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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초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들어갔고, 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그 덕에 언제나 통학은 함께였다. 딱히 같은 반이 자주 됐다던가 하는 건 아니지만, 학원만큼은 언제나 같은 학원의 같은 반이었다. 둘의 성적이 고만고만했고, 두 어머니들의 교육에 대한 정보도 별반 다를 게 없었으니, 이런 상황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둘의 사이가 유달리 친한 건 아니었다. 그야말로 ‘적당히’ 친한 사이. 하교를 하거나 밖에서 놀다가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집에 가는 걸 일부러 기다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서로가 다른 친구들과 놀 때 무리해서 같이 놀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덕분인지 친구들도 둘을 평범한 친구 사이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사춘기 즈음엔 짓궂게 구는 학생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성 친구와 말만 걸어도 놀려대는, 어디에나 한두 명씩은 꼭 있는 그런 친구들 말이다. 다만 주애는 단칼에 그런 이들을 머저리 취급해 버렸고 성훈은 그런 시선에 별로 관심도 없었기에, 두 사람이 딱히 어색해지진 않았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놀리는 상대는 꼭 주애와 성훈만이 아니었고, 놀리는 내용은 그다지 사실도 아니었기에 상관하지 않았다.
이런 둘 사이에 조금은 삐걱댈 만한 만한 일이 있었냐하면 그건 아마 고등학교 3학년 때일 것이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로 진로 희망을 했던 탓에 약간의 트러블이 생길 뻔했었다. 본인들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구태여 같은 곳을 써서 학교 내의 사람들끼리 경쟁할 이유가 있느냐는 학교 측의 중재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 다 고집이 셌기 때문에 양보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양쪽 모두 합격했으므로, 사이가 나빠지는 일은 결국엔 없었다.
이들에 대해 친구들이 말하기로는 둘 사이엔 언제나 미묘한 거리가 있다고 했다. 둘이 친하지 않냐 하면 물론 그건 아니었지만, 가장 친한 친구를 물으면 언제나 다른 사람을 대답했다. 베프라고 불러도 이상치 않을 만큼 둘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자주 만났지만, 정작 둘에게 가장 친한 사람은 아니었다.
“친하긴 하지만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게 주변 이들의 말이었다. 그리고 주애와 성훈 모두 그런 말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태도가, ‘남녀 사이에 친구는 존재한다. 김성훈과 한주애를 보면 알 수 있다.’라는 논리가 전파되는 이유였다.
* * *
주애와 성훈은 서로의 잔을 의무적인 태도로 채워 주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씩, 상대가 자신의 잔을 스스로 채우고 있는 걸 발견하면 그거대로 내버려 두었다. 각자 TV 혹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했고, 가끔은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간간히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침묵이라는 녀석은 간간히 가게의 소음 사이를 비집고서라도 끼어 들어왔다.
어느새 테이블엔 이미 빈 병이 잔뜩 쌓여 있었고, 주애의 얼굴은 조금 불그스름해졌다. 성훈은 이번 병만 비우면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 중이었다.
“……저게 친구라니. 참나. 어이가 없어서.”
두 사람의 대화가 다시 한 번 끊겼을 때. 대뜸 주애의 입에서 그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작은 비웃음과 함께 술잔 속 액체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왜? 남녀 사이 친구의 귀감이라잖냐.”
“됐다 그래. 남녀 사이의 친구 같은 소리 하네.”
“너도 남녀 사이에 영원한 친구는 없다는 쪽이냐?”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가 물었다.
“아니. 딱히.”
“그럼?”
“너랑 내가 그 예시는 아니란 거지.”
그는 주애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턱을 괸 채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시선을 거두고 그의 술잔을 비웠다.
어색했다. 마지막으로 단둘이 술을 마셨던 것도 5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단둘이 나란히 마주 보고 앉은 것도 너무 오랜만인 기분이었다. 그리고 애당초에 그녀와는 길게 나눌 수 있는 대화 주제가 없었다. 어느새 그의 손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주애가 양팔을 베개 삼아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커다란 한숨을 푹 내쉬다가 시선만 들어 올렸다.
