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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찻잔을 쥔 그의 맨손을 보았다. 불과 며칠 만에 손등이 텄다. 정아는 집에서 가져온 핸드크림을 남자들의 세면대를 겸하고 있는 타일 가장자리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퇴근 인사를 하려고 보조 주방에 들렀더니 재웅이 불쑥 봉지 하나를 건넨다.
“어제 마트 갔다가 잘못 산 건데 정아 씨가 쓰든가 버리든가 해요.”
검은 봉지 안의 상자가 제법 묵직하다.
“기억해요. 어제 샀던 겁니다.”
그에게 떠밀려 나왔다. 궁금해서 버스 정류장에서 상자를 열었다. 고가의 핸드크림이다. 세 개나 들어 있다. 건네면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기억해요. 어제 샀던 겁니다.’
정아가 낮에 갖다 둔 핸드크림을 보았던 듯싶다. 얼결에 서로 핸드크림을 선물하게 되었다.
집에 와서 손에 크림을 듬뿍 발랐다. 가게 일은 돕지 않고 일찍 누웠다. 영식의 만류 때문만은 아니다. 일을 마치고 긴장감이 풀어지면 온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겁다. 견뎌 내려면 힘을 모아야 했다. 허세로 무장한 재웅의 모습이 떠오른다. 겪어 보니 밉지 않은 허세다. 그는 닭을 배우기 위해 시장닭집에 나온다고 했다. 동기가 막연하여 호기심이 동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눈을 감기 전에 화장대의 핸드크림을 바라보았다.
‘왜 세 개나 담았을까?’
다음 날, 재웅은 마스크를 쓰고 출근해 있었다.
“감기가 심한가 봐요?”
정아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별거 아녜요. 기침 예의죠. 그런데 정아 씨, 표정이 왜 그래요?”
“뭐가요?”
“동정하는 것 같잖아요.”
“전 단지 걱정돼서요.”
“좋습니다. 동지애로 접수하죠.”
“풋. 고마워요. 핸드크림.”
“다행히 안 버렸나 보군요.”
“왜 세 개일까 궁금했어요.”
“아! 그거요? 세 개를 두 개 값에 팔고 있기에.”
의외의 대답에 정아는 싱거운 웃음으로 의혹 하나를 갈무리했다. 여하튼 그가 어제 일로 기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주눅이 든 모습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손님을 치른 뒤, 직원들은 늦은 점심을 한다. 식사를 마치고 정아는 보조 주방에 들러 생강차를 탔다. 마침 오디오에서 ‘노고지리’의 ‘찻잔’이 흐른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재웅이 바라본다. 전날과 같이 기특하다는 표정이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산울림 음악도 좋아하나 보네?”
“노고지리 노래 아닌가요?”
“산움림의 작품이기도 하죠.”
“그런데요, 늙은 사람도 산울림을 좋아하나 봐요?”
“늙은?”
정아의 응수가 의외였는지 짐짓 재웅은 당황한다.
“어, 정아 씨. 나, 그리 늙지 않았는데?”
“저도 그리 어리진 않아요.”
“호! 정아 씬 겪어 보니 재미있군요. 성냥팔이 소녀와도 거리가 있고 말입니다.”
“네?”
“아! 불쾌할 필욘 없어요. 내 빈약한 선입견을 고백한 거니까.”
언어의 유희가 그의 특기인가 보다. 찻잔을 비우고 본채 주방으로 가려는데, 구 여사가 득달같이 뛰어든다.
“야, 정아야! 미친놈 또 왔다. 냉큼 끌어내라! 재웅 총각도 와 봐.”
홀에는 서너 테이블의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한 테이블에 서른네 살의 그가 낮술에 취해 있다.
“우리 정아 왔구나.”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조용우가 반긴다.
“글쎄, 닭을 주문했더니, 저 할머니가 나한텐 안 판다고 꽥꽥 소리를 지르지 않냐. 너무 겁나서 널 불렀다.”
“오빠, 사장님은 술 취한 손님은 안 받으신다 했잖아요.”
“피해만 안 주면 되잖아!”
그때 구 여사의 목청이 끼어든다.
“내가 팔기 싫어서 그래! 재웅 총각 뭐 해? 냉큼 끌어내!”
“제가 모실게요.”
정아가 재빨리 다가가 용우의 겨드랑이를 붙들고 일으켰다.
“이 집 닭 먹고 싶다니까 그러네. 어째서 여기가 장사가 잘되는지를 자꾸 먹어 봐야 알 거 아니겠어!”
“다음에 저랑 같이 먹어요.”
“싫다. 지금 줘! 20년을 죽어라 고생한 내 솜씨보다 여기가 더 인정받는 이유를 오늘은 기어이 알아야겠어.”
“용우 오빠!”
정아의 안타까운 외침에 용우의 한쪽 팔을 붙든 재웅이 움찔한다. 그리고 용우를 유심히 바라본다. 용우는 정아를 찬찬히 바라본다.
“어라? 우리 영양사님이 화나셨네.”
“제발. 제겐 이곳이 중요해요. 저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이딴 허접한 곳이 뭐가 중요해? 네가 조리사야? 넌 영양사잖아. 네 아빠한테 넌 영양사여야지. 안 그래?”
용우의 주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냉큼 내보내라니까!”
구 여사의 채근에 재웅이 용우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귀공자풍의 남자가 의외로 힘이 셌고, 또 단호했다. 용우는 단박에 가게 밖으로 밀려 났다.
퇴근하는 길에 재웅이 따라붙었다.
“저녁 같이 먹읍시다.”
