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도천호협 1권(17화)
제四장 청보, 천목산으로 가다(4)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이 있어.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말이야. 사람이기에 해서는 아니 되는 일도 있는 법이지. 그 일을 그렇게 묻어 둘 참인가?”
“나도 고민이라네. 하나 청보가 문제야. 그 일을 알아서 청보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이지.”
“하긴, 크게 보면 무림의 일이기도 하나 작게 보면 집안일이기도 하지. 남의 집안일에 우리가 끼어들기도 참으로 무엇하고 말일세. 청보의 실력이 진보하였음에도 자네가 무림으로 보내 활약하게 하지 않았으니 여전히 우두미종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아니겠나? 천하제일로 명성을 높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바보가 되는 것이지. 해서 탐걸에게 아는 사람이면 알아봐 달라고 했지.”
“거기서 자네가 갖고 모든 의문이 풀렸겠군.”
“그렇다네. 탐걸도 단청보를 하도 천하우두, 우두미종이라 하기에 대체 얼마나 미련하기에 그런가 하고 조사해 봤다지.”
“자네도 그 일을 알았군. 나보다 조금 더 늦게 알았을 뿐이지만 말일세. 난 청보를 난화곡으로 데리고 가서 흑표가 수술을 할 무렵, 청보를 비참한 지경 속에서 제자로 거뒀기에 무슨 일인지 사유를 정확히 알고 싶었지. 그때 탐걸을 찾아 알아봤네. 그때서야 비로소 청보가 그녀와 관계가 아주 깊다는 것을 알게 됐지.”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러쿵저러쿵 숨길 이유는 없었다. 독고검성도 그 일을 알고 나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일었고, 탐걸은 천지괴협도 알고 있는 일이라고 했다. 몰랐다면 모를까 불의를 보고도 어찌 그냥 넘길 수 있을까.
“일이 그렇다면 우리들이 나서 처단해야 옳지 않겠는가?”
“그건 안 돼. 정의를 세우는 것은 마땅한 순리지만, 모든 일에는 시기라는 것이 있네. 무조건 건드릴 수는 없어. 무림의 화합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래서 불의를 알고도 그냥 넘기자?”
“우리가 끝낸 혈겁으로 무림은 수십 년간 안정됐지. 이제는 지속적인 평화가 정착하려고 하는 시기야. 이런 시기에 무림 전체에 큰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면, 화합의 차원에서 작은 일은 덮는 것이 좋아. 요새 초살검계가 성가시게 한단 이야기는 들었네만, 아직까진 별다른 존재가 아니니 우리가 신경 쓸 필요는 없네.”
“초살검계에 대한 이야기는 나도 들었네. 하긴 뛰어난 후배들이 많으니 우리가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야 없겠지. 하긴 우리 두 사람이 천마신교를 무너뜨려 혈겁을 끝내고 사십 년이 넘게 무림은 안정되어 왔지. 정사 간에도 나와 자네가 서로 잡아주고 있으니 그런대로 좋게 지내고 말이야. 하나 후일이 걱정이야. 지금 중원무림과 새외무림이 서로 팽팽한데, 중원무림의 종사들도 거의 일흔을 바라보니…….”
“그래서 신중해야 한다는 게야. 중원무림의 종사 가운데 그녀가 유일하게 젊고, 무림의 안정을 위해 그녀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야. 큰 일이 있을 때는 작은 것은 덮어둬야겠지.”
“새외의 북설과 남림을 생각하지 못했네.”
“바로 봤으이. 악질 악인이라면 일말의 여지와 일고의 가치도 두지 않았겠지. 어차피 그 일은 나와 자네가 나설 일이 아닐세. 청보가 당사자니 청보가 알아서 해결할 일이야. 청보를 성장시키는 것은 어느 곳에서든 광명정대한 대장부가 되길 바라기 때문이니까.”
“그랬었군. 무엇이 청보를 진정으로 위하는가를 생각했었군. 자네는 정말 대단해. 그 아이의 진정한 사부이자 부모는 결국 자네가 아니겠나. 그 일은 청보와 그들 사이의 일로서 매듭을 지어야겠군.”
장학선의 말을 듣자 속이 후련했다. 단청보의 주변에 그런 큰 일이 있었으니, 그가 자각을 하든 그렇지 못하든 그 일은 그에게 던져진 첫 번째 시험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검신 독고검성은 호박으로 만든 노리개를 하나 장학선에게 줬다.
“나와 같은 의미로군.”
“그렇다네. 우리가 무림의 큰 어른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해야지 않는가.”
