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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오후가 되어서도 햇살은 인색했고 창으로는 살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이빨방아에 머리는 갈수록 무겁다. 따뜻한 방에서 두툼한 이불을 덮고 눕고 싶다. 더는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순간 정아의 모습이 떠오른다. 재웅은 이를 악물고 주방의 구조와 기물을 꼼꼼히 살폈다.
오후 3시에 먼저 퇴근을 하던 최 씨가 오늘은 일을 거들고 갔다. 덕분에 평소보다 한 시간 빠른 5시에 퇴근했다. 출근복으로 선택했던 밝은 그레이칼라 오버코트를 걸쳐 더러워진 스웨터를 가리고 여동생 아영의 차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장 여사의 지시로 아영이 어제부터 퇴근길에 데리러 온다. 발을 동동 구르며 독촉 전화를 했다. 어스름한 저편에서 라이트가 켜지며 빨간 승용차가 다가온다. 아영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불퉁거리며 조수석 문을 열었더니 형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뭐야? 네가 왜 여기 타고 있지?”
재웅은 만사가 귀찮다는 투로 힘없이 말했다.
“응. 너 일 끝나면 같이 이 집 닭 먹으려고 왔어.”
“닭, 닭 자도 꺼내지 마라. 내려!”
형석을 끌어내고 조수석에 주저앉으며 운전석의 아영에게 소리쳤다.
“히터 세게!”
“어머! 오빠, 꼴이 뭐야. 어제보다 더하네!”
“득도로 향하는 고행 길을 가시는 중이랬잖니.”
뒷자리로 올라탄 형석이 이죽거린다.
“임마, 넌 연습이나 하지 왜 왔어?”
“우리 예쁜 아영 씨가 호출하시는데 어찌 신사의 도리를 저버릴 수 있냐?”
“미친놈.”
재웅은 티슈를 뽑아 코를 풀었다.
“아영아, 집에 가기 전에 마트 먼저 들르자.”
“오빠, 병원부터 가지.”
“됐어. 마트로.”
다투어 재웅의 몸 상태를 걱정해 주던 두 사람이 이내 자기네끼리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재웅은 심사가 뒤틀렸다.
“너희 둘이 친하지 마라.”
“오빠!”
“재웅아, 우린 그저.”
“형석이 이 녀석, 가난뱅이에다가 꿈만 먹고 살아. 어머니가 아시면 우리 밴드를 더더욱 저주하실 거다!”
“우린 오빠하고 승미같이 그런 편한…….”
“승미 얘긴 꺼내지도 마!”
재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움찔하고는 입을 닫았다. 청수전자 회장의 딸인 승미를 동생처럼 살갑게 챙겨 주며 지내 왔다. 그런데 장 여사와 작당하여 밴드를 방해한다. 그렇게 자신의 꿈을 방해하는 승미의 행짜에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끼어든단 말인가. 번거로운 일이 싫어서 어떤 여자도 만나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세 사람은 마트에 들어갔다. 코트 깃을 세워 훌쩍이는 코를 가린 채 재웅은 끈기 있게 물건을 찾아다녔다.
“아영아, 티 안 나는 내복 그런 거 있지?”
머뭇거리다가 묻는 재웅의 질문에 아영이 흠칫한다.
“오빤 내복 절대로 안 입잖수?”
“그러니까 내복 말고 비슷한 쫄바지 같은 거 있잖니. 흠.”
“스판타이즈나 기모타이즈 같은 걸 말하나 본데, 내가 골라 줘?”
“그러든가.”
옷뿐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쇼핑 바구니를 가득 채우는 재웅을 보고 아영이 한마디 한다.
“오빠, 혹시 살림 차릴 거요?”

***

어스름한 새벽이 창에 걸렸다. 정아는 모처럼 영식의 도마 소리가 들리기 전에 일어났다. 조용히 방문을 여니 기분 좋은 비린내가 날아든다. 정아는 단박에 아침 메뉴를 알아차렸다. 손님들에게 지리(ちり)로 통하는 맑은 탕이다. 주재료는 요즘이 제철인 생대구이다.
“더 자지 않고.”
살림집 주방에서 탕을 끓이던 영식이 힐긋 본다. 잠깐 비친 웃음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아빠하고 겸상하려면 할 수 없잖아요.”
부녀가 밥상 앞에 앉았다. 영식은 딸에게 이야기를 건네지 않고 묵묵히 젓가락질만 한다.
“늦게까지 장사하시던데, 몸은 괜찮아요?”
“박 과장이 다 하는걸 뭐.”