그의 말에 정아는 흠칫 놀랐다. 이내 차분하게 대답했다.
“집에 가서 먹을게요.”
“착각하지 말아요. 데이트 신청은 아니거든.”
“아빠가 식당을 해요.”
“잘됐네요. 거기로 갑시다.”
“수원이에요. 그리고 누굴 집에 초대할 생각은 없어요.”
“그럼 차라도 한잔. 데이트 신청은 확실히 아니고,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몸도 안 좋으신데, 빨리 들어가 쉬세요.”
“감긴 다 나았어요. 갑시다.”
그가 손을 낚아채더니 눈앞의 커피 전문점으로 끌고 들어갔다.
“아무거나 두 잔 주세요. 그냥 칼로리 높은 걸로.”
그가 일방적으로 주문을 했다. 그리고 정아를 응시하며 진지하게 묻는다.
“아까 택시 태워 보냈던 분, 이름이 조용우가 맞나요?”
“이름을 어떻게?”
“뉴욕에서 미쉐린 가이드에 손꼽히는 식당이 있었지요. 어느 해에 별 한 개에서 두 개로 승급되었는데, 다름 아닌 매우 창의적인 젊은 조리사의 활약 때문이었답니다. 그 젊은 조리사는 당시 삼십 대 초반의 한국인이었고요.”
그 사람이 조용우라고 말하는 것일까? 단지 뉴욕에 있었다는 말만 들었다.
“그 한국인 셰프는 장래가 보장된 식당을 그만두고 갑자기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찾아간 곳은 의외로 대기업의 구내식당이었습니다. 근무 조건은 공무원처럼 정시 출퇴근과 주말 휴일 보장이었다고 합니다.”
“아! 용우 오빠가 일했던 오성 그룹을 말하는 건가요?”
“맞습니다. 그나마 그곳도 그만두었지요. 역시 이유가 알려지지 않았죠. 그분의 이름이 조용우였다는 것만 펙트로 남았죠.”
“어떻게 저보다 잘 아시죠?”
“아버지가 뉴욕 출장 중에 그분 음식을 먹었어요. 나중에 수소문하셔서 구내식당을 찾아낸 덕분에 나도 그분 음식을 먹었죠.”
“그렇군요. 용우 오빠가 그 정도로 대단한 줄은 몰랐는데.”
“언플로 스타가 된 나이롱 셰프도 흔한 세상인데, 그분은 마케팅엔 취미가 없으신 거죠. 아니면 일부러 숨어 지내는 취미시거나. 자, 정아 씨. 이쯤에서 제가 묻죠. 오빠라고 부르던데, 대체 어떤 사이죠? 또, 어째서 그렇게 망가지신 거죠?”
속사포로 쏘아붙이는 그의 질문에 정아는 문득 먼저 묻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그보다 백재웅 씨, 그쪽이 전 수상해요. 누구시죠?’
***
이틀째 소화가 안 되고 오한이 심해 재웅은 초저녁부터 줄곧 누워 지냈다. 급기야 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다.
링거액이 다 들어가는 두세 시간 동안 꼼짝없이 응급실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러자면 제시간에 출근을 못 한다. 잠이 들었다가 깨어 보니 아버지와 동생은 돌아갔다.
“미련한 자식. 아프면 쉴 일이지. 다들 얼마나 놀랐는지.”
병실에 남은 장 여사가 혀를 끌끌 찼다.
“감기는 다 나았잖아요.”
“다 나은 녀석이 음식을 못 삼키니?”
“그냥 탈수 현상이라는데 우리 장 여사 오버하신다. 그보다 출근해야 하는데.”
“미쳤니?”
“두 달 동안 모범 근무하기로 약속했잖아요.”
“됐네, 이 사람아. 어? 그런데 두 달이라고 했니? 한 달이 아니고?”
아버지는 그렇게 설명했나 보다. 두 달을 견디면 조리실 현장으로, 한 달을 견디면 마케팅 부서로 일하기로 약속했다. 아버지는 애당초 두 달은 무리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오기가 돋는다.
“그만 맞으면 안 되나요?”
재웅이 영양제와 포도당 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절반이 남아 있다.
“정신 차려, 아들. 거울 갖다 줄까? 어휴, 어쩌다 산송장이 다 됐네. 그놈의 밴드 집어치우면 안 되겠니? 우리 아들 강골이었잖니. 밴드 한다고 허구한 날 밤새면서 몸이 축난 거잖니.”
“그래서 제가 양보했잖아요. 암튼 전 오늘은 꼭 출근해야 해요.”
“쉬는 게 영 내키지 않으면 오후에나 나가라. 특실을 하나 준비했으니 거기서 쉬고.”
무조건 쉬라고 우길 법한 어머니가 의외로 타협적이다.
“어휴, 네 아버지도 참 독하셔. 아들이 산송장 같은데도 원한다면 출근을 시키라니, 원.”
하지만 재웅은 그 타협책도 받아들일 처지가 못 되었다. 오늘은 반드시 일찍 출근해야 한다.
“좀 쉬었다 점심때 나갈 테니, 엄만 집에 가세요.”
“사양하겠다.”
“난 누가 옆에 있으면 잠을 못 잔다는 거 알잖아요.”
“그럼 잠깐 집에 좀 갔다 올까?”
장 여사가 나간 뒤 재웅은 간호사를 불렀다. 다행히 병원장인 외삼촌은 아직 출근 전이라 탈출은 어렵지 않았다.
