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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소속사 측 주장에 따르면 둘은 오랜 친구 사이이로, 저녁 식사를 함께한 것뿐이라는데요.
“저 봐라. 또 친구란다. 친구는 무슨. 최소 썸 같더만.”
속초 바다 앞의 한 숙소. 현오는 저 혼자 혀를 끌끌 차며 TV를 향해 대꾸를 했다.
이어 초은 양은 자신의 SNS를 통해 정우 군과는 여전히 오빠 동생 사이일 뿐이라며, 팬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괄호, 그 오빠가 아빠도 되고 여보도 되고 뭐 그런 거죠.”
“박현오, 너 시끄러워.”
미선이 그의 손에서 리모컨을 뺏어 들고선 채널을 돌렸다. 현오는 그런 그녀에게 잘 보고 있는데 왜 그러냐며 투덜거렸지만, 미선은 오히려 언제부터 아이돌에게 관심이 있었냐며 쏘아붙였다.
“그래도 나름 요즘 가장 핫한 아이돌의 스캔들이잖아.”
“그냥 둘이 아는 오빠 동생 사이라잖아. 친구라고. 말하면 좀 믿지 뭐가 불만이 많아?”
미선은 현오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눈을 흘겼다.
“야,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냐.”
“너랑 나.”
“……치, 친구 같은 소리 하네.”
“친구 아니면?”
“원수?”
“뭐…… 인정.”
미선이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둘은 서로 깨끗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돌려 곧장 입을 비죽였다.
“그래도 하나 있잖아.”
한참을 돌아가던 채널이, 어느 드라마에서 멈췄다. 그녀는 여전히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누군가를 향해 고개만 까딱였다.
“아아, 저것들?”
현오가 미선의 고갯짓이 향한 자리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소주잔을 단번에 비워 내고 있는 성훈과 주애가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불만인 것인지 아니면 마신 소주가 쓴 것인지. 미간을 잔뜩 모은 채로 주애는 채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저건 별종이랄까.”
“별종이 아니고 본보기지. 남녀 친구 사이의 귀감.”
“시끄러워. 우리보단 너희가 더 사이좋은 친구 같으니까.”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는 듯 계란말이를 형편없이 쪼개고 있던 주애가 입을 열었다. ‘사이좋은 친구’라는 표현에 미선의 표정이 단숨에 뾰로통해졌다.
“한주애, 오늘 좀 살벌하다?”
“내가 뭐.”
“하여간 저 까칠한 년. 처음에 만났을 때만해도 말도 없고 조용하게 방긋거려서 조신하고 그런 앤 줄 알았는데.”
“네에, 그거 그냥 낯가림이구요, 그냥 다 네 착각이시구요.”
한숨 섞인 주애의 말에 미선이 ‘치이’하고 불만을 표했다. 이어서 성훈이 낄낄 웃음을 터뜨리자, 주애가 뾰족한 시선으로 그를 째려봤다.
“너 그거 알아? 네 진짜 성격 알면 눈물 흘릴 남자들이 한 둘이 아니에요.”
“야, 그거 누가 들으면 내가 내숭이라도 떨었는지 알겠다. 그냥 지들이 착각하는 거지. 친하지도 않으면서.”
“너네 회사 사람들도 단체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미선의 이어지는 질문에 잠시. 젓가락질을 하다 말고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를 대충 집어먹던 주애가 잠시 곰곰이 생각을 했다.
“아마? 근데 뭐.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도 없…… 아.”
“아?”
“한 명 있긴 있네.”
주애의 발언에 모두가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한 명?”
“갑자기 우리 부서로 옮겨 온 사람인데, 좀 잘 지내고 싶달까? 이래저래 도움도 받고, 인간성도 괜찮고. 사적으로 잘 지내도 괜찮…… 야!”
젓가락을 멈춘 주애가 열심히 설명하는 사이, 성훈이 갑자기 그녀가 쪼개던 계란말이를 깨끗이 갈라 자신의 입 속으로 넣었다.
“야, 김성훈. 너 내가 열심히 쪼개던 걸!”
“뭐 어때. 그러기에 누가 그 허접한 젓가락질을 스물여섯 먹도록 못 고치래?”
