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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호협 1권(24화)
제六장 청보, 풍릉곡에 가다(5)


“청보야. 오늘의 일로 너도 적지 않게 깨달았겠지? 네가 이 일을 아주 말끔하게 처리하진 못했지만, 사리가 명확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아주 뜻 깊었다. 네가 이 일을 말끔하게 처리했다, 처리하지 못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너의 경험으로 보아, 오늘의 일은 네가 완벽하게 처리한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어. 덕분에 네가 닦은 실력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뜻을 세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터.”
“감사합니다!”
“이제, 네 사부에게 널 데려다 줄 차례구나.”
그는 약속대로 단청보를 천지괴협에게 데려왔다. 추성상단의 일꾼들은 검신과 단청보를 크게 칭송했다. 그 일은 차츰 강호로 퍼져 나갔다.
단청보가 경험이 부족하여 매끄럽지 않은 면을 보였지만, 최선을 다해 이 일에 나서 줬기 때문이다. 밀린 품삯과 손실 이자를 모두 지급받고 막막했던 생계의 걱정을 덜 수 있게 됐다.
장학선은 독고검성을 따라가 세상을 경험한 단청보를 반갑게 끌어안았다.
“녀석, 세상에 나가 혼란스럽지 않았느냐?”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검신 할아버님을 통해 제가 닦은 실력이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하하! 그래, 내가 언제까지 널 보살필 수는 없으니, 네 일생을 살아가는 뜻을 세우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지.”
천목산의 해광림에 돌아온 단청보는 다시 수련에 열중했다. 장학선의 눈에는 독고검성이 단청보를 데려오면서 뭔가 할 이야기가 있어 보였다.
“내 제자에게 귀한 가르침을 줬구만.”
“청보의 수련은 흠잡을 곳이 없기에 체계적으로 잘 다지면 앞으로 우리의 반열에 이를 훌륭한 고수가 될 재목임을 알았지. 하나 그 역량을 잘못된 곳에 사용한다면, 우환거리가 되고 말 것이네.”
“그래. 자네가 그래서 데려갔다는 것은 익히 생각해 뒀지. 표정을 보아 하니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말이야.”
“하하! 역시 자네 눈치는 못 당하겠어. 대단하이, 대단해.”
장학선도 독고검성의 어투를 보니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갔다. 짐작이 가다 보니 속으로도 좀 씁쓸하기도 했다.
“내 아들놈에 대해서네. 그놈이 영 개운치가 않아.”
“아직까진 표면에 드러난 것이 없으니 더 사악해지기 전에 정으로 흔들어 보게.”
“정으로 흔들어 보자라… 그게 무슨 뜻인가?”
“사악한 사람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정밖에 없으이. 청보와 같이 심성이 맑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인정을 베풀어 양심을 일깨워야 해. 하면 우리가 가고 난 다음에라도 막돼먹지는 않겠지.”
“그게 답이었어.”
검신은 흡족했다. 장학선에겐 사람의 근본을 꿰뚫는 눈이 있었다. 한부모의 자식도 아롱이 다롱이라고, 제자들도 성격이 제각각이다. 독고무흔이 무림에 외유를 나갔다고 하니 천천히 회포를 풀었다.


제七장 금동(禁洞)에 들어간 독고무흔(1)


