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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호협 1권(23화)
제六장 청보, 풍릉곡에 가다(4)


툭!
삽시간에 검날을 쓸어내리며 코등이를 매섭게 걸어 젖혔다. 검이 허공으로 튀어오르고, 손목과 손이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고 힘을 적당하게 조절했다.
독고무흔과 처음으로 제대로 붙었을 때, 그를 너무 때려서 감정을 나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이들과는 특별히 묵은 감정도 없었다.
“…….”
“이쯤 되면 객주 아저씨께선 품삯을 내어 놓으셔야 할 것 같은데, 아닙니까? 제가 저 사람들과 합세하여 공격하면 사람이 많이 다치게 될 겁니다.”
눈앞에 불벼락과 같이 단번에 네 명을 때려잡는 단청보를 보자 점차 두려워졌다. 그동안 품삯을 지급하지 않고, 버티게 되면서 그것이 사방으로 소문으로 퍼진 모양이다.
정도의 협객들이 이런 소식을 듣고 직접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처음 이 일에 참견한 고수가 누군가에게 들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뛰어난 고수들이 있다면 이상한 것은 바보로 알려진 우두미종이 전혀 바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매우 황당한 일이었다. 소문과 진실은 다르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일이 이렇다면 지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됐구려. 하나 우리 상단의 사정도 매우 어렵소. 안타까운 일이나 오늘 당장 품삯을 지급할 수는 없소. 나중에 품삯을 지급할 것이니 다른 날 찾아오시오.”
“진즉 그러셨어야죠.”
단청보는 순진하게 대답했다. 독고검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는 단청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청보야. 저 말을 정말 믿느냐? 저건 차일피일 미루려는 속셈이야. 그러니 오늘 지급하라고 해.”
단청보는 자기의 귀에 독고검성의 말이 들리자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독고 형과 닮았다. 겉과 속이 확실히 달랐다. 다만, 사정이 어려워 나중에 지급하겠다고 했는데 꼭 오늘 지급하라고 하는 것은… 급해 보였다. 그래도 연유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저기요.”
“말해 보시오.”
원승돈은 단청보의 실력을 보았고, 무력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것에 도달했다. 무력이 통할 상대가 아닌 고수들에게 고개를 뻣뻣이 세웠다간 다음에는 목에 칼이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사태가 아직까지는 대화로 잘 풀어 갈 수 있을 때,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좋았다.
“상황으로 봐서는 오늘 품삯을 지급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오늘은 곤란하오. 우리 상단의 사정이 어려우니 다른 날에 오도록 하시오. 다른 날에 오면 그때 지급하겠소.”
단청보도 그 말을 듣고 보니 눈이 번득였다. 독고 형의 태도를 보아서 알고 있었지만, 과연 독고검성의 말이 맞았다. 이것은 안 주려고 꾀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상단의 사정이 어렵다면서 일꾼을 계속 부리고 있었고, 주위에 저렇게 많은 무사들은 어떻게 거느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 나중에 지급하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언제요? 다른 날 언제 찾아오면 되겠습니까? 이제 보니 밀린 품삯을 안 주려고 꾀를 부리고 계셨군요!”
“아니, 그게, 그게 아니라 우리의 사정이 참으로 어렵기에 당장 품삯을 내어 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오. 그러니 앞으로 사흘 후에 다시 찾아오시오. 그땐 필히 주겠소.”
“사흘 후에요? 아, 그럼 사흘 안에 여기서 도망가시면 되겠네요.”
“으…….”
스스로를 바보라고 하여 대화가 통할 줄 알았는데 대화가 더욱 통하지 않았다. 하긴 얼뜨기라고 여겼던 저 많은 일꾼들도 더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으니. 꾀도 언제나 만능은 아니었다.
단청보는 점점 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이 객주를 보면서 깊은 한탄이 가슴에 찌르고 들어왔다. 세상이 이런 곳이었다니……. 마땅하게 해야 할 것도 이런 식으로 꾀를 부려 속여 먹으려고 하다니.
“저도 인내심에 한계가 느껴집니다. 오늘 당장! 저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저로서도 어떻게 나갈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금월도에 힘이 들어가고, 눈빛이 매우 사납게 변했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들어 목을 날릴 기세였다. 오늘은 일진이 참으로 사납지, 어디서 이런 골칫덩이들이 나타나 설치는지 모르겠다. 품삯을 지급하지 않고는 안 되게 생겼다.
하지만 호랑이에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린다면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내 목을 치시오. 내 목을 치더라도 오늘 당장 품삯을 받지는 못할 것이오!”
