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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호협 1권(4화)
제一장 사부님과의 인연(4)
난화곡주 흑표(黑彪).
올해 오십 세로 난화곡의 곡주로, 무림에선 신수명의(神手名醫)라 불렀다. 어릴 적부터 천재적인 의술을 지녀, 삼십 년이 넘게 숱한 환자를 치료한 일대 기인이다.
장학선과는 명분 없는 사도로 지냈으며, 그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기도 했다.
그는 장학선을 사부로 따랐다. 장학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사부님. 무슨 바람이 불어 영봉장에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수레에 탄 아이를 보면 알 것이 아니냐?”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무림에 소문이 안 좋게 났던데……. 사부님께서도 많이 속상하시죠?”
“속상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장학선의 제자가 된 것은 스무 살 때 일이다. 지금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서신을 통하며 배우고 있었다. 사제가 우두미종으로 소문이 단단히 퍼져 있으니, 자신에게도 망신살은 망신살이지만 연유가 있다고 여기며 무덤덤하게 넘겼다.
“모자란 것은 사실이니 소문이 나쁘게 날만도 하겠지요. 하지만 사부님께서 그냥 거두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겉은 모자라보여도 속이 꽉 차 있다면 마땅히 사부님의 수제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제자는 생각하니까요.”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구나. 아무래도 아이의 상태를 의술이 얕은 나로서는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워 너에게 데려온 것이다.”
“사제에게 병이 있었군요. 그것도 모르고 무림인들은 사제를 우두미종이라고 놀리고 있으니……. 사제가 안다면 상처가 크겠습니다. 최근 독고무흔은 무림에서 아주 크게 날리고 있습니다. 사십 명에 달하는 일류고수들를 격퇴하고, 실력을 과시하는 상황이니까요. 사제를 그의 대항마로 세우기엔 확실히 부족해 보이지만, 의외로 속이 꽉 차 있다면 가장 훌륭한 대항마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네가 그렇게 이해해 주니 고맙구나. 아무튼 이 아이의 상태를 네가 자세히 봐 줬으면 좋겠구나.”
“예, 사부님. 그러지요.”
흑표는 사부의 속을 알 수 없었지만, 짐작했다. 적어도 자기가 알고 있는 사부는 자질의 촉망함을 떠나, 속에 담긴 심성을 보고 제자를 뽑았다. 오래전 사부의 여러 제자들이 폐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볼 때 저 아이는 즉, 사제는 지금의 독고무흔에게 벌레도 안 되는 존재였다.
무림은 그를 소검신으로 올리며 향후를 전망했다. 그는 무궁무진한 승승장구를 계속했다. 정파의 각 대문파 후기지수들을 모두 격파했고, 사파의 모든 후기지수들을 격파했다. 강호에 이름깨나 있는 쟁쟁한 후학과 일류고수들을 상대로 승승장구했다.
그 반면, 사부의 수제자라고 하는 저 우두미종.
침이나 질질 흘리고 밥이나 축내고 있었다.
<4>
난화곡, 의전(醫殿).
아버지와도 같은 사부가 찾아왔고, 사람을 살리는 일은 가장 큰 선행이라 흔쾌히 받아들였다.
자신의 의술이 뛰어나니 십중팔구 사제가 무슨 병증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려고 했다.
아이는 난생처음 맡는 이상한 약 냄새에 매료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흑표의 손에 이끌렸다. 장학선은 수염을 쓸어내렸다.
“뭐가 좀 보이나?”
사부의 말에 흑표는 입맛을 다셨다.
맥을 짚어 보고, 연침으로 살살 혈을 짚었다. 입도 보고, 눈도 봤다. 아이는 그저 침만 질질 흘렸지만, 눈빛은 또렷한 것이 성질이 많이 난 모양이다. 가만가만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그는 진단을 내렸다.