<1>

장학선과 독고검성이 서로 회포를 푸는 동안, 심해연에서 단청보는 열심히 수련했다. 비도섬류와 철장공을 반복적으로 연습했다.
“오늘 연습, 끝!”
연습을 마치고 해광림으로 향했다. 가벼운 발걸음에 넘실넘실 함박 웃음 가득 지었다. 그때였다. 귀가 살살 흔들렸다. 누군가 접근했다. 처소로 가는 길목, 누군가 접근한다면 자신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척!
걸음을 멈추었다.
피식 웃으며 독고무흔이 앞으로 나타났다.
“수련이 잘돼서 기분이 좋은가 보군. 그런데 왜 멈췄나?”
“누군가 접근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독고무흔은 속으로 생각했다.
‘무공이 높아지면 기를 느낀다고 하지. 이 녀석의 무공이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고 있어. 젠장!’
쓰라리고 불편했다. 생각해 둔 것은 있었다. 전병을 들고서 청보에게 다가갔다.
“자네 몸은 스물한 살이지만 실은 아이와 같지. 산해진미를 맛보지 못했을 터. 이 형이 주는 것이니 먹어 보겠나?”
전병은 검신 할아버지가 추성에서 입에 넣어 줬을 때, 그때 참으로 맛있었다. 다독이는 검신 할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독고 형은 달랐다.
“검신 할아버지께서 전병을 먹여 주셨어요. 다른 것을 먹고 싶네요.”
“그래도 형의 성의를 봐서 먹어야지. 안 그런가? 맛있는 거야. 자, 어서…….”
“제가 꾀를 부릴 줄 모르지만, 형님께서 일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죠. 암수도 실력이라고요.”
눈치챘다. 바보가 천재의 계책을 눈치채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입술이 떨렸다.
“싸우고자 한다면, 형님의 수련으로 봐선 어려울 것 같고, 남은 것은 형님이 말씀하신 암수가 아닙니까? 암수를 쓰겠다는 것은 싸워 이길 자신이 없다는 뜻이고요. 그렇죠?”
“그래. 네놈이 의외로 똑똑해졌구나. 겉으론 상냥하게 했지만, 내 속을 꿰뚫고 있었구나.”
“아무리 바보라도 가르치는 스승이 위대한지 허술한지는 압니다. 또, 사람들에게 우두미종으로 놀림을 받고, 눈총을 받아와서 적어도 이 사람이 날 대하는 것이 진실한지 그렇지 못한지 정도는 압니다.”
독고무흔은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순수하고, 맑은 사람이 더러운 것을 쉽게 발견한다고. 의도를 철저하게 숨기고, 더 공을 들여야 속일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바보라도, 적대적이었다가 갑자기 친해지려하면 낯을 가리는 법.
“하면 내가 먹지.”
독고무흔은 전병을 먹었다.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단청보는 금월도를 들어 심히 경계했다.
“형님이 무슨 짓을 한지는 모르지만 제게 진실하지 않은 이상, 저 역시 형님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죠.”
“오늘은 이만 물러가마. 바보라도 아주 모르진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까.”
주먹을 움켜쥐며 온갖 인상 다 찌푸렸다. 그의 그림자는 청보의 눈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해광림으로 돌아왔다. 검신 할아버지와 사부님은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말할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만년옥침상에 누워 내공을 수련했다.

그 시각, 풍릉곡.
독고무흔은 있는 힘껏 달려왔다. 숨을 헐떡거리면서까지 달렸다.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입술은 마르고, 가슴은 헝클어지려 했다.
“젠장! 일은 실패했고… 그놈이 어떤 식으로든 말을 할 것인데. 빌어먹을! 정말 어쩌지?”
찢어 죽이고, 가루로 만들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다. 가슴이 답답하고, 초조했다. 어디서 나타난 잡종 따위가 자신을 이렇게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몸서리치도록 분노가 샘솟았다. 해약을 미리 먹어뒀기에 망정이지 아니 그랬다면 중독될 뻔했다.
“청보 그놈이 독수나 암수의 실체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날 믿지 않는데 말려들 리가 없지. 내가 서툴렀어. 억지로 감추느라 자연스럽지 않다 보니 이놈이 날 경계해 왔던 것이야.”
하루 동안 아버지의 추궁에 대답할 핑계를 생각하며, 미친 듯이 허공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한편, 단청보는 사부님과 검신 할아버지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했다.
독고무흔은 단청보가 자신의 양부와 장학선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할 것이라 생각하자 불안하기만 했다.
아버지가 오려면 아직 여유는 있었다. 핑계는 만들면 그만이다. 문제는 실력이다. 삼 년은 열심히 연습해야 그 잡종을 완벽하게 짓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삼 년을 어떻게 기다린단 말인가! 어떻게!”
기다릴 수 없었다. 몇 달이면 몰라도, 삼 년은 너무 길었다. 단청보를 짓밟는다고 해도 그 뒤가 문제였다. 천하무림을 쟁패하여, 수십만 무림인의 황제가 되려면 실력이 더욱 압도적이어야 했다. 아버지나 천지괴협에 버금가는 실력자여야 했다. 지금 실력으론 청허 진인과 같은 명사들과 겨뤄 봤자 일 초 반식에 지고 말 것이다.
“천하는 넓고, 나보다 아래도 많지만… 나보다 위도 많으니!”
미쳐 버릴 지경이다. 언제 그들을 다 능가한단 말인가. 아버지나 천지괴협은 올해로 여든여섯 살이다. 길어 봤자 이 노인네들은 몇 년 있으면 강적이 없어도 저절로 세상을 뜰 것이다. 문제는 정파사현과 사파삼절로 대비되는 중원 칠대명사들이다. 여섯 명은 환갑을 넘어, 몇 년 있으면 일흔을 바라본다. 하지만 아버지나 천지괴협과 같이 산다고 하면 여전히 십 년은 바라봐야 하는 일이다.

