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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호협 1권(14화)
제四장 청보, 천목산으로 가다(1)
<1>
풍릉곡.
심한 정적이 감돌고 냉랭한 기운이 맴돌았다.
독고무흔은 심각하게 움츠러들었다. 독고검성은 이번의 일로 독고무흔에게 크게 실망했다. 순간의 분기를 참아내지 못하고 일격의 검세를 살초로 시전했다. 자질이 총명한 독고무흔이 단청보에게 고전을 한 것은 재능만 믿고 승승장구하면서 노력 정진이 부족한 탓이다.
자신의 부족한 노력 정진은 무시하고 자기보다 못했던 사람이라 여겼다가 당했으니 억울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분명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 자리에는 학선이도 있었고, 청보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한 약조도 있었으니 넘어갔다만 여기선 결코 넘어가지 않겠다. 아무리 총명해도 노력 정진이 부족하면 언젠가 그 한계를 드러내는 법이다. 네 자질과 능력은 청보를 수십 배나 압도함에도 그렇게까지 고전을 면치 못했다면 그것은 네 노력과 정진이 부족해서지, 어찌 그 아이의 탓이란 말이냐? 순간의 분기를 못 이기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니! 검은 악을 처단하고, 용서할 수 없는 악당을 물리치라고 배우는 것이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라고 배우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죄송합니다. 소자가 순간 다급하여…….”
“너에게 묻겠다. 천력혼사와 탄막현세의 중수 변화는 어찌 응용하는지 말해 보아라.”
아버지는 검식과 함께 그 두 초식을 하루에 오백 번을 반복하고, 방향을 서로 틀어가며 목표점을 강타하라고 했다.
독고무흔은 같은 초식을 그렇게 반복하며 방향을 틀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독고무흔은 독고검성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중수 변화라는 뜻은 알고 있었지만 어찌 응용되는지는 몰랐다.
“중수 변화(中數變化)는 가해지는 힘의 중심으로 방향과 곡선이 틀어지는 변화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뭐라고? 내가 언제 중수 변화의 뜻을 물었느냐! 난 중수 변화의 응용을 물었느니라.”
“…….”
“너의 재능으로 초식이나 심법의 구결은 능히 배울 수 있지만, 중수 변화는 오직 체계적이고 반복적인 수련을 통해, 응용법과 변화식을 충분히 체득해야지만 구사할 수 있다. 하루에 적어도 삼백 번씩 반복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깊이 있는 무학과 급진된 실력과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이다. 네가 청보보다 내공이 뒤떨어졌다면 넌 근골이 깨지고 죽었을 것이다. 실력의 급진전은 네가 빠르지만, 청보보다 깊이 있는 무학의 수련을 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알겠느냐? 청허 진인에게 검면과 급소를 다 드러내 패했을 때. 너는 어째서 그것을 깨우치지 못했느냐?”
“소자가 잘못하였습니다. 미천한 재능만을 믿고 너무 거만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모든 것이 소자의 잘못입니다.”
이번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의 실수가 컸으니 할 말도 없었다. 더욱이 한참이나 모자라는 놈에게 패했으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속에서는 천불이 끓었다.
‘이게 다 그 곰팡이 같은 놈 때문에 벌어졌어!’
하지만 지금은 적개심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성질을 건드리기 전에 서둘러 해결을 보는 것이 나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엔 깊이 있는 무학의 수련도 좋겠지만, 서둘러서 높은 경지에 오른 뒤에 군웅들을 제압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일이었다. 삼백 번이나 반복해서 하는 수련은 정말이지 미련한 수련법이다.
독고검성의 꾸지람이 계속 이어졌다.
“네 죄를 알았다면 벽수동으로 들어가 참회하며 하루에 삼백 번씩 검식과 장법을 반복해서 수련하라. 내가 친히 오행판을 줄 것이니 각 방향을 틀어가며 중수 변화를 충분히 터득하도록, 알겠느냐?”
“예, 아버님.”
소태 씹은 얼굴이지만 서둘러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벽수동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이처럼 화를 낸 것은 처음이었고, 얼뜨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이 더욱 분하고 원통했다. 자기가 받아야 할 영단보희를 약발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그 잡종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더욱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놈이 내 영단보희를 빼앗아 가고 날 망신시켰어!’
