 없는 흔적을 그녀의 마음에 남겨 놓았다.
어찌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남루한 옷차림의 여아가 주저앉아 눈물만 뚝뚝 흘렸었다. 곁에 가솔들이 붙어 있는 이들과는 달리 투정을 부릴 이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남아 이도 저도 하지 못해 울고 있었으나 모두가 제가 보살피는 아가씨에 정신이 팔려 돌보지 않았었다. 그때 우가 나섰다. 제 옆의 여종과 유모를 두고 울고 있는 아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꽃과 같은 얼굴로 빙긋이 웃으며 다정히 말을 건넸었다. 저 역시 긴장된 얼굴로 울먹였으면서 저보다 작은 아이를 달랬다.
아직도 이란의 기억에 남아 있는 아릿한 기억이었다. 제가 받은 그대로를 행했을 것이 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정한 얼굴이 유달리 기억에 남아 아직도 왠지 모를 이유로 그 곁을 맴돌게 하였다.
“그랬나? 그래도 그 아이 기억은 나네. 순한 얼굴에 울음도 많고 웃음도 많았지.”
우가 미소 지었다. 그 아이가 함께 교육을 받던 중 결국 궐 밖으로 나가게 되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건만 그 순한 얼굴이 떠올라 괜스레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저를 마치 친동기처럼 쫓아다녔던 아이는 어찌 지낼까 문득 궁금해졌다.
혜비는 그런 우의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예, 그랬습니다. 가을이 와서인지 괜히 옛 생각이 듭니다.”
* * *
혜비의 뒤를 조용히 상궁과 궁녀들이 따랐다. 그네들은 어째서 혜비가 이토록 황후를 자주 찾아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아비가 예법에 아주 엄하다 하더니 그 딸마저 그런 것인가 그저 생각만 할 뿐이었다.
허면 왜 황제폐하께는 문안드리지 않는가, 태후마마께는 문안드리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일었으나 궐 안에서 상전을 모시면서 얻은 것이 눈치뿐인지라 조용히 따를 뿐이었다.
우는 명실상부 내명부의 실세였다. 황후였기에 당연시되는 일로 여겨질 수 있으나 본디 모든 황후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뒷방 신세로 전락한 황후가 한둘이던가?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모두의 표적이 되기에 십상이었고, 그중에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킨 이는 흔치 않았다.
송 귀비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는 하나 언제 시들해질지 모르는 황제의 총애 따위보다야 황후라는 지위와 그 대단한 집안이야말로 진정한 힘이었다. 황제가 아무리 송 귀비를 어여뻐하여도 황후의 집안을 생각하면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아비가 문신들의 수장이고, 오라비가 무신들의 실세였으니 황제뿐 아니라 모두가 우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황후, 우의 아래로 송 귀비가 있었으나 그이는 제가 쥔 권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품계만 귀비일 뿐 하는 짓거리는 저잣거리의 천둥벌거숭이 계집애였다. 그렇기에 혜비가 황후를 제외한 내명부의 권력자로 손에 꼽히곤 하였다. 그 집안이 우만 못하여도 명문가인 것은 분명하며, 그 지위가 송 귀비에 미치지 못한다고는 하나 가장 오래 비의 자리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 다들 송 귀비보다는 혜비를 더 윗사람 대하듯 하였다. 제 손에 있는 권력이 무엇인지 알고, 제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혜비를 다들 어려워하였다.
“우습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우습구나.”
“마마.”
혜비의 갑작스러운 말에 따르던 궁녀들과 상궁이 깜짝 놀라 주위를 살폈다. 상궁이 혜비의 곁으로 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옵니까, 마마.”
“그렇지 않으냐? 황제폐하께서 계시는 곳을 제외하고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한 궁이다. 그 궁의 주인이 앓고 있건만 궐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하지 않으냐. 국모가 아니더냐. 어미가 앓고 있는데 사방이 조용하니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겠느냐. 송 귀비가 앓아누웠다면 온 궁이 난리였겠지.”
혜비는 교태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태연한 모습에 상궁이 덜덜 떨었다. 누군가 듣고 고하기라도 한다면 사달이 날 터였다. 궁녀들 역시 혜비의 소리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누군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기 바빴다.
“다 제가 모자란 탓이 아니겠느냐. 손에 쥐고도 행하지 못함은.”
그 매서운 말에 상궁이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혜비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제야 혜비의 눈길이 교태전이 아니라 상궁에게로 떨어졌다. 제 행동에 놀란 상궁은 차마 뭐라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두어 걸음 물러섰다. 혜비는 상궁의 행동으로 생긴 저고리 소매의 주름을 매만지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며 궁녀들이 한숨을 쉬어 댔다.