“사부님. 사제는 편고증(偏枯症)과 풍의증(風懿症), 중경락(中經絡)이 있는 동풍(童風:소아 중풍)환자였습니다.”
“동풍 환자?”
“예. 무공에 대한 자질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의지력도 별로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맑고 순수해 보이는데…….”
“하하. 그건 나중에 보면 이 아이의 진정한 진가를 알게 될 것이야. 그래도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틀에 박힌 생각이 적어서 다행이구나. 지금의 모습만을 보고 판단하는 경향은 있으나, 속을 볼 줄 아니 다행이야. 너도 저 아이가 나만큼 오래 산다고 가정해 봐. 올해 열세 살이니 육십오 년을 더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더냐? 육십오 년 동안 계속 이러려고.”
“물론 그럴 겁니다. 하나 지금의 상태가 지속되면 평생 동안 이럴 가능성이 큽니다.”
의술로 냉정하게 볼 때 사제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편고, 풍의, 중경락의 동풍 환자였다.
온몸이 언제 어떻게 마비되어, 잘못될지 모르는 위중한 상황이다. 의술을 익힌 사람으로서 또한, 사형으로서 보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아이의 병증이 동풍이란 말인가?”
“확실합니다. 볼 것도 없이 동풍입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심히 난산하면 그때 동풍이 듭니다. 아주 심해 골수에 파고들면 목숨을 잃죠. 산모도 산후에 조리를 잘못하여 산후 열풍이 들면 목숨을 잃는 것 같이요. 아이를 낳다가 죽는 산모는 대부분 그런 이유입니다. 혹은 산모가 아이를 학대하거나, 무리해서 잘못 낳으면 풍을 맞아 고생하게 마련입니다. 사제는 태어나면서 동풍이 들어 지금까지 정상이 아닌 백치나 다름이 없는 것이지요.”
“그랬었군. 나도 몰랐던 사실이었구나. 이 아이에게 그런 심각한 병증이 있었다니 말이야. 의심은 좀 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치료는 가능한가?”
“음…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그래, 솔직히 말해 봐.”
“있긴 합니다. 빠른 방법과 늦은 방법이 있죠.”
“빠른 방법과 늦은 방법, 그게 무엇이냐?”
“빠른 방법은 볼 것도 없이 천년설삼, 천년귀룡담, 백년웅담, 영단보희 등의 영약을 달여서 일 년 동안 계속 복용하면 됩니다. 그럼 환골탈태(換骨奪胎)할 수 있습니다. 독고무흔보다 더 고수가 될 수도 있고요.”
“빠른 방법은 너무 기연에 의존해야 하는 구나. 네가 말한 그 네 가지 약을 한꺼번에 다 구하는 것은 아무리 기연이 많은 무림이라도 녹록하진 않을 것이야. 더욱이 일 년 동안이나 계속 복용하게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운 일이고.”
“잘 보셨습니다. 빠른 방법은 사제가 천운의 기연이 네 번이나 중첩되지 않는 한, 결코 불가능할 것입니다. 더욱이 사제가 십삼 년을 동풍을 앓아 와 몸 안의 원기가 말랐기에 그 네 가지 약을 한꺼번에 한 번 먹는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을 것입니다. 일 년 동안 장복해야 환골탈태의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면 차라리 평범한 자 수십 명을 환골탈태시키는 것이 나을 겁니다.”
“그래. 그건 네 말이 맞구나. 그것은 전혀 현실성이 없구나. 늦은 방법으로 말해 보거라.”
“무공을 익혀 막힌 혈도, 즉, 경혈을 하나씩 뚫으면 차츰 좋아질 겁니다. 화타의 의서를 보면 동풍 환자를 십여 년에 걸쳐 치료한 결과, 보통의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이 회복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제는 무공이나 의술이 높은 고인이 십여 년을 돌보며 치료해 주고, 무학을 닦을 수 있도록 하면 평범한 사람은 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그런 평범한 자질로는 독고무흔의 적수가 결코 못된다는 사실입니다만… 죄송합니다. 사실, 현재의 상황으로서는 전망이 별로 없다 보니 제자가 실수했습니다.”