***
칼바람이 우우, 비명을 지르며 주방 곳곳을 두드린다. 정아는 최 씨의 작업대 앞에서 닭을 토막 냈다. 부인이 많이 아픈가 보다. 하루도 결근을 하지 않았다는 최 씨가 이틀째 나오지 못하고 있다. 구 여사가 손수 닭을 토막 내겠다고 나서는 것을 정아가 만류했다. 의외로 닭을 쉽게 토막 내는 정아의 솜씨에 구 여사도, 재웅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겨울이어서 다행이다. 손이 느려 진종일 걸렸지만 닭의 신선도에는 문제가 없다. 이따금 최 씨의 일을 도운 바가 도움이 되긴 했지만, 용우 셰프의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이 컸다. 여느 급식소와는 달리 용우는 토막 닭이 아닌 생닭을 주문해서 주방에서 손질했으며, 그 일을 정아도 거들었다.
어제는 재웅과 둘이 일했고, 오늘은 정아 혼자 주방을 지키고 있다. 새벽에 나오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재웅은 10시가 되어서도 안 나타난다. 전날 그는 무리했다. 질긴 닭을 장시간에 걸쳐 토막을 내려면 힘의 안배가 중요한데도 그는 몰아쳐서 힘을 쓴다. 급한 성미보단 매사에 남보다 잘하려는 욕심 때문인 것 같다.
“힘들어서 어쩌냐?”
구 여사가 들어와 혀를 찬다. 드물게 인정이 가득 담긴 얼굴이다.
“그런데 사장님, 닭이 조금밖에 안 왔네요.”
“조금만 팔고 일찍 끝낼 거다. 천천히 해라.”
전날에도 장사를 일찍 마쳤다. 장사에 지장을 주는 행짜는 어떤 사정이 생긴 직원에게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데 유독 최 씨에게는 관대하다. 오래전 최 씨의 부인이 이곳에서 정아가 하는 일을 맡았다고 들었다. 오래된 아주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다. 말을 꺼낸 아주머니는 불현듯 입을 꼭 다물고는 못 들은 걸로 하라는 당부를 했다. 그 후로 더 이상 들은 이야기는 없다.
“한데 이놈의 총각은 어째 아직껏 안 나오는 게야!”
“총각, 여기 왔사옵니다!”
불퉁거리는 구 여사의 말을 넙죽 받으며 재웅이 나타났다. 전날의 고된 일 때문일까. 감기가 나아 좋아졌던 혈색이 다시금 창백하다.
“재웅 총각은 칼질하지 말고 똥집이나 다듬어.”
구 여사가 당부하고 나간다. 재웅은 고개를 실긋거리면서 정아를 본다.
“어제 재웅 씨가 토막 낸 거 있잖아요. 모양이 안 좋았대요.”
“섭섭하네. 이래 봬도 나 취사병 짬밥에 조리사 자격증이 두 갠데.”
투덜거리면서 생닭 세척을 시작한다. 조리사 자격증이 두 개라고 한다. 그가 이곳에서 일하는 바가 더욱 궁금하다. 더욱이 용우 셰프에 관해서도 정아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고개를 실긋거리며 그를 주시했다. 착각일까. 잠깐 휘청거리는 그의 몸짓이 병약하기 짝이 없다. 손을 녹이면서 그가 바라본다.
“정아 씬 팔 괜찮아요?”
“참을 만해요.”
손가락 관절이 아프고 어깨가 뭉쳤다. 몸이 고단할수록 묘한 쾌감이 찾아든다. 큰 고통을 달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아버지에 대한 애정의 증표라고 믿고 싶다. 묵묵히 서로의 일에 열중했다. 한순간 재웅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진다. 홱 돌아보니 그가 지척에 서서 바라보고 있다.
“가르쳐 줘요.”
“네?”
“어떻게 자르면 그렇게 깔끔하게 토막 낼 수 있죠?”
“오늘은 많지도 않은데 제가 토막 낼 테니, 재웅 씨는 배만 갈라 주심…….”
“가르쳐 줘요. 부탁입니다.”
겸손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가 부탁을 한다. 결국 도마 앞에 나란히 섰다.
“여기가 관절이거든요.”
정아가 날개 죽지를 토막 냈다. 그리고 절단된 부위를 보여 주었다.
“하얗고 둥글게 뼈가 보이죠? 삶아도 보기에 좋고, 뾰족하지 않아서 먹기에도 좋아요. 무엇보다 토막 낼 때 쉽게 잘리지요.”
다른 부위의 관절도 짚어 주고, 가슴살을 분리하는 요령도 알려 주었다.
“폐계닭은 껍질이 질겨요. 다리는 삶으면 쪼글쪼글해지니 이렇게 칼집을 내 줘야 해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재웅이 갑자기 정아의 어깨로 손을 짚는다. 봉긋한 가슴으로 그의 가슴이 닿는가 싶더니 동시에 그의 얼굴이 눈앞으로 날아든다. 창졸간에 그의 얼굴이 정아의 뺨과 맞닿았다. 정아는 그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어내며 소리쳤다.
“왜 그러세요!”
너무 세게 밀었던 것일까. 그가 휘뚝거리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당황한 정아가 사과를 하려고 하는데, 그가 먼저 한다.
“미, 미안해요. 어지러워서.”
정아가 어색하게 뻗은 손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어디 아프세요?”
“그건 아니고, 미인 곁에 서니 현기증이 나서.”
농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무슨 여자가 그리 힘이 장삽니까!”
그가 볼멘소리를 하자 정아는 휙 돌아서며 말머리를 돌렸다.
“차 한 잔 마시고 하게요.”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린다. 매끄러운 그의 뺨이 닿으면서 일어난 묘한 정전기로 이마까지 달아오른다. 정아는 손부채질을 하며 차를 끓였다.