“고마우이. 어쨌거나 사람 사는 곳에 항상 대의청정하고, 광명정대한 사람만 있겠는가? 하나 청보를 지금 당장 무림으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나 혼자 영봉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일세.”
“무슨 뜻인지 알겠네. 청보는 그때 영단보희를 먹고 좋아졌는가?”
청보의 주변에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독고검성은 그 이야기를 꺼냈다. 장학선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처음에는 자네 말대로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변화가 없었으이.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도 더 좋아지고, 정신도 맑아지더군. 무공에는 자질이 없으니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해야 깨우치는 상황은 그대로네. 가끔씩 발작을 일으키지만, 그 횟수가 많이 줄었지. 덕분에 말문이 온전히 트여서 사서삼경은 배웠다네.”
“다행이로세. 병세도 많이 호전되고, 말문이 트여 글까지 익혔다니 영단보희의 효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어. 기회를 보아 한 알 정도는 더 줌세.”
“하하! 그러지 말게나. 그런 게 있으면 자네 양자에게 줘야지.”
장학선은 느긋하게 웃어넘겼다.
독고검성은 어쨌든 청보 주변의 매듭은 청보에게 맡기기로 하고,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무림은 혈겁을 끝내고 평화가 안착하려고 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불안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중원무림의 종사들이 팔십육 세의 고령인 자신들보다 후배라고 해도, 일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연한 평지풍파를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이제 그 문제는 됐고, 앞으로 사흘 동안 자네의 제자와 내 양자가 서로 대련을 펼치는 것이 어떤가?”
“사흘 동안 말인가?”
“그렇다네.”
“좋아. 어차피 이 일은 무림에 크게 알려질 일도 아니니, 그간 내 제자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
본론에 들어갔다. 독고검성이 아들을 데리고 온 것은 단청보가 많이 발전한 것이 분명하니, 제대로 대련을 해 볼 차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장학선도 단청보가 얼마나 우뚝 섰는지 한 번 보여 주고 싶었다.
제五장 삼일대련(三日對鍊)(1)
<1>
아버지와 천지괴협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독고무흔은 눈에서 불이 튀었다. 자기 처소에서 쉬고 있는 단청보를 볼 때마다 적개심이 일어나 참을 수 없었다. 그 일로 인해 자신은 망신을 당했고, 아버지의 신임을 잃었다. 귀한 영단보희마저 단청보의 입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번엔 제대로 밟아 주마. 그때의 치욕을 만회하리라.’
눈을 불태우며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수백 번이나 휘둘렀다. 몸에서는 매서운 예기(銳氣)가 뿜어지고, 검에서는 신랄한 바람이 일었다.
슈아아악.
허공을 매섭게 가르는 위압적인 속도로, 마치 번개가 일어나는 느낌이다.
단청보도 지켜봤다.
단청보가 자신을 쳐다보자 독고무흔은 더욱 열을 냈다. 땅바닥은 검이 그린 선으로 어지러웠다.
독고무흔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단청보도 느꼈다. 성난 파도가 바위를 삼켜 먹을 듯이 몰려오는 형상이다. 지난번 대결 때 자신을 죽이려 했었다는 것은 정신을 차린 이후에 알았다.
‘못된 성격을 가졌어.’
저런 기세라면 언젠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아 단청보는 은근히 불안했다.
독고무흔은 심통이 단단히 난 얼굴로 단청보를 노려봤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지. 바보라고 깔볼 것은 아니라는 것은 너를 보며 깨달았다. 이번 기회에 승부를 제대로 가려 보자!”
“형님, 우리 사부님과 검신 할아버지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데 우리도 사이좋게 지내요.”
“형님? 어디다 대고 형님이야!”
독고무흔의 말은 참으로 정이 떨어질 정도였다.
단청보는 독고무흔이 자기보다 일곱 살이나 많으니 형님으로 올려서 불렀다. 하지만 독고무흔은 그것을 받아들일 뜻이 없나보다. 더는 말하지 않았다.
독고무흔은 이 잡종을 확실하게 짓밟아 바보는 절대 천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장학선과 독고검성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하하! 서로 무척이나 몸이 근질근질한가 보군.”
“그러게 말일세. 나와 자네가 제자를 키워 우열을 가리자는 대결을 한 지 벌써 십일 년이 아닌가. 이번에 누가 더 실력이 뛰어난지 견식을 해도 되겠어.”
“과연.”
장학선과 독고검성은 기 싸움이 치열한 두 사람을 목도했다.
단청보는 느긋한 것 같으면서도 상대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독고무흔은 반대로 강렬한 기세로 상대를 압도하려 했다. 참으로 팽팽했다.