“야, 김성훈.”
“…….”
“야아, 김성후운!”
“아, 왜.”
“개자식…….”
“여자애가 입 그렇게 험하면 시집 못 간다니까.”
“그거 성차별 발언이야, 나쁜 놈아. 그리고 나이가 몇인데 벌써부터 시집타령이야. 우리 엄마도 나한테 시집가란 소리는 안 해, 이 망할 놈아.”
“너도 입 험한 사람은 인간적으로도 매력 없다며.”
“뭐, 그건 괜찮아. 그래도 나 좋다는 남자 많으니까.”
인터넷 기사를 보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미간을 구긴 채 잠시 주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표정을 풀고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태연하게 한마디.
“아, 그 양다리 전 남친?”
그 말에 울컥한 주애가 자세를 바로 했다.
“닥쳐. 그 쓰레기랑은 사귄 적도 없으니까.”
“없는 거로 한다고 그게 어디 되더이까.”
한숨 섞인 목소리가 그녀를 비꼬았다. 주애는 그런 성훈을 빤히 쳐다볼 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눈짓으로 왜 그러냐고 묻자, 잠시 멈칫한 주애는 이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돼. 내가 된다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 쓰레기는 없는 과거야.”
그녀는 포크로 어묵을 하나 찍어 그녀의 앞 접시로 가져왔다. 그러나 먹을 생각은 않고, 포크로 계속해서 어묵을 쑤시기만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던 성훈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나는?”
“뭐?”
“그럼 나도 없는 과건가?”
“…….”
주애는 대답을 않고 앞에 있는 어묵을 입속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더 이상 성훈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성훈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시선을 거뒀다. 아무런 질문도, 대화도 없었던 것처럼. 둘은 각자 자신의 잔에 술잔을 채웠다.
남녀 사이에 정말 친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건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그들이 아는 선에선, 남녀 사이에 친구란 분명 있을 수 있는 존재였다. 남자 사람 친구라면, 혹은 여자 사람 친구라면. 눈앞의 김성훈, 혹은 한주애 외에도 있었으니까.
다만 여자 한주애와 남자 김성훈은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남녀 사이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대표적인 예시’가 아니었다. 행복한 부부를 연기하는 사람들을 쇼윈도 부부라고 부른다면, 이들은 아마 ‘쇼윈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친구인 척을 하는, 그러나 두 사람 중 누구도 상대가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렇다. 이들은 친구가 아니었다. 남녀 사이의 영원한 우정의 상징이자 완벽한 소꿉친구인 그들의, 남들에겐 죽어도 말 못할 비밀. 그건 바로 ‘전 남자 친구, 전 여자 친구’가 그들의 사이를 지칭하는 더 옳은 표현이라는 사실이었다.
“일어나자.”
성훈이 계산서를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어쩐지 주애가 일어날 생각을 않았다. 그냥 가만히 성훈을 말없이 쳐다볼 뿐이었다. 성훈이 그제야 깔려 있는 소주병의 수를 세어 봤다.
“하아…….”
그의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세어 나왔다. 다섯 병. 둘이서 비슷한 속도로 마셔 댔으니, 여기서만 거의 두 병 반을 마신 셈이었다. 아까 나오기 전에 마시던 소주 한 병을 포함하면 거의 세 병하고도 반을 더 마셨을 터. 주애의 주량인 두 병은 넘긴지가 오래였다.
멍청한 한주애. 남자랑 단둘이 마시면서 경계심도 없이 퍼마시다니. 내가 이제 자기한테 관심 없다 이건가? 그래도 남잔데. 분명 남자랑은 단둘이 마시지도 않고, 남자들이랑 같이 마실 땐 절대 취할 때까진 안 마셨던 것 같은데. 얘가 언제 이렇게 주당이 됐지?
