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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혜비가 떠나고 난 뒤, 우의 처소에는 소란이 일었다. 무리를 한 탓인지 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다 휘청거린 탓이었다. 주인이 아프니 당연히 처소가 시끄러울 수밖에. 결국 태의가 한 번 더 다녀가고 우가 잠이 들고 나서야 처소가 조용해졌다.
박 상궁이 우의 곁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황제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태의를 통해 우가 앓아누웠다는 소식이 들리도록 했건만 결국 허탕이었다. 황제와 황후라고 하나, 부부가 아니던가. 어찌 이리 매정한지 알 수 없었다. 키우던 짐승이 앓아도 이러지는 않겠다며 박 상궁은 그 모진 황제를 향해 속으로 욕을 퍼부어 댔다.
새벽녘이었다. 우가 눈을 뜬 것은. 침상 곁에는 박 상궁이 손에 물수건을 쥔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다정함이 기꺼워 우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보게, 박 상궁.”
목소리가 한껏 잠겨 잘 나오지 않았으나 용케 박 상궁은 그 소리에 퍼뜩 놀라 잠에서 깨었다. 아이고아이고 하며 손에 쥔 물수건을 팽개치고는 서둘러 물을 따라 우에게 먹였다.
“난 괜찮으니 처소로 돌아가 편히 쉬도록 하게.”
박 상궁이 우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픈 주인을 홀로 두고 어찌 제가 발 뻗고 편히 누워 잔단 말인가. 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박 상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픈 우를 돌봐 줄 이가 저뿐인지라 더욱 고집을 부렸다. 결국 우는 다시금 잠이 들었고, 그 곁을 박 상궁이 홀로 지켰다.
아침이 되자 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훨씬 몸이 가벼워져 누워 있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박 상궁은 그런 우의 곁에서 혹시나 하는 걱정에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며 우가 최대한 무리하지 않도록 애썼다. 태후에게는 다시 몸이 좋지 않아 문안 인사를 거른다고 전하고, 우가 보아야 할 문서들은 급한 것과 급하지 않은 것으로 나누었다. 하루를 온전히 쉬지도 못하는 우가 안쓰러워 박 상궁은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갈수록 한숨만 늘어 가는 현실에 또 한 번 한숨을 내쉰 박 상궁이었다.
우의 걱정으로 오전 내내 한숨만 내쉬던 박 상궁은 예상치 못한 방문객을 맞이하고 나서야 한숨 쉬는 것을 멈추었다.
“내 황후마마께 인사드리러 왔네.”
희원이었다. 박 상궁이 반가워하며 희원을 이끌었다.
“소왕야 아니십니까, 인사도 없이 그냥 떠나신 줄 알았습니다.”
희원이 답 없이 빙그레 웃었다. 희원은 웃음이 많다 하여 소(笑)왕야로도 불렸다. 박 상궁의 말대로 그냥 떠날까 하다 우가 아프단 소식에 방문한 희원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박 상궁이 모를 리 없었고, 희원이 방문하고 나면 우의 기분이 좋아지니 저도 모르게 희원이 입궁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그를 기다리곤 하였다.
“마마께서 괜찮으시면 내 인사를 좀 드릴까 하여 왔네.”
“마마야 소왕야는 언제든 기꺼워하시지요!”
요 며칠 새 좋지 않던 우의 기분을 생각한 박 상궁이 한껏 들떴다. 그러고는 서둘러 우에게 희원의 방문을 고하였다. 박 상궁의 예상대로였다. 우는 희원의 방문을 기꺼워했다.
“왕야, 어서 오세요.”
“몸이 편치 않으시다 하여 왔습니다. 괜찮으십니까?”
희원의 눈에 얼굴빛이 좋지 않은 우가 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메마른 입술이 한눈에 보아도 건강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말뿐이었다. 건넬 수 있는 것은.
“어찌 이러십니까?”
희원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굳은 얼굴과 낮게 깔린 목소리의 희원이 낯설어 우가 당황하여 희원을 불렀으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잔인했다. 제 곁에 있을 수 없는 여인의 불행을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 곁을 맴돌고 자꾸만 지켜보는 것은 애타는 마음과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어 저도 모르게, 결국엔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긴 침묵을 깨고 우가 말했다. 희원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우와 상처받은 희원의 눈이 마주쳤다. 희원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우가 그의 걱정을 덜어 주려 보란 듯이 빙긋 웃어 보였다. 그 모습마저 희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마음을 다스린 희원이 짐짓 장난스럽게 우를 야단쳤다. 가면을 뒤집어쓴 채 평온함을 연기하는 그 속마음은 이미 난도질당한 것처럼 엉망이었으나 겉으로 그는 여전히 웃음 많은 소왕야였다. 평상시처럼 돌아온 희원의 모습에 우가 잠시 멈칫했으나 곧 그 장단에 맞춰 주었다.