“마마, 밤이 깊었사옵니다. 어서 자리에 드시지요.”
박 상궁이 우를 향해 고했다. 오늘따라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제 주인이 안쓰러워 박 상궁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연 것이다. 황제께선 그 모자란 송 귀비가 어디가 그리 어여쁘다고 귀하디귀한 황후마마를 이리 박대하시는지, 박 상궁은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 총애가 시작되자마자 궁 안 위계질서가 엉망이 되었으며, 황후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차 한 잔 내오게. 오늘은 쉬이 잠이 오지 않을 거 같구나.”
우가 한숨을 쉬었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처소는 이미 서늘하였다. 그는 오갈 데 없는 제 마음이 안타깝고 불쌍하였다. 아홉 살에 입궐하였고, 열네 살 황태자비가 되어 그를 처음 만났다. 그를 만난 지는 벌써 십 년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만을 보며 소리 죽여 그를 위해 살았다. 허나 점점 지쳤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그 마음이 서럽고 아팠다. 제 온 마음을 주었으나 그는 단 한 번도 저를 돌아보지 않았다.
알고는 있었다. 그가 돌아보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온몸으로 뿜어 대는 그 냉담함과 적대감을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다만 그 옆자리가 자신의 자리라는 것에 위안하며 지내 왔다. 허나 아니었다. 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울뿐인 황후 자리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 옆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있었다. 제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가 질끈 눈을 감았다. 우는 그렇게 소리 내어 울지도, 분노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속으로 삼키고 있었다.
* * *
“마마, 박 상궁입니다. 기침하셨는지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저를 부를 시간이 한참 지났건만, 우의 처소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박 상궁은 대답 없는 우의 침소에 허락 없이 발을 들였다.
“마마! 마마!”
간밤 찬바람에 기어코 탈이 난 건지 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고 있었다. 박 상궁은 궁녀를 불러 태후전에 황후의 건강이 좋지 않아 문안드리지 못함을 알리고, 태의를 불러오라 명하였다.
젖은 물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 내며 박 상궁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요새 더욱이 기분이 좋지 않으셨으나 이리 병까지 나실 줄은 몰랐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이 된 듯하여 더욱 안타까웠다.
“어떠하오? 우리 마마 어디가 편찮으신 거요?”
태의가 걱정하지 말라며 그저 침을 놓고 몇 가지 처방전을 지어 주었다. 며칠 안정을 취하시면 괜찮을 것이니 그저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면 된다 하였다.
박 상궁이 그 말에 입을 삐죽였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시오? 우리 마마께선 워낙 올바르신 분이라 할 일은 절대 미루지 않으시오! 다른 처소 마마들이야 그저 주는 거 받고 먹고 자면 될 일이지만 이분은 황후마마 아니오?! 내 속만 문드러지지. 그러지 말고 태의 어르신! 부탁 좀 드립시다.”
“무엇을 말이오?”
불안한 기색의 태의가 속삭이듯 물었다. 귓속말로 박 상궁이 소곤거리자 태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의가 떠나고 박 상궁은 우의 곁에서 젖은 물수건으로 계속해서 땀을 닦아 내었다. 우가 궐로 들어왔을 때부터 모시기 시작하여 벌써 세월이 유수같이 흘렀다. 소녀가 여인이 되기까지의 그 시간이 얼마나 모질었던가. 궐 안 여인의 삶이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주인으로 모셔서인가 유독 우가 안타까워 박 상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도 고운데, 이렇게도 절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이리 사시나 싶어 자꾸만 안타까웠다. 그 미색으로 천하를 손에 쥘 만도 하건만 어찌하여 이리 올곧게만 사시나.
“박 상궁님! 혜비전에서 문안 인사 드리러 왔답니다. 어찌할까요?”
문밖에서 조용히 전하는 소리에 박 상궁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 왜 그 혜비인지.
“오셨습니까, 혜비마마.”
“내 황후마마께 인사드리러 왔네. 고하시게.”
박 상궁이 곤란한 얼굴로 혜비에게 허리를 굽혔다.
“황후마마께옵서 옥체가 편치 않으십니다. 다음에 다시 오시지요.”
혜비의 얼굴에 노여움이 서렸다. 인상을 찌푸리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냉담한 눈빛에 박 상궁이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혔다. 혜비는 타고나기를 마치 아랫사람을 부리도록 태어난 이 같았다. 우와는 다른 의미로 속을 알기 어려웠고, 그 속엔 자비도 없었다. 그렇다 하여 제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는 않으니 슬슬 저도 모르게 계속 눈치를 보는 것이다. 혜비에게는 제 사람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저 모두가 똑같았다.