지금은 절제해야 했다. 어쨌든 자신의 재능으로 단청보를 간단하게 이기지 못했다면…….
실력의 진전에만 급급하여 변화정수의 깊이를 충분히 터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도 악을 쓰며, 장법을 수백 번이나 반복하고 검을 수백 번이나 휘둘렀다. 내공이 단청보보다 강했지만,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이런 무식한 수련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아버지가 볼 때만 수련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적당히 흉내만 내다가 내공을 수련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수백 번이 넘는 반복에서 대체 무엇을 깨우치고, 터득하란 말인가. 서둘러 다음 초식을 배우고 무공을 배워 성취를 보는 것이 중요했다. 독고무흔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뭐라 변명하기 힘든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무조건 숙이고 들었다.
독고검성은 장학선의 말이 떠올랐다. 보법과 경신법의 요결도 모르고, 구결도 모르는데 완벽하게 숙지하고 응용한다고 했다. 철장공도 마찬가지였다. 정녕 자신의 눈에도 상승 무공과 절세 무공을 효과적으로 숙지하고 응용하고 있었다.
그토록 형편없는 자질의 사람이 아무리 노력 정진을 한다고 해도, 그런 성취는 불가능할 것 같아 보였으나 그 불가능은 현실이다.
기연을 얻어 무신지경의 신공을 얻었다고 하는 것보다도 더욱 기가 막힐 일이다. 아무튼 그것을 접고 독고무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어쨌거나 독고무흔 저놈이 생각보다 심성이 삐뚤어지고 사악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검이란 악을 처단하여 무고한 인명을 보호하는 단호한 힘이어야 하며, 사랑과 정을 지키는 열혈의검(熱血義劍)이어야 하거늘. 이놈은 수틀리면 상황에 따라 악을 행할 놈이로다. 그 친구의 표정이 무흔이를 보자 못마땅하게 변한 것은 그것일 터.’
독고검성은 독고무흔을 벽수동에 확실하게 가두었다. 독고무흔은 다음 단계의 새로운 무공으로 진전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익힌 무공들의 변화정수를 익히느라 반복만 계속했다. 처음 몇 달은 잘못한 것이 있었으니 참고 지냈지만 그것이 계속되자 점점 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강호의 여러 일류, 절정고수들과 겨루었다. 남해파를 비롯하여 곤륜파, 화산파, 청성파, 제갈세가, 남궁세가, 사천당문 등의 후학기수들과 겨뤘다. 역시 승승장구였다. 더 이상 상대할 자가 없을 정도로 독고무흔의 무공은 강호에 정평이 났다. 백 번을 싸우면 백 번을 다 이겼다. 그럼에도 독고검성은 계속해서 무의미하게만 느껴지는 반복적인 수련만 되풀이했다.
‘젠장!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 절세무학을 전수하여 일대종사들과 겨룰 수 있는 실력자로 키워 줘야 하는 것이 양부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어째서 이런 반복적인 수련만 계속해야 한단 말인가.’
이게 다 그 사건 때문이다. 이후로 아버지는 점점 더 엄격해지고, 절세무학을 전수하기 보단 끊임없이 반복적인 수련을 시켰다.
아버지가 원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결코 한 초식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한 초식이라 할지라도 확실하게 배워야지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다음 초식을 배울 거냐면서 역정만 냈다. 정말 지겨워지려고 했다.
삼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영봉장.
단청보는 독고무흔을 고전을 면치 못하게 만드는 한풀이를 했지만, 아직까진 달라진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진 않았다, 적어도 사람들의 눈에는.
끊임없이 승전보를 울리며 강호의 일류고수들과 절정고수들이 독고무흔과의 비무를 꺼릴 정도로 승승장구하는 반면, 단청보는 너무나도 느려 터진 느림보 거북이와 같았다.
영봉장과 남해파의 제자들은 빨리빨리 삼 년이란 세월이 지났으면 했다. 마침내 삼 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태사부가 약속한 기일이 거의 다되니 하루라도 빨리 그 바보 사숙을 안 봤으면 싶었다. 물론 전보다는 달라져서 고생은 덜했지만 강호에서 오르내리는 입방아를 견디는 것은 고욕이었다.