“오늘 퇴궐하려 합니다. 퇴궐하기 전 편찮으시다는 소식에 걱정이 되어 이리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벌써 가십니까? 좀 더 머물다 가시지 않고요.”
우가 아쉬움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희원이 궁을 방문하는 것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일 년에 두어 번쯤, 아니 여행이 길어지면 이 년이 넘어가기도 하였다. 간혹 서찰이나 귀한 물건을 보내는 일도 더러 있었으나 그렇다고 그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희원은 겁쟁이였다. 곁에 머무르며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없었다. 날로 커져만 가는 욕심이 저를 삼키고 결국 화를 부를 거 같았다. 그렇다 하여 모든 것을 끊어 내기엔 품고 있는 마음이 커다랬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겁쟁이처럼 그는 멀리 떠났다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방방곡곡을 헤매다가도 결국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우의 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제 천성이 한곳에 있질 못하나 봅니다. 슬슬 좀이 쑤시는 것이 떠날 때가 된 것이지요. 마마, 건강하셔야 합니다. 조금쯤 이기적이어도 괜찮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마마를 위해 행동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희원의 다정한 말에 우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모든 것이 황제, 희윤을 위한 것이었다. 우의 모든 것은 희윤을 위해 움직였다. 그를 모르고 있는 희원이 아니었고, 희원의 말을 이해 못 할 우도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으니 어찌할 수 없어 그저 어설픈 웃음만 지어 보였다.
희원이 떠나고 우는 밀려오는 쓸쓸함에 서글펐다. 이 넓은 궁 안, 많은 사람들 중 저를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이가 그뿐이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아비가 재상이고, 오라비가 대장군인 것이 무슨 소용인가. 우는 오히려 황후가 된 후 가족과는 거리를 두었다. 집안을 등에 업고 궁을 휘젓는다는 소리가 나지 않게, 혹여 사달이 나더라도 오로지 저만 책임지도록, 제 피붙이들은 무사하도록 자꾸만 거리를 두었다. 이런 우의 뜻을 알아서인지, 아니면 마찬가지로 우를 염려하는 마음 때문인지 그들 역시 거리를 두었다.
기댈 곳 하나 없이 홀로 황후의 자리를 지켜 가는 일은 고달프고 고달팠다. 희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그가 가는 길이 저로 인해 조금이나마 편해지기를,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인내하였다. 그가 원한다면 설령 제 목숨이라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우의 애정에 돌아온 것은 무관심이었다.
입궐하면서부터 우는 황후였다. 황후로 자랐고, 황제가 될 희윤의 옆자리가 자신의 것이라 배웠다. 제가 황태자비가 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한 점의 의심 없이 그의 옆자리가, 반려가 저라고 믿었다. 황태자비가 되어 처음 만난 희윤은 우에게는 항상 기다려 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사랑에 빠졌다. 그때의 희윤은 그래도 조금은 다정했었다. 소년의 쑥스러움이 우를 미소 짓게 했었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저와 그는 이토록 멀리 왔는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만이 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第二章. 빛과 어둠
너는 항상 그렇게 미소 하나로 작은 손짓 하나로 내가 애타게 갈망하는 것들을 아주 손쉽게 넣는다. 내가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도 얻지 못한 것을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가진다.
너는 빛이다. 너는 행복이고, 너는 희망이며, 너는 선이다.
나는 어둠이다. 나는 불행이고, 나는 절망이며, 나는 악이다.
그는 모든 반짝이는 것들과 달콤한 사랑의 말로 너의 존재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해하겠지. 그리고 모든 추악한 것들을 그러모아 나의 존재와 애정을 부정하겠지. 그러나 결국 그 옆에 남은 것은 나일 것이다. 그 옆에 서 있는 것은, 그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은 내가 되리라.
* * *
“박 상궁, 귀비에게 내가 보자 하였다 전해 주시게.”