“고해 주시게. 내 인사를 거절하는 것이 박 상궁이 되어야겠는가?”
처음과 같이 변함없는 그 말투에 박 상궁이 기다리라며 어쩔 수 없이 돌아섰다. 아픈 이를 깨우고 싶지 않았으나 제 능력이 미천한 것을 어찌하랴.
“마마, 혜비마마께서 인사 여쭌다 하십니다.”
결국 잠들었던 우가 깨어났다. 박 상궁은 나가서 혜비에게 인사는 받겠으나 몸이 여의치 않아 조금 오래 기다리셔야 한다 전하였다. 말을 전한 박 상궁은 우의 몸치장을 도왔다. 땀으로 인해 젖은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기고, 의복을 입는 것을 도왔다. 가볍게 차려입으셔도 되련만 굳이 모든 것을 어긋나지 않도록 준비하는 우의 모습에 왠지 모를 대견함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일었다.
자리에 앉은 우를 보니 안색이 좋지 않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고와 보여 박 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다 하여 본디 그 미색이 어디 가겠는가.
“박 상궁, 혜비를 모시고, 다과상도 서둘러 준비하여 내오게.”
“예, 마마.”
“황후마마께 인사 여쭙니다.”
혜비가 우에게 절을 올렸다. 귀한 비단옷에 같은 색의 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자수는 자세히 보아야 진가를 발휘했다. 혜비는 그가 입은 옷처럼 얼핏 보아선 알 수 없는 이였다.
“양해해 주게. 몸이 좋지 않아 오래 기다리게 했네.”
혜비가 우의 안색을 살폈다. 박 상궁의 말처럼 진실로 몸이 좋지 않은지 그 안색이 창백하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앉은 자세나 행동이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소첩이 괜히 왔나 봅니다. 어찌 이리 안색이 좋지 않으신가요? 보약이라도 지어 올리라 명하겠습니다.”
“되었네. 내 그 마음만 기꺼이 받겠소.”
궁녀가 가져온 다과상을 본 혜비는 슬쩍 미소 지었다. 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 철두철미함에 감탄하였다가 항상 저들을 살펴보고 있구나 싶어 뜨끔하기도 하였다.
“소첩 마마의 명대로 가마를 물렸다 고하러 왔습니다. 의원이 이제 괜찮다 하여 오늘도 제 발로 걸어왔답니다.”
“내 혜비에게 이른 것은 다친 다리가 걱정되어서였지, 다른 연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오.”
혜비는 알고 있다고 답하였다. 실제로는 걱정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물론 알고 있었으나, 황후에게 그리 말할 수는 없었다. 본인이 황후 자리에 있다 하여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저라면 송 귀비를 불러 호되게 꾸짖었을 테지만 말이다. 황제가 무에 대수인가. 제 아비가 재상이고, 오라비가 대장군이라면 아무리 황제라 하여도 함부로 할 수 없을 터였다.
어리석은 사람. 혜비는 생각했다. 그깟 마음이 무엇이라고 모든 것을 손에 쥐고도 쓸 줄 모르는가. 그가 보기에 우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궐 안에서 우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이는 혜비, 본인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문안드리지 못했지요, 소첩이 미욱하여 다리를 핑계로 게을렀습니다.”
혜비는 꾸준히 우의 처소를 찾는 유일한 후궁이었다. 황후가 된 후 모든 비빈들이 초반에는 우를 꾸준히 찾았으나, 우가 사사로이 인사받는 것은 되었다, 공식적으로 말한 이후 점차 그 수가 줄어들더니 결국엔 혜비만이 남아 있었다.
“마마, 혹시 기억하십니까?”
“무엇을 말이오?”
“처음 입궐하였을 때 말입니다.”
첫 입궐, 그때가 언제였던가. 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소녀라 칭할 수도 없을 만큼 어렸던 때였다. 부모와 헤어지는 게 무섭고 낯설고 커다란 궐이 두려워 덜덜 떨었더랬다. 어린 여아들이 한곳에 모여 제 유모에게 매달려 눈물지었고, 어떤 아이는 어미를 찾았더랬다.
혜비는 그때 우와 함께 입궐했던 수많은 여아 중 하나였다. 많은 이들이 건강상의 이유, 혹은 결격사유로 퇴궐하였고 그중 남은 이들에 우와 혜비가 있었다.
기억에 잠긴 우를 바라보며, 혜비 역시 그때를 떠올렸다. 열 살이 되기도 전의 이야기였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알 수 없는 흔적을 그녀의 마음에 남겨 놓았다.