오만 생각을 다 하고 있는 중에도, 주애는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마셨는지 확인도 안 하고 내버려 둔 자신이 잘못한 기분이 되었다. 이제는 어차피 남보다도 못한 사이고 분명 그의 잘못이 아닐 텐데도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었다.
“업혀.”
고민하던 성훈이 결국, 그녀에게 등을 내줬다.
“……됐어.”
하지만 주애는 단칼에 거절했다. 대신 마지막 병에 조금 남아 있던 소주를 잔에 채웠다. 성훈이 그걸 막으려 했지만, 주애는 주저 없이 비워 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성훈이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긴 한숨을 내뱉은 주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씩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아슬아슬했지만, 그래도 나름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혹시 술이 세졌나?
“야, 김성훈.”
가게 문을 붙잡으려던 그녀가, 뒤를 돌아 그를 불렀다.
“왜?”
여전히 그 자리에 있던 그가 대답했다.
“……계산해라.”
* * *
그녀가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성훈이 군대를 갔다가 복학한 직후.
“주애야, 나 성훈이 좀 소개시켜 줘.”
동아리 친구가, 주애와 성훈이 소꿉친구라는 이야기를 듣고 했던 부탁이었다.
“걘 안 돼.”
“왜?”
“……애가 영 별로야.”
그게 끝이었다.
혹시 둘이 사귀는 사이라서 거절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잠시 나돌았지만, 당시에 주애는 한 학번 위의 선배와 잘 되어 가던 중이었기 때문에 이 소문은 금방 사그라졌다. 그냥 소꿉친구다보니 단점을 너무 잘 알아서 그런 거 아니겠느냐는 이야기에 모두가 납득을 했었다.
* * *
바닷바람이 불었다. 주애와 성훈은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습한 바람이 자꾸만 바다 냄새를 이끌고 왔다. 바람이 피부에 달라붙는 것처럼, 어느 때보다도 끈적이는 것 같았다.
“야.”
성훈이 주애를 불렀다.
“왜?”
“너 술 좀 세졌나 보다?”
“그닥…….”
희미하게 웃던 주애가 기지개를 켰다. 걸음이 잠시 휘청거리는 듯했지만 금방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나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았다.
“김성훈.”
“…….”
“김성후운.”
“왜?”
“업어 줘.”
방긋거리며 웃는 그녀가, 주저앉은 채로 양손을 그에게 쭉 뻗었다.
멀쩡한 거 같더니. 결국 취했구만, 저거.
“됐다며?”
“아까는. 근데 이젠 걷기 싫어. 취하나 봐.”
어리광과 아무에게나 방긋거리는 것. 주애의 주사였다. 그리고 이토록 심한 주사는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마셨을 때만 가끔 부렸다.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보기 싫어도 계속해서 그녀를 봐 와야 했으니까.
결국 성훈은 등을 내어 주었다. 그의 등에 매달린 그녀가, 그의 목을 꼭 감쌌다.
“너 살쪘냐. 옛날보다 무겁다?”
“야, 그런 건 얘기하는 게 아니거든? 이 섬세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아.”
뾰족뾰족 가시가 박힌 목소리. 그러나 성훈은 웃었다.
알싸한 술 냄새와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제멋대로 섞여들었다. 술 때문에 올라오는 열기도. 옷 위에서, 피부 위에서 제 멋대로 섞여들었다.
“웃지 마. 하여튼 옛날부터 변하질 않아.”
“내가?”
“그래, 너. 김성훈 이 나쁜 놈아.”
조잘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성훈은 듣고 있었다. 그간 대화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마치 5년 만에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오랫만에 보는 그녀의 취한 모습이, 어쩐지 그리웠던 것 같다고. 아주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한주애.”
“왜, 나쁜 놈.”
“내가 왜 나쁜 놈이냐?”