이른 아침 눈을 뜬 우가 아침 식사 후 박 상궁에게 일렀다. 박 상궁은 이제야 송 귀비가 혼쭐이 나나 싶어 밝은 얼굴로 처소를 나섰다. 그이가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긴장한 얼굴의 송 귀비가 쭈뼛대며 교태전으로 들었다.
“황후마마께 인사드리옵니다.”
“어서 오게. 내 긴히 할 말이 있어 이리 청하였네.”
송 귀비는 최대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인사를 올린 후 조심스럽게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속으로 상궁이 일러 준 법도를 외우느라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 우가 저를 어이 부른 것인지는 생각도 못 하고 말이다.
“귀비가 단것을 좋아한다 하여 내 간단히 다과를 준비하였네.”
“마마의 성심에 감사드립니다.”
우가 준비한 것들은 모두 송 귀비가 평소에 잘 먹는 것들이었다. 그는 긴장으로 미처 눈치채지 못했으나 그것은 송 귀비의 취향을 헤아린 것이었다.
송 귀비는 조심스럽게 차를 마셨다. 혀끝에 맴도는 단맛에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우를 마주 보고 앉아 있으니 그 미색이 놀랍고, 그 행동거지가 어여뻐 놀랍고, 그 고운 목소리가 놀랍고, 모든 것이 놀라운 것투성이였다. 황후의 복색이었으나 검소한 모습이었다. 물론 황후의 복색이 초라할 리는 없으나 전날 그가 찾았던 여러 비빈들의 행색과 비교하니 그 지위에 비해 차림이 단출하였다. 처소 역시 단정하고, 검소하였다.
“내 귀비를 이리 부른 것은 청할 것이 있어서라네.”
“예, 마마. 무엇이든지 말씀하시어요.”
마시던 차를 놓지도 않고, 무작정 고개를 조아리는 송 귀비의 어린 모습에 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이가 품은 이는 이렇구나. 여리고 꽃 같구나. 순진하기 그지없구나. 나와는 전혀 다른 이구나. 우는 다시 한 번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진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황제폐하께서 하사하신 가마를 그만 타는 것이 어떻겠나? 본디 궐 안에서 가마를 탈 수 있는 이는 황제와 그 부모, 혹은 몸이 불편한 이들뿐이라오. 귀비의 가마를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은 내 알고 있지만 궐 안의 법도가 그러하니 사용을 자제했으면 한다오.”
우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 말에 송 귀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쥐고 있던 찻잔을 놓지도 않고 붉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그 모습이 누가 보아도 그이가 당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소첩이 무지하여 궐 안 법도에 대해 몰랐으니 용서해 주시어요. 앞으로는 가마를 타지 않겠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 모습에 우가 마음이 불편해져 오히려 그를 달랬다. 하마터면 차를 엎을 뻔한 송 귀비의 얼굴이 더욱더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지난번 일이 이해된 것이다. 혜비가 왜 저를 걸고넘어졌는지, 눈치 없다고는 하나 궐에 들어온 지 일 년이었다. 황후가 저를 어찌 감싸 주었는지도 기억이 났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저 자신이 한심스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제 곁의 모두가 쉬쉬하고 있으니 알 턱이 없었다. 황제의 과보호가 저를 이리 고립되게 만들고 있는 거 같았다. 그저 황제가 내렸으니, 타고 다니라 주었으니 그리했을 뿐이었다. 제가 모르는 사이 살벌한 다툼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 한가운데서 멍청하게 황후를 방패막이로 사용하고 있었다.
“귀비를 탓하는 게 아닐세. 하사품은 당연히 사용하는 것이 맞지. 다만, 곱지 않게 보는 눈들이 있으니 내 이리 청하는 걸세. 자네의 잘못이 아니네. 청한다고 하지 않았나. 잘못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부탁을 하는 게야.”
우의 차분하고 부드러운 어투가 송 귀비를 얼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송 귀비에게 우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한참을 그리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송 귀비는 진정하였다. 우는 차분히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고, 그저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진정한 송 귀비의 모습을 보고 우가 입을 열었다.
“괜찮은가?”
“송구하옵니다, 마마.”
송 귀비가 붉어진 눈가를 소매로 살짝 문지르며 대답하였다. 귀비라는 자리에 앉은 이가 이리 추태를 보인 것이 창피하였다. 소국의 몰락한 귀족의 딸이라 자신이 이리 못나고 배포가 작은 것인가 하여 울적한 마음도 일었다. 그러다 또 제 못난 마음이 부끄러워 속이 아팠다.