“나도 거기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단다. 사실이 그러하니까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좋겠지. 아무튼 늦은 방법으로라도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어야겠군.”
“평범한 사람으로 거듭나서 열심히 노력하면 의외의 성취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늦은 방법은 무려 십여 년의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흑표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의술은 강호에서 가장 뛰어나고 민가에서도 이름이 높았기 때문이다.
네 번의 기연을 한꺼번에 만나고, 또 그 수량도 일 년은 계속 복용할 수 있을 만큼 많아야 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렇구나.”
“무엇보다 지금 사제는 너무 뚱뚱해서 운신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게 지속되면 사지불수. 즉, 온몸이 마혈이 찍힌 것처럼 마비되고 말 것입니다.”
“나도 그것이 걱정이 되던 차였다. 방법이 없겠느냐?”
“경혈침법(經穴針法)을 써야 합니다. 사제는 갈수록 마혈이 찍힌 것처럼 몸이 마비되니, 통증을 느끼고 몸을 비트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풍의증은 정신을 잃고 혼미해지며 침을 질질 흘리게 만들지요. 입은 벌어지고 눈의 동공이 풀립니다. 정신도 오락가락하고요.”
“결국 이 아이의 정신이상은 거기서 온 것이군.”
“사제는 독고무흔이란 고수보다 더 무서운 동풍과 씨름을 해야 합니다. 동풍은 치료를 잘못하면 열다섯 살 이전에 거의가 다 죽습니다. 골수에까지 들진 않았지만 앞으로 이 정도면 이 년 안에 세상을 뜨고 말 겁니다.”
“의외로 심각했었군.”
“게다가 독고무흔에게 수십 번이나 두들겨 맞아서 몸이 엉망진창이 됐어요. 눈빛은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의지는 생긴 것 같은데…….”
“치료해 줄 수는 있겠느냐?”
흑표는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삼십 년이 넘도록 숱한 환자를 봐 왔지만 이토록 지독한 동풍 환자는 처음이다. 다 늙어 중풍을 앓고 있는 환자와 똑같았다.
사제는 적과 싸우기 전에 병과 싸워야 하는 신세였다.
그에게는 신수명의의 별호가 붙어 있으니 마땅히 살려야 했다. 완치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는 회복시켜야 의술을 익힌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사부님의 명이시니 당연히 치료해야죠!”
“그래. 내 그래서 널 찾아온 것이다. 내가 의술에 박식하지 않아 아이가 어느 정도의 상태인지 가늠을 못했거든.”
흑표는 경혈침법을 시행했다.
십이 경락(十二經絡)의 좌우 이십사 경락, 임맥(任脈)과 독맥(督脈) 오십이 경혈, 그 외 기경팔맥(奇經八脈) 오십구 개 혈 좌우 일백십팔 개 혈, 한측 네 개 혈 일백이십이 개 경혈, 경외 기혈 천오백여 혈에 침술을 펼쳤다. 제기법(提氣法)에 의한 사법(瀉法)으로 선용육수(先用六數)의 경락을 땄다. 침을 놓고 엄지손가락을 좌측으로 여섯 번 돌리며 마혈을 풀어 주는 것이다.
금침, 은침, 연침, 실침, 대침, 소침, 중침, 좌침, 안침, 화침의 열 가지의 침구를 사용했다.
몸에 쌓인 탁하고, 검붉은 피가 많이 나오자 천골과 작약을 갈아 만든 고약으로 지혈했다. 아이는 몸이 시원해지고 편안해지자 곧 잠에 빠져들었다.