“내 칼질 경력이 5년쯤 되거든요.”
찻잔을 받아 든 재웅이 바닥을 보며 힘없이 말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정아의 장화 코에 머물러 있다. 그 시선이 불쑥 올라온다. 정아는 달아오른 얼굴을 들킬까 봐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도 내 솜씨는 정아 씨보다 빈약해요. 근육도 내가 압도적으로 우월한데.”
정아는 딴 데를 보며 차만 홀짝거렸다.
“정아 씨, 출발이 틀렸겠지요?”
“……?”
“내가 일하는 방법 말입니다.”
뺨을 한 번 문지르고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 말인즉,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말을 실감한다, 그겁니다. 정아 씬 조용우 셰프에게 이걸 배웠겠죠?”
“네.”
“그렇군요. 역시 출발이 중요하고, 출발점의 멘토가 중요해요.”
“재웅 씨도 잘하시던 걸요. 단지 여기 닭은 특별하니 익숙하지 않으셨겠죠.”
“적절한 위로군요. 정아 씨, 난 말입니다. 세상에서 우리 아버지를 가장 존경해요.”
그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진솔함이 담겨 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가장이셔서 기본적으로 존경하지만, 인생의 멘토로도 더없이 훌륭하지요. 아버지는 스펙도 배경도 별로이셨어요. 하지만 성공하셨어요. 으뜸 비결은 다름 아닌 당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데 있었다 하시더군요. 그런데 난 아닌 것 같아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도마질이 서툴렀다고 이렇듯 기가 죽을 필요까지 있을까? 기운이 너무 없어 보인다. 그가 고개를 들어 정아의 표정을 읽더니 정색을 한다.
“그런 표정 좀 짓지 말아요. 고문이라고요.”
“제 표정이 왜?”
정아는 좀 전에 달아올랐던 얼굴이 남아 있는가 싶어 움찔했다.
“아무튼 동정하지 말아요. 이래 봬도 난 우월한 유전자를 가졌답니다.”
“알고 있어요, 풋!”
“비웃지도 말고요.”
“찬양하는 거예요. 우월한 유전자에게요.”
허세가 얄미웠던 그였는데, 묘하게도 허세를 부르는 그가 도리어 어울린다. 그가 통나무 도마 앞에 선다. 정아가 딱 한 번 보여 준 요령을 그는 이내 흡수하여 제법 쉽게 칼질을 한다. 구 여사가 달려와 살펴도 탈이 없을 정도였다.
“잘하고 있는 겁니까?”
십여 마리를 토막 내고는 그가 묻는다.
“네. 어깨에 힘만 더 빼심 되겠어요. 칼이 무거우니 내리칠 땐 손목 힘보다는 칼의 무게를 이용하세요.”
정아의 말에 따라 그가 다시 칼질을 한다.
“그렇군요. 그래서 가냘픈 정아 씨 손목이 견뎌 냈군요.”
그의 얼굴에 오롯한 성취감이 걸린다. 바라보다가 정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추운 날씨다. 그런데도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다. 식은땀?
과연 불편한지 그가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찻물을 보충한다.
“폐계닭 말이죠. 국어사전에 없던데, 무슨 뜻입니까?”
다들 첫날부터 물어보는 말을 재웅은 이제야 꺼낸다.
“알을 더 이상 못 낳는 닭을 말한다지만, 여기서는 딱히 맞는 말은 아니에요. 알을 생산해도 사료값에 비해 생산력이 떨어지면 도축을 해요.”
“그래도 늙은 닭이겠죠?”
“치킨집 육계 닭이 서너 달에서 여섯 달 키운 것인데, 폐계닭은 3~4년 키운 것이니 어리진 않죠. 하지만 계속 키우면 10년 이상 살 수 있는 닭이니 그리 늙은 닭은 아니겠죠?”
“그렇군요. 한데 구내식당 같은 데선 이런 질긴 닭은 안 쓰잖아요?”
“맞아요.”
“예전 조용우 셰프 밑에서 일할 땐 왜?”
“아! 나이 드신 직장인들은 옛날 닭에 대한 향수가 있잖아요. 무엇보다 육수 때문에 용우 오빠는 노계를 선호해요.”
“육수요?”
“네. 일반 육계는 개량종이라 빨리 자란 만큼 깊은 맛이 없어요. 그래서 진한 국물을 얻으려면 닭발을 따로 삶잖아요. 토종닭은 단가가 비싸고 하니 진한 육수와 졸깃한 고기를 얻자면 폐계닭이 유용하죠.”
“흠, 근데 정아 씨. 노계나 육계보단 토종닭이 진한 육수가 나오는 건 사실입니다. 뼈 안이 알토란처럼 꽉 차 있거든요.”
의외로 재웅이 정확한 지적을 해 주자 정아는 기분 좋게 말을 이었다.
“아,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하지만 단체 급식은 단가 문제가 있어서요.”
“폐계닭은 싸나요?”
“네. 일반 닭보다 더 싸게 들어와요.”
“아니, 3~4년씩이나 키우는데 어떻게 타산을.”
“육계용으로 일부러 키우면 어림없죠. 폐계닭은 달걀을 얻잖아요. 그래서 싸요. 거의 공짜로 가져왔던 시절도 있었대요. 동남아 사람들 입맛에 맞아서 그쪽으로 수출을 하는 바람에 그나마 값이 좀 형성되었대요.”
“흠. 영양사님이라 그런지 조예가 깊으시군요.”
“영양사 이야기가 왜 나오죠? 말씀드렸잖아요. 전 조리사가 될 거라고.”