원승돈은 오히려 단청보에게 목을 들이댔다.
단청보는 세상이 어찌 이럴 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뻔뻔해도 너무 뻔뻔했다. 일곱 달이나 품삯을 밀려 놓고, 돈을 받고 싶으면 목을 자르라니. 이런 황당한 일이……. 그러자 뒤에 있던 일꾼들은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듯이 덤벼들었다.
“여러분! 저 악덕 객주를 때려죽이고 악덕 상단을 털어 버립시다!”
이쪽의 상황이 안 풀리니 저쪽의 상황도 나빠지는 꼴이었다. 성질이 난 일꾼들은 아예 객주를 때려죽이고, 상단을 모조리 털어 버릴 심산이었다.
단청보는 중간에 끼어 몹시 혼란스러웠다.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처음부터 경험이 부족한 자기에게 너무 어려운 일을 시킨 격이다. 물론 돕는다고는 하였지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참으로 난감했다.

<5>

독고검성의 눈에도 양쪽의 상황은 악화일로 치달았다. 중간에 끼인 단청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무공은 뛰어나지만 주변 상황을 조절할 수 있는 안목이 부족했다.
무턱대고 나서, 이 일을 해결해 주면 청보는 정의를 제대로 배울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경험하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일부로 뒷짐을 지는 척, 지켜보고 있었다.
단청보는 상황이 다급해지자 급한 대로 일꾼들을 먼저 진정시키려고 했다.
“여러분들 진정하십시오! 이런다고 품삯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린 오늘 당장에 굶어 죽을 판입니다! 당장 때려 부숩시다!”
일이 시원하게 풀리지 않자 이쪽저쪽으로 한꺼번에 상황이 몰려 버렸다. 단청보는 성질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일꾼들을 쉽게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들에겐 생계가 걸린 절박한 문제가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의외로 강짜를 부리는 상단의 객주로 인해 상황을 풀어 갈 해법을 찾지 못했다.
독고검성은 단청보에게 전음을 날려주었다. 그 전음은 오직 단청보 한 사람만 듣게 했다.
“청보야, 옳은 일을 하더라도 그 정도와 범위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면 양쪽이 다 같이 혼란스럽게 변하게 되고 말아. 핵심을 찔러야지. 저자의 몸을 괴롭히는 것은 가장 나쁜 방책이니, 저자가 가진 재산을 찾아내도록 해. 먼저 곳간을 비도섬류의 도법으로 열면, 네 눈에 쉽게 드러날 거야. 그럼 이 일은 쉽게 해결할 수 있어.”

독고검성의 전음을 들은 단청보는 일순간 철장공의 철금수를 전개했다. 매서운 손이 상단객주 원승돈의 몸을 끌어당겼다. 원승돈은 단청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삽시간에 끌려들어 왔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멱살을 부여잡았다.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순식간에 사로잡혔다. 발버둥 칠 시간도, 틈도 없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단청보는 준엄한 어투로 꾸짖었다.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죽지 않을 만큼 계속해서 때려드리지요. 살려달라고 사정할 때까지요.”
“어서 죽여라! 날 죽인다고 해도 결코 품삯은 받지 못할 것이다!”
“역시 매로는 말을 들으실 분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런 행동을 하신다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어르신의 재산이라 함은, 무릇 저들 일꾼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품삯을 제외한 나머지를 이르는 것입니다. 객주께선 저보다 머리가 더 좋은 분이시니 알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감수하겠다고 한다면, 상단이 약탈을 당하더라도 재산을 빼앗기지 않으리란 계산이 있는 거겠죠.”
“……!”
그의 말을 듣자 얼굴빛은 사색이 되었다. 바짝 얼어붙었다. 젊은 놈이 생각보다 세상 경험이 짧아 실력에 비해 무른 감이 있었는데, 갑자기 뭐를 잘못 먹었는지 더 강하게 나오고 있었다.
한쪽의 기세를 누르자 단청보는 성급하게 나서려는 일꾼들에게 소리쳤다.
“여러분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몫을 넘어 약탈을 자행하겠다고 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몫은 어디까지나 정당하게 받아야 하는 품삯에 해당하지, 상단의 모든 재산이 아닌 겁니다!”
“…….”
그의 쩌렁쩌렁한 고함에 완전히 주눅이 들었다.
이 사람이 자신을 우두미종이라고 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단이 있었다. 검신 독고검성이 저 사람을 내세운 이유를 알 것 같다.
독고검성이야말로 천지괴협 장학선과 함께 무림의 양대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었다. 그가 내세운 사람이라면, 뭔가 모자라 보이더라도 확실한 사람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단청보의 말은 경우에 어긋나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무턱대고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그러면 제가 저 곳간을 먼저 부수도록 하겠습니다.”