거짓말이다. 당신 손을 안 거쳐 가는 음식을 한사코 손님에게 내놓지 않으려는 욕심에 성치 않은 몸으로 직원인 박 과장보다 갑절은 일한다. 그리고 당신의 딸은 주방에 절대 못 들어오게 한다. 다른 집의 주방 아르바이트는 허락하면서도 말이다.
“사람을 더 쓰시지 그래요.”
현저하게 의욕이 떨어진 업주인데도 손님은 꾸준하다. 20년 전통의 견고함 때문만은 아니다. 의욕을 상실했어도 음식에 대한 정직함과 예의는 잊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다. 아버지 유영식은.
“아빠라도 건강하셔야죠. 사람을 더 쓰시라고요, 네?”
“실력 있는 사람이 이런 델 오겠냐?”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기업형 조리실로 인재가 몰리고, 더욱 경쟁력이 높아진 공룡기업은 영세업소 사장을 체인점 점주로 전락시킨다. 매스컴에서는 주로 자본에 관해 토로하지만 실상은 유능한 직원에 대한 애로점이 더 크리라. 그래도 영식이 부르면 올 사람이 있다. 그것도 대한민국의 스타 셰프가.
“용우 오빠는 아빠만 좋다고 하심 오실 것 같던데요.”
과연 조용우 셰프의 이름이 나오자 영식의 이맛살에 주름이 잡힌다.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대꾸도 하지 않는다. 조용우 셰프를 싫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다시금 말이 궁하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 가고 싶다. 부녀지간의 데면데면함이 서럽다. 아무 말이나 꺼낸다.
“큰방은 따뜻해요?”
“뜨겁다고 했잖냐.”
같은 말을 여러 날에 걸쳐 물었다. 하지만 이런 대화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 혼잣말을 하고 만다.
“탕이 맛있네요.”
소금과 생강, 그리고 생선 뼈를 식초에 넣고 끊인 소스가 양념의 전부이다. 여러 책의 레시피, 그리고 영양사 실습 현장에서 대구 맑은 탕 요리를 구경했다. 영식의 방식과는 퍽이나 달랐다. 영식의 음식은 늘 단순하다. 토막 낸 대구에 두부 한 조각, 무 네 점, 대파와 쑥갓이 담겼다. 마늘이 없어 더 맑고 대구의 풍미가 깊다. 멸치 육수를 쓰지 않고 다시마 육수를 사용하여 비린 맛이 없다. 비린 맛을 감추고자 재료를 더 추가할 필요도 없다. 대구 살은 얼핏 단단해 보인다. 막상 수저를 넣으면 부드럽게 살이 떠진다. 씁쓰레한 곤이 맛이 점점 좋다. 생태와 달리 생대구는 암컷의 알보다는 수컷의 곤이를 더 쳐준다. 정아는 전에 없던 이유로 곤이의 쓰고 구수한 맛을 사랑한다.
“이 맛은 마치 인생 같아요.”
정아는 영식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인생을 잘 모르는 나이에는 잘 알 수 없는 맛이에요.”
“……?”
“대구 곤이 말이에요. 고소하면서도 쓰고, 쓰면서도 고소한 게 말이죠. 그래서 어른들이 더 좋아하시지 싶어요. 안 그래요, 아빠?”

출근하기 전에 핸드크림을 가방에 넣었다. 튼 손이 부쩍 거슬린다. 피부 트러블도 스스로 방치한 결과이다. 고된 수행임을 영식에게 애써 알리고 싶었던 심술 탓이다. 그 어떤 고난도 영식과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보다는 하찮은 것이라고 시위하고 싶었다. 그런데 재웅에게 지적받은 튼 손에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알게 모르게 아버지에게 고통을 주었다. 어쩌면 딸의 튼 손을 본 뒤부터 영식은 마주 앉는 것을 피했는지도 모른다. 시기가 맞아떨어진다. 시위한다는 것이 영식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일하는 도중에도 곁에 두고 바르는 게 나을 것 같다. 재웅의 과한 힐난이 문득 고맙다.
출근 인사를 하려고 가게에 들렀다. 영식의 시선은 창밖의 먼 산을 향하고 있다. 아마도 저 멀리 은백색으로 흔들리는 은사시나무 군락을 눈에 담고 마음에 품고 있는 중이리라. 영식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어긋난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연다.
“어젯밤에 네 친구 찾아왔더라.”
“제 친구요?”
“과 친구라던데. 남학생이더라.”
식품영양학과 남학생 동기는 둘뿐이다. 누군지 알 것 같다.
“너 잔다고 했더니, 깨우지 말라면서 그냥 가더라.”
말하면서 정아와 한 번도 눈을 맞추지 않는다. 그 무심한 모습에 인사를 건네고는 나왔다.