찻잔을 쥔 그의 맨손을 보았다. 불과 며칠 만에 손등이 텄다. 정아는 집에서 가져온 핸드크림을 남자들의 세면대를 겸하고 있는 타일 가장자리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퇴근 인사를 하려고 보조 주방에 들렀더니 재웅이 불쑥 봉지 하나를 건넨다.
“어제 마트 갔다가 잘못 산 건데 정아 씨가 쓰든가 버리든가 해요.”
검은 봉지 안의 상자가 제법 묵직하다.
“기억해요. 어제 샀던 겁니다.”
그에게 떠밀려 나왔다. 궁금해서 버스 정류장에서 상자를 열었다. 고가의 핸드크림이다. 세 개나 들어 있다. 건네면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기억해요. 어제 샀던 겁니다.’
정아가 낮에 갖다 둔 핸드크림을 보았던 듯싶다. 얼결에 서로 핸드크림을 선물하게 되었다.
집에 와서 손에 크림을 듬뿍 발랐다. 가게 일은 돕지 않고 일찍 누웠다. 영식의 만류 때문만은 아니다. 일을 마치고 긴장감이 풀어지면 온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겁다. 견뎌 내려면 힘을 모아야 했다. 허세로 무장한 재웅의 모습이 떠오른다. 겪어 보니 밉지 않은 허세다. 그는 닭을 배우기 위해 시장닭집에 나온다고 했다. 동기가 막연하여 호기심이 동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눈을 감기 전에 화장대의 핸드크림을 바라보았다.
‘왜 세 개나 담았을까?’
다음 날, 재웅은 마스크를 쓰고 출근해 있었다.
“감기가 심한가 봐요?”
정아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별거 아녜요. 기침 예의죠. 그런데 정아 씨, 표정이 왜 그래요?”
“뭐가요?”
“동정하는 것 같잖아요.”
“전 단지 걱정돼서요.”
“좋습니다. 동지애로 접수하죠.”
“풋. 고마워요. 핸드크림.”
“다행히 안 버렸나 보군요.”
“왜 세 개일까 궁금했어요.”
“아! 그거요? 세 개를 두 개 값에 팔고 있기에.”
의외의 대답에 정아는 싱거운 웃음으로 의혹 하나를 갈무리했다. 여하튼 그가 어제 일로 기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주눅이 든 모습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손님을 치른 뒤, 직원들은 늦은 점심을 한다. 식사를 마치고 정아는 보조 주방에 들러 생강차를 탔다. 마침 오디오에서 ‘노고지리’의 ‘찻잔’이 흐른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재웅이 바라본다. 전날과 같이 기특하다는 표정이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산울림 음악도 좋아하나 보네?”
“노고지리 노래 아닌가요?”
“산움림의 작품이기도 하죠.”
“그런데요, 늙은 사람도 산울림을 좋아하나 봐요?”
“늙은?”
정아의 응수가 의외였는지 짐짓 재웅은 당황한다.
“어, 정아 씨. 나, 그리 늙지 않았는데?”
“저도 그리 어리진 않아요.”
“호! 정아 씬 겪어 보니 재미있군요. 성냥팔이 소녀와도 거리가 있고 말입니다.”
“네?”
“아! 불쾌할 필욘 없어요. 내 빈약한 선입견을 고백한 거니까.”
언어의 유희가 그의 특기인가 보다. 찻잔을 비우고 본채 주방으로 가려는데, 구 여사가 득달같이 뛰어든다.
“야, 정아야! 미친놈 또 왔다. 냉큼 끌어내라! 재웅 총각도 와 봐.”
홀에는 서너 테이블의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한 테이블에 서른네 살의 그가 낮술에 취해 있다.
“우리 정아 왔구나.”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조용우가 반긴다.
“글쎄, 닭을 주문했더니, 저 할머니가 나한텐 안 판다고 꽥꽥 소리를 지르지 않냐. 너무 겁나서 널 불렀다.”
“오빠, 사장님은 술 취한 손님은 안 받으신다 했잖아요.”
“피해만 안 주면 되잖아!”
그때 구 여사의 목청이 끼어든다.
“내가 팔기 싫어서 그래! 재웅 총각 뭐 해? 냉큼 끌어내!”
“제가 모실게요.”
정아가 재빨리 다가가 용우의 겨드랑이를 붙들고 일으켰다.
“이 집 닭 먹고 싶다니까 그러네. 어째서 여기가 장사가 잘되는지를 자꾸 먹어 봐야 알 거 아니겠어!”
“다음에 저랑 같이 먹어요.”
“싫다. 지금 줘! 20년을 죽어라 고생한 내 솜씨보다 여기가 더 인정받는 이유를 오늘은 기어이 알아야겠어.”
“용우 오빠!”
정아의 안타까운 외침에 용우의 한쪽 팔을 붙든 재웅이 움찔한다. 그리고 용우를 유심히 바라본다. 용우는 정아를 찬찬히 바라본다.
“어라? 우리 영양사님이 화나셨네.”
“제발. 제겐 이곳이 중요해요. 저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이딴 허접한 곳이 뭐가 중요해? 네가 조리사야? 넌 영양사잖아. 네 아빠한테 넌 영양사여야지. 안 그래?”
용우의 주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냉큼 내보내라니까!”
구 여사의 채근에 재웅이 용우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귀공자풍의 남자가 의외로 힘이 셌고, 또 단호했다. 용우는 단박에 가게 밖으로 밀려 났다.
퇴근하는 길에 재웅이 따라붙었다.
“저녁 같이 먹읍시다.”