“자네 제자는 생각보다 노련미가 있어 보이고, 내 양자는 예리함이 강한 것 같으이.”
“그런 것 같네.”
독고검성은 검술을 연습하는 독고무흔에게, 장학선은 쉬고 있는 단청보에게 각각 갔다. 이 년 전, 서로 겨뤄 봤으니 한 번 겨루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여겼다.
“무흔아, 기다리느라 지루했겠구나. 이제 청보와 한 수 겨뤄 보도록 해라.”
“예, 아버님!”
기다려 왔던 순간이다. 오늘을 위해 하루에도 수백 번이나 검을 휘둘렀다. 반복의 훈련을 참아 온 이유이기도 했다. 전에 없던 고된 수련이었다.
장학선도 단청보에게 말했다.
“청보야, 너도 알다시피 독고무흔은 매우 예리한 기세를 가졌다. 내공은 여전히 너보다 한 수 위니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야.”
“파도와 많이 싸워 봐서 느낌은 있어요.”
“그래. 독고무흔이 너보다 내공이 좀 앞선다고 하지만, 파도와 진법을 상대로 고된 수련을 이겨 냈으니 실제로는 한 치의 차이밖에 나지 않을 터.”
서로 벌판으로 나왔다. 독고검성은 이번 기회가 독고무흔의 무공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시험할 수 있는 좋은 척도라고 여겼다. 마침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제안을 했다.
“자, 그럼 아까 이야기한 대로 삼 일 동안 자네 제자와 내 양자가 서로 대련을 해 봄세. 그렇지 않아도 내 양자가 아주 달아올랐어. 그동안 단단히도 벼르고 있었던 모양일세.”
“그런가? 그거 아주 잘되었네. 이번엔 우리의 눈도 무척이나 즐거워지겠구먼. 청보의 내공이 자네 양자보단 좀 쳐져도, 무학에 대한 깊은 수련은 내 제자가 더 나을 걸세.”
장학선은 흔쾌히 수락했다. 삼 일 동안의 대련은 단청보의 실력을 본격적으로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무림에선 여러 후기지수들과 일류, 절정고수들을 물리친 쟁쟁한 고수가 독고무흔이다. 단청보는 지금까지 수련한 모든 무예를 발휘할 절호의 기회였다.
“삼 일 동안 서로 대련을 해 보도록 해라.”
독고무흔은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사흘 동안 확실하게 짓밟아 주리란 다짐이 굳건하게 섰다. 오늘을 위해 기다렸던 시간.
스르르릉.
단청보와 독고무흔은 서로 금월도와 장검을 빼들었다. 예전엔 권법으로 자길 상대했는데 이번엔 도법으로 상대하고 있다.
“자네의 실력이 얼마나 향상됐는지 내게 가르침을 주시게.”
“형님께서도 미천한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단청보의 말은 무시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독고무흔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단청보의 기세를 완벽히 꺾기 위함이다. 처음부터 맹렬한 검초를 발휘했다.
이도격검세(荑掉擊劍勢).
독고검성은 지켜보기로 했다. 단청보도 도무기를 갖고 있으니 쉽게 당하리라 여기진 않았다.
반월이 그려지며 강한 예기가 주위를 둘렀다. 풀잎이 잘려 나갔다. 생각보다 허점이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단청보는 파도가 맹렬하게 밀려오는 것 같은 기세를 느꼈다.
챙! 챙! 챙!
금월도를 틀어 독고무흔의 이도격검세의 검초를 막았다. 매섭게 원을 그려 자기에게 몰려오고 있는 검기를 흩어 냈다. 금월도에서도 단청보의 내공을 타고 날카로운 섬광이 뿜어졌다.
독고무흔은 살초에 가깝게 전개했음에도, 단청보가 의외로 잘 막자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그의 경공술을 깨기보단, 그에게 먼저 덜미 잡히지 않기 위함이었다.
파도식(破刀式)을 펼쳤다.
탄검수법으로 몸을 띄워 단청보의 주위에서 검사(劍絲)를 펼쳐 공격했다.
단청보는 여유롭게 보법을 밟아 가며 무산시켰다. 독고무흔은 서둘러서 검으로 몸을 튕겨 위로 올라갔다. 폭포수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낙공을 전개했다. 몸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회전했다. 독고무흔은 단청보의 보법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청보도 매서운 낙공과 회전력으로 밀어붙이자 피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직감했다.
즉시 금월도를 뻗어 독고무흔의 검과 맹렬하게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