발끈한 주애가 성훈의 팔을 때리려 손을 휘둘렀지만,
“하이파이브.”
성훈은 재빠르게 자신의 손바닥으로 막아 냈다. 능청스러운 그의 태도에 주애가 씩씩거렸지만, 성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걸 보는 현오와 미선은 못 말린다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남녀 사이에 완벽한 친구 사이가 있긴 한가보다고. 말없이 가로젓는 두 고개는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야야, 한주애.”
잠시 후 눈치를 살피던 미선이 주애에게 귓속말을 걸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미선이 주위를 힐끔거렸고, 주애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한숨을 쉬더니 이내 성훈의 어깨를 툭 쳤다.
“야, 김성훈. 나 바람 쐬러 갈래.”
“왜. 너 혼자 가.”
“이 밤길에 여자 혼자면 위험하잖아.”
“넌 얼굴이 무기야.”
결국 참다못한 주애가 성훈의 등을 걷어찰 자세를 취했지만, 현오의 헛기침 소리가 먼저 들렸다. 못마땅한 성훈이 혀를 한 번 세게 차더니,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생각해 보니 네 얼굴 볼 사람도 보호해 줘야겠네.”
결국, 닫히는 현관 뒤로는 찰싹하는 소리와 동시에 성훈의 짧은 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앞집에 살아서’, ‘어릴 때부터 쭉 같이해서’ 따위의 이유를 달고 있는, 소위 말하는 소꿉친구. 이제는 내 친구가 네 친구고 네 친구가 내 친구인, 그리고 덕분에 어느 모임에나 세트 취급을 당하는. 본인들 기억에는 없다지만 부모의 말에 의하면 어릴 때 목욕탕에서 마주친 적도 있는 그런 사이. 서로가 서로를 남녀로 안 본다고 하는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설렘이라고는 단 1mg도 들어있지 않을 것 같은 그들.
그러니까 이건,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26살 동갑내기 김성훈과 한주애, 두 사람의 이야기다.
그리고 어느 유행가, 혹은 영화 제목처럼.
누구나 비밀은 있다.
1. 그는 숨기는 데에 재능이 없습니다.
“너 손 진짜 맵다고 몇 년을 말해. 진짜 시집도 못 가겠다. 아오, 아파라.”
“죽을래?”
노려보는 주애를 향해 성훈이 방어 태세를 취했지만, 주애는 눈만 한 번 흘기고선 묵묵히 길을 걸어갔다.
“…….”
“…….”
대화는 결국 거기서 잠시 끊어졌다. 아스팔트 위를 나뒹구는 모래를 밟는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언제나처럼 둘로 나눠지지 않는 발소리는 어색했다. 그녀는 한 걸음 앞에서, 그는 한 걸음 뒤에서. 두 사람은 땅바닥만 쳐다보고 걸었다.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들리는 소리가 불만스러웠던 주애가 일부러 발걸음이 어긋나도록 걸었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 하고는 도로 합이 맞았다. 결국 주애는 빠르게 체념하고선,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에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얼마 걷지 못해서, 아직 숙소의 정경이 사라기지도 전에 뭐가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슬리퍼를 있는 힘껏 질질 끌기 시작한 성훈이 별안간 숙소를 돌아봤다.
“그나저나 진짜 저 미친것들은 더윌 먹었나. 뭔 고백을 여행까지 와서 한다고.”
혼잣말처럼 괜히 내지른 소리. 그러나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은 메아리조차 남겨 주지 않고 흔적을 지웠다. 정처를 잃은 것 같은 그 소리가 주애의 어깨를 두들겼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성훈을 지나 숙소를 향했다. 그를 의식하는 것처럼, 아닌 것처럼.
“……지들끼리 알아서 좀 하든가. 그리고 이럴 거면 왜 불렀대?”
애들도 아니고. 주애는 중얼대는 것처럼 한마디를 덧붙였다.
쯧. 혀를 한 번 세게 차며 가던 길을 쳐다봤다. 시선 끝에 걸렸던 성훈을 무시하고 다시 앞의 길을 향했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방금 그건 분명, 그에게 한 대답이 아니었다.