그의 말에 정아는 흠칫 놀랐다. 이내 차분하게 대답했다.
“집에 가서 먹을게요.”
“착각하지 말아요. 데이트 신청은 아니거든.”
“아빠가 식당을 해요.”
“잘됐네요. 거기로 갑시다.”
“수원이에요. 그리고 누굴 집에 초대할 생각은 없어요.”
“그럼 차라도 한잔. 데이트 신청은 확실히 아니고,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몸도 안 좋으신데, 빨리 들어가 쉬세요.”
“감긴 다 나았어요. 갑시다.”
그가 손을 낚아채더니 눈앞의 커피 전문점으로 끌고 들어갔다.
“아무거나 두 잔 주세요. 그냥 칼로리 높은 걸로.”
그가 일방적으로 주문을 했다. 그리고 정아를 응시하며 진지하게 묻는다.
“아까 택시 태워 보냈던 분, 이름이 조용우가 맞나요?”
“이름을 어떻게?”
“뉴욕에서 미쉐린 가이드에 손꼽히는 식당이 있었지요. 어느 해에 별 한 개에서 두 개로 승급되었는데, 다름 아닌 매우 창의적인 젊은 조리사의 활약 때문이었답니다. 그 젊은 조리사는 당시 삼십 대 초반의 한국인이었고요.”
그 사람이 조용우라고 말하는 것일까? 단지 뉴욕에 있었다는 말만 들었다.
“그 한국인 셰프는 장래가 보장된 식당을 그만두고 갑자기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찾아간 곳은 의외로 대기업의 구내식당이었습니다. 근무 조건은 공무원처럼 정시 출퇴근과 주말 휴일 보장이었다고 합니다.”
“아! 용우 오빠가 일했던 오성 그룹을 말하는 건가요?”
“맞습니다. 그나마 그곳도 그만두었지요. 역시 이유가 알려지지 않았죠. 그분의 이름이 조용우였다는 것만 펙트로 남았죠.”
“어떻게 저보다 잘 아시죠?”
“아버지가 뉴욕 출장 중에 그분 음식을 먹었어요. 나중에 수소문하셔서 구내식당을 찾아낸 덕분에 나도 그분 음식을 먹었죠.”
“그렇군요. 용우 오빠가 그 정도로 대단한 줄은 몰랐는데.”
“언플로 스타가 된 나이롱 셰프도 흔한 세상인데, 그분은 마케팅엔 취미가 없으신 거죠. 아니면 일부러 숨어 지내는 취미시거나. 자, 정아 씨. 이쯤에서 제가 묻죠. 오빠라고 부르던데, 대체 어떤 사이죠? 또, 어째서 그렇게 망가지신 거죠?”
속사포로 쏘아붙이는 그의 질문에 정아는 문득 먼저 묻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그보다 백재웅 씨, 그쪽이 전 수상해요. 누구시죠?’
***
이틀째 소화가 안 되고 오한이 심해 재웅은 초저녁부터 줄곧 누워 지냈다. 급기야 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다.
링거액이 다 들어가는 두세 시간 동안 꼼짝없이 응급실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러자면 제시간에 출근을 못 한다. 잠이 들었다가 깨어 보니 아버지와 동생은 돌아갔다.
“미련한 자식. 아프면 쉴 일이지. 다들 얼마나 놀랐는지.”
병실에 남은 장 여사가 혀를 끌끌 찼다.
“감기는 다 나았잖아요.”
“다 나은 녀석이 음식을 못 삼키니?”
“그냥 탈수 현상이라는데 우리 장 여사 오버하신다. 그보다 출근해야 하는데.”
“미쳤니?”
“두 달 동안 모범 근무하기로 약속했잖아요.”
“됐네, 이 사람아. 어? 그런데 두 달이라고 했니? 한 달이 아니고?”
아버지는 그렇게 설명했나 보다. 두 달을 견디면 조리실 현장으로, 한 달을 견디면 마케팅 부서로 일하기로 약속했다. 아버지는 애당초 두 달은 무리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오기가 돋는다.
“그만 맞으면 안 되나요?”
재웅이 영양제와 포도당 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절반이 남아 있다.
“정신 차려, 아들. 거울 갖다 줄까? 어휴, 어쩌다 산송장이 다 됐네. 그놈의 밴드 집어치우면 안 되겠니? 우리 아들 강골이었잖니. 밴드 한다고 허구한 날 밤새면서 몸이 축난 거잖니.”
“그래서 제가 양보했잖아요. 암튼 전 오늘은 꼭 출근해야 해요.”
“쉬는 게 영 내키지 않으면 오후에나 나가라. 특실을 하나 준비했으니 거기서 쉬고.”
무조건 쉬라고 우길 법한 어머니가 의외로 타협적이다.
“어휴, 네 아버지도 참 독하셔. 아들이 산송장 같은데도 원한다면 출근을 시키라니, 원.”
하지만 재웅은 그 타협책도 받아들일 처지가 못 되었다. 오늘은 반드시 일찍 출근해야 한다.
“좀 쉬었다 점심때 나갈 테니, 엄만 집에 가세요.”
“사양하겠다.”
“난 누가 옆에 있으면 잠을 못 잔다는 거 알잖아요.”
“그럼 잠깐 집에 좀 갔다 올까?”
장 여사가 나간 뒤 재웅은 간호사를 불렀다. 다행히 병원장인 외삼촌은 아직 출근 전이라 탈출은 어렵지 않았다.