과거에 술을 많이 마신 주애는 언제나 그에게 솔직했다. 그리고 많이 마신 다음날은 필름이 끊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물었다. 어쩐지 지금이라면 이 분위기에 조금 기대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초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들어갔고, 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그 덕에 언제나 통학은 함께였다. 딱히 같은 반이 자주 됐다던가 하는 건 아니지만, 학원만큼은 언제나 같은 학원의 같은 반이었다. 둘의 성적이 고만고만했고, 두 어머니들의 교육에 대한 정보도 별반 다를 게 없었으니, 이런 상황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둘의 사이가 유달리 친한 건 아니었다. 그야말로 ‘적당히’ 친한 사이. 하교를 하거나 밖에서 놀다가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집에 가는 걸 일부러 기다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서로가 다른 친구들과 놀 때 무리해서 같이 놀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덕분인지 친구들도 둘을 평범한 친구 사이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사춘기 즈음엔 짓궂게 구는 학생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성 친구와 말만 걸어도 놀려대는, 어디에나 한두 명씩은 꼭 있는 그런 친구들 말이다. 다만 주애는 단칼에 그런 이들을 머저리 취급해 버렸고 성훈은 그런 시선에 별로 관심도 없었기에, 두 사람이 딱히 어색해지진 않았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놀리는 상대는 꼭 주애와 성훈만이 아니었고, 놀리는 내용은 그다지 사실도 아니었기에 상관하지 않았다.
이런 둘 사이에 조금은 삐걱댈 만한 만한 일이 있었냐하면 그건 아마 고등학교 3학년 때일 것이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로 진로 희망을 했던 탓에 약간의 트러블이 생길 뻔했었다. 본인들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구태여 같은 곳을 써서 학교 내의 사람들끼리 경쟁할 이유가 있느냐는 학교 측의 중재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 다 고집이 셌기 때문에 양보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양쪽 모두 합격했으므로, 사이가 나빠지는 일은 결국엔 없었다.
이들에 대해 친구들이 말하기로는 둘 사이엔 언제나 미묘한 거리가 있다고 했다. 둘이 친하지 않냐 하면 물론 그건 아니었지만, 가장 친한 친구를 물으면 언제나 다른 사람을 대답했다. 베프라고 불러도 이상치 않을 만큼 둘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자주 만났지만, 정작 둘에게 가장 친한 사람은 아니었다.
“친하긴 하지만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게 주변 이들의 말이었다. 그리고 주애와 성훈 모두 그런 말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태도가, ‘남녀 사이에 친구는 존재한다. 김성훈과 한주애를 보면 알 수 있다.’라는 논리가 전파되는 이유였다.
주애와 성훈은 서로의 잔을 의무적인 태도로 채워 주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씩, 상대가 자신의 잔을 스스로 채우고 있는 걸 발견하면 그거대로 내버려 두었다. 각자 TV 혹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했고, 가끔은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간간히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침묵이라는 녀석은 간간히 가게의 소음 사이를 비집고서라도 끼어 들어왔다.
어느새 테이블엔 이미 빈 병이 잔뜩 쌓여 있었고, 주애의 얼굴은 조금 불그스름해졌다. 성훈은 이번 병만 비우면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 중이었다.
“……저게 친구라니. 참나. 어이가 없어서.”
두 사람의 대화가 다시 한 번 끊겼을 때. 대뜸 주애의 입에서 그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작은 비웃음과 함께 술잔 속 액체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왜? 남녀 사이 친구의 귀감이라잖냐.”
“됐다 그래. 남녀 사이의 친구 같은 소리 하네.”
“너도 남녀 사이에 영원한 친구는 없다는 쪽이냐?”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가 물었다.
“아니. 딱히.”
“그럼?”
“너랑 내가 그 예시는 아니란 거지.”
그는 주애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턱을 괸 채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시선을 거두고 그의 술잔을 비웠다.
어색했다. 마지막으로 단둘이 술을 마셨던 것도 5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단둘이 나란히 마주 보고 앉은 것도 너무 오랜만인 기분이었다. 그리고 애당초에 그녀와는 길게 나눌 수 있는 대화 주제가 없었다. 어느새 그의 손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주애가 양팔을 베개 삼아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커다란 한숨을 푹 내쉬다가 시선만 들어 올렸다.