혜비가 떠나고 난 뒤, 우의 처소에는 소란이 일었다. 무리를 한 탓인지 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다 휘청거린 탓이었다. 주인이 아프니 당연히 처소가 시끄러울 수밖에. 결국 태의가 한 번 더 다녀가고 우가 잠이 들고 나서야 처소가 조용해졌다.
박 상궁이 우의 곁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황제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태의를 통해 우가 앓아누웠다는 소식이 들리도록 했건만 결국 허탕이었다. 황제와 황후라고 하나, 부부가 아니던가. 어찌 이리 매정한지 알 수 없었다. 키우던 짐승이 앓아도 이러지는 않겠다며 박 상궁은 그 모진 황제를 향해 속으로 욕을 퍼부어 댔다.
새벽녘이었다. 우가 눈을 뜬 것은. 침상 곁에는 박 상궁이 손에 물수건을 쥔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다정함이 기꺼워 우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보게, 박 상궁.”
목소리가 한껏 잠겨 잘 나오지 않았으나 용케 박 상궁은 그 소리에 퍼뜩 놀라 잠에서 깨었다. 아이고아이고 하며 손에 쥔 물수건을 팽개치고는 서둘러 물을 따라 우에게 먹였다.
“난 괜찮으니 처소로 돌아가 편히 쉬도록 하게.”
박 상궁이 우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픈 주인을 홀로 두고 어찌 제가 발 뻗고 편히 누워 잔단 말인가. 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박 상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픈 우를 돌봐 줄 이가 저뿐인지라 더욱 고집을 부렸다. 결국 우는 다시금 잠이 들었고, 그 곁을 박 상궁이 홀로 지켰다.
아침이 되자 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훨씬 몸이 가벼워져 누워 있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박 상궁은 그런 우의 곁에서 혹시나 하는 걱정에 이리저리 동분서주하며 우가 최대한 무리하지 않도록 애썼다. 태후에게는 다시 몸이 좋지 않아 문안 인사를 거른다고 전하고, 우가 보아야 할 문서들은 급한 것과 급하지 않은 것으로 나누었다. 하루를 온전히 쉬지도 못하는 우가 안쓰러워 박 상궁은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갈수록 한숨만 늘어 가는 현실에 또 한 번 한숨을 내쉰 박 상궁이었다.
우의 걱정으로 오전 내내 한숨만 내쉬던 박 상궁은 예상치 못한 방문객을 맞이하고 나서야 한숨 쉬는 것을 멈추었다.
“내 황후마마께 인사드리러 왔네.”
희원이었다. 박 상궁이 반가워하며 희원을 이끌었다.
“소왕야 아니십니까, 인사도 없이 그냥 떠나신 줄 알았습니다.”
희원이 답 없이 빙그레 웃었다. 희원은 웃음이 많다 하여 소(笑)왕야로도 불렸다. 박 상궁의 말대로 그냥 떠날까 하다 우가 아프단 소식에 방문한 희원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박 상궁이 모를 리 없었고, 희원이 방문하고 나면 우의 기분이 좋아지니 저도 모르게 희원이 입궁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그를 기다리곤 하였다.
“마마께서 괜찮으시면 내 인사를 좀 드릴까 하여 왔네.”
“마마야 소왕야는 언제든 기꺼워하시지요!”
요 며칠 새 좋지 않던 우의 기분을 생각한 박 상궁이 한껏 들떴다. 그러고는 서둘러 우에게 희원의 방문을 고하였다. 박 상궁의 예상대로였다. 우는 희원의 방문을 기꺼워했다.
“왕야, 어서 오세요.”
“몸이 편치 않으시다 하여 왔습니다. 괜찮으십니까?”
희원의 눈에 얼굴빛이 좋지 않은 우가 보였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메마른 입술이 한눈에 보아도 건강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말뿐이었다. 건넬 수 있는 것은.
“어찌 이러십니까?”
희원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굳은 얼굴과 낮게 깔린 목소리의 희원이 낯설어 우가 당황하여 희원을 불렀으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잔인했다. 제 곁에 있을 수 없는 여인의 불행을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 곁을 맴돌고 자꾸만 지켜보는 것은 애타는 마음과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어 저도 모르게, 결국엔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긴 침묵을 깨고 우가 말했다. 희원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우와 상처받은 희원의 눈이 마주쳤다. 희원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우가 그의 걱정을 덜어 주려 보란 듯이 빙긋 웃어 보였다. 그 모습마저 희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마음을 다스린 희원이 짐짓 장난스럽게 우를 야단쳤다. 가면을 뒤집어쓴 채 평온함을 연기하는 그 속마음은 이미 난도질당한 것처럼 엉망이었으나 겉으로 그는 여전히 웃음 많은 소왕야였다. 평상시처럼 돌아온 희원의 모습에 우가 잠시 멈칫했으나 곧 그 장단에 맞춰 주었다.