***
칼바람이 우우, 비명을 지르며 주방 곳곳을 두드린다. 정아는 최 씨의 작업대 앞에서 닭을 토막 냈다. 부인이 많이 아픈가 보다. 하루도 결근을 하지 않았다는 최 씨가 이틀째 나오지 못하고 있다. 구 여사가 손수 닭을 토막 내겠다고 나서는 것을 정아가 만류했다. 의외로 닭을 쉽게 토막 내는 정아의 솜씨에 구 여사도, 재웅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겨울이어서 다행이다. 손이 느려 진종일 걸렸지만 닭의 신선도에는 문제가 없다. 이따금 최 씨의 일을 도운 바가 도움이 되긴 했지만, 용우 셰프의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이 컸다. 여느 급식소와는 달리 용우는 토막 닭이 아닌 생닭을 주문해서 주방에서 손질했으며, 그 일을 정아도 거들었다.
어제는 재웅과 둘이 일했고, 오늘은 정아 혼자 주방을 지키고 있다. 새벽에 나오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재웅은 10시가 되어서도 안 나타난다. 전날 그는 무리했다. 질긴 닭을 장시간에 걸쳐 토막을 내려면 힘의 안배가 중요한데도 그는 몰아쳐서 힘을 쓴다. 급한 성미보단 매사에 남보다 잘하려는 욕심 때문인 것 같다.
“힘들어서 어쩌냐?”
구 여사가 들어와 혀를 찬다. 드물게 인정이 가득 담긴 얼굴이다.
“그런데 사장님, 닭이 조금밖에 안 왔네요.”
“조금만 팔고 일찍 끝낼 거다. 천천히 해라.”
전날에도 장사를 일찍 마쳤다. 장사에 지장을 주는 행짜는 어떤 사정이 생긴 직원에게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데 유독 최 씨에게는 관대하다. 오래전 최 씨의 부인이 이곳에서 정아가 하는 일을 맡았다고 들었다. 오래된 아주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다. 말을 꺼낸 아주머니는 불현듯 입을 꼭 다물고는 못 들은 걸로 하라는 당부를 했다. 그 후로 더 이상 들은 이야기는 없다.
“한데 이놈의 총각은 어째 아직껏 안 나오는 게야!”
“총각, 여기 왔사옵니다!”
불퉁거리는 구 여사의 말을 넙죽 받으며 재웅이 나타났다. 전날의 고된 일 때문일까. 감기가 나아 좋아졌던 혈색이 다시금 창백하다.
“재웅 총각은 칼질하지 말고 똥집이나 다듬어.”
구 여사가 당부하고 나간다. 재웅은 고개를 실긋거리면서 정아를 본다.
“어제 재웅 씨가 토막 낸 거 있잖아요. 모양이 안 좋았대요.”
“섭섭하네. 이래 봬도 나 취사병 짬밥에 조리사 자격증이 두 갠데.”
투덜거리면서 생닭 세척을 시작한다. 조리사 자격증이 두 개라고 한다. 그가 이곳에서 일하는 바가 더욱 궁금하다. 더욱이 용우 셰프에 관해서도 정아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고개를 실긋거리며 그를 주시했다. 착각일까. 잠깐 휘청거리는 그의 몸짓이 병약하기 짝이 없다. 손을 녹이면서 그가 바라본다.
“정아 씬 팔 괜찮아요?”
“참을 만해요.”
손가락 관절이 아프고 어깨가 뭉쳤다. 몸이 고단할수록 묘한 쾌감이 찾아든다. 큰 고통을 달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아버지에 대한 애정의 증표라고 믿고 싶다. 묵묵히 서로의 일에 열중했다. 한순간 재웅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진다. 홱 돌아보니 그가 지척에 서서 바라보고 있다.
“가르쳐 줘요.”
“네?”
“어떻게 자르면 그렇게 깔끔하게 토막 낼 수 있죠?”
“오늘은 많지도 않은데 제가 토막 낼 테니, 재웅 씨는 배만 갈라 주심…….”
“가르쳐 줘요. 부탁입니다.”
겸손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가 부탁을 한다. 결국 도마 앞에 나란히 섰다.
“여기가 관절이거든요.”
정아가 날개 죽지를 토막 냈다. 그리고 절단된 부위를 보여 주었다.
“하얗고 둥글게 뼈가 보이죠? 삶아도 보기에 좋고, 뾰족하지 않아서 먹기에도 좋아요. 무엇보다 토막 낼 때 쉽게 잘리지요.”
다른 부위의 관절도 짚어 주고, 가슴살을 분리하는 요령도 알려 주었다.
“폐계닭은 껍질이 질겨요. 다리는 삶으면 쪼글쪼글해지니 이렇게 칼집을 내 줘야 해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재웅이 갑자기 정아의 어깨로 손을 짚는다. 봉긋한 가슴으로 그의 가슴이 닿는가 싶더니 동시에 그의 얼굴이 눈앞으로 날아든다. 창졸간에 그의 얼굴이 정아의 뺨과 맞닿았다. 정아는 그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어내며 소리쳤다.
“왜 그러세요!”
너무 세게 밀었던 것일까. 그가 휘뚝거리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당황한 정아가 사과를 하려고 하는데, 그가 먼저 한다.
“미, 미안해요. 어지러워서.”
정아가 어색하게 뻗은 손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어디 아프세요?”
“그건 아니고, 미인 곁에 서니 현기증이 나서.”
농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무슨 여자가 그리 힘이 장삽니까!”
그가 볼멘소리를 하자 정아는 휙 돌아서며 말머리를 돌렸다.
“차 한 잔 마시고 하게요.”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린다. 매끄러운 그의 뺨이 닿으면서 일어난 묘한 정전기로 이마까지 달아오른다. 정아는 손부채질을 하며 차를 끓였다.