치료는 하루, 이틀, 사흘… 계속됐다. 침과 뜸은 물론 약재도 함께 사용했다. 소도(小刀)를 항문을 통해 넣어, 쌓여 있던 숙변을 끄집어 냈다. 냄새가 말도 못하게 고약했다. 활동은 못하면서, 과한 육식을 즐긴 탓이다. 일주일 동안 대수술 하느라 흑표는 참으로 많이 지쳤다. 이런 동풍 환자를 감당하기는 일생일대 처음이기도 했다.
“사부님도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런 아이를 수제자로 거두시다니. 이 아이가 정말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적지 않게 힘들 것 같습니다.
“많이 힘들기는 하지.”
“제가 수시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장학선은 흑표의 이런 마음에 탄복했다. 무공보단 의학을 더 좋아했지만, 인명을 중히 여겼다. 그래서 데려온 것이다.
단청보는 이 대수술로 많이 좋아졌다. 흑표는 대수술을 통해 이토록 불쌍한 아이일 줄은 몰랐었다.
“이 아이가 참으로 불쌍합니다.”
“그래, 참으로 불쌍하지.”
“병이 일어난 원인을 보면, 산모가 아이를 적지 않게 학대했던 것 같은데…….”
“아이가 듣겠구나. 그 일은 나중에 천천히 말해 줘야겠지.”
“아무튼 사제의 심맥은 어느 정도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사향, 우황, 백하수오 칠 전, 적하수오 삼 전, 오가피 삼 전, 천마 이 전 반, 원지, 백복신, 석창포, 구기자, 당귀, 천궁, 진범, 대파극, 거심(去心) 각 일 전 반, 강활, 백강잠, 우담남성, 위령선, 원방풍 각 일 전으로 보해탕을 만들어 먹이십시오. 동시에 체력을 회복시키고 끊임없이 운동을 시켜야 할 겁니다. 약재는 사람을 통해 계속 보내드리겠습니다. 우황청심환(牛黃淸心丸)은 필수이니 함께 챙겨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집니다. 남은 것은 사부님의 노력과 사제의 의지력입니다.”
“길은 그뿐이구나.”
장학선은 실망하지 않았다.
제자인 흑표의 의술은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희망이 생겼다. 아이도 싸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의지가 생겼다.
난화곡을 나왔다.
흑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아주 중한 동풍 환자를 수술하면서, 자기도 적지 않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속으로 단청보가 회복하길 바랐다. 자기가 치료해 준 사람이 회복하는 것은 의원으로서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장학선도 그것을 느끼며 뿌듯했다.
사부의 깊은 뜻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과연 일세의 고인은 고인이다.
영봉장.
아이는 꿈결 속에서 헤맸다. 그저 좋은 곳을 다녀온 표정이다. 아이가 눈을 떴다. 초롱초롱 빛이 나는 눈빛이다.
“사우배우”
“싸움을 배우겠다고?”
“네.”
아이의 발음이 아주 좋아지진 않았어도, 제법 좋아졌다.
대수술의 효과가 있었는지 주변 상황을 어느 정도 인식했다.
장학선은 우황청심환과 보해탕을 먹였다. 아이는 스스로의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우둑우둑.’
뒤틀린 뼈마디와 뭉쳐 있는 근육을 풀고, 혈도를 내공으로 뚫었다. 체내에 들어 있는 아주 나쁜 피가 쏟아졌다. 머리가 맑아지게 하려고 머리의 경락에 연음지력(演陰指力)으로 지압을 놓았다.
아이는 시원한지 싱글벙글 웃었다. 장학선도 기분이 좋아졌다.
“우우우.”
“녀석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네.”
“너는 여느 사람보다 많이 모자라다. 네가 그 녀석을 이기려면 날 따라야 한다. 할 수 있겠니?”
“네.”
아이는 독고무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눈에서 불이 났다. 표정도 비장해졌다. 절대로 그냥은 맞고 살지는 않겠다는 뜻.
장학선은 제자에게 생긴 그 마음에 진심으로 뿌듯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