“친구는 얼어 죽을.”
들리지 않을 소리로 중얼댄 그녀가 앞에 있던 돌멩이를 세차게 발로 차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발길질 탓에 그녀의 발은 엉뚱하게 바닥을 내리꽂았다.
“윽……!”
아프다고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주저앉은 그녀를 성훈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심 좀 하지……’라는 작은 소리는 멀리서 들려온 파도 소리에 묻혔다. 그는 그녀를 따라 앉아 시선을 마주한다든가, 아니면 그녀의 발을 살펴보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떨어진 채, 그 자리에 서 있는 그대로 물었다.
“발 안 깨졌냐?”
“몰라, 그냥. 좀 까졌어.”
“멍청하긴.”
주애가 고개를 휙 들어 올려 그를 노려봐도, 성훈은 주위를 두리번댈 뿐 그녀의 시선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런 시선엔 이미 익숙하다는 듯이.
“야, 저기 약국 있다. 알아서 걸을 수는 있지? 난 카페나 가서 시간 죽칠 테니까 넌 알아서 해라. 그렇다고 어디 위험한 데 돌아다니다가 길 잃어버리진 말고.”
한마디만 남겨 놓고 쌩하니 뒤를 도는 성훈의 모습에, 주애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야, 김성훈!”
그녀의 목소리가 밤길 위로 쩌렁쩌렁 울렸다. 온 동네 사람들이 주목할 것 같은 목소리를 탓하며, 성훈의 발길을 세웠다.
“왜?”
“나 돈 없어!”
“아오, 저게 진짜!”
얼마 가지 못한 발걸음이 다시 돌아왔다. 발을 톡톡 털고 일어난 주애가 다시 그의 앞에 마주했다.
“……야.”
그녀가 그를 불렀다. 하지만 못 들은 척. 그는 대답을 않고 걷기 시작했다. 여자도 그를 따라 걸었다. 남자는 여자를 부축할 생각을 않고, 여자도 남자에게 부축 받을 생각을 않았다. 그저 발을 대충 끌며, 약국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 불빛으로 향했다. 한 걸음 앞에선 성훈이, 한 걸음 뒤에선 주애가 걸었다.
“야.”
다시 한 번 그녀가 그의 등을 툭 치며 불렀다. 결국엔 무시를 하지 못한 그는 인상을 구기고서 그녀를 돌아봤다. 까만 어둠 속에 그녀의 얼굴이 그의 시야로 들어왔다.
“왜?”
그러나 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이나 먹으러 가자.”
“……너랑 나 둘이서?”
“우리 말고 누가 있어.”
“돈 없다며.”
“숙소 가서 줄게.”
“……돈만 낸다면야.”
아무 문제도 없는 척, 아무 고민도 없는 척. 그는 그렇게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두 사람은 소꿉친구였다. 정말 꼬박 만 25년 동안을 알고 지낸, 제 머리도 똑바로 가누지 못할 때부터 같이 누워 있던 그런 친구였다. 당연히 둘에겐 첫 만남의 기억 따위는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던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인생에 당연한 것처럼 존재하던 사람이었다.
주애와 성훈의 위로 있는 여자 형제들도 동갑내기였고, 둘의 집은 같은 아파트 같은 층의 앞집이었다. 그런 인연을 시작으로, 두 사람의 부모는 그들의 태어나기도 전에 친하게 지냈었다. 그리고 양쪽 모두 비슷한 시기에 둘째 계획을 세웠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게 부모들의 설명이었다.
그렇게 성훈이 겨울에 태어났고, 같은 해 봄에는 주애가 태어났다. 앞집 이웃사촌으로서, 또래 아이의 어머니로서 이미 친해질 대로 친해진 두 어머니는 항상 아이들 넷이서 놀게 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지내게 돼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아이들도 그걸 싫어하진 않았다. 물론 유치원에 다니던 시기엔 주애와 성훈을 보고 알나리깔나리 놀리던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나타날 때면 가끔은 마주하길 꺼리는 기색을 보였으나, 막상 또 놀기 시작하면 곧잘 사이좋게 놀았었다.
