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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호협 1권(22화)
제六장 청보, 풍릉곡에 가다(3)


“얘야. 이러다가 내가 뭘하는지도 잊게 생겼다. 자중하고 저쪽으로 가 보자.”
“네!”
도리질을 치며 정신 차렸다. 단청보도 엄중한 검신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따라갔다. 독고검성은 인자한 어투로 말했다.
“청보야. 너는 가만히 있으면서 할아버지가 뭐하는지 구경만 하면 돼. 알았지?”
“알았어요.”
단청보를 잘 달래 놓은 독고검성이 앞으로 죽 나아갔다.
사람들은 웅성웅성 저마다 몽둥이, 곡괭이 들치고 큰집을 삼켜 버릴 듯이 몰려갔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너희만 등 따시고, 우린 등 차갑냐? 밀린 품삯 지급하라! 지급하라!”
“자자, 진정들 다들 하시오. 추성상단의 사정이 어려워 여러 쟁자수들에게 품삯을 지급하지 못했소. 그러니 우리의 사정도 헤아려 주시오.”
추성상단의 행수가 나와 성난 쟁자수들을 달래느라 등에 땀이 맺혔다.
그러나 쟁자수들은 쉽게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쟁자수들 중 몇이 나와 행수에게 따져 물었다.
“그것을 지금 핑계라고 하시오? 품삯이 무려 일곱 달이나 밀렸소. 우리 가족이 다 굶어 죽을 판이오. 그런데 사정이 어려워 품삯을 지급하지 못했다? 삼척동자가 길가다 웃을 것이고, 지나가는 개가 흙구덩이 팔 일이오. 그대 상단 행수는 등 따시고, 배부르게 지냈으며 저 집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 사흘이 멀게 나고 있었소. 그대들은 등 따시고, 배부르고 고기 굽는데! 우린 등 차갑고, 배곯아 죽어 버리라는 거요? 여러분!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에 있소이까! 우리의 고혈을 짜 먹어 호의호식하는 악덕 상단 물러나라, 물러나라! 악덕 객주는 밀린 품삯 지급하라! 지급하라!”
상단 행수의 변명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상단 행수는 일꾼들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보니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성난 일꾼들은 추성상단의 대문을 때려 부수고 들어갈 기세로 문 앞에서 돌을 집어 들고 농성 중이었다.
팍! 팍!
일순간, 행수는 돌팔매와 몽둥이 찜질을 받아야 했다.
추성상단의 대문이 활짝 열리고, 백이 넘는 호위무사들이 창검을 들고 뛰어 나왔다.
삼백 명이 넘는 일꾼들은 이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품삯이 칠 개월이나 밀려 가족들도 모두 굶어 죽을 판이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 단청보는 혼란스러웠다.
수백 명의 성난 일꾼들은 다 때려 부수려고 했다. 일곱 달이나 품삯을 받지 못했다고 하니 눈이 뒤집어진 것이 분명했다.
끼이익.
추성상단의 객주 원승돈(元勝敦)이 나왔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행수들을 불러들였다. 그의 옆에는 백이나 되는 호위무사들이 호위했다.
“무슨 일로 이리 시끄러운 것이냐?”
“밀린 품삯을 지급하라며 난리를 부리고 있습니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일한 적 없는 것들이 무슨 얼어 죽을 품삯! 쌀 한 톨도 내어 줄 수 없으니 썩 꺼지라고 하라!”
그의 말을 들은 삼백 명의 일꾼들은 격분을 참지 못했다. 그들은 몽둥이와 괭이를 들었다. 호위무사들과 싸우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이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였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하루 아홉 시진을 짐을 부리게 하고, 수레를 끌게 했으면서 주는 것이라곤 멀건 죽과 소금물이 다였다! 그래 놓고선 제대로 일을 안 했다? 악덕 객주는 밀린 품삯 지급하고! 악덕상단 물러나라! 물러나라!”
“여봐라. 저 미친놈들을 모조리 끌어내서 족치도록 하라!”
들을 가치조차 없는 이야기는 몽둥이가 약이다.
검신 독고검성은 더는 이 일을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호위무사들의 수준으로 보아 평범한 쟁자수들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말 것이다.