집 밖에서 몇 걸음 걷는데, 아직은 어둑한 거리에서 단단해 보이는 몸에 짧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시동이 켜진 신형 세단 옆에 서 있었다. 진구였다.
“도라에몽?”
뿔테 안경과 만화 영화 덕분에 진구는 학교에서 도라에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외모도, 성격도 어른스러웠으며, 차가우면서도 진중한 태도로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놀랐니?”
“조금. 어제 왔다면서?”
“응. 너 잔다기에 그냥 나왔어.”
“휴가?”
“응.”
“수원에 일이 있었어?”
서울이 집인 그가 간밤에도, 그리고 아침에도 수원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반가울 듯싶은 친구인데도 대화는 설렁설렁 흘러간다. 여럿이 섞인 학교에서는 편한 친구인데 따로 만나면 서먹서먹하다. 그가 입대하기 전부터 정아는 개인적인 만남을 피했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인생에 매료당해 한순간 기대고 싶다는 욕심을 키웠다. 하지만 곧 마음을 접었다. 친한 친구가 정아에 앞서 이미 그를 남자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다. 그래서 이성적인 만남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여지를 딴에는 온전히 차단해 왔다.

‘뭐, 윤희하고 나 사이? 나 원! 감정이 고픈 녀석한테 잠시 기댈 어깨를 내줬을 뿐이야. 쌍방 감정은 절대로 아니었지. 그리고 나 그리 싼 남자가 아니거든. 굳이 따지자면 연민 정도랄까.’

그의 변명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인생을 꿰면서 한 가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나의 감정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서울로 출근한다며? 타라.”
그가 자신의 승용차를 가리켰다. 비로소 찬찬히 진구의 얼굴을 마주했다. 얼굴이 퍼렇게 얼어 있다.
“나를 기다렸어?”
“어제 네 아빠에게 출근 시간을 물어봤어.”
윤희는 만나 봤냐는, 말을 입 안에 굴리다가 삼켰다.
“전철역까지만.”
하지만 진구의 고집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다가 서울까지 타고 갔다. 정아의 침묵을 존중하던 그가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불쑥 짜증스럽게 입을 연다.
“너한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니? 전화번호도 바꾸고, 쉬는 날도 없이 일을 하고. 또, 너의 그 차림새는 뭐니? 노점상이라도 하니?”
“……진구야, 미안한데 말이다. 난 겨울 동안 인생의 아주 중요한 시험을 치르는 중이야. 묻지 말고 내버려 두면 좋겠어.”
“걱정하게 만드니까 그러지! 더욱이 나한테 알리지도 않았던 중요한 시험 들먹이고!”
걱정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감흥을 주기는커녕 부담스럽다. 사실 일방적으로 집까지 찾아온 자체부터 껄끄럽다. 새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의 여자 친구가 된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터다. 정아가 계속 침묵하자, 진구는 끙, 신음 소리를 내며 입을 닫는다.
시장닭집을 한참 남겨 두고 내렸다. 등으로 진구의 눈길을 느껴졌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정아가 보조 주방 문을 여니 평소와 달리 훈훈한 김이 자욱하다. 시멘트 가장자리로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놓였고, 그 위로는 반질거리는 노란 양은 냄비가 모락모락 수증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이젠 주전자 가지고 들락거릴 필요 없어요.”
재웅이 싱긋 웃으며 말한다. 여유로운 표정과는 달리 목소리는 잠겨 있다. 안색도 그렇고 감기에 걸린 게 분명해 보인다. 정아가 레인지를 가리켰다.
“사장님이 사 주셨어요?”
“이 몸이 직접 공수했죠.”
예상했던 답이다. 정아는 이미 그의 복장에 관심이 가 있었다. 겉옷은 여전히 얇아 보였지만 스카프라고 부를 수도 있는 실크 머플러로 목을 완전히 감쌌다. 뿐만이 아니다.
“모자, 쓰셨네요.”
“조리사니까 조리모를 당연히 써야죠. 머리카락 들어가면 안 되잖아.”
명분이 있어서 다행이다.
“정아 씨, 차 한 잔 마시고 합시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더니 낯선 2단 선반이 보인다. 거기에는 꿀과 유자가 담긴 병과 커피와 머그잔들이 놓여 있다. 선반 아래로는 컵라면이며 죽 등의 인스턴트 간식들이 가득하다.
“대장님과 이미 합의를 봤어요. 대장님은 그냥 드시고, 조달은 내가, 끓이는 것은 정아 씨가. 나쁘진 않죠?”
처음 정아에게 악수를 청할 때처럼 그는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반가운 일이었지만 정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이 뭐라고 안 하실지 모르겠네요.”