“오늘 퇴궐하려 합니다. 퇴궐하기 전 편찮으시다는 소식에 걱정이 되어 이리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벌써 가십니까? 좀 더 머물다 가시지 않고요.”
우가 아쉬움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희원이 궁을 방문하는 것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일 년에 두어 번쯤, 아니 여행이 길어지면 이 년이 넘어가기도 하였다. 간혹 서찰이나 귀한 물건을 보내는 일도 더러 있었으나 그렇다고 그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희원은 겁쟁이였다. 곁에 머무르며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없었다. 날로 커져만 가는 욕심이 저를 삼키고 결국 화를 부를 거 같았다. 그렇다 하여 모든 것을 끊어 내기엔 품고 있는 마음이 커다랬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겁쟁이처럼 그는 멀리 떠났다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방방곡곡을 헤매다가도 결국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우의 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제 천성이 한곳에 있질 못하나 봅니다. 슬슬 좀이 쑤시는 것이 떠날 때가 된 것이지요. 마마, 건강하셔야 합니다. 조금쯤 이기적이어도 괜찮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마마를 위해 행동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희원의 다정한 말에 우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모든 것이 황제, 희윤을 위한 것이었다. 우의 모든 것은 희윤을 위해 움직였다. 그를 모르고 있는 희원이 아니었고, 희원의 말을 이해 못 할 우도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으니 어찌할 수 없어 그저 어설픈 웃음만 지어 보였다.
희원이 떠나고 우는 밀려오는 쓸쓸함에 서글펐다. 이 넓은 궁 안, 많은 사람들 중 저를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이가 그뿐이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아비가 재상이고, 오라비가 대장군인 것이 무슨 소용인가. 우는 오히려 황후가 된 후 가족과는 거리를 두었다. 집안을 등에 업고 궁을 휘젓는다는 소리가 나지 않게, 혹여 사달이 나더라도 오로지 저만 책임지도록, 제 피붙이들은 무사하도록 자꾸만 거리를 두었다. 이런 우의 뜻을 알아서인지, 아니면 마찬가지로 우를 염려하는 마음 때문인지 그들 역시 거리를 두었다.
기댈 곳 하나 없이 홀로 황후의 자리를 지켜 가는 일은 고달프고 고달팠다. 희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그가 가는 길이 저로 인해 조금이나마 편해지기를,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인내하였다. 그가 원한다면 설령 제 목숨이라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우의 애정에 돌아온 것은 무관심이었다.
입궐하면서부터 우는 황후였다. 황후로 자랐고, 황제가 될 희윤의 옆자리가 자신의 것이라 배웠다. 제가 황태자비가 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한 점의 의심 없이 그의 옆자리가, 반려가 저라고 믿었다. 황태자비가 되어 처음 만난 희윤은 우에게는 항상 기다려 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사랑에 빠졌다. 그때의 희윤은 그래도 조금은 다정했었다. 소년의 쑥스러움이 우를 미소 짓게 했었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저와 그는 이토록 멀리 왔는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만이 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第二章. 빛과 어둠
너는 항상 그렇게 미소 하나로 작은 손짓 하나로 내가 애타게 갈망하는 것들을 아주 손쉽게 넣는다. 내가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도 얻지 못한 것을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가진다.
너는 빛이다. 너는 행복이고, 너는 희망이며, 너는 선이다.
나는 어둠이다. 나는 불행이고, 나는 절망이며, 나는 악이다.
그는 모든 반짝이는 것들과 달콤한 사랑의 말로 너의 존재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해하겠지. 그리고 모든 추악한 것들을 그러모아 나의 존재와 애정을 부정하겠지. 그러나 결국 그 옆에 남은 것은 나일 것이다. 그 옆에 서 있는 것은, 그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은 내가 되리라.
* * *
“박 상궁, 귀비에게 내가 보자 하였다 전해 주시게.”