위이융!
매서운 장풍이 일어났다.
쟁자수들을 두들겨 패서 쫓아내려던 수십 명의 호위무사들이 거센 반탄력과 장풍에 일고여덟 걸음이 밀려났다. 분위기가 냉랭하니 얼어붙었다.
장검을 허리춤에 차고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손가락으로 원승돈을 가리켰다.
“그대가 추성상단의 객주인가?”
“그렇소. 당신과 이 일은 무관하니 빠지시오.”
참으로 안하무인이다.
호위무사들은 무예를 갈고 닦은 사람들이다. 지금 나타난 사람이 누군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시나무 떨 듯했고, 모두가 두려워 얼굴조차 쳐다볼 수 없었다.
천지괴협이 아니면, 그 누구도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는 천하제일의 고수 검신 독고검성. 감히 얼굴을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은 무림에서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독고검성은 준엄한 어투로 말했다.
“무관하다? 저 많은 일꾼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품삯을 일곱 달씩이나 받지 못했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지. 나같이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이러한 일을 보고 지나칠 수 있을까?”
“그래서? 네놈이 저들에게 품삯을 지급하게 해 주겠다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무엇들 하는 것이냐? 이놈을 당장 끌어내라!”
실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안하무인도 이런 안하무인이 있을까. 한마디로 자기는 부귀영화를 누려도, 남들은 다 굶어 죽어야 한다는 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어떤 사람이던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부유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호위무사들은 원승돈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모두 머뭇거리며 동요됐다.
“아니! 이것들이?”
“나에게 오늘과 같은 일을 미리 전해 준 사람이 있었지. 이곳 추성에서 네가 가장 악독하여,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라고 말이야. 나는 너에게서 품삯을 반드시 받아 낼 것인데, 네 생각은 어떠하냐?”
“결코! 받아 내지 못할 것이다!”
“허허. 과연 배짱이 두둑하시구만. 그 배짱이 어디까지인지 구경해 보고 싶은데, 어떤가?”
“뭐라? 이것들은 대체 무엇들을 하는 것이냐! 이놈을 당장 끌어내라, 어서!”
거품을 물며 도끼눈을 부라리며 독고검성을 노려보는 원승돈.
그런 원승돈에게서 실소를 금할 수 없어 실실 웃고, 비웃는 독고검성. 두 사람의 기세가 냉랭하게 펼쳐졌다.
단청보는 이 일이 순탄하게 풀릴까 걱정이 됐다.

<4>

걱정하는 단청보를 독고검성은 묵묵히 쳐다보았다. 청보는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고, 정신마저 온전히 못했던 세월을 살았다. 자신에 대한 삶의 확실한 지표가 세워지지도 않았고, 축적된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명확한 방향도 없었다. 힘은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다.
‘청보는 나와 학선이 그 친구에 못지않게 경우에 맞게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재목이야.’
단청보는 머쓱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앞으로 나섰다. 원승돈은 어디서 굴러온 잡인이 행세를 하려는 것인지 참으로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무림의 고수라고 갑자기 나타나 협객으로 행세하려는 자들을 심심치 않게 봤기 때문이다.
“내게서 품삯을 받아 내 협객 흉내를 내려고 하는 것이냐? 결코 품삯을 받아 내지 못할 터!”
추성상단의 객주는 완강했다. 결코 품삯을 내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호위무사들은 다들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화가 난 원승돈이 그들을 다그치며 말했다.
“대체 저것들이 뭐가 두렵다고 이러는 것이냐?”
“저… 그, 그게…….”
말을 더듬거렸다.
독고검성은 그들에게 눈치를 줬다. 자신의 존재감을 안다면, 아무리 완강한 악다구니라도 품삯을 내어 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호위무사들은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 냉가슴을 앓았다. 상단의 객주는 성질이 났지, 무림의 무신고수인 독고검성은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지. 대체 어느 비위와 장단에 맞춰야 한단 말인가.
“이런 한심한 놈들을 보았는가! 내가 이런 놈들에게 은자를 수백 냥이나 주고 있었다니.”
단청보는 원승돈의 말을 듣자 눈빛이 반짝거렸다.