“닭이나 내장 앞으로 직접 열이 안 가면 되잖아요. 그리고 개혁에는 본디 시련이 따르는 법이죠. 것도 정아 씨 몫으로 주죠.”
“네?”
“빨리요, 정아 씨. 우리 대장님, 차 아직 안 드셨어요.”
코맹맹이 소리로 거침이 없다. 정작 재웅이 ‘대장님’이라고 들먹이는 최 씨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는다. 모르겠다. 일단 차를 한 잔 마시고 보자. 마침 몸이 따뜻한 차를 원한다. 식재료와 떨어진 구석진 곳에서 뜨거운 물을 끓인다고 해도 구 여사의 책망이 신경이 쓰인다. ‘것도 정아 씨 몫으로 주죠.’ 라는 그의 넉살 덕분에 정아는 출입문을 연방 힐끔거리며 차를 탔다.
“불 끄지 말고 주전자를 계속 올려놓아요. 화톳불은 못 피워도 부탄가스 호강이라도 하자고요.”
재웅이 참견했다. 그러고 보니 부탄가스도 잔뜩 사놓았다.
“부탄가스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토치램프에 쓰는 부탄가스도 낭비하면 한 소리 듣거든요.”
“걱정 마요. 내 돈으로 살 겁니다.”
시종 여유롭게 나온다. 간간이 기침을 하는 모습이 측은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갑자기 음악 소리가 들려서 보니, 재웅 곁에 미니 오디오가 놓여 있다. 부모님이 라디오를 즐겨 들은 덕분에 정아는 어릴 때부터 음악 속에서 살았다. 이곳에 라디오를 가져올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침묵을 성스럽게 여기는 듯싶은 최 씨에게 누가 될 것 같아 참았다. 오디오는 덩치는 작아도 성능이 뛰어났다. 스마트폰으로 듣는 음악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반젤리스’의 투명하고도 애절한 ‘바닷가의 작은 소녀’가 흘러나왔다. 정아는 침묵을 사랑하는 최 씨를 쳐다보았다. 그는 오디오를 한 번 힐긋 보고는 무심하게 차를 마셨다. 오래간만에 듣는 낯익은 선율이 반가워 정아는 지그시 눈을 감고 차와 함께 음미했다. 동물 다큐 배경에 쓰였던 탓에 세렝게티 국립공원 풍경을 새김질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재웅이 불쑥 물었다. 정아는 번쩍 눈을 뜨고 뚱하니 바라보았다.
“음악 말입니다. 옛날 것도 즐기나 봐요?”
모르는 사이에 선율에 맞춰 몸이 흔들렸나 보다.
“아, 네. 전 옛날 노래가 좋아요.”
“호!”
그가 기특하다는 양 반색했다. 정아는 많지 않은 나이의 그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같아 피식 웃었다. 재웅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훨씬 어른스럽게 보이는 진구의 모습도 잠깐 겹쳐진다. 이어서 다른 얼굴이 떠오른다.
“오래 묵은 노래는 부모님 세대와 소통하기에 유용하거든요.”
정아는 영식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끈질긴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재빨리 잔을 비우고 내장 박스를 끌어당겼다.
갑자기 음악 소리가 커졌다. 바뀐 음악에 정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재웅을 보았다. 다시 닭 손질에 들어가려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오디오를 꺼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단박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어서 화가 난다. 왜 장례식장에서는 반젤리스의 음악을 사용했을까. 곡이 바뀌어 ‘1492. 콜럼버스’의 웅장한 음악이 성능 좋은 스피커에서 터져 나와 마음을 울울하게 적신다. 어머니의 발인 때 생뚱맞게도 장례식장에서는 이 음악을 사용했다. 묘지로 향하는 고인을 배웅한답시고 모든 직원이 제복을 입고 도열해 유족에게 헌화를 권할 때 흘렀던 곡이다. 죽음이 신대륙으로 가는 길목이라고 여기며 선택한 것인지는 몰라도 정아는 두고두고 그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껏 유교적인 예법을 설파하며 고지식하게 장례를 지도해 놓고는 막판에 ‘아메리카 신대륙’이라니. 더욱이 음악의 집단 최면 위력은 만만치 않았다. 어머니의 고향 섬을 향해 운구차를 배에 실을 때는 영화 속 콜럼버스의 배를 떠올리는 정아 자신에게 기가 막혔다. 어머니는 다만 망자의 몸이 되어 간신히 고향에 돌아가고 있는 중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정아는 알고 있었다. 그 모든 짜증은 사실 아버지에게 언뜻 엿보이는 수상한 ‘광기’를 인정하기 싫어서 나온 것이었다. 요컨대 아버지, 영식은 어머니의 죽음을 빌미로 당신의 땅을 새롭게 발견했던 것이다.