“야, 김성훈.”
“…….”
“야아, 김성후운!”
“아, 왜.”
“개자식…….”
“여자애가 입 그렇게 험하면 시집 못 간다니까.”
“그거 성차별 발언이야, 나쁜 놈아. 그리고 나이가 몇인데 벌써부터 시집타령이야. 우리 엄마도 나한테 시집가란 소리는 안 해, 이 망할 놈아.”
“너도 입 험한 사람은 인간적으로도 매력 없다며.”
“뭐, 그건 괜찮아. 그래도 나 좋다는 남자 많으니까.”
인터넷 기사를 보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미간을 구긴 채 잠시 주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표정을 풀고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태연하게 한마디.
“아, 그 양다리 전 남친?”
그 말에 울컥한 주애가 자세를 바로 했다.
“닥쳐. 그 쓰레기랑은 사귄 적도 없으니까.”
“없는 거로 한다고 그게 어디 되더이까.”
한숨 섞인 목소리가 그녀를 비꼬았다. 주애는 그런 성훈을 빤히 쳐다볼 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눈짓으로 왜 그러냐고 묻자, 잠시 멈칫한 주애는 이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돼. 내가 된다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 쓰레기는 없는 과거야.”
그녀는 포크로 어묵을 하나 찍어 그녀의 앞 접시로 가져왔다. 그러나 먹을 생각은 않고, 포크로 계속해서 어묵을 쑤시기만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던 성훈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나는?”
“뭐?”
“그럼 나도 없는 과건가?”
“…….”
주애는 대답을 않고 앞에 있는 어묵을 입속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더 이상 성훈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성훈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시선을 거뒀다. 아무런 질문도, 대화도 없었던 것처럼. 둘은 각자 자신의 잔에 술잔을 채웠다.
남녀 사이에 정말 친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건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그들이 아는 선에선, 남녀 사이에 친구란 분명 있을 수 있는 존재였다. 남자 사람 친구라면, 혹은 여자 사람 친구라면. 눈앞의 김성훈, 혹은 한주애 외에도 있었으니까.
다만 여자 한주애와 남자 김성훈은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남녀 사이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대표적인 예시’가 아니었다. 행복한 부부를 연기하는 사람들을 쇼윈도 부부라고 부른다면, 이들은 아마 ‘쇼윈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친구인 척을 하는, 그러나 두 사람 중 누구도 상대가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렇다. 이들은 친구가 아니었다. 남녀 사이의 영원한 우정의 상징이자 완벽한 소꿉친구인 그들의, 남들에겐 죽어도 말 못할 비밀. 그건 바로 ‘전 남자 친구, 전 여자 친구’가 그들의 사이를 지칭하는 더 옳은 표현이라는 사실이었다.
“일어나자.”
성훈이 계산서를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어쩐지 주애가 일어날 생각을 않았다. 그냥 가만히 성훈을 말없이 쳐다볼 뿐이었다. 성훈이 그제야 깔려 있는 소주병의 수를 세어 봤다.
“하아…….”
그의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세어 나왔다. 다섯 병. 둘이서 비슷한 속도로 마셔 댔으니, 여기서만 거의 두 병 반을 마신 셈이었다. 아까 나오기 전에 마시던 소주 한 병을 포함하면 거의 세 병하고도 반을 더 마셨을 터. 주애의 주량인 두 병은 넘긴지가 오래였다.
멍청한 한주애. 남자랑 단둘이 마시면서 경계심도 없이 퍼마시다니. 내가 이제 자기한테 관심 없다 이건가? 그래도 남잔데. 분명 남자랑은 단둘이 마시지도 않고, 남자들이랑 같이 마실 땐 절대 취할 때까진 안 마셨던 것 같은데. 얘가 언제 이렇게 주당이 됐지?