소속사 측 주장에 따르면 둘은 오랜 친구 사이이로, 저녁 식사를 함께한 것뿐이라는데요.
“저 봐라. 또 친구란다. 친구는 무슨. 최소 썸 같더만.”
속초 바다 앞의 한 숙소. 현오는 저 혼자 혀를 끌끌 차며 TV를 향해 대꾸를 했다.
이어 초은 양은 자신의 SNS를 통해 정우 군과는 여전히 오빠 동생 사이일 뿐이라며, 팬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괄호, 그 오빠가 아빠도 되고 여보도 되고 뭐 그런 거죠.”
“박현오, 너 시끄러워.”
미선이 그의 손에서 리모컨을 뺏어 들고선 채널을 돌렸다. 현오는 그런 그녀에게 잘 보고 있는데 왜 그러냐며 투덜거렸지만, 미선은 오히려 언제부터 아이돌에게 관심이 있었냐며 쏘아붙였다.
“그래도 나름 요즘 가장 핫한 아이돌의 스캔들이잖아.”
“그냥 둘이 아는 오빠 동생 사이라잖아. 친구라고. 말하면 좀 믿지 뭐가 불만이 많아?”
미선은 현오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눈을 흘겼다.
“야,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냐.”
“너랑 나.”
“……치, 친구 같은 소리 하네.”
“친구 아니면?”
“원수?”
“뭐…… 인정.”
미선이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둘은 서로 깨끗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돌려 곧장 입을 비죽였다.
“그래도 하나 있잖아.”
한참을 돌아가던 채널이, 어느 드라마에서 멈췄다. 그녀는 여전히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누군가를 향해 고개만 까딱였다.
“아아, 저것들?”
현오가 미선의 고갯짓이 향한 자리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소주잔을 단번에 비워 내고 있는 성훈과 주애가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불만인 것인지 아니면 마신 소주가 쓴 것인지. 미간을 잔뜩 모은 채로 주애는 채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저건 별종이랄까.”
“별종이 아니고 본보기지. 남녀 친구 사이의 귀감.”
“시끄러워. 우리보단 너희가 더 사이좋은 친구 같으니까.”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는 듯 계란말이를 형편없이 쪼개고 있던 주애가 입을 열었다. ‘사이좋은 친구’라는 표현에 미선의 표정이 단숨에 뾰로통해졌다.
“한주애, 오늘 좀 살벌하다?”
“내가 뭐.”
“하여간 저 까칠한 년. 처음에 만났을 때만해도 말도 없고 조용하게 방긋거려서 조신하고 그런 앤 줄 알았는데.”
“네에, 그거 그냥 낯가림이구요, 그냥 다 네 착각이시구요.”
한숨 섞인 주애의 말에 미선이 ‘치이’하고 불만을 표했다. 이어서 성훈이 낄낄 웃음을 터뜨리자, 주애가 뾰족한 시선으로 그를 째려봤다.
“너 그거 알아? 네 진짜 성격 알면 눈물 흘릴 남자들이 한 둘이 아니에요.”
“야, 그거 누가 들으면 내가 내숭이라도 떨었는지 알겠다. 그냥 지들이 착각하는 거지. 친하지도 않으면서.”
“너네 회사 사람들도 단체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미선의 이어지는 질문에 잠시. 젓가락질을 하다 말고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를 대충 집어먹던 주애가 잠시 곰곰이 생각을 했다.
“아마? 근데 뭐.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도 없…… 아.”
“아?”
“한 명 있긴 있네.”
주애의 발언에 모두가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한 명?”
“갑자기 우리 부서로 옮겨 온 사람인데, 좀 잘 지내고 싶달까? 이래저래 도움도 받고, 인간성도 괜찮고. 사적으로 잘 지내도 괜찮…… 야!”
젓가락을 멈춘 주애가 열심히 설명하는 사이, 성훈이 갑자기 그녀가 쪼개던 계란말이를 깨끗이 갈라 자신의 입 속으로 넣었다.
“야, 김성훈. 너 내가 열심히 쪼개던 걸!”