이른 아침 눈을 뜬 우가 아침 식사 후 박 상궁에게 일렀다. 박 상궁은 이제야 송 귀비가 혼쭐이 나나 싶어 밝은 얼굴로 처소를 나섰다. 그이가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긴장한 얼굴의 송 귀비가 쭈뼛대며 교태전으로 들었다.
“황후마마께 인사드리옵니다.”
“어서 오게. 내 긴히 할 말이 있어 이리 청하였네.”
송 귀비는 최대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인사를 올린 후 조심스럽게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속으로 상궁이 일러 준 법도를 외우느라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 우가 저를 어이 부른 것인지는 생각도 못 하고 말이다.
“귀비가 단것을 좋아한다 하여 내 간단히 다과를 준비하였네.”
“마마의 성심에 감사드립니다.”
우가 준비한 것들은 모두 송 귀비가 평소에 잘 먹는 것들이었다. 그는 긴장으로 미처 눈치채지 못했으나 그것은 송 귀비의 취향을 헤아린 것이었다.
송 귀비는 조심스럽게 차를 마셨다. 혀끝에 맴도는 단맛에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우를 마주 보고 앉아 있으니 그 미색이 놀랍고, 그 행동거지가 어여뻐 놀랍고, 그 고운 목소리가 놀랍고, 모든 것이 놀라운 것투성이였다. 황후의 복색이었으나 검소한 모습이었다. 물론 황후의 복색이 초라할 리는 없으나 전날 그가 찾았던 여러 비빈들의 행색과 비교하니 그 지위에 비해 차림이 단출하였다. 처소 역시 단정하고, 검소하였다.
“내 귀비를 이리 부른 것은 청할 것이 있어서라네.”
“예, 마마. 무엇이든지 말씀하시어요.”
마시던 차를 놓지도 않고, 무작정 고개를 조아리는 송 귀비의 어린 모습에 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이가 품은 이는 이렇구나. 여리고 꽃 같구나. 순진하기 그지없구나. 나와는 전혀 다른 이구나. 우는 다시 한 번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진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황제폐하께서 하사하신 가마를 그만 타는 것이 어떻겠나? 본디 궐 안에서 가마를 탈 수 있는 이는 황제와 그 부모, 혹은 몸이 불편한 이들뿐이라오. 귀비의 가마를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은 내 알고 있지만 궐 안의 법도가 그러하니 사용을 자제했으면 한다오.”
우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 말에 송 귀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쥐고 있던 찻잔을 놓지도 않고 붉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그 모습이 누가 보아도 그이가 당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소첩이 무지하여 궐 안 법도에 대해 몰랐으니 용서해 주시어요. 앞으로는 가마를 타지 않겠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 모습에 우가 마음이 불편해져 오히려 그를 달랬다. 하마터면 차를 엎을 뻔한 송 귀비의 얼굴이 더욱더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지난번 일이 이해된 것이다. 혜비가 왜 저를 걸고넘어졌는지, 눈치 없다고는 하나 궐에 들어온 지 일 년이었다. 황후가 저를 어찌 감싸 주었는지도 기억이 났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저 자신이 한심스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제 곁의 모두가 쉬쉬하고 있으니 알 턱이 없었다. 황제의 과보호가 저를 이리 고립되게 만들고 있는 거 같았다. 그저 황제가 내렸으니, 타고 다니라 주었으니 그리했을 뿐이었다. 제가 모르는 사이 살벌한 다툼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 한가운데서 멍청하게 황후를 방패막이로 사용하고 있었다.
“귀비를 탓하는 게 아닐세. 하사품은 당연히 사용하는 것이 맞지. 다만, 곱지 않게 보는 눈들이 있으니 내 이리 청하는 걸세. 자네의 잘못이 아니네. 청한다고 하지 않았나. 잘못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부탁을 하는 게야.”
우의 차분하고 부드러운 어투가 송 귀비를 얼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송 귀비에게 우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한참을 그리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송 귀비는 진정하였다. 우는 차분히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고, 그저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진정한 송 귀비의 모습을 보고 우가 입을 열었다.
“괜찮은가?”
“송구하옵니다, 마마.”
송 귀비가 붉어진 눈가를 소매로 살짝 문지르며 대답하였다. 귀비라는 자리에 앉은 이가 이리 추태를 보인 것이 창피하였다. 소국의 몰락한 귀족의 딸이라 자신이 이리 못나고 배포가 작은 것인가 하여 울적한 마음도 일었다. 그러다 또 제 못난 마음이 부끄러워 속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