정아는 음악을 꺼 달라는 부탁을 하는 대신에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눈물을 훔치고 파랗게 얼어붙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기운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먼저 걸린다.
‘어떤 식으로든.’
정아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아빠와 함께할 거예요.’
잠시 허수 하게 터졌던 마음을 단단히 여민 뒤 안으로 들어왔다. 등을 보이며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가는 재웅이 보인다. 음악 소리는 멈추어 있었다.
그가 아픈 몸으로도 한결 여유를 부리는 바가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그는 구 여사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못마땅해도 명분이 약하면 책망하지 않는 구 여사다. 다만 명분이 생기면 몇 갑절로 갚는다.
한참 뒤에 과연 걱정하던 일이 터지고 만다.
“저런 지랄을 봤나! 야, 재웅 총각!”
보조 주방에 들어온 구 여사가 날이 선 목청으로 생닭을 세척 중인 ‘재웅 총각’을 부른다. 한달음에 수돗가로 달려가 수도꼭지의 수압을 줄인다.
“닭 씻는데 폭포가 필요해? 한 시간째 저쪽 수돗물이 잘 안 나온다 했더니 여기서 펑펑 쓰고 자빠졌었네. 제정신이야!”
“잘 안 씻어졌다고 지적하셔서.”
재웅이 볼멘소리를 했다.
“손으로 살살 긁으면서 씻어야지, 억수로 물을 쏟아 부운다고 씻겨진다냐! 이게 어디 공짜 물인가. 아낄 줄을 몰라. 옛날엔 우물 한 두레박 퍼서 열댓 마리 씻어 냈어도 깨끗하기만 했다. 그리고 닭이 좀 더럽다고 한마디 했다고 이렇게까지 반짝반짝 씻어야 해?”
구 여사에게 한마디 들은 뒤부터 과연 재웅은 과하다 싶을 만큼 청결을 고집했다.
“하여간 요즘 것들은 뭐든 흥청망청 쓸 줄만 알지, 도무지 아낄 줄을 몰라!”
독설을 쏟아내는 도중 재웅이 선반에 가득 채워 둔 부탄가스를 힐긋 쳐다보는 구 여사의 눈길을 정아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재웅은 둔하다.
“여기서 깨끗이 세척하면 요리할 적에 좀 덜 행구니 낭비만은 아니지 싶은데요?”
매를 번다.
“요 닭대가리 총각을 보소. 백번을 씻어 봐라! 삶으려고 봉지 풀면 핏물이 나오니까 어차피 또 씻어야 할 거 아냐! 근데 네깐 게 뭘 안다고 꼬박꼬박 대꾸야. 50년 동안 장사해 먹은 이 할멈보다 네놈이 더 잘 알아? 엉!”
쩌렁쩌렁 울리는 타박에 재웅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구 여사가 돌아간 뒤에도 그는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않는다. 감기 기운을 넉살로 감추며 유지해 온 그의 근엄한 몸짓은 그렇게 무너지고 만다.
정아는 보조 주방의 일을 마치고 일어났다. 선뜻 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재웅은 여전히 일손을 놓은 채 피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는 쪽창의 얼음꽃에 오래도록 시선을 붙이고 있었다. 어깨에 걸친 물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뛰쳐나가도 이젠 놀라지 않을 것 같다. 벌써 이십여 분을 그렇게 서 있다.
그의 정지된 몸짓은 의외로 싱겁게 풀린다.
“닭 줘야지?”
“아! 넵, 대장님!”
최 씨의 한마디에 재웅은 곧 토막 낼 닭을 챙기기 시작한다. 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뜨거운 차를 한 번 더 준비했다.
차를 홀짝거리면서 재웅은 정아를 힐끔힐끔 본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시선을 내리깐 채 말한다.
“사과 하나 할게요. 받아 줘요.”
“……?”
“노예근성이라고 했던 말, 실수였어요. 정아 씨가 듣기에는 부당한 말이었다 그거죠, 뭐.”
“네, 실수 맞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견디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견딘다고요? 이곳 일이 몸에 맞아서 머물고 있는 건 아니고요?”
“저마다 사정이 있기 마련이죠.”
“하긴. 몸에 안 맞는 옷도 필요할 때가 있죠.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그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차를 마신다. 그도 무언가 사정이 있어 보인다. 정아가 보기에는 지금 그는 몸에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다. 더는 관심을 갖지 않기로 했다. 스스로에게 주어진 남은 17일에만 집중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