“뭐 어때. 그러기에 누가 그 허접한 젓가락질을 스물여섯 먹도록 못 고치래?”
발끈한 주애가 성훈의 팔을 때리려 손을 휘둘렀지만,
“하이파이브.”
성훈은 재빠르게 자신의 손바닥으로 막아 냈다. 능청스러운 그의 태도에 주애가 씩씩거렸지만, 성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걸 보는 현오와 미선은 못 말린다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남녀 사이에 완벽한 친구 사이가 있긴 한가보다고. 말없이 가로젓는 두 고개는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야야, 한주애.”
잠시 후 눈치를 살피던 미선이 주애에게 귓속말을 걸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미선이 주위를 힐끔거렸고, 주애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한숨을 쉬더니 이내 성훈의 어깨를 툭 쳤다.
“야, 김성훈. 나 바람 쐬러 갈래.”
“왜. 너 혼자 가.”
“이 밤길에 여자 혼자면 위험하잖아.”
“넌 얼굴이 무기야.”
결국 참다못한 주애가 성훈의 등을 걷어찰 자세를 취했지만, 현오의 헛기침 소리가 먼저 들렸다. 못마땅한 성훈이 혀를 한 번 세게 차더니,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생각해 보니 네 얼굴 볼 사람도 보호해 줘야겠네.”
결국, 닫히는 현관 뒤로는 찰싹하는 소리와 동시에 성훈의 짧은 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앞집에 살아서’, ‘어릴 때부터 쭉 같이해서’ 따위의 이유를 달고 있는, 소위 말하는 소꿉친구. 이제는 내 친구가 네 친구고 네 친구가 내 친구인, 그리고 덕분에 어느 모임에나 세트 취급을 당하는. 본인들 기억에는 없다지만 부모의 말에 의하면 어릴 때 목욕탕에서 마주친 적도 있는 그런 사이. 서로가 서로를 남녀로 안 본다고 하는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설렘이라고는 단 1mg도 들어있지 않을 것 같은 그들.
그러니까 이건,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26살 동갑내기 김성훈과 한주애, 두 사람의 이야기다.
그리고 어느 유행가, 혹은 영화 제목처럼.
누구나 비밀은 있다.
1. 그는 숨기는 데에 재능이 없습니다.
“너 손 진짜 맵다고 몇 년을 말해. 진짜 시집도 못 가겠다. 아오, 아파라.”
“죽을래?”
노려보는 주애를 향해 성훈이 방어 태세를 취했지만, 주애는 눈만 한 번 흘기고선 묵묵히 길을 걸어갔다.
“…….”
“…….”
대화는 결국 거기서 잠시 끊어졌다. 아스팔트 위를 나뒹구는 모래를 밟는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언제나처럼 둘로 나눠지지 않는 발소리는 어색했다. 그녀는 한 걸음 앞에서, 그는 한 걸음 뒤에서. 두 사람은 땅바닥만 쳐다보고 걸었다.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들리는 소리가 불만스러웠던 주애가 일부러 발걸음이 어긋나도록 걸었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 하고는 도로 합이 맞았다. 결국 주애는 빠르게 체념하고선,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에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얼마 걷지 못해서, 아직 숙소의 정경이 사라기지도 전에 뭐가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슬리퍼를 있는 힘껏 질질 끌기 시작한 성훈이 별안간 숙소를 돌아봤다.
“그나저나 진짜 저 미친것들은 더윌 먹었나. 뭔 고백을 여행까지 와서 한다고.”
혼잣말처럼 괜히 내지른 소리. 그러나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은 메아리조차 남겨 주지 않고 흔적을 지웠다. 정처를 잃은 것 같은 그 소리가 주애의 어깨를 두들겼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성훈을 지나 숙소를 향했다. 그를 의식하는 것처럼, 아닌 것처럼.
“……지들끼리 알아서 좀 하든가. 그리고 이럴 거면 왜 불렀대?”
애들도 아니고. 주애는 중얼대는 것처럼 한마디를 덧붙였다.
쯧. 혀를 한 번 세게 차며 가던 길을 쳐다봤다. 시선 끝에 걸렸던 성훈을 무시하고 다시 앞의 길을 향했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방금 그건 분명, 그에게 한 대답이 아니었다.