중원칠대명사 중 참정신궁의 궁주는 오십도 채 되지 않았다. 족히 이십 년은 봐야 했다. 새외에는 맹천상과 가사완이란 중원명사와 버금가는 실력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참정신궁의 궁주와 같은 또래였다.
“그들만이 아니지. 칠대 문파의 적전수제자들은 그 실력이 나를 능가하니까. 무림의 혈겁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새외와 팽팽하니 평화가 정착하려면, 거쳐야 할 난관이 많겠지. 무림은 나와 같은 성향을 가진 자들도 워낙 대단한 힘을 가진 고수들이 무림 대권을 쥐고 있어,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형국이고. 무엇보다 새외의 남림북설도 아버지와 천지괴협이 있으니 잠잠하지, 언젠가 일을 저지르겠지만.”
중원무림에 당장은 위협적이지 않은 새외의 양대 세력이나 속내를 숨기고 암중에서 세력을 쌓는 자들. 잠잠하고 고요할 따름이다. 모든 대세가 한눈에 보였다.
“나부터가 아버지와 천지괴협, 여러 명사들로 인해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을 터. 단청보 이놈을 짓밟고, 무림황제가 되려면 하루빨리 강해져야 돼.”
덕분에 좋은 것도 있었다. 성가신 존재가 가끔씩 나와 흔들어 보자는 수작을 벌이는 경우를 제외하면, 당금무림은 조용했다. 사람들은 미련하여, 이런 고요함이 수십 년을 이어 와서 오래갈 줄 안다. 그래서 글이나 그림에 심취하는 무인들도 많았다.
‘그런 자들이 많을수록 유리하지.’
무림의 형세와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봤다. 이제 중요한 건 아버지의 불호령에 대비한 핑계였다. 너무 당황했던가, 당장 떠오르는 획기적인 것이 없었다.
그 순간, 아버지가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금동이 떠올랐다. 들어가지 말라고 엄명을 했다는 것은, 그 안에 진귀한 것이 있기에 그러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마음 독하게 먹고 금동이 있는 골짜기로 갔다.

석문(石門)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자주 보아서 알고 있었다. 안전하게 금동으로 들어가려면, 석문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수월했다.
주변에 있는 진병들을 피해 몰래 들어왔다.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이만하면 아무리 눈치가 빠르고, 사물을 꿰뚫어 보는 아버지라도 모를 것이다.

<2>

불을 켜지 않고 야광주를 이용해 동굴의 깊은 내실로 차근차근 들어갔다.
이각의 시간이 흘렀다. 무언가 앞을 가로막았다. 또 다른 석문이었다. 야광주로 방위의 구조를 살피고, 동에서 서로 용두석(龍頭石)을 돌렸다. 붉은빛을 장엄하게 뿜어내는 한 자루의 검이 바윗돌에 꽂혀 있었다.
“저게 뭐지?”
긴장된 눈빛. 몸에서는 전율이 일었다. 도대체 무엇이기에 바윗돌에 꽂혀 있으면서도 날은 녹슬지도 않고, 붉은빛을 머금고 있단 말인가. 눈으로 봐도 믿겨지지 않았다.
꿀꺽.
검의 위세에 눌렸다.
손을 앞으로 뻗으며 살금살금 앞을 향해 나갔다.
사 척의 길이인 장검은 날카롭기로 치면 너무나 예리하여 입고 있던 옷을 벌써 잘라낼 정도였다.
지이익.
그냥 다가가기만 했는데도 옷자락이 잘렸다. 대단한 살기를 품은 검이 틀림없었다. 그럴수록 저 검을 갖고 싶었다. 모든 것을 한 번에 역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위세에 눌린 것은 잠시였다. 정신을 차리고 내공을 일으켜 검의 예기를 막았다. 그럼에도 옷이 조금씩 찢어졌다. 검이 품고 있는 예기가 너무도 살벌했다. 그럴수록 점점 더 이 검이 갖고 싶어졌다.
그것은.

수라마검(修羅魔劍).
만인혈원(萬人血願) 혈염휘천하(血染揮天下).
―만인의 피를 원하노니 이 검을 휘둘러 천하를 피로서 물들일 것이다.