어찌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남루한 옷차림의 여아가 주저앉아 눈물만 뚝뚝 흘렸었다. 곁에 가솔들이 붙어 있는 이들과는 달리 투정을 부릴 이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남아 이도 저도 하지 못해 울고 있었으나 모두가 제가 보살피는 아가씨에 정신이 팔려 돌보지 않았었다. 그때 우가 나섰다. 제 옆의 여종과 유모를 두고 울고 있는 아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꽃과 같은 얼굴로 빙긋이 웃으며 다정히 말을 건넸었다. 저 역시 긴장된 얼굴로 울먹였으면서 저보다 작은 아이를 달랬다.
아직도 이란의 기억에 남아 있는 아릿한 기억이었다. 제가 받은 그대로를 행했을 것이 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정한 얼굴이 유달리 기억에 남아 아직도 왠지 모를 이유로 그 곁을 맴돌게 하였다.
“그랬나? 그래도 그 아이 기억은 나네. 순한 얼굴에 울음도 많고 웃음도 많았지.”
우가 미소 지었다. 그 아이가 함께 교육을 받던 중 결국 궐 밖으로 나가게 되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건만 그 순한 얼굴이 떠올라 괜스레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저를 마치 친동기처럼 쫓아다녔던 아이는 어찌 지낼까 문득 궁금해졌다.
혜비는 그런 우의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예, 그랬습니다. 가을이 와서인지 괜히 옛 생각이 듭니다.”
* * *
혜비의 뒤를 조용히 상궁과 궁녀들이 따랐다. 그네들은 어째서 혜비가 이토록 황후를 자주 찾아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아비가 예법에 아주 엄하다 하더니 그 딸마저 그런 것인가 그저 생각만 할 뿐이었다.
허면 왜 황제폐하께는 문안드리지 않는가, 태후마마께는 문안드리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일었으나 궐 안에서 상전을 모시면서 얻은 것이 눈치뿐인지라 조용히 따를 뿐이었다.
우는 명실상부 내명부의 실세였다. 황후였기에 당연시되는 일로 여겨질 수 있으나 본디 모든 황후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뒷방 신세로 전락한 황후가 한둘이던가?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모두의 표적이 되기에 십상이었고, 그중에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킨 이는 흔치 않았다.
송 귀비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는 하나 언제 시들해질지 모르는 황제의 총애 따위보다야 황후라는 지위와 그 대단한 집안이야말로 진정한 힘이었다. 황제가 아무리 송 귀비를 어여뻐하여도 황후의 집안을 생각하면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아비가 문신들의 수장이고, 오라비가 무신들의 실세였으니 황제뿐 아니라 모두가 우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황후, 우의 아래로 송 귀비가 있었으나 그이는 제가 쥔 권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품계만 귀비일 뿐 하는 짓거리는 저잣거리의 천둥벌거숭이 계집애였다. 그렇기에 혜비가 황후를 제외한 내명부의 권력자로 손에 꼽히곤 하였다. 그 집안이 우만 못하여도 명문가인 것은 분명하며, 그 지위가 송 귀비에 미치지 못한다고는 하나 가장 오래 비의 자리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 다들 송 귀비보다는 혜비를 더 윗사람 대하듯 하였다. 제 손에 있는 권력이 무엇인지 알고, 제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혜비를 다들 어려워하였다.
“우습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우습구나.”
“마마.”
혜비의 갑작스러운 말에 따르던 궁녀들과 상궁이 깜짝 놀라 주위를 살폈다. 상궁이 혜비의 곁으로 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옵니까, 마마.”
“그렇지 않으냐? 황제폐하께서 계시는 곳을 제외하고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한 궁이다. 그 궁의 주인이 앓고 있건만 궐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하지 않으냐. 국모가 아니더냐. 어미가 앓고 있는데 사방이 조용하니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겠느냐. 송 귀비가 앓아누웠다면 온 궁이 난리였겠지.”
혜비는 교태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태연한 모습에 상궁이 덜덜 떨었다. 누군가 듣고 고하기라도 한다면 사달이 날 터였다. 궁녀들 역시 혜비의 소리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누군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기 바빴다.
“다 제가 모자란 탓이 아니겠느냐. 손에 쥐고도 행하지 못함은.”
그 매서운 말에 상궁이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혜비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제야 혜비의 눈길이 교태전이 아니라 상궁에게로 떨어졌다. 제 행동에 놀란 상궁은 차마 뭐라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두어 걸음 물러섰다. 혜비는 상궁의 행동으로 생긴 저고리 소매의 주름을 매만지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며 궁녀들이 한숨을 쉬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