“친구는 얼어 죽을.”
들리지 않을 소리로 중얼댄 그녀가 앞에 있던 돌멩이를 세차게 발로 차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발길질 탓에 그녀의 발은 엉뚱하게 바닥을 내리꽂았다.
“윽……!”
아프다고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주저앉은 그녀를 성훈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심 좀 하지……’라는 작은 소리는 멀리서 들려온 파도 소리에 묻혔다. 그는 그녀를 따라 앉아 시선을 마주한다든가, 아니면 그녀의 발을 살펴보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떨어진 채, 그 자리에 서 있는 그대로 물었다.
“발 안 깨졌냐?”
“몰라, 그냥. 좀 까졌어.”
“멍청하긴.”
주애가 고개를 휙 들어 올려 그를 노려봐도, 성훈은 주위를 두리번댈 뿐 그녀의 시선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런 시선엔 이미 익숙하다는 듯이.
“야, 저기 약국 있다. 알아서 걸을 수는 있지? 난 카페나 가서 시간 죽칠 테니까 넌 알아서 해라. 그렇다고 어디 위험한 데 돌아다니다가 길 잃어버리진 말고.”
한마디만 남겨 놓고 쌩하니 뒤를 도는 성훈의 모습에, 주애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야, 김성훈!”
그녀의 목소리가 밤길 위로 쩌렁쩌렁 울렸다. 온 동네 사람들이 주목할 것 같은 목소리를 탓하며, 성훈의 발길을 세웠다.
“왜?”
“나 돈 없어!”
“아오, 저게 진짜!”
얼마 가지 못한 발걸음이 다시 돌아왔다. 발을 톡톡 털고 일어난 주애가 다시 그의 앞에 마주했다.
“……야.”
그녀가 그를 불렀다. 하지만 못 들은 척. 그는 대답을 않고 걷기 시작했다. 여자도 그를 따라 걸었다. 남자는 여자를 부축할 생각을 않고, 여자도 남자에게 부축 받을 생각을 않았다. 그저 발을 대충 끌며, 약국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 불빛으로 향했다. 한 걸음 앞에선 성훈이, 한 걸음 뒤에선 주애가 걸었다.
“야.”
다시 한 번 그녀가 그의 등을 툭 치며 불렀다. 결국엔 무시를 하지 못한 그는 인상을 구기고서 그녀를 돌아봤다. 까만 어둠 속에 그녀의 얼굴이 그의 시야로 들어왔다.
“왜?”
그러나 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이나 먹으러 가자.”
“……너랑 나 둘이서?”
“우리 말고 누가 있어.”
“돈 없다며.”
“숙소 가서 줄게.”
“……돈만 낸다면야.”
아무 문제도 없는 척, 아무 고민도 없는 척. 그는 그렇게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소꿉친구였다. 정말 꼬박 만 25년 동안을 알고 지낸, 제 머리도 똑바로 가누지 못할 때부터 같이 누워 있던 그런 친구였다. 당연히 둘에겐 첫 만남의 기억 따위는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던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인생에 당연한 것처럼 존재하던 사람이었다.
주애와 성훈의 위로 있는 여자 형제들도 동갑내기였고, 둘의 집은 같은 아파트 같은 층의 앞집이었다. 그런 인연을 시작으로, 두 사람의 부모는 그들의 태어나기도 전에 친하게 지냈었다. 그리고 양쪽 모두 비슷한 시기에 둘째 계획을 세웠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게 부모들의 설명이었다.
그렇게 성훈이 겨울에 태어났고, 같은 해 봄에는 주애가 태어났다. 앞집 이웃사촌으로서, 또래 아이의 어머니로서 이미 친해질 대로 친해진 두 어머니는 항상 아이들 넷이서 놀게 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지내게 돼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아이들도 그걸 싫어하진 않았다. 물론 유치원에 다니던 시기엔 주애와 성훈을 보고 알나리깔나리 놀리던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나타날 때면 가끔은 마주하길 꺼리는 기색을 보였으나, 막상 또 놀기 시작하면 곧잘 사이좋게 놀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