“저기요. 아저씨는 저 많은 사람들에게 은자를 수백 냥이나 줬다고 하는데, 어째서 일꾼들에겐 품삯을 지급하지 않는 것입니까?”
“오라, 네놈이 협객으로 행세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났는가 보구나. 저것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품삯을 주지 않았다. 그럼 이유가 되었을 것이니 썩 물러나라!”
뒤에 무공이 아주 뛰어난 검신 할아버지가 있으니, 원승돈은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있었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도 돌아가는 상황은 알 수 있었다.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은 그만 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지금 상황에서 이유는 검신 할아버지밖에 없는 셈이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품삯을 주지 않으셨다는 것은 아저씨의 말씀이고, 기준인 것 같은데 아닙니까?”
“그래서? 말꼬리 잡고 늘어지겠다는 것이냐?”
“말꼬리 잡고 늘어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품삯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 상황으로 보아 아저씨의 말일 뿐, 합당한 증거가 없는 것 같은데요?”
“뭐라? 어디서 새파랗게 젊은 놈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이냐?”
“저도 장유유서(長幼有序)가 무슨 뜻인지는 압니다. 하지만 사리와 경우에 맞지 않다면 바로 잡아야 한다고 사부님께 배웠습니다.”
단청보는 뒤에 든든한 검신 할아버지가 받쳐 주고 있으니 자신감을 가졌다. 적절한 힘과 자신감, 그리고 상황을 살필 수 있는 눈을 제대로 갖고 있다면 어떤 상황이라고 해도 풀어낼 수 있었다. 그는 일꾼들에게 질문했다.
“저 객주 아저씨가 일을 얼마 동안이나 시켰습니까?”
“불과 일주일 전까지 계속 시켰으니, 칠 개월입니다.”
“알겠습니다.”
일꾼들은 단청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단청보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줬다. 단청보는 상단의 객주 원승돈을 향해 말했다.
“객주 아저씨께선 저분들을 칠 개월이나 일꾼으로 부리셨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그렇다. 그게 뭐가 어째서냐?”
그의 거친 말을 들어 보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사부님의 제자로 들어 별다른 성과를 보여 주지 못하자 주변의 사람들이 자기를 우두미종이라고 불렀다. 사부님과 같이 고귀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선, 바보를 제자 삼아 바르게 키우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듣고 보니 아저씨의 말씀에 앞뒤가 안 맞아서요. 이 미련한 바보는 사람들이 우두미종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사부님의 제자가 되어 몇 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성취를 보여 주지 못한 탓이 컸습니다. 상단에서의 일이라면, 문파에서 다년간 제자를 키우는 일과 다를 것입니다. 이 미련한 바보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루하루가 바쁘지 않겠습니까? 일을 만족스럽게 하지 못했다면 벌써 그만두게 하셨어야죠. 그런데도 일곱 달이나 계속 일꾼으로 부렸다면 저들이 일을 만족스럽게 하지 못했다는 객주 아저씨의 말씀은 상식에 맞지 않습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뭐라? 네가 뭔데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더 이상 듣기 싫다. 너흰 무엇하는 것이냐! 이놈을 당장 끌어내라!”
원승돈이 생각해도 단청보의 말에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당장 호위무사들을 윽박질러 단청보를 끌어내게 했다. 독고검성이 나서지 않으니 해 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 말하는 사람은 우두미종이라고 하지 않던가. 천하제일 고수의 바보 제자라는 것 정도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휘리링.
네 명의 호위무사가 장검을 뽑아 들고 단청보에게 덤볐다.
단청보는 금월도를 뽑아 들었다. 그의 칼날에선 예리한 섬광이 신랄한 기세로 기를 뿜었다. 그러나 도병에 힘을 집중해서 가하진 않았다.
도경어도.
금월도를 휘둘러 장검의 코등이에 걸어 젖혔다. 네 명의 호위무사는 손목이 아려 왔다. 삽시간에 손목을 ‘툭툭’ 치는 것이었다. 장검은 아래로 떨어지고, 뒤에서 몰려온 두 명의 무사는 금월도를 틀어 뒤로 당기니 그 힘에 못 이겨 밀려났다. 단청보의 완력 하나는 정말 매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