그동안 단청보는 말과 글을 이전보다 더 많이 배웠다.
장학선은 틈틈이 연음신공의 구결과 요결을 가르쳤다. 잠영비공술의 모든 구결과 요결을 가르치고 연음신도장의 구결과 요결도 가르쳤다.
단청보는 자신이 철장공과 잠영비공술은 확실하게 터득했음을 알고 있었고, 요결과 구결, 초식의 변화정수와 요체도 다 알고 있었다. 연음신공도 삼 단계에 도달하여 절용상기의 내공을 이루고 있었다.
이 년 동안 끊임없이 하수오와 산삼을 먹었고, 만년옥침상에서 수련했다.
괴이한 진은 더욱 복잡하고, 정교하게 변화했으며 심지어는 위력도 무자비했다. 하루에도 백 번이 넘게 반복하며, 괴이한 진을 뚫었다. 지독한 맹훈련이기도 했다. 사부는 그것을 두고 극각절진(極角絶陣)이라고 했다. 이전보다 더 어렵고, 더 복잡한 곳에서 수련을 끊임없이 해야 했다.
장학선은 아직까지도 단청보를 무림에 내보내지 않았다.
우려되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삼 년 동안 병세는 많이 호전되어 말도 훨씬 잘하고 글도 어지간한 것은 다 알고, 쓸 줄 알았다.
“청보야.”
“예, 사부님. 말씀하십시오.”
“너도 이제 이만큼 자랐으니 네 사질들이 너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도 알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천하우두, 우두미종이라 소문이 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래. 그들에게 약속한 삼 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넌 이제 영봉장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전부터 말씀하셨으니 저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단청보는 이전보다 말이 훨씬 더 또렷해지고, 정신도 많이 맑아졌다.
신수명의 흑표에게 보였을 때, 놀라울 만큼이나 좋아졌다고 했다. 흑표는 단청보를 비교적 좋게 보는 편이었다. 단청보의 무공은 사실 일류고수를 넘어, 상승고수에 속했다.
문제는 꾀를 낼 줄 모르고 융통성이 부족하고 강호의 살벌한 암수와 싸운 적이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도법(刀法)을 아직까지도 가르치지 못했다. 청보도 사부님께 더 이상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난 십일 년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병을 이만큼 낫게 해 줬다.
목숨을 몇 백번을 바친다고 한들.
은혜의 백분의 일도 갚지 못할 것이다.
“미안하구나.”
“제자가 납득할 만한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밥값도 못하는 돼지라고 놀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럴 것이다. 그래도 이 사부가 하루에도 수백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같은 글을 외우라고 한 보람이 있긴 하구나. 최소한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읽고 해석할 줄 아니 말이야. 학문에서도 그만하면, 상식 이상은 다 갖춘 셈이야. 너의 진가가 발휘되면 모자라다 손가락질하는 자들은 없을 터.”
“사부님께 받은 은혜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부나 부모나 같은 것이란다. 나에게 넌 자식과도 같고 손자와도 같았어. 남들보다 늦게 성취하고, 많이 부족해 보여도 내게 넌 소중한 제자인 게야. 어디서든 그것을 잊지 않으면 되는 거란다.”
“사부님… 그럼 전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절강의 천목산(天目山) 해광림(海洸林)으로 사부와 함께 가자꾸나.”
“네?”
단청보는 갑작스런 변화에 머리만 긁었다. 사부님이 함께 가겠다고 했으니 안정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장학선은 더 늦기 전에 뭔가를 말해 줄 긴한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제 좀 온전한 정신을 가다듬고 있고, 심잠의 원기가 많이 회복됐는데…….
“이곳 영봉장에선 널 반기지 않는 사람들만 있고 내가 늙어 나중엔 분란이 일어나겠지. 앞으로 넌 혼자서 살아야 한다. 그래도 해광림에 필요한 것은 다 갖춰 놨으니 일 년만 내가 같이 있어 주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 것 같구나.”
장학선은 그날 영봉장에서 단청보를 내보낸다고 결정을 내렸다. 많은 사질들이 크게 환영했다. 지금은 비교적 좋아지긴 했지만, 특별히 달라진 것을 체감할 수 없는 그런 바보의 대명사를 사숙으로 모시며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