“와! 와!”
일꾼들은 함성을 질렀다. 단청보는 독고검성의 조언을 받아 강하게 밀자 일이 술술 풀렸다. 참으로 신이 났다.
독고검성은 서투르기는 하지만 이토록 올바르게 일을 처리하고, 자신의 힘을 과하게 쓰지 않으려는 단청보의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모자라 보여도, 진정 큰 가슴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청보는 자신의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검신에게 존경심이 있었다. 사부님인 천지괴협에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도 갚을 수 없는 경애심이 있었다.
일말의 매서운 눈빛이 지났다.
비금섬류참.
일격의 금월도에 강기가 실렸다. 땅을 후려치는 것같이 펼쳐진 매서운 도기가 곳간을 향해 뿜어졌다.
자물통이 잘려 나가고 문이 부서졌다. 마치 물결이 소용돌이치 듯 일격에 날아드는 도기에선 물결의 잔잔한 소리까지 들렸다. 꼭 파도를 후려치는 소리였다.
처어어어.
쾅!
굉음이 지나간 자리는 먼지가 일어나며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어설픈 무사는 저 일격에 저승을 구경하고 말 것이다.
독고검성도 단청보의 무공이 상승에 달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천하무림의 일대종사들과 수십 초식을 섞을 만한 실력이었다.
휑.
곡간이 열렸으되, 아무것도 없었다. 먼지가 풀풀 풍겼다. 볏짚으로 쌓아 둔 가짜 자루가 눈에 선명히 드러났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과연 검신 할아버지의 조언이 맞았다. 때려 죽여도 재산을 내놓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털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더 강짜를 부린 것이다.
원승돈의 몸을 괴롭힌다고 한들, 한순간만 지나면 끝나는 일이다. 그의 핵심을 찌르는 것이 좋았다.
“역시 객주 어른은 대단하시군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상단 건물을 다 부순다고 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일꾼들은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자신들이 너무 앞서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토록 차일피일 미루며 안 줄 때는 그만 한 대비를 하였을 것이 분명했다.
단청보는 상단 객주 원승돈를 향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재물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재주껏 찾아보아라!”
단청보는 금월도의 도병으로 밀어서 내동댕이쳤다.
퍽!
엷은 비명 소리와 함께 벽에 박치기를 당했다. 자기의 몸은 괜찮은데 벽은 맥없이 쓰러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와 꽃가루들이 일어났다. 정원을 뭉개 버린 것이다.
“그쪽 방면으로 진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곳간을 중심으로 진법의 장치가 연결되어 있으니 말이지요. 그렇다면, 저기에 있을 모든 재물은 객주 어른의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겠습니다. 제가 모두 가져가서 일꾼들에게 나눠 주지요!”
“대협! 대협! 진정하십시오. 모두 내어 주겠습니다, 모두!”
이제는 진심으로 굴복했다. 버텨 봐야 소용이 없었다. 곳간을 부수면서 진의 연결 장치가 단청보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지겹게도 절진에서 수련했으니 이를 어찌 모르겠는가.
결국 독고검성과 단청보가 보는 가운데 삼백 명에게 줘야 할 품삯을 모두 지급하게 됐다. 독고검성의 조언을 받았지만, 단청보의 역할은 매우 지대했다.
독고검성이 다시 단청보에게 전음을 날렸다.
“청보야. 저들 일꾼들은 일곱 달이나 품삯이 밀리고, 지금까지 상단 객주의 횡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단다. 그에 대한 보상도 함께 이뤄지게 하거라.”
단청보는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금월도를 상단객주 원승돈의 목에 대며 말했다.
“헤헤. 품삯만 지급해서는 곤란합니다. 일곱 달이나 품삯이 밀렸다면, 마땅히 그에 대한 손해에 대해서도 보상하고! 이자도 쳐야겠죠. 아닙니까?”
“예, 대협!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요! 제가 떠난 다음에 호위무사들이나 다른 무사들을 시켜 일꾼들에게 준 품삯을 강탈하려고 한다면, 그때는 재산은 물론 죽지 않을 만큼 계속 두들겨 팰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일꾼들은 단청보의 정의로운 행동에 크게 감탄했다. 그들의 환호와 만세가 그칠 줄 몰랐다. 독고검성도 흡족했다. 원승돈의 궤변을 원천적으로 반박하여, 무력화시킨 것이 매우 훌륭한 점이었다.
세상의 경험이 짧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꾀에 넘어갈 위기에 있었다. 그래도 흡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