오만 생각을 다 하고 있는 중에도, 주애는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마셨는지 확인도 안 하고 내버려 둔 자신이 잘못한 기분이 되었다. 이제는 어차피 남보다도 못한 사이고 분명 그의 잘못이 아닐 텐데도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었다.
“업혀.”
고민하던 성훈이 결국, 그녀에게 등을 내줬다.
“……됐어.”
하지만 주애는 단칼에 거절했다. 대신 마지막 병에 조금 남아 있던 소주를 잔에 채웠다. 성훈이 그걸 막으려 했지만, 주애는 주저 없이 비워 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성훈이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긴 한숨을 내뱉은 주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씩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아슬아슬했지만, 그래도 나름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혹시 술이 세졌나?
“야, 김성훈.”
가게 문을 붙잡으려던 그녀가, 뒤를 돌아 그를 불렀다.
“왜?”
여전히 그 자리에 있던 그가 대답했다.
“……계산해라.”
그녀가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성훈이 군대를 갔다가 복학한 직후.
“주애야, 나 성훈이 좀 소개시켜 줘.”
동아리 친구가, 주애와 성훈이 소꿉친구라는 이야기를 듣고 했던 부탁이었다.
“걘 안 돼.”
“왜?”
“……애가 영 별로야.”
그게 끝이었다.
혹시 둘이 사귀는 사이라서 거절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잠시 나돌았지만, 당시에 주애는 한 학번 위의 선배와 잘 되어 가던 중이었기 때문에 이 소문은 금방 사그라졌다. 그냥 소꿉친구다보니 단점을 너무 잘 알아서 그런 거 아니겠느냐는 이야기에 모두가 납득을 했었다.
바닷바람이 불었다. 주애와 성훈은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습한 바람이 자꾸만 바다 냄새를 이끌고 왔다. 바람이 피부에 달라붙는 것처럼, 어느 때보다도 끈적이는 것 같았다.
“야.”
성훈이 주애를 불렀다.
“왜?”
“너 술 좀 세졌나 보다?”
“그닥…….”
희미하게 웃던 주애가 기지개를 켰다. 걸음이 잠시 휘청거리는 듯했지만 금방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나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았다.
“김성훈.”
“…….”
“김성후운.”
“왜?”
“업어 줘.”
방긋거리며 웃는 그녀가, 주저앉은 채로 양손을 그에게 쭉 뻗었다.
멀쩡한 거 같더니. 결국 취했구만, 저거.
“됐다며?”
“아까는. 근데 이젠 걷기 싫어. 취하나 봐.”
어리광과 아무에게나 방긋거리는 것. 주애의 주사였다. 그리고 이토록 심한 주사는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마셨을 때만 가끔 부렸다.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보기 싫어도 계속해서 그녀를 봐 와야 했으니까.
결국 성훈은 등을 내어 주었다. 그의 등에 매달린 그녀가, 그의 목을 꼭 감쌌다.
“너 살쪘냐. 옛날보다 무겁다?”
“야, 그런 건 얘기하는 게 아니거든? 이 섬세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아.”
뾰족뾰족 가시가 박힌 목소리. 그러나 성훈은 웃었다.
알싸한 술 냄새와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제멋대로 섞여들었다. 술 때문에 올라오는 열기도. 옷 위에서, 피부 위에서 제 멋대로 섞여들었다.
“웃지 마. 하여튼 옛날부터 변하질 않아.”
“내가?”
“그래, 너. 김성훈 이 나쁜 놈아.”
조잘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성훈은 듣고 있었다. 그간 대화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마치 5년 만에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오랫만에 보는 그녀의 취한 모습이, 어쩐지 그리웠던 것 같다고. 아주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한주애.”
“왜, 나쁜 놈.”
“내가 왜 나쁜 놈이냐?”
과거에 술을 많이 마신 주애는 언제나 그에게 솔직했다. 그리고 많이 마신 다음날은 필름이 끊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물었다. 어쩐지 지금이라면 이 분위기에 조금 기대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