“내 칼질 경력이 5년쯤 되거든요.”
찻잔을 받아 든 재웅이 바닥을 보며 힘없이 말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정아의 장화 코에 머물러 있다. 그 시선이 불쑥 올라온다. 정아는 달아오른 얼굴을 들킬까 봐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도 내 솜씨는 정아 씨보다 빈약해요. 근육도 내가 압도적으로 우월한데.”
정아는 딴 데를 보며 차만 홀짝거렸다.
“정아 씨, 출발이 틀렸겠지요?”
“……?”
“내가 일하는 방법 말입니다.”
뺨을 한 번 문지르고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 말인즉,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말을 실감한다, 그겁니다. 정아 씬 조용우 셰프에게 이걸 배웠겠죠?”
“네.”
“그렇군요. 역시 출발이 중요하고, 출발점의 멘토가 중요해요.”
“재웅 씨도 잘하시던 걸요. 단지 여기 닭은 특별하니 익숙하지 않으셨겠죠.”
“적절한 위로군요. 정아 씨, 난 말입니다. 세상에서 우리 아버지를 가장 존경해요.”
그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진솔함이 담겨 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가장이셔서 기본적으로 존경하지만, 인생의 멘토로도 더없이 훌륭하지요. 아버지는 스펙도 배경도 별로이셨어요. 하지만 성공하셨어요. 으뜸 비결은 다름 아닌 당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데 있었다 하시더군요. 그런데 난 아닌 것 같아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도마질이 서툴렀다고 이렇듯 기가 죽을 필요까지 있을까? 기운이 너무 없어 보인다. 그가 고개를 들어 정아의 표정을 읽더니 정색을 한다.
“그런 표정 좀 짓지 말아요. 고문이라고요.”
“제 표정이 왜?”
정아는 좀 전에 달아올랐던 얼굴이 남아 있는가 싶어 움찔했다.
“아무튼 동정하지 말아요. 이래 봬도 난 우월한 유전자를 가졌답니다.”
“알고 있어요, 풋!”
“비웃지도 말고요.”
“찬양하는 거예요. 우월한 유전자에게요.”
허세가 얄미웠던 그였는데, 묘하게도 허세를 부르는 그가 도리어 어울린다. 그가 통나무 도마 앞에 선다. 정아가 딱 한 번 보여 준 요령을 그는 이내 흡수하여 제법 쉽게 칼질을 한다. 구 여사가 달려와 살펴도 탈이 없을 정도였다.
“잘하고 있는 겁니까?”
십여 마리를 토막 내고는 그가 묻는다.
“네. 어깨에 힘만 더 빼심 되겠어요. 칼이 무거우니 내리칠 땐 손목 힘보다는 칼의 무게를 이용하세요.”
정아의 말에 따라 그가 다시 칼질을 한다.
“그렇군요. 그래서 가냘픈 정아 씨 손목이 견뎌 냈군요.”
그의 얼굴에 오롯한 성취감이 걸린다. 바라보다가 정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추운 날씨다. 그런데도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다. 식은땀?
과연 불편한지 그가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찻물을 보충한다.
“폐계닭 말이죠. 국어사전에 없던데, 무슨 뜻입니까?”
다들 첫날부터 물어보는 말을 재웅은 이제야 꺼낸다.
“알을 더 이상 못 낳는 닭을 말한다지만, 여기서는 딱히 맞는 말은 아니에요. 알을 생산해도 사료값에 비해 생산력이 떨어지면 도축을 해요.”
“그래도 늙은 닭이겠죠?”
“치킨집 육계 닭이 서너 달에서 여섯 달 키운 것인데, 폐계닭은 3~4년 키운 것이니 어리진 않죠. 하지만 계속 키우면 10년 이상 살 수 있는 닭이니 그리 늙은 닭은 아니겠죠?”
“그렇군요. 한데 구내식당 같은 데선 이런 질긴 닭은 안 쓰잖아요?”
“맞아요.”
“예전 조용우 셰프 밑에서 일할 땐 왜?”
“아! 나이 드신 직장인들은 옛날 닭에 대한 향수가 있잖아요. 무엇보다 육수 때문에 용우 오빠는 노계를 선호해요.”
“육수요?”
“네. 일반 육계는 개량종이라 빨리 자란 만큼 깊은 맛이 없어요. 그래서 진한 국물을 얻으려면 닭발을 따로 삶잖아요. 토종닭은 단가가 비싸고 하니 진한 육수와 졸깃한 고기를 얻자면 폐계닭이 유용하죠.”
“흠, 근데 정아 씨. 노계나 육계보단 토종닭이 진한 육수가 나오는 건 사실입니다. 뼈 안이 알토란처럼 꽉 차 있거든요.”
의외로 재웅이 정확한 지적을 해 주자 정아는 기분 좋게 말을 이었다.
“아,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하지만 단체 급식은 단가 문제가 있어서요.”
“폐계닭은 싸나요?”
“네. 일반 닭보다 더 싸게 들어와요.”
“아니, 3~4년씩이나 키우는데 어떻게 타산을.”
“육계용으로 일부러 키우면 어림없죠. 폐계닭은 달걀을 얻잖아요. 그래서 싸요. 거의 공짜로 가져왔던 시절도 있었대요. 동남아 사람들 입맛에 맞아서 그쪽으로 수출을 하는 바람에 그나마 값이 좀 형성되었대요.”
“흠. 영양사님이라 그런지 조예가 깊으시군요.”
“영양사 이야기가 왜 나오죠? 말씀드렸잖아요. 전 조리사가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